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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이름 (2)
법의 중심 자체에 있는 오염으로서 이 차이 적인 오염을 생각하면서 나는 벤야민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는 뒤에서 다시 다루어보고 싶다-을 뽑아냈다. “법의 중심에 썩어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법 속에는 타락한, 또는 썩어 있는 어떤 것이 있는데, 이는 미리 법을 폐기하거나 파멸시킨다.
우리가 법의 주체에 대해 감히 사형 선고를-특히 사형이 문제가 되고 있을 경우-내릴 수 있다면, 법은 폐기처분 되고 무너지게 되며, 몰락하게 되고 파멸하게 된다. 그리고 벤야민은 바로 사형에 대한 구절에서 법 속의 ‘썩어 있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법 속에는 타락한, 또는 썩어 있는 어떤 것이 있는데, 이는 미리 법을 폐기하거나 파멸시킨다. 우리가 법의 주체에 대해 감히 사형 선고를 특히 사형이 문제가 되고 있을 경우 내릴 수 있다면, 법은 폐기처분되고 무너지게 되며, 몰락하게 되고 파멸하게 된다. 그리고 벤야민은 바로 사형에 대한 구절에서 법 속의 ‘썩어 있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90)
만약 모든 해석 안에 파업 및 파업권과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거기에는 또한 전쟁과 폴레모스도 존재한다. 전쟁은 법에 내재하는 이러한 모순의 또 다른 사례다. 전쟁의 권리가 존재한다(슈미트는 이것이 더 이상 정치의 가능성 자체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릴 것이다) 이러한 권리는 파업권과 동일한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겉보기에 이러한 권리(법적) 주체는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목표들을 추구하는 폭력들(다른 자들이 영토와 재산, 여자들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가 나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죽인다)을 승인하기 위해 전쟁을 선언한다. 그러나 법 외부의 ‘강탈’과 유사한 이러한 전쟁 같은 폭력은 항상 법의 영역 내부에서 일어난다. 이는 그것이 단절하는 것처럼 보이는 법 체계 내부의 무질서다. 여기에서 관계의 단절은 곧 관계다.
전쟁은 단순히 두 가지 이해관계 또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두 가지 힘의 충돌로 환원되지 않는다. 벤야민의 글이 부분에서 괄호 속의 문장은, 전쟁-평화의 쌍에서, 전쟁 역시 비자연적인 현상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평화의 의례라는 점을 강조한다.(91)
전쟁의 의례 이후 치러지는 평화의 의례는 승리한 자가 새로운 법을 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연적 목적을 추구하는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폭력으로 간주되는 전쟁은 실제로는 법정초적인 폭력일 뿐이다. 이러한 또 다른 법의 실정적이고 정립적이며 정초적인 특징이 인정되는 순간부터, 근대법은 개인적 주체에게 폭력에 대한 권리 일체를 거부한다. ‘거대한 범죄’ 앞에서 대중이 느끼는 감탄은 원시 시대에서처럼 자신 안에 입법가나 예언자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개인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두 유형의 폭력(정초적이고 보존적인)의 구분을 추적하거나 정초하고 보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폭력이 법의 기원에 존재한다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중적 폭력,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의 비판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법보존적 폭력에 관해 말하기 위해 벤야민은 상대적으로 근대적인, 방금 전의 총파업의 문제만큼 근대적인 문제들에 몰두한다.
이번에는 병역 의무나 근대 경찰 또는 사형제 폐지 등이 문제다. 1차 세계대전 및 그 후에 열정적으로 전개된 폭력의 비판은 법보존적 폭력의 형태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병역 의미의 활용을 전제하고 있는 근대적 개념으로서 군국주의는 국가 및 국가의 합법적인 목적들을 위한 힘의 강제적인 사용, 힘이나 폭력 사용의 ‘강제’다.(92)
여기서 군사적 폭력은 합법적이며 법을 보존한다. 따라서 이는 평화주의자들과 행동주의자들-벤야민은 노골적으로 이들을 무시한다. 이 ‘웅변’을 토하면서 믿고 있는 것보다는 비판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반군국주의적인 평화주의자들의 비일관성은 이러한 법보존적 폭력이 지니고 있는, 반박의 여지없는 합법적 성격을 인지하지 못한데서 비롯한다.
정초적 폭력을 비판하는 것은 좀더 어려우며 좀더 비적법한데, 왜냐하면 선행하는 어떤 법 제도 앞으로 그것을 소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법을 정초하는 순간 그것은 현존하는 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의 두 항 사이에는 포착 불가능한 혁명적 순간이라는 문제, 곧 어떤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연속성에도 속하지 않지만, 새로운 법의 정초가 그것이 확장하고 근본화하고 변형시키고 은유화하거나 환유화하는 선행하는 법에 속하는 어떤 것에 작용하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문제, 그 예외적 결정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결정의 모습은 여기서는 전쟁이나 총파업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는 또한 오염이기도 하다. 이것은 정초와 보존의 순수하고 단순한 구분을 삭제하거나 뒤섞어버린다. 이는 기원 안에 되풀이 (불)가능성을 기입하는데, 나는 이를 ‘사태’ 자체 안에서, 그리고 벤야민의 텍스트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협상 한복판에서 작동하는 해체라고 부를 것이다.(93)
법은 자신의 폭력 자체 내에서 각 개인의 인격에 존재하는 소위 인간성을 목적으로 인정하고 옹호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하게 도덕적인 폭력의 비판은 무기력한 만큼이나 부당하다. 벤야민이 여기서 어떤 헤겔적 마르크스주의의 흐름-이는 벤야민의 성찰 전반에 걸쳐 현존하고 있다-에 따라 ‘형태 없는 자유’라고 부르는 순전히 추상적인 자유, 공허한 형식의 이름으로 폭력을 비판할 수 없다.
폭력에 대한 이러한 공격들은 그것들이 폭력의 법적 본질에, ‘법질서’에 외재적인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적합성과 유효성을 결여하고 있다. 유효한 비판은 머리와 팔다리를 지니고 있는 법 그 자체의 몸통, 법이 자신의 권력의 비호 아래 채택하고 있는 법률들과 특수한 관행들을 비판해야 한다.(94)
벤야민은 경찰과 사형, 의회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운명에 대한 성찰을 해나가면서 벤야민은 신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법을 파괴하는 신의 정의와 법을 정초하는 신화적 폭력을 구분하게 된다.(95)
법질서는 사형의 가능성에서 자신을 전체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사형을 폐지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장치 중 하나를 손보는 것이 아니라, 법의 원칙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법의 중심에 ‘썩어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이 확증된다.
사형이 증언해야 하는 것은 법이 자연과 반대되는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두 형태의 폭력(보전적 폭력과 정초적 폭력)을 혼합함으로써 좀더 ‘유령적인’ 방식으로 법이 자연에 반대되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근대 경찰 제도다.
마치 두 폭력 중 하나가 다른 것에 신들려 있는 것 같은 ‘유령적 혼합’인 두 개의 이질적인 폭력의 혼합, 이것이 바로 근대 경찰이다. 신체는 그 자체로, 그것 그대로는 결코 현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유령성이 비롯한다.(96)
경찰은 법의 힘이며, 법의 힘을 지니고 있다. 경찰은 수치스러운 것인데, 왜냐하면 경찰의 권위 안에서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의 분리가 제거되기(또는 지양되기)” 때문이다. 경찰 자체를 의미하는 이러한 제거/지양에 따라 경찰은 법이 자신에게 입법의 가능성을 허용할 만큼 비규정적일 때마다 법을 발명하고, 자신을 ‘법정립적인’ 것으로, 입법적인 것으로 만든다. 경찰은 법의 권리를 가로채고, 법을 침탈한다.
비록 법을 공포하지는 않지만, 경찰은 근대의 입법가는 아닐지라도, 근대 속에서의 입법가로 자처한다. 경찰이 존재하는 곳에서, 곧 바로 이곳을 포함한 도처에서 우리는 보존적 폭력과 정초적 폭력이라는 두 가지 폭력을 분간할 수 없으며, 바로 여기에 수치스럽고 모욕적이고 참을 수 없는 애매성이 존재한다.(97)
정초와 보존을 혼합하고 있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더욱더 폭력적이게 되는 경찰의 사례, 이 환영적인 폭력의 징표를 택해보자. 분명 이처럼 폭력을 축적하는 경찰은 단지 경찰일 뿐인 것은 아니다. 경찰은 민간에서 군사적 모델에 따라-여기에서는 파업권이 거부된다. 정의상 경찰은 법의 힘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현전하거나 재현된다. 사회 질서의 보존이 존재하는 곳마다 그것은 현전하며, 때로는 비가시적이지만 항상 효과적이다.(100)
벤야민이 문명국가들에 관해 말할 때, 그가 근대 국가의 경찰에 관해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국가 일반에 관해 말하는 것인지는 알아내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첫 번째 가설 쪽으로 마음이 끌린다.
1. 그는 근대의 폭력의 사례들, 예컨대 총파업의 사례나 사형의 문제를 선택한다. 그는 앞에서 단지 문명국가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또 다른 ‘근대 국가의 제도’, 경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경찰은 다만 그 집행자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되고 있는 법을 경찰 자신이 생산하도록 인도해온 것은 바로 근대의 정치, 기술적 상황에 처한 근대 경찰이다.
2. 경찰의 환영적 몸체는-매우 파악하기 어렵긴 하지만-항상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벤야민은 그 정신, 경찰의 정신은 절대군주제에서보다는 경찰의 폭력이 타락하는 근대 민주주의에서 더 많이 손상을 당한다는 것을 인정한다.(102)
경찰은 유령적 분신의 현전은 어떤 경계도 허용하지 않는다. 법-여기에서는 경찰 그 자체-의 폭력과 관련된 모든 것은 자연적이 아니라 정신적이라는 점을 지적해두는 것은 “Zur Kritik der Gewalt”의 논리와 부합한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을 통해, 사형의 가능성을 통해 자연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생명 너머로 자기 자신을 고양시키는 생명이라는 의미와 함께 유령이라는 의미에서도 정신이 존재한다. 경찰은 이를 입증해준다.
여기서 나는 정신의 발현이라는 주제에 관해 『독일 비애극의 기원』에서 정의된 한 ‘테제’를 상기해보고 싶다. 정신은 권력의 형식 아래 밖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능력은 독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현행적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정신은 독재다. 역으로 폭력으로서의 권력의 본질인 독재는 정신적 본질이다.(103)
민주주의에 포함되는 대신에, 이러한 경찰의 정신, 정신으로서의 경찰의 폭력은 그로부터 퇴락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에서, 폭력으로서 또는 권위의 원칙으로서, 권력으로서 생각될 수 있는 최대한의 퇴락을 경험하게 된다.
민주주의적 권력의 퇴락은 경찰 이외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왜 그런가? 절대 군주제에서 입법권과 행정권은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권위 또는 권력의 폭력은 정상적이며, 자신의 본질과 자신의 이념, 정신에 일치한다. 반면 민주주의에서 폭력은 더 이상 경찰의 정신과 일치 할 수 없다. 전제되어 있는 권력의 분리 때문에, 그것은 비적법한 방식으로 실행되며, 특히 경찰이 법을 적용하는 대신 법을 만들어 낼 때 그렇다.
여기서 벤야민은 산업 민주의 국가들과, 고도의 정보 통신 기술을 이용한 국가들의 군산 복합체의 치안적 현실에 대한 분석 원칙을 지시하고 있다. 절대 군주제에서 치안적 폭력은 아무리 공포스러운 것일지라도, 그 정신에 따라 자기 자신의 본질 그대로,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지만, 민주주의에서 치안적 폭력은 은밀하고 갑작스럽게 법을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고유 원칙을 부정한다.(104)
이것의 두 가지 결과 또는 두 가지 함의는 다음과 같다.
1.민주주의는 법의 퇴락이며, 법의 폭력이나 권위 또는 권력의 퇴락이다.
2.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어떤 민주주의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도래할 것으로, 산출되거나 재산출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벤야민의 논의는 자유 민주주의의 의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전개될 때 혁명적이며,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적이지만, 이는 ‘혁명적’이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에서, 곧 ‘반동적’이라는 뜻, 좀더 순수한 시초적 과거로의 복귀라는 뜻도 포함하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 양면성은 아주 전형적인 것이어서 특히 양차 대전사이에 좌파와 우파의 많은 혁명적 담론들을 길러냈다. 자신을 대신하는 경찰의 폭력을 통제하는 데 무능력한 의회주이ㅡ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폭력의 ‘퇴락’에 대한 비판은 하나의 ‘역사 철학’-법의 역사를 기원 이래 타락해온 역사로 읽고 있는 시원-목적론적 관점, 심지어 시원-종말론적 관점을 채택하는-에 기초하고 있는 폭력의 비판이다.
슈미트 또는 하이데거의 도식들과의 유비는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이 삼각 구도는 어떤 교류-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 세 사상가를 연결하는 서신 교류(슈미트-벤야민, 하이데거-슈미트)다-에 의해 예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문제는 정신과 혁명이다.(105)
벤야민은 방금 전에 원초적 폭력의 퇴락에 대하여, 예컨대 근대 민주주의에서 부패하는 절대 군주제의 치안적 폭력의 퇴락에 대하여 언급했다. 벤야민은 여기에서는 의회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혁명의 타락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 “어떤 법 제도 안에 잠재적으로 현전하고 있는 폭력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면, 그 제도는 타락하고 만다.” 그 첫 번째 사례로 선택된 것이 당시의 의회들이다.(106)
의회주의는 권위의 폭력에, 그리고 이상의 포기에 있다. 그것은 말과 토론, 비폭력적인 토의, 요컨대 자유 민주주의를 작동시킴으로써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실패한다. ‘의회의 타락’에 직면하여 벤야민은 의회주의에 대한 볼셰비키와 생디칼리스트들의 비판이 전반적으로는 적절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파괴적이라는 점을 발견한다.(107)
우리가 비폭력의 영역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대립 앞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다른 개념적 분할이 정치적인 것의 영역 자체에서 폭력과 비폭력의 관계를 한정하게 될 것이다.
소렐이나 마르크스의 전통에서 정치적 총파업-현존하는 국가를 다른 국가로 대체하려고 하기 때문에 폭력적인(이는 예컨대 벤야민의 글이 발표되기 얼마 전에 독일에서 섬광처럼 잠깐 번득였던 총파업이다)-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소렐이 말하듯 “사회학자들, 사회개혁을 애호하는 상류층 인사들,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사고하는 직업을 맡고 있는 지식인들”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할 뿐 아니라 국가를 강화하는 대신 그것을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혁명-을 구분하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108)
벤야민은 진심의 문화와 진실한 예의, 공감, 평화의 사랑, 신뢰, 우정이 사적 세계를 지배할 때, 이 사적 세계에서 비폭력적 갈등의 제거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수단-목적의 관계가 중단되어 있기 때문에 순수 수단들과 관계하는 영역에 진입하는데, 이 순수 수단들은 어떤 식으로든 폭력을 배제한다.
폭력이 사적인 또는 개인적 영역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벤야민의 답변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하다. 곧 비폭력의 가능성은 거짓말, 기만도 처벌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확증된다, 로마법과 고대 게르만법은 이것들에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이는 적어도 사적인 삶이나 개인적 의도에 속하는 어떤 것이 권력과 법, 권위적 폭력의 공간을 벗어나 있음을 확증해준다.
여기서 거짓말은 정치적-법적-치안적 감시법을 벗어나는 사례다. 따라서 거짓말을 위법으로 간주하는 것은 퇴락의 표시가 된다. 국가 권력이 사적인 것의 고유한 영역과 공적인 것의 장 사이의 경계들을 무시할 정도로 담론들의 진실성을 통제하려고 할 때 타락이 발생한다.(109)
근대법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으며, 도덕적 이유들 때문이 아니라 기만이 피해자들 편에서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폭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기만을 비난한다. 곧 그들은 거꾸로 법질서를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파업권을 허가하는 경우와 동일한 매커니즘이다. 항상 최악의 폭력을 다른 폭력으로 제한하는 것이 문제다.
벤야민은 소렐이 말했듯이 한 국가나 새로운 법을 재정초하려고 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에서처럼, 단지 사적인 관계들만이 아니라 일정한 공정 관계들까지도 법질서에서-따라서 거짓말에 대한 처벌법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비폭력의 질서를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10)
“모든 법적 문제의 결정 불가능성”과, 정당한 것과 거짓된 것, 옮음과 그름 사이에서 명료하고 확실하며 규정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생성 중인 언어들에서 발생하는 것 사이에는 유비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를 언어에 관한 벤야민의 다른 텍스트들, 특히 「번역가의 관제」(1923)와, 유명한 1916년 논문 (“Zur Kritik der Gewalt”보다 5년 전에 씌어진)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관하여」에 기초하여 발전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1916년의 텍스트는 원죄를, 웅성거리는 소음들을 야기시키는 매개적인 의사소통 언어로의 타락으로 정의한다. 창조이후의 선악의 문제는 이러한 웅성거리는 소음들에 속하는 문제다. 지식의 나무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하는 자에게 내려진 판결의 징후적 기호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이러한 비범한 아이러니는 우리가 법의 신화적 기원을 인지하게 되는 기호다.”(112)
따라서 여기서 벤야민은 단순한 유비를 넘어서 법의 가능성, 어쨌든 항상 보편화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는 법과 더 이상 연루되어 있지 않은 어떤 목적성, 어떤 목적들의 정당성을 사고하려고 한다. 법의 보편화는 법의 가능성 자체이며, 이는 정의 개념에 분석적으로 기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이해되지 않은 것은 이러한 보편성이 신 그 자신, 곧 이성을 넘어서 그리고 심지어 운명적 폭력을 넘어서 수단의 적법성과 목적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자와 모순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성과 보편성을 넘어서는, 일종의 법의 계몽을 넘어서는 신에 대한 이러한 뜻밖의 준거는 내가 보기에 각 상황의 환원 불가능한 독특성에 대한 준거와 다르지 않다.
‘폭력의 비매개적 기능’, 권위 일반의 비매개적 기능을 납득시키기 위해 벤야민은 다시 한번 마치 하나의 유비가 문제일 뿐이라는 긋이 일상 언어의 사례를 든다. 언어는 매개이기 이전에 발현이고 현현이고 순수한 현전화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분노의 사례를 들고 있는 것이 우연일까? 분노에서 폭력의 분출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보여주는 것,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갖지 않는다.(113)
벤야민의 텍스트의 마지막 구절 가장 수수께끼 같고 가장 매혹적이며 가장 심오한 구절이 시작되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 세게에서 신화적 형식으로 발현되는 신성한 폭력은 힘을 빌려 적용하기보다는, 보상과 처벌을 분배함으로써 현존하는 법을 ‘강제하기’보다는, 법을 정초한다. 이는 분배적이거나 징벌적인 정의가 아니다.
벤야민은 니오베와 아폴로, 아르테미스,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을 환기시키고 있다. 새로운 법을 정초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니오베에게 가해진 폭력은 운명으로부터 도래한다. 이 운명은 불확실하고 애매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선행하는 어떤 탁월한, 또는 초월적인 법에 의해 규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초적인 이 폭력은 ‘고유하게 파괴적인’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예컨대 이것은 니오베의 자식들이 피를 뿌리며 죽게 만드는 순간에 그 어머니의 생명은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뿌려진 피에 대한 암시가 판별적이다. 벤야민이 보기에는 오직 이것만이 그리스 세계의 신화적이고 폭력적인 법의 정초를 유대주의의 신성한 폭력과 구분하여 확인하게 해준다. 이 애매성의 사례들은 더 늘어나서 이 단어는 적어도 네 차례 반복된다.
근본 원칙에서 권력이고 힘이며 권위의 정립인, 따라서 또한 소렐이 제시하듯(여기서 벤야민은 그에 동의하는 듯 보인다) 왕이나 권력가의 특권인-모든 법은 기원에서는 하나의 특권(법에 앞서는 것)이며, 특전이다-이 신화적인 법의 정립에는 ‘다이몬적인’ 애매성이 존재한다.(114)
이 원초적이고 신화적인 순간에는 아직 어떤 분배적 정의도, 어떤 징벌이나 형벌도 존재하지 않으며, ‘응보’가 아니라 ‘속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스 신화의 이러한 폭력에 대해 벤야민은 하나하나의 특징마다 신의 폭력을 대립시킨다. 모든 점에서 볼 때 이 후자는 전자의 대립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신의 폭력은 법을 정초하는 대신 법을 파괴한다. 한계들과 경계들을 성정하는 대신 이것들을 소멸시킨다. 잘못을 저지르게 하고 동시에 속죄해주는 대신 속죄하게 만든다. 위협하는 대신 내리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이것이 본질적인 점인데 –피를 뿌리며 죽게 만드는 대신 피를 흘리지 않고서 죽게 하고 소멸시킨다.(115)
피가 모든 차이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몇가지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벤야민뿐만이 아니라 로젠츠바이크에게도 나타나는 이 피의 사상에 대한 해석은 곤혹 스럽다. 피는 생명, 순수하고 단순한 생명, 생명 자체의 상징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신화적인 법의 폭력은 피흘리게 하기 때문에, 생명체 자체의 생명의 질서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것이 피흘리게 만드는 순수하고 단순한 생명에 맞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실행된다.
이와는 반대로 순수하게 신적인(유대적인) 폭력은 모든 생명에 대해 행사되지만, 이는 생명체를 위해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화적인 법의 폭력은 생명체를 희생시킴으로써 자족하는 반면, 신성한 폭력은 생명체를 위해, 생명체를 구원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킨다. 두 경우 모두 희생이 존재하지만, 피가 요구되는 경우에는 생명체가 존중되지 않는다.
이로부터 벤야민의 독특한 결론이 나온다. “첫번째(신화론적인 법의 정초)는 희생을 요구하며, 두 번째(신의 폭력)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떠맡는다.” 이 신의 폭력은 아마도 재화와 생명, 법과 법의 토대 등을 소멸시킬 테지만, 그러나 이는 결코 생명체의 영혼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다.
가장 파괴적인 신의 폭력이, 법을 넘어서, 판결을 넘어서 생명체에 대한 존중을 명령할 때, “살생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적인 명령으로 남게 된다.(116)
모든 결정 불가능성은 법과 신화적 폭력, 곧 법정초적이고 법보존적인 폭력의 편에 위치해 있고 모여 있고 집적되어 있다. 반대로 모든 결정 가능성은 법을 파괴하는-법을 해체하는이라고 감히 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성한 폭력의 편에 위치해 있다. 법을 파괴하거나 해체하는 신의 폭력의 편에 모든 결정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1. 역사, 정확히 말하면 신화와 대립하는 역사는 이 신의 폭력의 편에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의 역사 ‘철학’이 문제가 되며, 바로 이 때문에 벤야민은 신화의 지배의 종언 이후에, 신화적인 법 형식들의 마법적 원의 파열 이후에, 슈타츠게발트, 곧 국가의 폭력이나 권력 또는 권위의 폐지 이후에 뒤따르게 될 ‘새로운 역사적 시대’에 호소하고 있다. 반대로 예컨대 어떤 슈미트는 이 양자의 혼합을 부인하면서도, 목적론적인 방식으로 양자를 연계시킬 것이다.
2. 만약 모든 결정 가능성이 유대적 전통의 신의 폭력 쪽에 집중되어 있다면, 이 사실은 법의 역사가 보여주는 광경을 확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곧 법의 역사는 결정 불가능성 속에서 스스로를 해체하고 무력해진다. 벤야민이 법정초적이거나 법보존적인 폭력에서 나타나는 ‘상승과 하강의 변증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법보존적 폭력이 지속적으로 ‘적대적인 대항 폭력들의 억압’에 전념해야 하는 동요 상태를 이룬다. 그러나 이 억압-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법적 제도로서의 법은 본질적으로 억압적이다-은 자신이 대표(재현)하는 정초적 폭력을 계속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 순환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119)
왜냐하면 벤야민은 여기서 되풀이 (불)가능성의 법칙, 곧 항상 자신의 기원의 전통을 반복하며, 궁극적으로는 처음부터 반복되고 보존되고 재설립되게끔 운명지어진 어떤 토대를 유지하는 데 불과한 보존적 폭력에서 정초적 폭력이 대표(재현)되게 만드는 되풀이 (불)가능성의 법칙을 암묵적으로나마 인정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정초적 폭력이 보존적 폭력 속에서 ‘대표(재현)된다’고 말한다.
벤야민이 실제로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그는 ‘혁명적 폭력’에 대해 조건법으로 말하고 있다. ‘만약’ 폭력이 법을 넘어서 자신의 지위가 순수하고 직접적인 폭력으로 보증된다는 것을 보게 된다면, 이는 혁명적 폭력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그러나 이 구절은 조건문으로 씌어 있다-인간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폭력의 발현의 이름은 바로 이 혁명적 폭력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20)
신화적 폭력, 곧 법, 곧 역사적으로 결정 가능한 것의 영역에서만 확실성이나 규정적인 인식이 존재할 뿐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비교 불가능한 효과들 속에서가 아니라면, 신의 폭력이 아니라 오직 신화적인 폭력만이 그 자체로 확실하게 인식될 수 있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두 개의 폭력, 두 개의 경쟁적인 게발텐이 존재한다. 한편에는 법과 국가를 넘어서지만, 결정 가능한 인식이 없는(정당하고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등의) 결정과 정의가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는 구조적으로 결정 불가능한 것의 영역, 신화적 법과 국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어떤 영역에서는 결정 가능한 인식과 확실성이 존재한다.(122)
벤야민은 서명하기 직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결국 신화의 정의며, 따라서 법정초적 폭력의 정의다. 신화적 법-법률적 허구라고 할 수도 있다-은 “순수한 신의 폭력의 영원한 형식들”을 ‘서출화했던’것이 될 폭력이다. 신화는 신의 폭력을 법으로 서출화했다. 이는 천민과의 결혼이며 불순한 계보다. 피의 혼합이 아니라 서출, 곧 피흘리게 만들고 피로써 보답하게 만드는 법을 근저에서 창조했던 게 될 서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신화적 폭력, 곧 통치하는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법정립적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법보존적인 폭력, 곧 통치하는 폭력에 이용되는 통치되는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123)
마지막 문장은 이 마지막 전언을 벤야민의 이름인 발터에 아주 가깝게 서명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서명과 징표, 봉인을 명명하며, 이름 ‘디 발텐데’라고 불리는(자신을 ‘디 발텐데’라고 부르는)것을 명명한다.
그러나 누가 서명하는가? 그것은 항상 그렇듯이 신, 전혀 다른자다. 신의 폭력은 모든 이름에 항상 선행했던 게 될 테지만, 또한 모든 이름을 선사했던 게 될 것이다. 신은 이처럼 순수한-그리고 본질상 정당한 폭력의 이름이다. 이외의 다른 폭력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것 이전에는 어떤 폭력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 앞에서 다른 폭력은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한다. 권위와 정의, 권력, 폭력이 그 안에서는 하나를 이룬다.(124)
“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성한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폭력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불릴 수 있을 것이다-주권적 폭력이라고, 비밀스럽게, 스스로를 부른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것이 주권적으로 스스로를 부르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이것을 부른다는 점에서 이것은 주권적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명명한다. 주권자는 이러한 원초적 명명의 폭력적인 위력이다. 절대적 특권, 무한한 특전. 특전은 모든 명명의 조건을 선사한다. 이것은 다른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것은 침묵 속에 스스로를 명명한다. 따라서 이름만이, 이름 이전의 이름의 순수한 명명만이 울려퍼질 뿐이다.(125)
신의 이름 붙이기, 바로 여기에 무한한 역량을 지닌 그의 정의가 존재한다. 이는 서명에서 시작해서 서명에서 끝난다. 서명들 중에서 가장 독특한 것에서, 가장 그럴듯하지 않은 것에서, 주권적인 것에서 또한 가장 비밀스런 곳에서, 주권적이라는 것은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비밀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말하고자 한다). 의미한다(말하고자 한다), 곧 말하자면 부르고 초대하고 명명하고 전달하고 스스로를 전달한다.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곧바로 타자의 이름을 겹쳐놓으면서. 주권적인 힘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한 봉인의 판독 불가능성을 개봉하는 힘을 받아들이는, 그러나 그 힘 자체로 그대로 고이 간직하는 사람에게는.(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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