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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 사람들(한나 아렌트)

제9장 베르톨트 브레히트(347-37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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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베르톨트 브레히트(347-377)
 
 
#1
 
 
망명 생활과 원하지 않은 귀국
 
시인과 정치의 관계: 경계를 넘어서
 
1941년 브레히트가 미국의 피난처를 찾아갔다
1947년 그는 미국을 떠났다
브레히트가 서독에 정착하려 했을 때 점령군 당국은 필요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1949년 동베를린에 정착하여 한 극장의 감독을 맡았고
생애 처음 공산주의의 전체적 지배를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를 가졌다
 
브레히트의 명성은 죽은 뒤에 유럽 전역 러시아까지도 영어권 국가들에까지 퍼졌다
독일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영어로 쓴 브레히트의 시에 흥분하고 열광하는 이유를 이해하기란 때로는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브레히트의 정치적 전기, 시와 정치에 애매한 관계에 대한 일종의 사례사는 쉽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해 브레히트의 교조적이면서 때로는 장난스러운 집착은 심각한 관심을 끌 일이 못된다.
 
 
히틀러 치하 동료 시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계하라 그대들이 노래하는 히틀러라는 이 인간을
나는 그가 곧 죽을 것이고. 죽었을 때 명성을 잃을 것임을 알고 있다. ”
 
히틀러나 히틀러의 전쟁을 찬양하는 시는 그가 죽은 뒤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어느 찬미 작가도 “아름답게 들리는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목소리는 단시에서 동료 시인들에게 아주 아름답게 들리는데 그가 왜 시를 출판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가 동베를린에 사는 동안 집필하여 출판했던 스탈린 송시나 스탈린 범죄에 대한 참가는 그의 저작집에 빠져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알지 못했는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난밤 꿈에서 나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았다.
마치 문둥이를 가리키듯 손가락들 헤어지고 부러졌더라
 
너희들은 아무것도 몰라!’
 
나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소리쳤다
 
[브레히트의 스탈린 찬미는 그의 저작집 속에 빠져있다.
유일한 흔적은 그가 죽은 뒤 출판된 메티비망록 산문집 제 5권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스탈린은 유용한 인간으로 찬미되고 그의 범죄는 정당화되고 있다.
스탈린 사망 직후 브레히트는 그가 5대륙에 억압받는 사람들의 희망의 화신이었다고 쓰고 있다.]
 
시인에 대해 말하기란 거북한 일이다.
시인은 인용되는 존재이지 말할 상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들의 목소리는 비평가나 학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관심 대상이다.
그것은 사적 삶에서나 시민으로서의 삶에서나 우리의 관심 대상이다.
 
 
브레히트의 경우처럼 정치적 태도와 신념이 저자의 생애와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비문학계 인사가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훨씬 용이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먼저 지적할 사항은 시인들이 이따금 선량하고 믿을 만한 시민이 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에즈라 파운드의 경우 미국 정부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그의 반역 행위를 불문에 붙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정신 이상을 이유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시인은 무거운 짐을 지지 않는다. ”
 
그러나 괴테의 시행은 다른 종류의 잘못, 즉 가벼운 잘못 브레히트가 언급한 그러한 것과 관련이 있다.
 
브레히트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진리를 언급하려는 억누를 수 없는 욕구로 자기 집안의 여자들에게
 
“여러분은 나의 내면에서 여러분이 신뢰할 수 없는 남성의 모습을 발견한다”
 
고 말했으며
 
 
아울러, 여성들이 자기 집안의 남자들에게서 신뢰성을 가장 많이 원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시인들은 신뢰성을 제공할 수 없다.
높이 날아오르는 임무를 맡은 자들은 중력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묶여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들처럼 많은 책임을 등에 져서도 안된다
 
그는 1934년 어느 대화에서 자신은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했다. 했다고 언급했다.
나는 어쩌면 법정에서 조사받을지도 모른다
어떤가? 당신은 정말 심각한가?’
 
그때 나는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전적으로 중대하다고 생각한 예술적인 문제, 극장과 관련된 문제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나는 이 중대한 질문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에 훨씬 더 중요한 진술, 즉 나의 태도가 정당하다는 점을 첨가하고 싶다.
 
파운드는 연설해서 무솔리니의 의식(행사)에 어리석게 압도당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악명 높은 라디오 방송에서 무솔리니의 최악의 연설을 넣어 훨씬 넘어 히틀러의 역할을 연출했고
대서양 양쪽에 살고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대인을 가장 혹독하게 박해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전쟁 이전이나 이후에도 유대인을 싫어했다.
이러한 혐오감은 정치적 의미를 거의 지니지 않은 개인적 문제이다.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살해되고 있는 순간 이런 종류의 혐오감을 세계에 퍼뜨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파운드는 정신 이상 상태였다고 변명해
온전한 정신이며 지극히 지성적이었던 브레히트가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을 교묘히 벗어날 수 있었다.
 
브레히트의 잘못은 파운드의 잘못에 비해 훨씬 하찮았다. 그럼에도 브레히트는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 다만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침착성 신뢰성 책임감을 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민들의 위대한 아버지이며 살육자인 스탈린을 위한 브레히트의 송시들이 있는데,
당시 가장 무능한 브레히트의 아류 작가가 그러한 송시들을 조작했던 것 같다
시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스탈린을 위한 송시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송시들은 공포 때문에 쓰인 것이 아닌가?
 
그는 거의 모든 것이 폭력 앞에서 정당화된다고 항상 믿지 않았던가
 
 
 
코이너 씨의 이야기(86개 산문단편집)에는 다음에 이야기가 나온다
 
어두운 시대의 어느 날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을 배운사람의 집에 지배자의 앞잡이가 찾아왔다
앞잡이는 사람의 집과 음식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너는 나를 섬기라고 사람에게 요구했다.
사람은 앞잡이를 침실로 데려가 담요를 덮어주며 그의 침실을 지켰고 그렇게 7년 동안 봉사했다.
그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7년이 지나자 앞잡이는 먹고 자고 명령하면서 생활하다가 살이 쪄서 죽었다
그 사람은 시체를 썩은 담요에 담아 집 밖으로 던져버리고 침실을 닦고 벽을 칠하면서 안도의 숨을 쉰 뒤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1953년 노동자 봉기 이후 많이 인용되는 재담이 있다.
 
”617일 인민 봉기가 일어난 뒤.....
그 전단에는 인민들이 정부의 신뢰를 잃었으니
단지 노동량을 배가함으로써 이것을 회복할 수 있다고 쓰여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시키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
연애시와 동요에는 감동을 울리는 시행들이 많다
[‘해결’, 「시집」 제7권. 동독의 1953년 봉기에 관한 브레히트의 유명한 시,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
 
 
 
 
유명한 시 아무런 이유도 없이를 반쯤 의식적으로 변형한 시구이다.
 
(장미꽃에 ‘’왜는 없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자기에 대해서는 초연하다
사람들이 그게 보이는가 하고 묻지 않는다.)
 
브레히트가 이러한 시행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시인의 분위기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한 결정적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모든 것이 보여주듯이 시인은 새로운 목소리를 발견했으나, 그 목소리는 들리는 순간에 이르러 힘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러한 경계들은 희미한 융기와 같으며 사람이 일단 넘으면 갑자기 벽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에 맨 눈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되돌아갈 길은 없다. 그는 어떻게 하더라도 자신의 등 뒤에 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모두 조치가 발생한 순간,
즉 처벌이 그에게 내려진 순간이다.
 
죽음을 제외하고 시인이 감내할 수 있는 유일한 의미있는 형벌은 물론
 
인간의 생애를 통해 천부적 재능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갑자기 잃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2
 
 
동 베를린 정착과 때늦은 상실감
 
브레히트는 확실히 상실감을 오히려 늦게 깨달았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때 그러한 상실감은 나타나지 않았다.
1920년대 그리고 심지어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잘못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실수였다.
 
브레히트는 친구들 가운데 일부가 피고가 되었던 모스크바 재판 기간에 공산당과 결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스페인 내란 기간에 러시아인들이 심지어 공산당 내외부의 반스탈린주의자들을 제고하고자
스페인의 불행을 이용하면서 스페인 공화국에 불리한 모든 일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이때에도 그러한 상실감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히틀러와 스탈린의 비밀 협정이 체결되던 시기에
브레히트는 공산당과의 관계 단절은 차치하더라도 이를 언급하지 못했는데 이때에도 그러한 상실감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에 아직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어떠한 정치 연구에도 종속되지는 않았다.
 
그가 동베를린에 정착하면서 공산주의 체제 아래 산다는 것이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매일매일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러한 상실감은 비로소 찾아왔다
 
브레히트는 동베를린에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947년 10월부터 1949년 가을까지 뮌헨 정착 허가서를 얻으려고 취리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불행한 시기가 닥칠 때까지 동독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과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아직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전쟁 초기 유럽을 떠났을 때 모스크바에는 한 발자국도 딛지를 않았으며 러시아를 가능한 도피처로는 생각지도 않았다.
 
서유럽의 자유로운 청중들만 시종일관 브레히트를 인정했다.
따라서 러시아 공산당에 결코 호감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불길한 예감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즉 그는 (공산당원은 결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운동에 아주 깊이 관여했을 때에도 공산주의 정치와 시작 활동을 분리시킬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태도로 소비에트 현실의 맹공격에 저항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이러한 태도로 울브리히트 동독체제의 훨씬 덜 끔찍스러운 맹공격에도 견뎌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안전은 동베를린이 1950년대 동유럽의 견본인 예외적 장소로서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서베를린과 필사적인 경쟁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보장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베를리너 앙상블은 브레히트가 동독 정부의 후원 아래 조직하고 주도했으며 작품을 쓰고 연출을 맡았던 극단이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처지를 알았으며 동 베를린에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죽기 얼마 전 덴마크의 집을 샀으며
또한 스위스로 이사할 것을 고려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그보다 더 열망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례는 위대한 시인이면서 극작가와 병행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시인들과 세계를 공유하려는 모든 시민에 중요하다,
 
즉 좋은 시행을 쓰는 능력은 시인들의 의지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능력을 부여받았어도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
 
 
어두운 시대 브레히트의 자화상
 
잃어버린 세대의 삶과 고뇌
 
우선 나는 여기에서 몇 가지 전기적 상황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20세기 다른 작가들에 비해서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많은 말을 더 삼가했으며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1898년 태어난 브레히트는 이를테면, 잃어버린 세대 가운데 세 세대 가운데 첫 번째 세대에 속한다.
 
1차 세대 세계대전 당시 참호와 전쟁터를 통해 세계에 처음으로 참여한 브레히트 세대의 사람들,
즉 잃어버린 제1세대는 정상적 삶을 영위하는 데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 세대를 인간으로 만들어준 정상심리는 공포에 대한 모든 경험의 포기이고 공포 속에서도 발현되는 동지애였다.
 
대략 1890년부터 1920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 세 그룹은 병사, 망명자, 추방자로서 또는 저항운동의 일원이자 집단 수용소와 학살 수용소의 포로로서 또는 폭탄의 우박 속에서 노출되어 있던 시민으로서 도시 생존자로서 2차 세계대전 중 단일 집단을 형성할 정도로 상당히 가까운 연령대에 있었다.
브레히트는 몇십 년 전에 시에서 이들에 대해 언급했다.
 
‘신앙기도서’에 수록되어 있는 불쌍한 B.B.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이 시는 그가 잃어버린 세대를 주제로 해서 쓴 유일한 것이다.
 
잃어버린 것은 이 쓸모없는 인간 집단뿐만 아니라 그들을 수용하고 있는 세계이다.
 
브레히트는 가장 높은 차원은 아니지만, 자기 연민의 입장에서 결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오히려 고독한 사람과 관계를 끊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가 개인으로서 발전에 필요한 은밀한 장소와 담보물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붕괴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가진 나머지 현실 문제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깊이 파내려 가지 않았고
모든 것을 기억했지만, 중요한 것은 잊었다
 
브레히트가 결코 스스로 미안한 감정을 결코 느끼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점은 그의 커다란 미덕 가운데 하나지만, 미덕은 다른 어떤 것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 미덕은 재능이었으며 부분적으로 축복이고 부분적으로 재앙이다.
그는 유일하게 지극히 개인적인 시로 이것에 대해 쓰고 있다.
 
최우수 작품에 속하는 이 시의 제목은 어부’.
 
이 시는 주인이 모든 사람에게 이방인이면서 친구인 달의 주기에 따라 부침하는 사람들, 그들의 일, 그물값, 고기잡이로 얻는 이익, 부인들, 세리를 속이는 수법에 어떻게 관심을 갖는가에 언급하고 있다.

(시에서) 그가 처음 왔을 때는 환영받았지만 결코 초대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바랄 때 그는 쫓겨난 하인처럼 얌전하게 길을 떠날 것이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림자도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자화상, 젊은 시인에 대한 브레히트의 생생한 묘사는 후일의 시인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오만과 겸손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모두에게 이방인이자 친구이고” 따라서 거부당하고 환영받으며,
“대화와 반론”에만 응할 힘이 있고, 마치 이야기할 것이 없기라도 한 듯 자신에 대해 침묵을 지키며, 호기심이 많고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실재를 철저하게 필요로 한다.
 
이 자화상은 젊은 브레히트가 자기 동료들의 세계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는데 겪었음이 틀림없는 엄청난 어려움을 적어도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젊은 시절 브레히트의 기질과 시적 정향
 
브레히트는 처음부터 익명성을 좋아하는 성향을 지녔으며 온갖 야단법석을 특별히 혐오했다.
브레히트는 자신이 보통의 인간이 되기를 강력히 원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긴밀하게 연계된 두 가지 개인적 기질, 즉 익명성과 평범성을 마음가짐으로 채택하기 오래전에 이러한 기질을 완전히 습득했다.
 
그는 이러한 기질 때문에 훗날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외형상 대립되는 두 가지 태도에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 하나는 비합법적 활동에 대한 그의 위험스러운 편애이다.
다른 하나는 특징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 이른바 동조자들을 자기 주변에 모으겠다는 그의 특이한 주장이다.
 
 
어두운 시대를 알리는 전령
 
브레히트가 자신을 명료하게 밝히고 있는 한 편의 시가 더 있다.
후손들에게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초기의 시 ‘불쌍한 B.B.에 대하여’ 대해서 강조하고 있듯이 ‘후손들에게라는 시는 세계에서 시대의 대재앙뿐만 아니라 우연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과 관련해 냉정을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닥쳐올 대변동이 내습하니까 엄격한 전기 형식의 암시적인 말은 모두 사라졌다
 
그 시는 어두운 시대에 살고 있는사람들에 관한 시이다.
 
그는 나의 행운이 다하면 나도 그만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재능보다 행운에 자신을 의지했으며 비범함보다는 자신의 행운을 믿는 것이 그의 자랑이었다.
 
그는 몇 년 후 전쟁 기간 중에 죽은 친구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손실을 고려하면서 시를 지었다
나는 오늘 밤 꿈속에서 이러한 친구들이 더 강한 자들은 생존한다라고 나에 대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증오했다.
 
국제적 실업 대란을 성공하려는 욕구 또는 성공과 실패에 대한 생각으로 대응하거나, 전쟁이라는 파국을 원만한 인격의 이상으로 맞서거나, 또는 자신의 많은 친구들이 그러했듯 잃어버린 명성과 파탄난 인생에 대한 불만으로 망명하려는 개인적 열망의 척도로 사건의 흐름을 측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고 있었다.
 
브레히트는 망명자를 불운의 전령이라고 아름답게 그리고 솜씨 있게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망명자들은 나라에서 나라로 그리고 대륙에서 대륙으로 자신들의 불행뿐 아니라 온누리에 엄청난 불행을 전달했다.
 
망명자와 방랑자를 불운의 전령이라고 표현한 기발하고 그 이상 기발한 이 문구는 브레히트의 위대한 시적 총명함,
모든 시작(시쓰기)의 전제를 이루는 응축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그가 1950년대 초에 동·서독의 예술가와 작가에게 보낸 반전 선언서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위대한 카르타고는 세 번의 전쟁을 치렀다
카르타고는 첫 번째 전쟁을 치른 뒤에도 강대국이었다.
두 번째 치 전쟁을 치른 뒤에도 살만한 나라였다.
카르타고는 세 번째 전쟁 뒤에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브레히트는 모스크바 재판 당시 미국에 있었다.
우리가 들은 바에 따르면 브레히트는 여전히 좌파에 속하지만 지독하게 반스탈린주의적이고 트로츠키의 후원 아래 공개 재판에 깊이 관여했던 한 사람을 방문했다.
 
그런데 브레히트는 오랜 침묵을 지키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무죄일수록 그들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이런 선고는 부당할 것 같다.
 
그들은 스탈린에 대해 음모를 꾀한 혐의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스탈린에 대해 음모를 꾀한 적이 없다.
혐의에 대해 무죄다
 
근위대는 스탈린이라는 한 인간이 혁명을 거대한 범죄로 바꾸는 것을 저지하는 명백한 의무를 수행해야 하지 않았는가
브레히트를 초청한 주인은 물론 이런 내용을 알지 못했다.
 
·The End. 202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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