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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2부 1장, 스피노자, 반오웰:대중들의 공포(pp.148-208)/2025.01.02. 테츠(哲)
테츠(哲) 2025. 1. 2. 21:43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2부 1장 스피노자, 반오웰 : 대중들의 공포(pp.148-208)
중에서 148-170
1장 스피노자, 반오웰 : 대중들의 공포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정치 사상이 아포리아에 빠져 있어 보임에도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사상인지 해명해 보려고 한다.’(148)고 밝히며 스피노자 정치 사상의 난점을 돌파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스피노자는 ‘한 가지 정의’나 ‘다른 경향들을 압도하게 될 한 경향’이 아닌 ‘진정한 해결책이 없는 모순들의 복합체’(148)이자, ‘그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회피할 수 없기에 철학자로서의 스피노자의 특징을 발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사상의 특징적이 모순들’(149)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의 개념들 안에서 사고해야 할 것’과 반대로 답이 정해지지 않은 ‘우리 자신의 탐구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150)를 파악하며 나아갈 것을 강조합니다.
대중의 관점의 양가성
논쟁적인 첫 번째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multitudo’의 개념으로, 이는 번역가들 사이에서 ‘대중 masse’으로 번역되어 온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강조’해오거나 그와 함께 사용된 단어들의 ‘계기적이거나 동시적인 사용을 해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150)는 비판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가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대중의 시대나 군중 및 대중운도의 시대라 불리는 최근의 문제설정과의 대결을 요구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껴 왔다.”(150)고 밝히며 스피노자 어법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의미와 차이들을 고려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는 당시 스피노자의 시대적 상황, ‘혁명의 동요와 폭력의 와중에서 정치적 격변과 절대주의적 근대국가의 형성이 대중들의 운동이라는 문제, 따라서 이 운동의 통제와 활용 또는 예방적인 억압이라는 문제를 출현시킨 시대의 맥락에 전적으로 기입되어 있다.’(150)고 밝히며, 스피노자는 대중을 ‘탐구와 반성, 역사적 분석의 주요 대상’(151)으로 삼아 사유하여 ‘대중운동의 원인 및 그 고유한 논리를 설명하려고 추구하는 매우 보기 드문 이론가들 중 한 사람’(151)이라고 주장합니다. 스피노자의 물티투도의 개념이 정치적․법적 질서의 기초로서 공표되는 것을 넘어서는 ‘상징적인 실정성’(151)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에서 대중,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은 명시적인 이론적 대상이 되는데, 정치적 실천을 이러저러한 방향issue으로 인도하는 기회들을 규정하는 것은 최종 분석에서 볼 때 정세 및 정념적 경제나 체제에 따라 달라지는 대중들의 실존양상들이기 때문이다.(151)
네그리가 표현한 스피노자주의의 ‘야생의 이례성(야생의 별종으로서의 성격)’(151)이라는 표현처럼, ‘국가 그 자체의 관점이 아니고, 인민 또는 민주주의의 관점도 아니며, 정확히 말하면 계급적 관점도 아닌’(152) 것처럼 보이는 스피노자에 대해서 우리는 대중들의 관점이 정치적 관점으로 채택된 것인지 질문해야만 합니다.
스피노자 정치 사상에서 ‘대중들의 공포’는 주격적 소유격의 의미에서는 ‘대중들이 느끼는 공포’이면서, ‘또한 대중들이, 통치 또는 정치적 행동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곧 국가 그 자체로 하여금 느끼게 만드는 공포이기도 하다’(152)는 점에서 목적격적 소유격의 양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대중과 관련된 공포의 요소에서 ‘국가의 구성 또는 개혁이라는 문제’(152)가 생겨나기 때문에 대중에 있어 공포의 문제는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좀더 건설적인 다른 힘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는지’, 아니면 ‘상호 공포가 서로를 부추겨서 결국 사회적 몸체의 해체를 우려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지’(152)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발리바르는 대중과 공포에 대한 두 가지 고찰을 정식화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공포의 동역학’(153)이라는 표현처럼 대중이 느끼는 공포, ‘희망 없이 공포 없고, 공포 없이는 희망도 없다는 명제’처럼 ‘인간의 본질’로서 ‘욕망과 그 최초의 분할로서 기쁨과 슬픔’이라는 욕망의 개념에서 정념적인 삶의 모습에서 설명되는 원리입니다. 정념적인 삶은 개인적 차원에서 ‘기쁨 정념’을 위하거나 또는 집합적 차원에서 ‘대중들의 정신 안에서 마음의 동요를 종결시킬 수 있는’(153) 하나의 경향이나 노력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둘째, ‘정념들의 중화’(153)라는 모형을 거론하며 스피노자가 ‘자연에 일치하는 제도들의 프로그램을 구상’(153)할 때 볼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각 개인의 욕망이 집단의 이익에 대한 합리적 인식에 따라 직접 표현’(154)되면서 정념적 이해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개념의 또 다른 양가성을 조명하며, ‘대중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태도, 입장 자체가 드러내는 양가성’(154)에 대한 도식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윤리학』 4부 37의 두 개의 주석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적혀 있는데, 하나는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고’, ‘인류 전체에게 공통적인 통념들을 지각함으로써 직접 자신을 규제하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도시’(154)의 가설이지만, 이는 ‘순전히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지적 유희에 불과’하며, ‘자연적 원인들 및 신체의 역량의 발전에 관한 스피노자의 분석과 완전히 모순되는 자기제어라는 환상’(155)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양가적으로 다른 ‘적대적인 정념들이 중화된 체제’(155)로서 ‘대중을 제거하는 이러한 중화’의 방식입니다. ‘적대의 중화’의 실천의 방식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적대의 중화가 보편 신앙의 교리들의 언표 자체 및 그 실천적 기능 안에 집중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교리들 자체는 어떻게 사고해야 할까? 상이한 종교적 관점들에 공통적이며, 따라서 상상적 사고에 내재적인 겉포장으로 사고해야 할까?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교리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서로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호소통하고, 그리하여 공존과 상호교류의 조건들을 스스로 생산하는 사람들의 집합적 실천 덕분인가? 또는 반대로, 철학자가 우중과 거리를 두고 이들의 갈등에서 벗어나 과학적 공리들에 기초한 역사적 고증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지성의 관념을 생산한 뒤, 나중에 계몽주의가 설파하는 류의 종교와 정치의 중재 및 이성적인 진보라는 관점에서 국가에게 우중 및 국가 자신들에 대해 이를 부과하도록 제안하는 것이 문제인가?(156-158)
우리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등을 통해서 확인한 그의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운동의 급진적이고 민중적인 형태이든가, 아니면 전루소적이고 전칸트적인 부르주아 자연종교이든가 하는 양자택일’(158)임을 설명하면서, 스피노자의 양자택일적 모습에 담겨있는 아포리아적 의미가 아닌, 다른 것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네덜란드의 민주주의 국가의 위기 형태에 개입하기 위해 철학자들에게 호소하고 공통통념들을 활용하는 방식을 『신학정치론』을 통해서 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견을 제시하며, 스피노자의 공통통념이 가진 성격이 이론적인 것인지, 아니면 실천적인 것인지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음에도, ‘주지주의적인 정의를 실천적으로 변형’(159)시키면서 지적 엘리트주의와 거리를 두었다는 가설을 제시합니다.
가설에서 멈추지만 스피노자의 입장의 난점은 당시의 홀란트 공화국의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대중들 안에서 ‘기초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구성되어야 할 세력’(159)을 찾기 위한 것이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발리바르가 제시하고 있는 스피노자 정치 사상의 양가성에 대한 조명이라는 설명에 대해서, 제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피노자가 자신의 정치 사상을 서술해가는 과정에서 양가적이고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모순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은 신을 호출하고 신학과 윤리에 의존하게 되는 방법이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양가적인 의미 속에서 실존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면서 정치적으로 민주적일 수 있으면서 동시에 종교적 대중들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사랑과 정의로 설명되는 당시대에서는 적합한 도피처였을지도 모릅니다. 아포리아의 성격을 발리바르가 밝히고 있지만, 스피노자는 그 아포리아를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다는 현실적 한계에서 그가 제시한 방식은 적절한 타협점을 도출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의 정치적 타협에 멈추는 것이지는 않았을까요?
정치 사상과 현상이 더욱 복합적인 현재의 시대에서 우리는 좀더 나은 상상을 하고 적합한 개념을 찾아 말해나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양가성 그 너머의 초월적인 사유를 응원할 수 있는 차원의 사유와 활동이 필요할 것입니다. 물론 스피노자가 직접 시대 속에서 모순을 발견하는 사유의 활동을 토대로 우리는 이보다 더 나아가는 사유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지식인의 도움을 얻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인민의 삶에 존재하는 죽음
스피노자의 용어에서 대중들이라는 개념을 물티투도라 언급하면서도, 해당 용어가 『윤리학』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다른 정식들’로 활용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물티투도의 부재의 문제를 관찰하며 『윤리학』의 표현에서 “인간 대중의 문제가 좀더 간접적이거나 좀더 복잡한, 그리고 수적 규정보다 더 본질적인 다른 양상에 따라 현존한다는 점을 의미한다”(161)는 표현처럼 스피노자가 대중을 바라보는 관점의 복합성을 드러내는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이외에도 ‘불구스’ 등의 스피노자의 용어 사용에 대해 ‘논쟁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분석적 의미도 부여’(162)하며 살펴보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용어는 『신학정치론』에 이르러서 물티투도-플레브스(통치자들과 대립하는 인민대중으로 권리상·사실상 열등한 사람들, 163)-불구스(편견을 지닌 사람들, 163) 사이에 연관성이 확립되지만 양가적인 상태에 놓여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물티투도’라는 용어에는 ‘사고를 예속시키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체계, 또는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장치’(163)라 설명합니다.
각각의 개인에게 자연적인 공포를 활용함으로써 군주제적·종교적 미신의 장치는 이 공포를 재생산하고 대중적 현상으로 증폭시키며, 결국 통제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이유 때문에 군주 체제는 인류의 시초의 야만 상태로의 후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정말로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유일한 야만성의 생산이다. 야만무도한자들!(164)
개인들의 자연적 코나투스의 이러한 전도는 광폭한 대중운동 중에 자기 자신의 죽음, 자기 파괴에 대한 욕망에 자신의 신체를 내맡기는 데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자연적 본성이 보존 본능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모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극단적 상태에 대해 스피노자가 참주적 군주정들과 인민 혁명들 사이의 연쇄를 분석하면서 기술하고 있는 죽음의 진정한 원환을 결부시켜야 한다.(164-165)
“혁명은 자신의 자식들을 잡아먹고 복고를 낳고 만다.”(165)는 표현처럼 스피노자가 군주를 제거하는 혁명에 대한 다소 회의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그 상황에 ‘군주와 인민을 죽음의 원환 안에 가두는 정념의 메커니즘’(166)의 장치가 있으며, 이는 홉스식의 ‘각각의 개인에 대한 각각의 개인의 투쟁’(166)과는 ‘대척점’으로 위치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발리바르는 물티투도를 통해 바라보는 스피노자의 정치사상이 ‘추상으로부터 이론과 실천의 구체적 통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탁월한 개념’(198)이라 표현하며 인민의 위치를 탐색합니다. 인민은 물티투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는데, 인민은 국가 안에서 존재하지만 ‘우중’으로 실존하고 있으며 몰락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아포리아적 상태를 마주하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혁명은 본성상 유해하다는 결론’(169)을 내리는데, ‘모든 대중운동은 내적 예속과 동의어이며, 하나의 독재를 다르 독재로 대체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169) 의미에서 국가 안에서 공포와 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합치’, ‘호혜 관계’에 부응하는 ‘집합적 수단, 정치적 실천’은 사실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민주주의는 바람직하지만 무기력하다.”(170)
대중으로의 복귀
스피노자에게 물티투도는 근본 개념으로서 ‘자연권이라는 이론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각각의 정치체제의 조절이라는 실천적 수준에서도 정치적 문제의 모든 측면을 포괄’(170)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근본적인 질문은 국가 안의 대중이 자연권의 권리이자 역량으로 상호작용 하는 양상에서 확인하게 되는 권력의 성격, 즉 ‘권력의 절대성’(171)에 대한 것으로 권력이 절대적일 수 있게 되는 실족적이거나 기능적인 양상에 대중은 근본적인 문제로 다루어지게 됩니다.
홉스와 스피노자는 대중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홉스는 ‘개인주의적인 다중 개념’(172)이라면 로크는 ‘다수의 동의가 전체 또는 만장일치의 결의를 권리상, 사실상으로 대체’(172)하고 있으며, 스피노자는 ‘이 두 요소를 곧바로 결합’(172)하여 국가구성에서 대중을 논의한다고 설명합니다.
홉스에게 다중 개념은 이후에 곧바로 지양되어 버리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스피노자가 함께 사고하려고 하는 두 요소를 홉스는 조심스럽게 분리시킨다. 곧 홉스에서 계약을 정초하는 다중은 대중 개념이 아니라, 항상 이미 해체되어 있고, 미리 수성적인 원자들의 합으로 환원되어 있으며, 계약을 통해 시민사회의 새로운 제도적 관계로 한 사람씩 진입할 수 있는 인민 개념이다.(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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