티스토리 뷰

 

 

                                 

<발터 벤야민>

 

 

 

8장 발터 베냐민

 

 

곱사등이

 

베냐민 사후 명성과 문단 내의 위상

 

상업적이지도 않고 실리적이지도 못한 사후의 명성이 오늘날 독일에서 발터 베냐민의 이름과 저작에 붙여지고 있다. 유대계 독일인인 베냐민은 히틀러의 집권과 자신의 망명 이전 10년 못 되는 기간에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잡지와 신문의 문예란 기고자로 알려져 있었다.(272)

 

우리는 사후의 명성을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에 대한 쓰라린 보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는커녕 사후의 명성은 일반적으로 동료들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에 따라 이뤄진다.

 

1924년 카프카가 죽었을 때 출판된 몇 권의 책들은 몇백 부 정도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그의 짧은 산문 몇 편을 우연히 읽은 소수의 독자들과 동료 문인들은 그가 바로 현대 산문의 대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발터 벤냐민은 일찍이 그러한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명성을 얻었다.(273)

 

우리는 사후의 명성이 천재들의 몫이 아닐 것이라는 점을 합리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명성은 사회적 현상이다. 우정이나 사랑은 한 사람의 의견으로 충분하지만 명성은 한 사람의 의견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어느 사회도 분류기준을 갖지 않을 경우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이러한 불가피한 분류기준은 모든 사회적 구별의 기초다. 그리고 평등이 정치적인 것의 구성요소이듯 구별은 오늘날의 견해와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사회영역의 구성요소다.(274)

 

우리는 통상적인 준거 틀에서 저자로서 베냐민과 그의 저작을 적절히 기술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상당히 많이 부정적인 어법으로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는 상당히 박학다식하지만 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주요 주제는 원전과 원전 해석이지만 그는 문헌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종교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나 신한, 그리고 원전의 신성함을 항상 전제하는 신학적 해석형식에는 매력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신학자가 아니었으며, 특별히 성서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그는 타고난 작가였지만 저서를 모두 인용문으로 집필하겠다는 최대의 야망을 가졌다.(275)

 

베냐민은 프루스트, -종 페르스, 보들레르의 파리의 풍경을 번역한 최초의 독일인이지만 번역가는 아니었다. 그는 서평을 썼고 생존 작가나 작고한 작가에 관한 숱한 평론을 썼지만 문학 비평가는 아니었다. 그는 독일의 바로크에 관한 책을 썼고 19세기 프랑스에 관한 방대한 미완의 연구를 남겼지만 문학이나 다른 분야의 역사가는 아니었다. 나는 베냐민이 시적으로 사유했다는 것을 제시하려고 하겠지만 그는 시인도 철학자도 아니었다. 베냐민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정의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을 문학 비평가로 생각했다.(276)

 

비평가는 연금술사와 같다. 그는 실물의 무익한 요소들을 빛나며 영구적인 진리의 황금으로 전환하는 모호한 기술을 실행하는, 더 정확히 표현하여 그러한 신비스러운 변신을 불러일으키는 역사과정을 주시하고 해석한다. 우리가 이러한 인물상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하든 이러한 인물상은 저술가를 문학 비평가로 분류할 때 통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거의 유사점을 갖지 못한다.(278)

 

 

<마르셀 프루스트>

 

 

첫 번째 행운과 불운: 호프만슈탈과 교수자격 논문

 

그러나 사후에 승리한사람들의 삶과 연관되지만 분류할 수 없는 것이란 단순한 사실과 달리 객관적이지 못한 다른 요소도 있다. 그것은 불운이란 요소다. 우리는 베냐민의 삶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이 요소를 여기에서 무시할 수는 없다. 아마도 사후의 명성에 대해 결코 생각하거나 꿈꾸지도 않았던 그 자신은 이 점에 대해서 지나치리만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저술이나 대화 속에서도 유명한 독일 민속시 모음집인 소년의 마술피리에 나오는 독일 동화의 인물인 작은 곱사등이에 대해서 곧잘 얻급했다.(279)

 

포도주를 따르러

지하실에 내려갔더니,

그곳에 있는 작은 곱사등이가

내 단지를 움켜쥐네.

 

수프를 만들러

부엌에 갔더니,

그곳에 있는 작은 곱사등이가

내 조그만 그릇을 깨뜨리네.

 

베냐민은 작은 곱사등이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베냐민은 어린시절 동화책에서 그 시를 읽으면서 작은 곱사등이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그 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베냐민은 1900년경 베를린의 어린시절끝 부분에서 죽음을 예상했을 때 단 한 번 죽음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간다고 할 때와 같이 자신의 전 생애’”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인생 초기에 그를 공포로 몰아넣었고 죽을 때까지 함께 따라다녔던 것이 무엇이며 누구인가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유년시절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재미있게 골려주려고 못된 짓을 꾸미는 작은 곱사등이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네가 넘어질 때 네 다리를 걸은 사람이 곱사등이였으며 다른 상황에도 자주 비유했다.

 

베냐민은 성인이 된 이후 어린 시절 아직 알지 못했던 사실, 즉 어린 자신이 곱사등이를 주시한 게 아니라 비록 그가 공포를 배우려는 어린이기는 하지만 곱사등이가 어린 자신을 주시했다는 사실과 경솔한 행동(말썽)이 불행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난쟁이가 주시했던 어느 누구도 자신과 난쟁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황한 그는 부스러기 더미 앞에 서있다.”(280)

 

베냐민에게는 첫행운과 불운이 있었다. 첫 행운으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출판을 거절당했지만 괴테의 선택적 친화력에 관한 연구라는 에세이를 호프만슈탈의 잡지 신독일논문에 게재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받아줄 사람을 찾는 일을거의 포기했을 호프만슈탈은 이 작품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불운이 있었는데 이 불운은 결코 외견상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 베냐민이 준비하고 있었던 대학교수직의 첫째 단계인 교수자격증 취득이었다. 논문 심사에 참여한 교수들이 이후 자신들은 베냐민이 제출했던 논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글자 한 자도 이해하지 못했다.(282)

 

베냐민은 전시 중 스위스에서 학위를 취득했는데 누구의 제자도 아니었다. 또는 평범하다고 인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대학의 습관적인 의심을 연계시킬 필요는 없다.(28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게오르 학파, 변증법적 유물론자들과의 갈등

 

베냐민이 대학교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망쳐놓은 것은 바로 그의 괴테에 대한 논문이었다. 베냐민은 저잗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 논문도 논쟁에 고무되어 집필했으며, 공격의 대상은 군돌프의 괴테에 관한 저서였다.(283)

 

사람들은 그가 군돌프나 베르트람이 세운 업적뿐만 아니라--- 학자연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냐민이 대학교수로 임용되기 이전에 이러한 사실을 공개한 것은 그의 서툰 행동이거나 불운의 원인이었다.(284)

 

1920년대 중반 베냐민이 공산당에 입당해려고 했었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본 괴테에 관한 주요한 연구는 포함시킬 예정이었던 러시아 대백과 사전에서도 오늘의 독일에서도 결코 출판되지 않았다. 만은 자신이 책임 편집을 맡은 문학 잡지 회합에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소설에 대한 서평을 기고해 달라고 베냐민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만은 250프랑(10달러)의 원고료를 요청한 베냐민에게 150프랑 이상을 지불할 수 없으므로 원고를 반려했다. 브레히트의 시집에 대한 베냐민의 주해는 그의 생전에는 출간되지 않았다.(285)

 

가장 심각한 문제는 원래 프랑크푸르트 대학 소속의 사회과학연구소가 미국으로 옮겨지면서 발생했다. 베냐민은 재정적으로 이 연구소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연구소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변증법적 유물론자였다. 이들의 의견에 따라면 베냐민은 마르크스주의의 범주에 전혀 일치하지 않는 유물론적 범주에서 비변증법적으로사유했다.

 

베냐민이 보들레르에 관한 에세이에서 상부구조의 몇 가지 뚜렷한 요소들을 하부구조의 대응하는 요소들과---- 직접적으로, 아마도 인과적으로연관시키고 있는 한 그들은 베냐민의 사유가 매개능력을 결여하고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베냐민의 에세이 보들레르 작품들에 나타난 제2제정 시대의 파리는 당시 연구소 잡지나 사후에 발간된 2권의 저작집에도 수록되지 못했다.(286)

 

 

<샤를 보들레르>

 

 

두 번째 행운과 불운: 브레히트와 아도르노

 

당시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시인인 브레히트는 당대 가장 중요한 비평가인 베냐민을 만났으며, 두사람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두 사람의 특별한 우정은 베냐민의 생에에서 두 번 째이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행운이었다는 것은 실제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급격히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베냐민의 친구 몇 사람의 반감을 샀으며, 사회조사연구소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베냐민은 사회조사연구소의 제안에 대해 순응해야할 이유가 있었다. 그는 브레히트와의 우정 때문에 숄렘과의 우정을 희생시킬 수 없었다.(292)

 

그 이유는 숄렘은 자기 친구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변치 않는 성실성과 감탄할 만한 관용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베냐민은 마르크스의 범주를 명백히 비변증법적으로 사용했으며 모든 형이상학과 단호하게 결별했는데, 아도르노와 숄렘은 그 책임이 모두 브레히트의 해로운 영향”(숄렘)에 있다고 비난했다.(293)

 

베냐민은 브레히트 자신의 표현인 서투른 사유를 브레히트와 함께 실행에 옮겼다.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요한 것은 서투르게 상유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서투른 사유, 그것은 위대한 것의 사유다.”

 

그는 설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미세한 것의 애호가를 변증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 서투른 사유가 오히려 변증법적 사유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이들은 이론을 실천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사유는 행위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서툴러야한다.”

 

그러나 베냐민이 서투른 사유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사유가 실천으로 전환되기보다 실재로 전환되기 때문이다.(294)

 

 

<베르톨트 브레히트>

 

 

빛을 보지 못한 출판물들

 

우리는 베냐민의 생애를 어디서 들여다보든 언제나 작은 곱사등이를 만날 것이다. 3제국이 증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작은 곱사등이는 사악한 술책을 부렸으며, 아울러 원고를 읽고 잡지를 편집하는 대가로 베냐민에게 연봉 지불을 약속했던 출판사를 잡지 첫 호도 내지 못한 채 파산케 했다. 그 후 작은 곱사등이는 많은 노력을 들여 매우 진기한 주해를 첨가한 방대한 독일인 편지 모음집의 출판을 허락했다.(295)

 

193811, 보들레르 연구논문의 첫 번째 출간을 거절하는 아도르노의 편지가 그에게 가한 타격의 여파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숄렘은 베냐민이 프루스트 다음으로 카프카에 개인적으로 강한 친근감을 느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분명히 옳다. 그리고 베냐민은 카프카의 작품을 이해하면서 그 가운데 특히 자신이 실패자라고 소박하게 인정했다고 썼을 때 그는 자신의 작품 가운데 폐허의 영역과 재앙의 영역을 분명히 생각했다, 베냐민이 특이한 재능을 지닌 카프카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그 자신에게도 적용된다.(296)

 

 

<프란츠 카프카>

 

 

스페인 국경 앞에서의 비극적 자살

 

베냐민은 심장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짧은 거리의 여행도 커다란 부담이었고, 그가 국경에 도착했을 때는 탈진한 상태에 있었다. 그를 포함한 적은 규모의 망명자들이 스페인 국경의 한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스페인이 국경을 폐쇄하고 경비병들이 마르세유에서 작성된 비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망명자들은 그 다음날 같은 길을 거쳐서 프랑스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날 밤 베냐민은 목숨을 끊었다.(298)

 

베냐민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은 국경 경비들은 이 망명자들을 포르투갈로 가도록 허락했다. 수주일이 지난 뒤에 비자에 대한 금령은 다시 해제되었다. 하루만 빨랐어도 베냐민은 무사히 국경을 넘어갔을 것이다. 또 하루만 늦었더라도 마르세유 사람들은 당분간 스페인 국경 통과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비극은 이 특별한 단 하루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299)

 

 

어두운 시대

 

살아 있으면서도 삶에 맞설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드리워진 절망을 다소나마 피하기 위해 한쪽 손을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그는 폐허 속에 본 것을 다른 손으로 적을 수 있다. 그는 타인과는 다른 것, 타인보다 더 많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생존 시기에는 죽은 것과 같지만 참된 생존자다.”

-프란츠 카프카, 일기(19211019)

 

 

이미 가라앉고 있는 돛대의 꼭대기에 기어 올라가 난파선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구조신호를 보낼 기회를 갖는다.”

-베냐민이 숄렘에게 보낸 편지(1931417일자)(299)

 

 

‘19세기 수도’, 파리의 경험

 

시대에 영향을 가장 덜 받고 시대와 먼 거리를 두고 있어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시대는 이들에게 그 특징을 아주 명료하게 각인시킨다. 프루스트, 카프카, 크라우스, 그리고 베냐민이 그런 사람들이다. 베냐민의 경우 몸짓, 말하고 들을 때 머리를 세우는 습관, 예의범절, 특히 용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것을 포함한 표현방식, 대단히 독특한 취향 등은 고풍스러워 보였다.

 

19세기 유럽 문화의 형태를 마련했던 탁월한 국가가 있었다. 오스만은 그 국가를 위해 베냐민의 표현대로 “19세기의 수도인 파리를 재건했다. 이곳 파리는 분명히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아직 살고 있지는 않지만 참으로 유럽적이었다. 따라서 파리는 10세기 중엽 이후 조국 없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제2의 조국이 되었다.(300)

 

베냐민은 대로를 연결하면서 악천후를 대비해 주는 아케이드에 굉장한 매력을 느끼게 되어서 자신이 계획 중이던, 19세기와 그 도시에 관한 주요 연구의 제목을 아케이드 프로젝트라고 붙였다.(302)

 

다른 모든 도시들에서는 사회의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만 어쩔 수 없이 산책을 할 수 있지만 파리의 거리는 실제로 모든 사람들에게 산책의 기회를 제공한다. ᄄᆞ라서 제2제정 이후 파리는 생계비를 쫖거나 출세를 추구하며 목적을 달성할 필요가 없는 모든 사람들의 천국이었다.

 

즉 파리는 당시 자유분방한 사람들의 천국이고, 아울러 예술가들과 작가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주위에 모여들었던 모든 사람들(가정이나 국가가 없어서 정치적 𐤟 사회적으로 통합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의 천국이었다.(303)

 

베냐민은 모스크바 여행에서 돌아와 공산주의 깃발 아래 문학활동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것을 확신하고 파리에서의 지위를 굳히기 시작했다.(304)

 

<라울 뒤피- 전기요정>

 

 

자유기고 작가 시절의 궁핍한 삶

 

외부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러한 입장은 글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유기고 작가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리히너가 유일하게 지적했듯이 베냐민은 독특한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저술이 자주 출간된 것도 아니었고, 그가 어느 정도 다른 수입에 의존할 수 있었는가도 확실하지 않았기때문이다.(305)

 

베냐민이 자신의 직업적 야망을 나타내기 위해 프랑스어를 선택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설정한 목표는 독일문학 비평의 제일인자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독일의 문학비평의 제일인자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독일의 문학비평이 50년 이상 중요한 장르로 취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평 속에서 자기 자신의 자리를 창조한다는 것은 비평을 하나의 장르로 재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베냐민은 분명 이러한 직업 선택의 동기를 젊은 시절 프랑스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돌렸다. 이러한 직업 선택도 실제로 궁핍한 시기와 재정적 고통에 의해 촉진된다는 사실은 훨씬 더 특징적이다. 베냐민은 개인수집가 겸 재야학자라는 직업 이외에 어떤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306)

 

1차 세계대전 이전 시작했던 그의 연구는 당시 상황에서 대학교수직에 이르러 단지 끝날 수 있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은 공직 뿐만 아니라 대학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유대인은 대학교수 자격증을 획득하더라도 기껏해야 무보수의 정원 외 교수직을 얻을 수 있었다.(307)

 

베냐민은 1930년 부모가 사망할 때까지 부모의 집으로 이사함으로써 생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며, 이곳에서 처음으로 가족(아내와 외아들)과 함께 생활하다고 곧 별거하여 혼자 살았다.(그는 1930년까지 이혼하지 않았다.(308)

 

더욱이 베냐민은 재정문제에 대한 태도에서 결코 고립된 입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악화되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입장은 독일계 유대인들 가운데 지식인의 세대 전체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한 견해의 밑바탕에는 자신들의 성공을 너무 높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식들이 훨씬 고귀한 것을 지향하기를 바라는 꿈을 가진 성공한 사업가들, 즉 아버지들의 생각이 깔려있다.

 

율법이나 탈무드 같은 신의 계율을 배우는사람들이 민중의 참된 엘리트로서 돈을 벌거나 돈벌이를 위해 일하는 그런 비속한 직업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고대 유대 신앙의 세속화된 견해였다.(309)

 

베내민의 경우에 매달 받는 지원금이 유일한 형태의 수입이었으며, 그는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이 수당을 받기 위해 많은 일을 준비하고 노력했다. 즉 그는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에게 좋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경우 매달 300마르크를 벌고자 히브리어를 연구하려고 준비했고, 온갖 매개적 수사를 사용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거래할 다른 방법이 없을 경우 1,000프랑을 벌고자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려고 준비했다. 그가 궁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310)

 

<게르숌 숄렘>

 

 

베를린 유대인들의 삶의 방식: 완고함과 자신감

 

 

베냐민은 자신이 성장했던 독일 제국 시절 독일계 유대인 사회의 환경, 그리고 자신의 가문에 반항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직업선택을 거부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반항을 정당화할 만한 이유도 갖고 있었다.(312)

 

완고함이란 유대인 자신들의 유대인성과 연관되며, 그들은 오직 완고함 때문에 유대인성을 고수했다. 자신감이란 그들이 결국 비유대적 환경에서 조금씩 성취했던 지위 때문에 강화되었다.(313)

 

 

유대계 지식인과 유대인 문제

 

 

1870년대 또는 1880년대 이후 제기됐던 이른바 유대인 문제는 당시 독일어권 중유럽에서만 그러한 형태로 존재했다. 오늘날 이러한 문제는 사실상 유럽 유대인의 수난으로 소멸되어 왔고, 이제 망각되고 있다. 물론 우리는 20세기 전반 10년 동안 형성된 사유습관을 지닌 구세대 독일 시온주의자들의 언어에서 종종 이러한 문제를 대면하게 된다.

 

유대인 문제는 이러한 도덕형식에서 카프카의 말로 표현하여 이러한 세대의 놀랄 만한 내면상태를 결정했다. 이 문제가 이후 실제로 발생한 것의 정면에 있는 우리에게 아무리 중요하지 않게 보이더라도 여기서 이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314)

 

카프카는 이렇게 쓰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세계는 노동생활을 어떤 의미에서 불가피하게 움막에 들어가게하고𐤟𐤟𐤟𐤟𐤟𐤟𐤟 잘 꾸며진 가정방을 답답하게 하며 더럽히고 어린아이를 불편하게 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베냐민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의 정치적 기능은 당이 아닌 파벌을 세우는 것이며, 그들의 문학적 기능은 유파가 아닌 유행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들의 경제적 기능은 생산자가 아닌 중개인을 배풀하는 것이다. 중개인이나 숙련자는 자신들의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데 엄청난 낭비를 하며 텅빈 공간에서 야단법석을 ᄄᅠᆫ다. 사람들은 불편한 상황 속에서 보다 편안하게 지낼 수는 없다.”(319)

 

공산주의자들은 시온주의자들을 유대적 파시스트들이라고 비난했으며, 시온주의자들은 젊은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을 붉은 암살자들이라고 불렀다. 베냐민은 뚜렷하고도 독특한 방식으로 오랫동안 양쪽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이후에에도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길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었으며,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진 친구들, 특히 이러한 유대인들의 의견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이것은 두 이데올로기의 어ᄄᅠᆫ 긍정적 측면도 그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며, 두 경우에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 현존하는 조건들, 즉 부르주아적 환상이나 비진정성, 학계뿐만아니라 문단 밖의 입장에 대한 비판의 부정적요소였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321)

 

유대인 가운데 가장 훌륭했던 사람들이 문학계의 동료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정신에 대한 배반이었다.

 

일찍이 1913년에 베냐민은 양친의 가정과 독일계 유대인의 문학 생활에 대한 이중의 반역이라는 의미에서 시온주의 입장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그래서 아마도 필요한 약속으로생각했다. (322)

 

2년 후 베냐민은 숄렘을 만나게 되는데, 그에게서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 있는 유대주의를 발견했다. 거의 20년에 걸쳐 지속되었던 기묘하고도 끝없는 팔레스타인 이주에 관한 생각은 숄렘과의 만남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 베냐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결코 불가능하지 않은 여러 조건 아래서 결코 경정하지는 않았지만(팔레스타인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곳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돈벌이를 하지 않는 훌륭한 유대인들)은 그 이외의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그런 계획을 일종의 폭력 행위로 간주했다. 그것은 결국 필연적이지 않을 경우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제적𐤟정치적 필요성이 생겨날 때마다 그는 그 계획을 재고하면서도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가 시온주의 환경에서 성장한 아내와 헤어진 다음에도 계속해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파리 망명 시절에도 내 연구소에서 다소나마 명확한 결론을 내린 다음 조만간 10월 또는 11월 예루살렘으로갈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그가 시온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오락가락 왔다갔다 했듯이 편지에서 우유부단함을 보인 것은 진실로 그의 통렬한 통찰에 기인하는 것 같다.(323)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운동도 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재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정치적𐤟정신적 전통의 전체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325)

 

 

<게르숌 숄렘>

 

 

전통 붕괴의 시대 과거의 전달 가능성

 

 

발터 베냐민은 그의 생애속에서 일어난 전통의 파산과 권위의 상실이 회복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과거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과거의 전달 가능성이 인용 가능성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과거의 권위 대신 서서히 현재에 정착하면서 현재로부터 마음의 평화”, 즉 현상에 만족하는 무심한 평화를 빼앗아 내는 이상한 힘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했다.(327)

 

베냐민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하기 전인 1920년대초 자신에게 제시된 문제는 이러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 무렵 그는 독일 바로크 시대를 대학교수 자격 논문의 주제로 선택했다. 이 선택은 전체적으로 미해결된 이러한 문제들의 이중성을 매우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독일 문학과 시의 전통에서 바로크는 그 시대의 위대한 교회 합창곡을 제외할 경우 사실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330)

 

베냐민은 전통의 돌이킬 수 없는 단절과 권위의 상실을 충분히 깨닫기 바로 직전에 진리가 비밀을 파괴하는 폭로가 아니라 그것을 실물대로 나타내는 노출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진리가 역사상 적절한 순간에 세상에 일단 존재하게 되자 진리에 독특한 이러한 일관성은 진리를 사실상 명백하게 해주며, 따라서 그 진리는 전통에 의해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331)

 

 

수집가의 열정과 천공방식

 

 

베냐민은 자기 자신이 지녔던 수집가의 열정을 분석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태도의 이러한 애매성을 예증했다. 수집이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동기에서 비롯된다. 베냐민이 아마도 처음으로 강조했듯이 수집이란 어린아이들의 열정이다. 사물은 이들에게 아직 상품도 아니며 그 효용성에 ᄄᆞ라 평가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부자들의 취미다. 부자란 유용한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소유하며, 따라서 대상의 변형을 그들의 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수집가도 혁명가와 마찬가지로 먼 미래의 또는 과거의 세계로 통하는 길뿐만 아니라 동시에 보다 좋은 세계에 이르는 길을 꿈꾼다. 물론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이 일상세계에서 필요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제공받지는 못하지만 사물은 유용성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된다.”(333)

 

전통은 연대기적일 뿐만 아니라 무어보다도 체계적으로도 과거를 정돈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들자면 전통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전통과 이단을, 의무적이고 연관된 것과 무관하거나 단지 흥미로운 의견이나 자료의 집합을 분리한다.

 

한편 수집가의 열정은 비 체계적이며 거의 무질서에 가깝다. 수집가의 열정은 그것이 하나의 열정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분류 가능한 것, 대상의 질에 의해 촉진되기보다 오히려 열정의 순수성과 특이성, 즉 어떠한 체계적 분류도 거부하는 무엇인가에 의해 촉진되기 때문이다.(335)

 

따라서 전통은 모든 것을 구별하지만 수집가는 모든 차이를 평준화한다. 이러한 평준화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편애와 거절은 여기에는 거의 비슷하다.” 따라서 수집가가 전통 자체를 자신의 특별영역으로 삼고 전통에 의해 인식되지 못한 것을 조심스럽게 제거하더라도 이러한 평준화는 발생하게 된다. 수집가는 진실성의 기준으로 전통에 맞서며 기원의 징후와 권위 있는 것을 대립시킨다.(336)

 

베냐민은 독일의 비애극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을 때 매우 체계적으로 깨끗이 정리된 600개 이상의 인용문의 수집을 자랑했다. 후기의 필기장처럼 이 인용문의 수집도 집필의 부담을 가볍게 해주는 발췌문의 축적이 아니라 이차적인 성격의 집필과 더불어 주요 저작을 구성했다.

 

모든 면에서 초현실주의적 짜맞춤 기술이 중요하다. 인용문만으로 구성되는 저작을 부각시키려는 베냐민의 이상은 또한 아주 대가답게 구성되었다. 따라서 그 저작은 모든 부수적인 내용을 달지 않을 수 있으며 지극히 별나고 게다가 자기 파괴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비슷한 충동에서 발생한 당대의 초현실주의적 실험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340)

 

독일 비애극의 원천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베냐민은 진리를 청각적 현상으로 간주했다. 베냐민의 경우에 철학의 아버지플라톤이 아니라사물에 이름을 붙여준 아담이었다. 따라서 전통은 이름을 제공하는 이러한 언어들이 전달되는 형식이며, 또한 본질적으로 청각적 현상이었다.(342)

 

 

언어철학과 시적 사유

 

 

베냐민의 철학적 관심이 왜 처음부터 언어철학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인용을 통해 최종적으로 이름을 명명하는 것이 왜 그에게 전통의 힘을 빌리지 않은채 과거를 논하는 유일하면서 타당한 방법이 되었는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과거가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문제 되는 시대는 결과적으로 언어현상에 부딪쳐야 한다. 과거는 언어 속에 뿌리 깊이 담겨있기 때문에 과거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모든 시도는 언어현상으로 좌초된다.

 

우리가 정치라는 말을 사용하는한, 그리스의 폴리스는 우리의 정치적 실존의 근저-즉 바다의 밑바닥-에 계속 존재할 것이다. 어의론 학자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의론 학자들은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언어를 과거가 숨는 배후 장벽이라고 공격한다.- 그들은 이것을 언어의 혼란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의견은 절대적으로 정당하다. 최종적으로 분석한다면 모든 문제는 언어문제다. 그들은 다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의 함의를 알지 못할 뿐이다.(343)

 

모든 사상이 연관되는 궁극적 비밀의 갈등 없고 심지어 고요한 보관소, 즉 진리의 언어가 존재하며(번역자의 사명), 이것이 참된 언어. 우리는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경우에는 그 참된 언어의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상정하게 된다. 그것은 베냐민이 번역자의 사명이라는 자신의 논문 중심에 말라르메의 놀라울 만한 인용문을 적어 넣은 이유다.

 

그는 언어적 창조물의 공리적 또는 소통적 기능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결정화되고, 따라서 궁극적으로 단편화된 형태의 언어적 창조물을 세계의 본질의 비의도적𐤟비소통적 발언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그가 언어를 본질적으로 시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베냐민이 인용하지 않은 말라르메의 경구 가운데 마지막 문장이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밝힌 것이다.

 

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언어의 결점을 철학적으로 보완해주는 시작품은 언어의 탁월한 보족이다.”

 

현재에 의해 촉발되는 시적 사유는 사유의 단편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고 과거에서 사유의 단편을 얻으며 자신의 주변에 사유의 단편을 모은다. 바닥을 파헤치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귀중하고 신기한 것, 즉 심연의 진주와 산호를 들어 올려서 그것을 수면으로 운반하고자 바다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진주조개 채취 잠수부처럼 시적 사유는 과거의 심연으로 파고 들어간다.

 

한때 살아 있는 것도 가라앉고 용해되어 버리는 바닷속 깊은 곳에서 어떤 것이 현저한 변화에도 견뎌내고, 언젠가 그것들에게로 내려와 삶의 세계- “사유의 단편”, 귀중하고 신기한 것, 아마도 영원한 근원 현상들로서-까지 운반할 진주조개 채취 잠수부만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새롭게 결정화된 형태나 유형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이다.(345)

 

<새로운 천사>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