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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 진중권

p315 : 편집자를 세계의 건축가로 만드는 이 편집의 틀을 안더스는 매트릭스라 부른다. ‘팬텀이 세계를 이루는 재료라면, ‘매트릭스는 그 재료로 세계를 짜는 활판이라고 할 수 있다. (318)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주관의 선험적 형식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실은 우리의 의식이 시공의 형식에 따라 구성한 것이라는 얘기다. 편집의 몽타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신문을 짜는 원리는 세계를 짜는 원리다. 과거의 조작은 사실을 날조하거나, 해석을 왜곡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조작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다. 더 중요한 조작은 편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작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p319 : 오래전에 도시산업선교회라는 게 있었다. (320) 당시 신문과 방송은 도산이 들어오면 기업이 도산한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더니 급기야 이들을 폭력혁명을 부추기는 반국가단체로 바꾸어놓았다.

그 단체를 이끈 두 목사는 그 후 세상을 던졌다. 산속에서 홀로 농사를 지으며 사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한 사람은 신문이든 방송이든 일체의 미디어를 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다른 이는 텔레비전은 가끔 보나, 드라마만 본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미디어가 떠드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내가 지금 보는 이 세계는 또 얼마나 현실적인가? 혹시 이 역시 누군가의 매트릭스가 아닐까? 민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꿈을 현실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양수로 가득 찬 거대한 수조 속에서 웅크린 채 꿈을 꾸는 우리에게 매트릭스의 건축가가 말한다.

나의 표상이 너희의 세계다.”

 

p325 : 시뮬라크르란 안더스가 말한 팬텀에 해당하고, 시뮬라시옹이란 그가 말한 매트릭스를 고쳐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시뮬라크르는 이 세계를 이루는 재료이며, 시뮬라시옹이란 그 재료로 세계를 구성하는 활판이라고 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에게서는 이 관계가 거꾸로 뒤집힌다. 그에게는 가상이 있고, 그것의 존재를 현실이 위협한다. 한마디로 현실을 위협하던 가상이 어느새 현실을 잡아먹고, 주변으로 밀려난 현실이 가끔 가상의 가상성을 폭로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327) 자본주의는 이렇게 인간이 상품과 상품 사이를 소비하고 그 차이를 지불하기 위해 일하는 거대한 꿈의 세계, 어른들의 디즈니랜드다.

 

p328 : 안더스는 가장 중요한 조작은 카메라로 무엇을 비추고, 무엇을 비추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할 때부터 일어난다고 했다. 보드리야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늘날의 조작은 아예 거대한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그 안으로 현실이 침입해 들어와 이 가상의 가상성을 폭로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라.

부정과 부패는 권력의 일반적 속성이 아니라 닉슨이라는 한 개인의 부덕으로 처리되었다.

 

p330 : 권력은 사실 한 개인이 가진게 아니다. 소위 최고권력자라는 이드은 실은 권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케네디를 살해함으로써 권력은 (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대통령의 중요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 환상은 소위 민주주의라는 시뮬라시옹의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p333 : 어느 잡지의 기사에 따르면 인터넷에 범람하는 포르노그래피로 인해 현실의 성생활에 지장을 바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포르노의 세계는 현실 섹스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강렬한 어떤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다.

하이퍼리얼리즘을 극사실주의라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사실주의의 극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자는 복제에 대한 원본의 우위를 인정하나, 하이퍼리얼리스트들은 그 위계를 전복시킨다.

 

p356 : 저마다 모두 다를 때, 남과 다르다는 것은 외려 남과 같다는 뜻이 된다. ? 남과 다르다는 것이 모든 이의 특징이니까.

차이의 생산이 극에 달하면 외려 모든 차이가 소멸한다. 이 역설이 일어나는 지점을 보드리야르는 가치의 황홀경이라고 부른다. 현대는 이미 개별자의 차이가 지워져 거대한 일자로 합류하는 디오니소스의 황홀경에 있다. 차이의 생산을 원동력으로 삼았던 모던은 종말을 고하고, 사회는 이미 동일자를 무한 증식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가 있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무한 증식하는 스미스는 현대 사회의 이 악마 같은 모습의 상징일 것이다.

 

p359 : 평범한 것과 미적인 것. 둘 사이의 구별이 지워지는 현상을 보드리야르는 초미학이라고 부른다. 미적인 것에 극점에 달하면 그것은 외려 사라진다. 모든 게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도시 풍경, 예술을 방불케 하는 기발한 상업광고, 작품을 연상케 하는 멋진 상품들. 예술은 현실로 실현되고 있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모든 것이 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예술에 종언을 고한다.

예술은 더 이상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이다.”

 

p360 : 우리의 문제는 이것이다. 실재와 가상을 가르는 기준 역시 가상이며, 현실과 허구를 나누는 기준마저 허구일 수 있다는 것. 도대체 무엇이 실재이며 무엇이 가상인가? 대체 어디까지 현실이며 어디부터 가상인가? 그런 의미에서 사라지는 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허구와 실재가 복잡하게 뒤엉킨 현실을 살아야 한다


 

소비의 사회 / 보드리야르 / 임문영 번역 / 계명대학교 출판부 / 199712월 출간

p136 : “당신이 꿈꾸어온 육체는 바로 당신이다.” 이 경탄할 만한 동어반복은, 실로 어느 브래지어의 선전문구이지만, 개성화된자기도취적 모순들을 담고 있다. 즉 당신을 기준으로삼고 있는 당신의 이상에 접근시킴으로써, 진정으로 당신자신이 됨으로써, 당신은 집단적인 명령에 가장 잘 복종하고 또한 강요된 이러저러한 모델에 가장 가까이 일치하게 된다.

우리는 소비사회가 어떻게 자기도취적으로 자신을 반영하고 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p137 : 소비사회에서의 개인의 자기도취현상은 독특함을 향수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집단적 특징의 굴절현상이다.

어디에서나 개인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좋아하고, 자기만족하도록 권유받는다.

 

[역자 해설]

p342 : 소비사회는 사회생활에 다른 두 경향을 유도한다.

첫째는 사회분할과 모순을 미리 경험한 사회에서 이전의 구분과 분할의 놀랄만한 감소현상이다. 이것들은 이제 최저의 차이를 나타내며 이전의 모든 사회들이 가까운 사람들의 유대를 기초로 정립되었다는 바탕 위에 설명되어진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점점 더 만들어진 사회 관계로 특징지어지는데 이 관계들이란 그 자체가 소비된 사물로 전환된다.

둘째는 사물과의 관계에서 기호화된 특징의 변화인데 사회적 차이는 주체가 아닌 사물 속에, 사물에 의해 조정된다. (343) 이 문화모델은 사물의 인격화의 외적 형태처럼 소비자에 대한 새로운 개성화 효과를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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