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벤야민의 이름 (1)
옳든 그르든 간에, 내가 보기에 「나치즘과 궁극적 해결책: 표상의 한계들에 대한 검토」에 관한 회의의 개막에 맞춰 발터 벤야민의 한 텍스트, 특히 1921년에 씌어지고 ‘Zur Kritik der Gewalt’라는 제목이 붙은 한 논문을 다루는 게 전혀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따라서 나는 서로 중첩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이유 때문에 여러분에게 벤야민의 이 텍스트에 대한 다소 모험적인 독해를 제시해보기로 했다.
1. 나는 불안스럽고 수수께끼투성이고 극히 다의적인 이 텍스트가 미리 근본적 파괴, 말살, 총체적 무화라는 주제에 신들려 있다고 믿고 있다. 정의는 아닐지라도 법에 대한, 그리고 이 법들 중에서는 적어도 그리스나 ‘계몽주의’적 유형의 자연법 전통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인간의 법들에 대한 파괴나 말살, 무화 말이다.(63)
나는 의도적으로 이 텍스트가 말살적 폭력이라는 주제에 신들려 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우선 그것이, 내가 한번 보여주고 싶은데, 신들림 자체에, 곧 현전이나 부재 또는 재-현의 존재론적 논리를 대체해야 하는-이는 후자가 이 존재론적 논리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이다-유령의 우사 논리에 신들려 있기 때문이다.(64)
벤야민의 이 텍스트는 사람들이 유대적이라고 말하고, 또 자기 스스로 유대적이라고 부르는 한 사상가에 의해 서명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Zur Kritik der Gewalt’는 또한 법을 파괴하는 신성한 폭력(유대적인)과, 법을 창설하고 보존하는 신화적 폭력(그리스적인)을 대립시키는 유대적 관점 속에 기입되어 있기도 하다.
2. 이 논문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논리는 언어에 대한-언어의 기원 및 경험에 대한-한 가지 해석을 가동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악, 곧 치명적 위력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표상의 방식에 의해, 곧 재현적이고 매개적이며, 따라서 기술적이고 효용적이고 기호론적이고 정보적인 차원에 의해 언어에 도래하게 된다.
이는 언어의 뿌리를 뽑아내어 타락시키는, 언어를 원래의 소명에서 멀어지도록 또는 그 밖으로 벗어나도록 실추시키는 가공할 만한 위력이다. 벤야민의 논문은 사건에 대해, 도래하고 있고 표상에 의해 언어에 도달하는 이 악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책임과 유죄, 희생과 해결, 징벌이나 속죄 같은 개념들이 은밀하지만 분명히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 역할은 대부분의 경우 결정 불가능한 것, 다이몬적이고 ‘다이몬적으로 애매한’ 것이라는 양면적 가치가 결합되어 있다.(65)
3. ‘Zur Kritik der Gewalt’는 언어의 도착과 타락인 표상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형식적이고 의회적인 민주주의 정치체계인 대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혁명주의적’ 논문(마르크스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메시아주의적인 스타일에서 혁명주의적인)은 1921년에 반의회주의적이고 반‘꼐몽주의’적인 대세-나치즘은 1920년대와 30년대 초에 말하자면 이 조류의 표면 위로 부상하고, 심지어 ‘파도타기’를 하게 될 것이다-에 속하고 있었다. 벤야민이 찬양하고 서신을 교환했던 칼 슈미트는 이 논문을 칭찬했다.
4. 이 기묘한 논문에서 표상/대의라는 극히 다면적이고 다의적인 문제는 또 다른 관점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이라는 두 가지 폭력을 구분하면서 출발했지만, 한 지점에서 벤야민은 이 중 하나가 다른 하나와 근원적으로 이질적일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소위 정초적 폭력은 때로 보존적 폭력에 의해 ‘표상/대표’되고, 필연적으로 반복-이 단어의 강한 의미에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66)
이 텍스트에서 중첩되는 코드들이 극히 예외적으로 다양하다는 사실, 또는 한정하자면, 단지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신화가 제거된 진정한 역사의 개시를 선포하는 메시아적 혁명의 언어에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의 개시를 선포하는 메시아적 혁명의 언어에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의 언어가 접목되고 있다는 사실은 ‘궁극적 해결책’에 대한 담론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에 관한 벤야민 식 담론의 성격이라는 주제에 관해 우리가 가설을 제기하기 어렵게 만든다.(67)
1. ‘궁극적 해결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이러한 유대-독일적인 ‘정신’의 역사 및 구조에 대한 다면적이고 종결될 수 없는 과감한 분석을 빠뜨릴 수 없다. 독일 식의 어떤 애국주의-대개는 민족주의이지만, 때로는 군국주의기도 하다. 벤야민의 텍스트와 칼 슈미트, 심지어 하이데거의 어떤 텍스트들 사이에 존재하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규정될 수 있는 특정한 친화성은 내가 보기에는 진지하게 질문해봐야 할 문제였다.(69)
이는 단지 의회 민주주의나 심지어 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떄문이 아니라, 계몽주의에 대한, 폴레모스와 전쟁, 폭력 및 언어의 특정한 해석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당시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해체’라는 주제 때문이기도 하다.
2. 또 다른 맥락에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에 관한 콜로퀴엄에서 벤야민의 텍스트를 상이한 관점에서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포리아 자체 속에서 낯선 사건들을 산출해내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텍스트의 자살은 아닐지라도 일종의 텍스트의 자기 파괴와 같은 것으로서, 신의 서명으로서의 자신의 서명의 폭력만을 유산으로 나타나게 한다.
번역하기 매우 어려운 게발트Gewalt라는 관념(‘폭력’을 뜻하지만 또한 우리가 국가 권력Staatsgewalt이라고 할 때처럼 ‘적법한 힘’, 허가된 강제력, 합법적 권력을 뜩하기도 한다)을 다루고 있는 이 텍스트의 마지막 단어들 구절은 한밤중의, 또는 우리가 더 이상 또는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의 밤의 쇼퍼처럼 울려퍼진다.(70)
벤야민은 자신이 비판적인 방식으로 작동시킨 모든 대립(특히 결정 가능한 것과 결정 불가능한 것, 이론적 판단과 혁명적 행동, 정의로운 신성한 폭력과 대립하는 신화적 폭력 내부에서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의 대립 등)을 해체하고 몰락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텍스트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고유한 사건의 독특성 외에는, 자신의 고유한 몰락 외에는 어떤 다른 내용도, 아마도 심지어는 어떤 ‘번역될 수 있는’ 내용도 남아 있지 않은 텍스트의 마지막에서 마지막 문장, 종말론적인 마지막 문장은 서명과 봉인을 명명하고, 이름(발터)과 ‘주권적인 것 die waltebde’이라 불리는 것을 명명한다.(71)
1. 벤야민의 분석은 부르주아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의회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유럽 식 모델과 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법 개념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패전국 독일은 당시 이 위기-이것의 독자성은 파업권이나 총파업 개념(소렐에 준거하거나 준거하지 않는) 같은 몇몇 근대적 특징들로부터도 유래한다-가 극단적으로 집약된 장소였다.(72)
칼 슈미트와 같은 독일 법학자들의 사고에도 동기를 부여했다. “Zur Kritik der Gewalt”가 출간된 직후 벤야민은 보수적인 가톨릭 성향의 대법학자 칼 슈미트로부터 이를 칭찬 하는 편지를 받았는데, 우리는 그가 당시에는 아직 입헌주의자였지만 기이하게도 1933년에 히틀러주의로 개종하며, 특히 벤야민, 레오 슈트라우스, 하이데거와 서신 교환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텍스트는 몇 가지 특징을 통해 포스트소렐적인 네오 마르크스주의에 유대적인 네오 메시아주의의 신비주의를 접목시킨 것으로(또는 그 반대로) 읽힐 수 있ᄃᆞ. “Zur Kritik der Gewalt”와 하이데거 사상의 어떤 전회들 사이의 유비들과 관련해보면 특히 발텐 및 게발트와 같은 모티프를 둘러싼 유비들을 간과할 수 없다.(73)
“Zur Kritik der Gewalt”는 신의폭력 die gottliche Gewalt이라는 주제로 끝을 맺고 있으며, 마지막 문장에서 발터는 이러한 신의 폭력에 대해 우리가 이를 디 발텐데라고 부르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신성한 폭력은--- 주권적 폭력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die gottliche Gewalt--- mag die waltende heissen). “--- 디 발텐데 하이센 die waltende heiben”이 은밀한 봉인, 자신의 서명의 이름으로서의 이 텍스트의 마지막 단어들이다.(74)
벤야민은 하나의 ‘법철학’을 창설하려고까지 한다. 그리고 이 법철학은, 어느 정도까지는 흥미 있고 도전적이고 필연적인 것 같지만, 내 생각으로는 똔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일련의 구분을 통해 조직되는 것 같다.
1. 우선 두 가지 법적 폭력, 법과 관련된 두 가지 폭력 사이의 구분이 존재하는데, 법을 설립하고 정립하는 정초적 폭력(법정립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 곧 법의 영속성과 적용 가능성을 유지하고 확증하고 보장하는 폭력(법보존적 폭력)의 구분이 그것이다.(75)
2. 다음으로 ‘신화적’(암묵적으로는 그리스적이라는 것을 의마하는 듯하다)이라고 불리는 법정초적 폭력과, ‘신적’(암묵적으로는 유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이라고 불리는 법파괴적 폭력의 구분이 존재한다.
3. 마지막으로 모든 신성한 목적 정립의 원리로서의 정의와 모든 신화적인 법정립의 원리로서의 권력 사이의 구분이 존재한다.
“Zur Kritik der Gewalt”라는 제목에서 ‘비판’은 단순히 폭력에 대한 적법한 거부나 비난 같은 부정적 가치 평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판단할 수단을 자기 자신에게 제공하는 판단과 가치 평가, 검토를 의미한다.
비판의 개념은 그것이 판단이라는 형식아래 결정을 함축하고 판단의 권리(법적) 주체에 대한 질문을 함축하는 한에서, 그 자체가 법의 영역과 본질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칸트 전통의 비판 개념과 얼마간 유사한 것이다. 폭력 개념은 단지 법과 정의의 영역이나 윤리적 관계의 영역에서만 가치 평가적인 비판을 허용한다. 자연적이거나 물리적인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비유적으로 지진이나 심지어 육체적 고통과 관련하여 폭력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이, 어떤 정의의 장치/사법 기관 앞에서 판단을 산출할 수 있는 게발트의 경우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76)
폭력의 개념은 법과 정치, 윤리의 상징적 질서, 곧 권위나 권위화의 모든 형식, 적어도 권위에 대한 모든 주장의 상징적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오직 이런 한에서만 이 개념은 비판을 산출할 수 있다.
벤야민이 반론을 제기하는 것처럼, 폭력이(정당하거나 부당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그것이 정당한가 부당한가)은 폭력 그 자체에 대한 판단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준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옥직 폭력의 적용에만 관계하게 된다. 우리는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 아닌지, 윤리적인지 아닌지에 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차원은 자연법 전통에서는 배제되어왔다. 자연법의 옹호자들에게 폭력적 수단에 의존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연적 목적들은 정당하기 때문이다. 폭력적 수단에 의존하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움직이는 인간의 ‘권리’만큼이나 정당하고 정상적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폭력 Gewalt은 ‘자연의 산물 Naturorodukt’이다.(77)
*벤야민은 자연법주의가 폭력을 자연화하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a)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말하고 있는 자연권에 기초한 국가, 이 국가의 시민들은 이성적인 계약이 채결되기 전에 그가 사실상 보유하는 폭력을 합법적으로/권리상으로 행사한다.
b) 프랑스 혁명에서 공포 정치의 이데올로기적 기초.
c) 모종의 다윈주의적 남용 등.
자연법주의에 대립하는 법실증주의적 전통은 법의 역사적 발생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지만, 이 역시 벤야민이 요구하는 비판적 문제 제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자연법주의는 목적들의 정당성을 통해 수단들을 ‘정당화’하려 하고 법실증주의는 수단들의 정당화를 통해 목적들의 정당성을 ‘보증’하려 한다.” 두 전통은 동일한 독단적 전제의 원을 돌고 있는 셈이다. (78)
그리고 정당한 목적들과 정당회된 수단 사이에서 모순이 발생할 때, 그 이율배반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실증주의는 목적들의 무조건성에 대해 맹목적이며, 자연법주의는 수단들의 조건성에 대해 맹목적이다. 하지만 두 전통 모두를 대칭적으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벤야민은 법실증주의 전통에서 법의 역사성이라는 의미를 보존해둔다.
벤야민의 폭력 비판은 두 전통을 넘어서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단순히 법의 영역 및 법적 제도에 대한 내부적 해석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그가 아주 독특한 의미에서 ‘역사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하며, 슈미트가 항상 그렇게 하듯이, 명시적으로 기존의 유럽법에 논의가 한정된다.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유럽법은 개인의 폭력을 금지하고 비난하는데, 이는 그것이 이러저러한 법을 위협하기 때문이 아니라 법질서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법이 게발트의 의미에서, 곧 권위로서의 폭력이라는 의미에서 폭력을 독점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폭력을 독점하려는 법의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독점음 이러저러한 정당하고 합법적인 목적들이 아니라 법 자체를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다.(79)
“‘대’ 범죄자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감탄 어린 매혹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곧 사람들이 은밀한 감탄을 느끼는 것은 이러저러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법에 도전함으로써 법질서 자체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람이다.(80)
벤야민은 계급투쟁에서 파업권이 노동자들에게 보증되며, 그리하여 이들은 국가 이외에 폭력권을 보증받은,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는 국가의(폭력) 독점을 공유하는 유일한 법적 주체라는 점에 주목한다. 어떤 사람들은 파업의 실행, 곧 이러한 활동의 중단, ‘비행위’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서 폭력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 권력은 폭력권을 허락하는 것을 이처럼 정당화한다. 폭력은 고용주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파업은 단지 일의 회피, 곧 노동자가 사용주와 그의 기계들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중지시키면서 단순히 그것들과 낯설게 되는 비폭력적인 거리 두기일 뿐이다. 나중에 브레히트의 친구가 되는 이 사람은 이러한 거리 두기를 ‘낯설게 하기’로 정의한다.
그러나 분명 벤야민은 파업의 비폭력성에 대한 이러한 논거를 믿지 않는다. 파업 중인 노동자들은 작업 재개의 조건을 설정해두고 있으며, 사태의 질서가 변화하지 않는 한 파업을 중단하지 ᄋᆞᆭ을 것이다. 그리하여 폭력을 반대하는 폭력이 있는 것이다. 파업권을 극한까지 밀고 감으로써, 총파업이라는 개념 또는 구호는 법(권리)의 본질을 드러낸다.
국가는 이러한 극단으로의 이행을 제대로 견대낼 수 없다. 국가는 이것이 남용이라고 판단하며, 원래 의도에 대한 오해, 잘못된 해석이 있었다고, 파업권은 ‘그런’의도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국가는 총파업을 불법적인 것으로 비난할 수 있는데, 만약 파업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혁명적인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81)
이러한 상황은 실제로는 우리가 법(권리)과 폭력의 동질성, 곧 권리(법)의 행사로서의 폭력과 폭력의 행사로서의 법(권리)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다. 폭력은 법질서에 외재적이지 않다. 그것은 법의 내부로부터 법을 위협한다. 폭력은 본질적으로는 이러저러한 결과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무력 또는 적나라한 힘을 발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법질서나 정확히 말하면 이 경우는 이러한 폭력권, 예컨대 파업권에 동의해야 했던 국가적인 법질서를 위협하거나 파괴하는 데 있다.
국가는 정초적인 폭력, 곧 법적 관계들을 정당화하고 적법화 할 수 있거나 또는 변혁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자신이 법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폭력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이러한 폭력 비록 그것이 우리의 정의감을 손상시킬 수도 있지만은 변혁되어야 하거나 정초되어야 할 어떤 법의 질서에 이미 소속되어 있다.(82)
오직 이러한 폭력만이, 폭력을 자연적인 힘의 행사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규정하는 ‘폭력의 비판’을 요구할 수 있고 가능하게 할 수 있다. 폭력의 비팦ㄴ, 곧 그에 대한 해석적이고 의미 있는 가치 평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법의 외부에서 발생한 우연한 사건으로 볼 수 없는 어떤 폭력에서 의미를 인지해야 한다. 법을 위협하는 것은 이미 법에, 법의 법에, 법의 기원에 속해 있다.
그리하여 총파업은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현존하는 법질서에 저항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곧 살펴볼 것처럼- 항상 새로운 국가를 정초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새로운 법을 정초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혁명적 상황을 창출하도록 승인받은 권리를 실행하기 때문이다.
좌익적이든 우익적이든 간에 모든 혁명적 상황과 모든 혁명적 담론(1921년부터 독일에는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있지만 당혹스럽게도 서로 유사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며, 벤야민은 자주 이 양자의 중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은 진행 중이거나 도래할 예정인 새로운 법, 새로운 국가의 창설을 주장함으로써 폭력에 의존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도래할 법이 정의감과 충돌할 수도 있는 폭력을 소급적으로, 회고적으로 정당화하게 될 것처럼, 그것의 전미래는 이미 폭력을 정당화한다. 모든 국가의 정초는 우리가 이처럼 혁명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으ㄴ새로운 법을 창설하며, 항상 폭력 속에서 창설한다. 국가들- 작든 크든, 고대적이든 현대적이든, 우리 가까이에서든 멀리서든 간에-의 정초에 자주 수반되는 거대한 학살이나 추방, 축출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항상 그렇다.(83)
벤야민이 제시하는 것처럼 이러한 폭력은 독해 가능하며 심지어 인식 가능하기까지 한데, 왜냐하면 폴레모스나 에리스가 디케의 모든 형태와 의미 작용에 생소하지 않은 것처럼, 이러한 폭력은 법에 생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법 속에서 법을 중지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법을 정초하기 위해 기존의 법을 중단시킨다.
이러한 중지의 계기, 이러한 에포케, 이러한 법정초적이거나 법혁명적인 계기는 법 속에 있는 비법적인 심급(순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법의 역사 전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계기는 항상 발생하지만, 결코 어떤 현전속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이 순간은 법의 정초가 공백 속에서 또는 심연 위에서 정지된 채, 누구에게도 또는 누구 앞에서도 해명할 필요가 없는 순수한 수행적 행위에 맡겨진(정지된)채 남아 있는 순간이다. 이 순수한 수행의 가정된 주체는 더 이상 법 앞에 있지 않을 것이다.(84)
법은 초월적이고 폭력적이면서 비폭력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그것 앞에 – 따라서 그것 이전에 – 있는 이에게만, 항상 그를 벗어나는 현전에서 이루어지는 절대적인 수행적 활동 속에서 법을 생산하고 정초하고 권위를 부여한 이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법은 초월적이고 신하적이며, 따라서 항상 도래하게 될 것이고 항상 약속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내재적이고 유한하며, 따라서 이미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주체’는 이러한 아포리아적인 구조에 미리 사로잡혀 있다.(85)
이제 우리는 가장 강력한 권위를 지닌 기존의 법, 곧 국가의 법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와 유비적인 어떤 권리, 곧 모든 해석적 독해의 ‘총파업’의 가능성, 총파업의 권리가 존재한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적법화하는 권위와 그것의 모든 독해 규범을 중단시킬 권리를 지니고 있으며, 가장 예리하고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적합한 독해들을 통해 이를 해낼 권리를 갖고 있다.
물론 이 독해들은 때로는 또 다른 독해의 질서, 또 다른 국가를 정초하기 위해,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거나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왜냐하면 뒤에서 볼 것처럼 벤야민은 두 종류의 총파업, 곧 하나의 국가 질서를 다른 국가 질서로 대체하게 될 것(정치적 총파업)과 국가를 폐지하게 될 것(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을 구분하기 때문이다-독해 불가능한 것에 근거하기도 한다.(86)
국가를 형성하는 것에게는 독해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모든 창설적 독해에는 총파업, ᄄᆞ라서 혁명적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총파업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각각의 경우에 ᄄᆞ라 무정부주의나 회의주의, 니힐리즘이나 탈정치화, 또는 역으로 전복적인 과잉 정치화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총파업은 대규모의 사람들을 동원하거나 동원 해제할 필요가 없다.(87)
총파업, 단절의 전략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단절의 전략이 변호사나 피고가 법정에 가기 전에, 또는 감옥에서의 단식 파업 중에 어떻게든 이 전략에 관해 ‘협상’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순수하지 않은 것처럼, 또 다른 국가를 재정초하려 하는 정치적 총파업과 국가를 파괴하려 하는 프롤레타리아 총파업 사이에는 결코 순수한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벤야민의 이 대립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해체되어야 할것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해체하며, 이는 심지어 해체의 패러다임들로 보인다.(88)
총파업과 부분적 파업의 엄격한 구분(다시 한번 말해두면 산업 사회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위한 기술적 기준들이 결여되어 있다)이 아니며, 소렐 식의 의미에서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의 엄격한 구분도 아니다. 해체는 또한 이러한 차이적 오염의 사상이며, 이러한 오염의 필연성에서 포착된 사상이기도 하다.(90)
'세미나 발제문 > 신적폭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의 힘』 (2) / 자크 데리다 / 개벽크 / 23. 09. 21. / (1) | 2023.09.10 |
---|---|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발터 벤야민/ 개벽크 / 23. 09. 07./ (0) | 2023.09.07 |
- Total
- Today
- Yesterday
- 개인심리
- 루이 알튀세르
- 안토니오그람시
- 옥중수고이전
- 이탈리아공산당
- 레비스트로스
- 계급투쟁
- 무엇을할것인가
- 마키아벨리
- 헤게모니
- 검은 소
- 생산양식
- 브루스커밍스
- 알튀세르
- 루이알튀세르
- virtù
- 의식과사회
- 신학정치론
- 그람시
- 딘애치슨
- 이데올로기
- 집단심리
- 옥중수고
- 로마사논고
- 생산관계
- 프롤레타리아 독재
- 한국전쟁의기원
- 스피노자
- 야생의사고
- 공화국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