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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베르톨트 브레히트(378-409)
 
제1차 세계대전과 삶의 찬미
 
휘몰아치는 강철의 폭풍
 
그는 문제의 핵심을 포착하는 날카롭고, 비이론적이며, 비관조적인 지성을 천부적으로 지녔고, 과묵하며,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하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부끄러움이 많았으며, 하여튼 자신의 일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놀라울 정도로 호기심이 강했다.
 
그는 제1차 세게대전이 발생하던 해에 16세였으며 전쟁이 끝나는 해에 위생병으로 징집되었다. 그때 세계는 그에게 무의미한 살육의 장면으로 비쳤으며 언어는 연설의 성낸 목소리로 울렸다.(378)
 
사르트르만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도구가 부서져 사용할 수 없고, 계획은 중단되고 노력은 무의미하게 되었을 때 세계는 공허 속에서 궤도 없이 멈추고 어린아이처럼 무섭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379)
 
브레히트의 눈에 비치듯이 4년간의 파괴는 세계를 말끔히 씻어버렸으며, 그 포푹은 모든 인간의 흔적, 즉 문화적 대상과 도덕적 가치- 확고한 평가기준 및 도덕적 행위를 위한 견고한 안내 표지뿐만 아니라 확고한 일상적 사유의 표준 등-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지킬 수 있었던 모든 것을 휩쓸어 갔다.
 
전후 세계의 순진하고 소름 끼치는 신선함은 브레히트의 초기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끔찍한 결백에 반영되고 있다.(380)
 
 
생명에 대한 환희와 감사
 
브레히트는 깨끗이 청소되어 새로워진 이 세계 속에서 우선 안주했다. 그를 분류한다면, 그는 기질이나 성향 면에서는 무정부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380)
 
브레히트가 태어날 때부터 지녔을 철학은 그가 훗날 마르크스나 레닌으로부터 차용한 교의와는 대조적으로 모두『신앙기도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철학이 명백히 소개된 두 편의 시는 「추수감사절의 대찬가」, 그리고 뒷날 『마고하고니시의 흥망』에 수록한 「유혹에 대하여」다. 「대찬가」는 독일의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외우는 네안더의 바로크조의 장엄한 교회 찬가 「주를 찬미하소서」의 정확한 모작이다.(385)
 
브레히트의 경우 신과 내세의 부재에 대한 생각은 불안이 아닌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브레히트는 가톨릭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문제의 이러한 측면을 아주 순조롭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는 어떤 것이 천국에 대한 희망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지구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보다 더 좋은가를 분명히 생각했다. 그 자신의 내면에서 종교에 반항하는 것은 의혹도 아니고 욕구도 아니고 자존심이었다. 종교를 격렬하게 부정하고 지구의 신인 바알을 찬미하는 그의 내면에는 거의 격정적인 감사의 마음이 존재한다.
 
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생명보다 위대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지향하는 당시의 풍조나 그에 대한 반발에서 그러한 감사의 마음을 거의 마주치지 못할 것이다.(387)
 
 
작품의 모티브: 동정심과 개종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브레히트가 현실에 다시 관심을 갖고 시작을 거의 중단한 계기는 동정심이었다. 굶주림이 만연했을 때 그는 굶주리는 자들과 함께 반항했다.
 
동정심은 분명히 브레히트의 정념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 가장 근원적인 것이었다. 그는 동정심을 애써 숨기려 했지만 숨기는 데 별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동정심은 그가 쓴 모든 희곡 작품에 빛나고 있다. 『서푼짜리 오페라』의 구절에 드러나는 냉소적인 우스갯소리 가운데에도 강렬하고 비난하는 소리가 들린다.(389)
 
동정심 때문에 유발되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은 선해질 수 없다. 브레히트는 본능적으로 혁명사가들이 일관되게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즉 로베스피에르로부터 레닌에 이르기까지 근대의 혁명가들은 동정이란 정념, 로베스피에르의 동정적인 열정에 사로잡혔다. 로베스피에르는 “약한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이러한 강력한 유인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정도로 여전히 아주 순수했다.
 
브레히트의 암호화된 언어적 표현인 “고전적 대가”, 즉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동정심이 가장 강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다른 “무지한 사람들”과 달리 동정이라는 감정을 분노의 감정으로 “전환시키는” 법을 알았다. 그들이 이해했듯이 “연민은 사람들이 도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들이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브레히트는 아마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마키아벨리가 “선하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군주와 정치가에게 제시한 교훈에 담긴 지혜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선 자체에 대해 세련되면서도 외견상 애매한 태도를 마키아벨리와 함께 공유한다. 이러한 태도는 브레히트 자신이나 선구자의 경우에도 단순하면서도 학구적인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왔다.(391)
 
가난한 사람들의 거대한 흐름이 노도처럼 처음으로 유럽의 거리에 흘러념쳤던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브레히트처럼 동정심에서 행동했거나 수치심 때문에 과학적 이론이나 냉철한 웅변술로 자신들의 동정심을 숨겼던 혁명가들이 많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 어둠 속에 남아 있고 인류의 기억 속에 기록되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상처받은 삶에 덧붙여진 모욕을 이해했던 혁명가들은 소수였다.
 
민중의 위대한 차산의 교사는 투쟁에 참가해서
피지배계급의 역사를 지배계급의 역사에 덧 붙인다.
 
이 시는 브레히트가 「공산당 선언」을 기묘한 바로크풍의 시적 형태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393)
 
 
브레히트의 개종과 ‘조치’
 
우리가 이러한 것들-무중력성, 중력보다는 현대 세계의 환경 내에서 작합한 중심에 대한 열망, 아울러 동정심, 즉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견디지 못하는 자연스러운 능력, 또는 브레히트의 표현대로 그러한 동물적 능력-을 함께 모을 때 공산당에 동조하겠다는 그의 결정은 당시 상황 아래서 이해하기 쉽다.(395)
 
“고전”으로서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저작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동정심이 현실로서 자신에게 미리 보여주었던 것을 공산당 때문에 매일 마주치게 되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 현실이란 바로 이 눈물의 계곡에서 나타나는 어둠과 매서운 추위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목을 내놓을 필요가 없었다. 무언가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그의 말썽과 우리와 그 사이의 말썽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는 나쁜 세계를 좋은 세계로 바꾸기 위해서는 “선하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스스로 약해져야 된다는 사실, 천한 것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공산당에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396)
 
당시에도 공산당 내외에 있었던 격렬한 스탈린 반대주의자들은 브레히트가 모스크바를 옹호하는 희곡을 ᄊᅠᆻ다는 사실에 격분했으며,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지식인’이 본 것이 러시아 공산주의의 현실과 일치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그는 이러한 진실이 보일 수 있었던 범위 내에서 진실을 밝혔다.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과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적과의 투쟁을 그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친구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 문제의 단순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시작을 혁명적 열정의 과잉으로만 여전히 변호했으나, 브레히트는 보기처럼 무모하지 않을 만큼 상당히 지적이었다.
 
물론 브레히트는 낙원을 건설하는 체하는 자들이 지상에 지옥을 바로 만들었다는 사실, 그들이 저지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비열한 행위나 배신행위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예견하지는 못했다.(398)
 
 
시인의 죄과와 부담
 
망명 시절 나치 관련시
 
나치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브레히트가 외부에서 제3 제국의 현실을 직면해야만 한 이후 처음으로 그의 잘못이 드러났다. 1933년 2월 28일 의사당 방화사건 다음 날 그는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고전”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고전은 히틀러가 실제로 행한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으며, 신문 논조의 말투가 운문형식으로 바뀐, 이후 이른바 시들을 예견케 하는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에서 서투른 산문형식의 대화를 섰다.(400)
 
히틀러는 1935년 또는 1936년에 기근과 실업을 해소했다. 따라서 “고전”으로 훈련을 받은 브레히트의 경우 히틀러를 찬양하지 않을 어떠한 구실은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이 구실을 찾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에게 명백한 것, 즉 실제로 박해받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아니고 유대인들이라는 사실, 중요한 것은 계급이 아니라 인종이라는 사실을 단지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또는 레닌의 저작에는 이러한 문제를 취급한 부분은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 부정하고, 이것을 지배계급의 구실이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 탐색하는 것”을 완고하게 거부했던 브레히트도 같은 입장에 빠졌다.(401)
 
 
스벤보르 시절 시작활동
 
그의 마음이 자본주의나 계급투쟁과 관련 없는 주제로 옮겨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시적인 증거다.
 
1939년 봄 발터 베냐민은 덴마크에 있는 브레히트를 방문한 후 그의 시를 갖고 파리로 돌아왔으며, 좋은 소문이 다 그러하듯이 그러한 지혜가 매우 필요한 곳에서 그 시는 위안과 인내의 근원으로서 빠른 속도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403)
 
망명 시절 희곡들
 
브레히트는- 이른바 서사적 연극이라는 방법으로-무언가 개성을 지는 역할을 창조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그러나 오늘날 갑자기 그의 희곡은 진실한 인간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옛날 의미에서는 개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독특하며 개성적인 인물이어서 여기에는 시몬 마샤르, 쓰촨의 선량한 여인, 용감한 어머니, 코카서스의 백묵원에 나오는 소녀 크루셰와 아츠다크 판사 그리고 갈릴레오, 푼틸라, 그의 하인 마티 등이 포함된다.(404)
 
확실히 이 뒤늦은 명성은 브레히트 자신의 재능과 시인 극작가로서의 재능뿐만 아니라 극장 감독으로서의 특출한 재능에 기인되는 것이다.(405)

그는 아르투르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ㅡ히틀러의 "억제할 수 없는" 권력 장악을 풍자한 것이지만 위대한 작품에 속하지 않는다ㅡ 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406)

브레히트는 소수의 시인들만 행했듯이 이러한 시도를 통해 자신의 생애와 예술을 걸고 모험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승리하면서도 재앙을 맞게 되었다.

만약 브레히트가 오늘날까지 우리와 함께 살아 있다면 그가 이러한 예외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을 것임은 분명하다.(407)

우리는 언제나 어떤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소행을 용서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사랑만이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우리는 사랑을 하든 하지 않든 사람 자체를 위해 용서를 한다. 그런데 정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요구하며, 자비는 불평등을 주장한다.

불평등은 모든 사람이 행하고 성취한 것보다 더 귀중하거나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브레히트는 젊은 시절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유용성"을 채택하기 이전에 다른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408)

불평등의 영역을 지배하는 기준은 고대 로마의 격언 속에 들어있다. "주피터에게 허락된 것은 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위안을 주는 경우 이 불평등은 양쪽으로 작동된다.

한 시인이 내가 여기서 브레히트를 위해 요구했던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는 그가 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있으며 그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라는 점이다.

옛 격언의 통렬함은 양쪽의 의미를 자르며 한줌의 연민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쓰지 않았던 불쌍한 B.B. 에 대하여 와 같은 예는 우리 세기 또는 다른 어떤 시대에서나 시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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