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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p207-/ 보드리야르 / 18.11.07 모임용 발제

 

동물들 영역과 변형들

p207 :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실험적 잔인성을 가지고서 동물들을 이용하고 남용할 때, 우리는 해부도와 전도체들 밑에서 그들에게서 어떤 자백을 끌어내려고 하는가?

동물들에게 그들이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자백하게 해야 한다. (208) 동물들에게서 동물성, 그 불확실성의 원칙을 죽여야 한다.

그리하여 동물들이 그들의 침묵에 의하여 우리에게 구현하고 있는 야만의 질서, 해결할 수 없는 질서를 축축하여야 한다.

동물들은 그러니까 과거의 자유주의적인 제거의 운명 위에서 우리를 앞서가고 있었다. (210) 동물들은 심적 병을 육체적 병으로 만든다.

결론으로, 유일한 치료는 공간인 것 같다.

여러 혼란들이 기업의 수익성에 해를 끼칠 정도로 심각하기에, 이 소득감소는 동물들에게 훨씬 정상적인 생활조건을 주도록 사육자들을 인도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사람들이 이러한 정신적인 균형을 회복하기 위하여 사람들처럼 동물들도 시골로 보내게 될 시대를 예상한다. (211) 산업적인 동물들이 정상적으로 죽기 위하여는 어떤 생활의 질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죄수도 감옥을 견디기 위해서는 자유, , ‘정상성을 필요로 함을 발견한다.

노동자 자신도 생산의 강제명령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하여는 책임과 자율관리를 필요로 한다. 적응하기 위하여 모든 인간은 심리현상이 필요하다.

 

p212 :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심리현상의 황금기는 모든 영역 속에서 합리적인 사회화가 불가능하다는 점과 일치할 것이다.

그 복잡성이 무한히 개화될 수 있는 심리학적 모든 발견은, 다음의 엄밀한 등가육의 법칙에 따라, (노동자들을) 죽도로 착취할 불가능성, (죄인들을) 죽도록 가둘 불가능성, (동물들을) 죽도록 살찌게 할 불가능성으로부터 오는 것일 따름이다.

마소처럼 죽도록 짐을 나르던 동물들은 인간을 위하여 일해야만 하였다. 실험을 위한 동물들은 과학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불려졌다. 소비를 위한 동물들은 산업적인 고기가 되었다.

그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것과 같다.

이것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인 특권을 온 힘을 다해 세웠던 인간이성에 대한 일종의 씁쓸한 복수이다.

 

p213 : 우주공간과 실험실의 무시무시한 세계에 우리 대신 대답하라고 동물들을 보내길 허용한 심연, 아프리카의 동물보호구역이나 지옥 같은 동물원에다 견본으로서 동물들을 저장하면서 종족들을 제거하길 허용해 온 심연 등은 종족주의적 감정으로 덮여진다.

옛날에는 동물들이 인간보다 훨씬 성스럽고 신성한 성격을 지녔다. 원시인들에게는 인간이란 계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동물의 질서는 참조의 질서였다. (214) 동물들이 겪었던 궤적, 신적인 제물에서 분위기 있는 음악과 함께 무덤으로까지, 신성한 도전에서 자연보호론적인 감상성에 이르기까지, 이 궤적은 인간의 위상 자체의 저속화를 잘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여전히 인관과 동물 사이의 예기치 않은 상호성을 다시 한 번 기술한다.

(215) 우리가 동물에 대해서 갖는 감상성은 특이하게도 우리가 그들에게 갖는 경멸의 확실한 기호이다.

종속적인 연민, 우리는 이것으로 짐승들을 장식하여 그들을 아예 감상적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p220 : 동물들은 무의식이 없다. 동물들은 틀림없이 꿈을 꾼다. 그러나 이것은 생체-전자적인 질서의 억측이다. 그들에게는 언어가 없다. 언어만이 꿈을 상징적인 질서에 새겨서 꿈에 의미를 준다. (223) 동물들은 무의식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역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들은 그들이 더 이상 영역을 갖지 않는 이래로 무의식을 갖는다. 영역과 변형이 동시에 인간들에게 박탈되었다. 무의식은 이러한 상실이 끝없이, 희망없이 연주되는 장례의 개인적 구조이다. 동물들은 이러한 상실된 것들에 대한 향(224)수이다. 동물들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은 그러니까 이것일 것이다. : 우리의 문화, 아마도 모든 문화의 이상적 도식을 넘어, 에너지의 축적과 궁극적 자유의 이상적 도식을 넘어, 우리는 폭발보다는 차라리 함열을, 에너지 보다는 차라리 변신을, 자유보다는 차라리 의무와 제의적인 도전을, 차라리 영역적인 원을 꿈꾸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동물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침묵한다.

 

나머지

p228 : 섹스와 죽음은 두 개의 반대되는 의미와 웃음을 야기할 수 있는 잘 알려진 주제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세 번째인데 아마도 유일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둘이 회귀성의 수사형에 끌려오듯이 나머지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웃는가? 사람들은 사물들의 회귀성에 대해서 웃는다. 그리고 섹스와 죽음은 특출하게 회귀적인 수사형이다.

 

나선형 시신

p234 : 어떤 공격적인 폭발은 불가능하다. 신음하는 지식과 권력게임의 우화적인, 시뮬라크르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부패를 더 급히 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좌익은 권력을 원한다. 따라서 좌익은 체제가 권력에 종말을 고한 그곳에서 권력을 믿고 권력을 부활시킨다. (235) 대학 종말의 의식을 사회전체의 부패 모델, 모든 사회구조의 와해를 전염하는 모델로서 제공하는 복수화된 시뮬라시옹에 의하여, 조롱과 도전에 의하여 이 부패를 격렬한 과정으로, 격렬한 죽음으로 전환하여야 할 것이다. 이 썩어 가는 사회에서는 죽음이 마침내 휩쓸게 될 것이고, 파업은, 체제와 공모하여 이 죽음을 몰아내려 하겠지만, 기껏해야 이 죽음을 연기해서 느릿한 죽음으로 변하게 하는 데나 성공할 것이다.

 

p239 : 우리는 자본의 단말마적 고뇌가 우리에게 행사한 깊은 미혹에 저항하여, 우리가 실제 그 고통자인 자본에 의한 자기자신의 단말마적 고통의 무대화에 저항하여 싸워야 한다. 자본에게 자기 죽음의 주도권을 주는 것은 그에게 혁명적 모든 특권을 주는 것이다. 가치의 시뮬라크르에 의해, 그리고 자본과 권력의 환영에 의해 포위되어서, 우리는 가치와 상품의 법칙에 의해 포위된 것보다도 더 무장해제되고 무력하다.(240)왜냐하면, 체제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통합할 수 있음이 밝혀졌지만, 우리 생명의 책임이 우리로부터 박탈되어,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의 생명의 내기도 우리로부터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체제의 이러한 최상의 교활함, 자기 죽음이라는 시뮬라크르의 교활함은 모든 가능한 부정성을 흡수하여 제거하여 버렸다. 그 때문에 체제는, 이 죽음 시뮬라크르의 교활함을 통하여 우리를 산 채로 유지한다. 오직 더 우월한 교활함만이 이 시스템의 교활함의 방어를 할 수가 있다. 도전 혹은 상상의 과학, 오직 시뮬라크르들의 형이상상학pataphysics만이 시스템의 시뮬라시옹 전략으로부터, 시스템이 우리를 가둔 죽음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우리를 빠져 나오게 할 수 있다.

 

가치의 마지막 탱고

p241 : 대학의 가치들은(졸업장, 학위 등) 약간은 둥둥 떠다니는 자본들 혹은 유럽 달러들처럼, 계속 번식할 것이고 계속 유통할 것이다. 이 가치들은 참조물의 기준이 없이, 궁극적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이 맴돌 것이다. (242) 현재의 세대들은 여전히 읽기를, 배우기를, 경쟁하기를 꿈꾸고 있지만, 가슴은 거기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고행적인 문화정신은 선체와 화물전체를 난파해버렸다. (243) 체제는 더 이상 졸업장과 학위들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공허 속에서 작동적인 가치들을) 원한다. 그래서 전도된 환상 속에서, 이것을 시발시켰던 자는 바로 우리다.

공부하지 않고 졸업장이 수여되는 것을 보는 학생들의 비탄도 가르치는 사람들의 비탄과 동등하고 또 이것의 보충이다. (244) 현대적인 잡동사니들을 통해서 교수는 그의 권력을 재투여하는 장난이 행해지고 있다. 누구도 이러한 장난에 속지 않는다. 단지, 역할들, 위상들, 책임성들 (...)

바로 이 공모 위에서 (...) 가치와 노력에 종말이 있기 때문에, 가치와 노력의 시뮬라크르에 종말이 없다. 시뮬라시옹의 세계는 전위실제적이고 무한적이다. 어떠한 실제성도 더 이상 여기에 종말을 고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붕괴와 영역의 미끄러짐, 이것은 우리의 가장 광적인 희망으로 남을 것이다.

 

허무주의에 관하여

p245 : 허무주의는 더 이상 세기말적인, 음울하고, 바그너적이며, 스펭글러적이고 음침한 색깔을 띠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오늘날 투명성의 허무주의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앞섰던 역사적 허무주의 형태들보다도 훨씬 근본적이고 훨씬 위기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투명성, 이러한 부유는 해소 불가능한 체계의 투명성, 그리고 이 체계를 분석하겠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론의 누명성이기 때문이다. 신이 죽었을 때는, 아직 이 사실을 알릴 니체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물들의 시뮬라크르된 투명성 앞에서는, 파생실재성 속에서 세상의 물질주의적 혹은 이상주의적인 수행의 가장 앞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것들을 알아볼 이론적이고 비평적인 신이 없다. (246) 허무주의는 기묘한 방식으로 더 이상 파괴 속에서가 아니라 시뮬라시옹과 저지 속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

 

p247 : 남아 있는 모든 것은 사막처럼 황량하고 무관심한 형태들에 대한 미혹, 우리를 제거한 체계의 작동 자체에 대한 미혹이다. 따라서 미혹은 (외양에 집착하였던 유혹과는 반대로, 의미에 집착하였던 변증법적 이성과는 반대로) 훌륭하게 허무주의적인 정열이다. 이것은 사라짐의 세상에 고유한 정열이다. 우리는 모든 사라짐의, 우리들의 사라짐의 형태들에 의하여 미혹되었다. 우수적이고 미혹된, 이것이 비의지적인 투명성의 시기에 일반적인 우리의 상황이다. (248) 이론들도 부유한다.(사실, 허무주의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허무주의는 여전히 절망적인 그러나 한정된 하나의 이론, 종말의 상상, 대파국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p252 : 더 이상 무대가, 사건들이 사실성의 힘을 취하도록 힘을 취하도록 해주는 극소의 환상조차도 없다. 정신적 혹은 정치적인 연대감의 무대가 없다.

이 모든 것은 텔레비전 화면 위에서 제거되기 위하여 온다. 우리는 결과 없는 사건들의 시대에 있다.(그리고 결과 없는 이론들의 시대).

의미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말한다 : 의미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서 의미가 자신의 일시적인 지배를 강요했던 것, 의미가 빛들의 지배를 강요하기 위하여 제거한다고 생각했던 것, 외양들은 죽지 않는 것들이며, 의미 혹은 비-의미의 허무주의에 다치지 않는 것들이다.

바로 여기서 유혹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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