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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2./오늘날에도 여전히 헤겔주의자가 되는 것은 가능할까?/낭만샘
역사적 사유의 주요한 특징은 ‘모든 것은 변한다.’가 아니라 어떤 불가능성에 대한 완전한 승인에 있다. 즉 역사적 단절 이후에 과거로 돌아가거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계속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355) 개념들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적 분석의 출현과 함께 신화적 사유는 직접성을 잃었으며, 그것을 부활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가짜가 되었다.(356) 그렇다면 헤겔의 사변적 관념론은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적 불가능성의 전형적인 사례가 아닐까?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헤겔 이후의 전통적 형이상학과의 단절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헤겔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헤겔을 재긍정하는 것은 탈-헤겔적 단절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유하거나 행동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하지만 지젝은 여기서 문제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이런 물음을 제기한다. “만약 문제의 단절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면?” 또한 지젝은 그러한 단절은 비록 헤겔에게서 정점에 달한 모습으로 구현된 관념론과의 단절을 표방하고 하지만 헤겔의 사유의 결정적 차원을 무시하고 있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없었던 것처럼 계속 사유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나 마찬가지이라고 주장한다.(367) 지젝이 헤겔의 ‘사변적 사유’를 재주장하는 것은 헤겔 이후의 단절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헤겔의 어떤 차원을 부정함으로써 헤겔 이후의 단절 자체가 지탱되고 있는지를 제시하려는 것이다.(358)
헤겔 대 니체
지젝은 르브륀의 유작인 <변증법의 이면>을 오늘날 헤겔주의자가 되는 것의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시도 중 하나로 제시한다. 르브퀸의 해결책은 니체적인 역사적 서지학을 통하는 것이다. 즉 살아 있는 존재들(생명들)이 사활적 이해에 대한 위협에 대처하는 방법에 근거하고 있는 ‘탁월한 내부-합리적인 어휘적 선택들’을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드러내려면 “변증법의 이면의 베일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헤겔에게 패배의 실제적인 전도는 일어나지 않으며 오직 순수하게 형식적인 전환, 패배 자체를 승리로 제시하려는 관점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니체는 그러한 승리는 가짜이며, 마술사의 싸구려 속임수이며,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데 대한 대가로 주는 아차상이라고 비꼰다. 르브퀸의 니체적 독법에서 헤겔은 일종의 무신론적인 기독교 철학자로 나타난다. 하지만 기독교와 달리 헤겔은 이승에서의 손실에 대해 재보상해 줄 다른 세계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초월성은 절대적으로 내재적이며, 유한한 현실 ‘너머’에 있는 것은 단지 그것의 자기극복의 내재적 과정일 뿐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전형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절대적 부정성’이 바로 그것이다.(363)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속에서 노예가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의 자아의 부정적인 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정성의 긍정적 위대함으로서의 전도 같은 것은 없다. 여기서 유일한 ‘위대함’은 이 부정성 자체뿐이다.(365) 부정성이 제 할 일을 다 한 후에 남는 것이 이상적인(관념적인) 개념적 구조의 파루시아(임재)이다. 니체적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는 긍정적인 아니오가 사라지고 만다. 적수와 아주 기뻐하며 영웅적으로 대면할 때의 아니오, 그리고 자기지양이 아니라 자기 긍정을 목표로 하는 투쟁의 아니오가 그것이다.(366)
투쟁과 화해
‘모든 것은 변한다.’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는 헤겔을 ‘영원한 투쟁’의 철학자로 보는 것인데, 그것은 엥겔스부터 스탈린과 모택동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서 대중화되었다. 삶은 반동과 진보, 신과 구, 과거와 미래 사이의 영원한 갈등이라는 잘 알려진 ‘변증법적’ 개념이 그것이다. ‘진보’쪽에 가담할 것을 촉구하는 이처럼 호전적인 견해는 헤겔에게는 완전히 낯선 것이다.(367) 진정한 적은 맞서 싸우고 있는 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한성이다. 여기서 헤겔의 요지는 외적 장애물(또는 적)에 대한 ‘자기 모순’의 우위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유한하거나 자기정합적이지 않은 것은 우리 행동이 항상 외적 장애물에 의해 좌절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유한하고 비정합적이기 때문이다. 헤겔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하자면, 외부의 적과 싸우면서(부지불식중에) 우리는 자신의 본질과 싸우게 된다.(368) 여기서 헤겔을 니체로부터 분리시키는 거리를 명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즉 니체가 소생시키려는 활기 넘치는 영웅주의의 순진성, 모험의 열정, 투쟁에 전면적으로 뛰어들려는 열정 또는 승리 또는 패배의 열정, 이 모든 것이 부재하는 것이다. 투쟁의 ‘진리’는 오직 패배 속에서만 그리고 패배를 통해서만 나타난다.(369) 이러한 헤겔적 화해를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적 화해를 기만적이라 비판한다. 현실의 적대성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 채 오직 이념 속에서만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은 이런 비판은 헛짚은 것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왜냐하면 헤겔에게는 소외로부터 화해로 이행하려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지각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보여주듯이.(373)
“욕망이라는 것은 대상을 전적으로 부인하며, 그럼으로써 티 없는 자기감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니만큼 또 거기서 얻어지는 만족감은 그대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때 욕망에는 대상의 존립이라는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노동의 경우는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사물이 탕진되고 소멸되는 데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사물의 형성으로 나아간다.”<헤겔 정신현상학 1권>
헤겔에게서 기만적인 것은 끈질기게 지속되는 분열들을 무시하는 ‘거짓 화해’의 기만이 아니다 진짜 기만은 우리에게는 생성의 카오스처럼 보이는 것 속에서 무한한 목표가 이미 실현되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간단히 말해, 궁극적 기만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들의 회중이 이미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귀환인 성령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진짜’ 환생을 고대하는 그리스도 사도들처럼 말이다.(374)
헤겔적 화해는 갈등을 해결하거나 극복하는 적극적인 몸짓이 아니라 실제로는 결코 심각한 갈등이 없었다는 것, 두 적수는 항상 같은 편에 있었다는 소급적 통찰로 작용하는 것이다. 자코뱅의 혁명적 공포 정치도 역사적 교착 상태였음에도 근대적인 합리적 국가에 도달하려면 그것을 통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포정치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불필요하고 파괴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통념에 따르면 오직 오류의 길을 따라서만 최종적인 진리에 이를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길에 따르는 오류들은 단순히 버려야할 것이 아니라 최종적 진리 속에서 ‘지양되어’ 그것의 계기 중 하나로 보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전 단계들은 실제로 불필요하지만 그것들이 그렇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379)
해야 할 이야기
‘헤겔’이라 불리는 질병’에 대한 이런 진단을 어떻게 논박할 수 있을까?(379) 역사적인 사유는 어떻게 그처럼 보편화된 ‘모든 것은 변한다’와 단절할까? 열쇠는 소급성이라는 개념에 들어 있는데, 그것은 헤겔과 마르크스 관계의 핵심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즉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마르크스에게서 헤겔로 돌아가야 하며, 마르크스 자체를 ‘유물론적으로 전복’시켜야 하는 주된 이유이다.(380)
이처럼 복잡한 쟁점에 접근하기 위해 지젝은 순수 과거라는 들뢰즈의 개념을 제시한다. “순수 과거는 모두 과거여야 하지만 또한 어떤 새로운 현재의 발생을 통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살아 있는 시인을 평가할 때는 “그를 죽은 사람들 사이에 놓아야 한다.”는 말로 엘리엇은 들뢰즈의 순수 과거의 정확한 사례를 정식화하고 있다.(383) 보르헤스는 “각각의 작가는 자신의 선도자들을 창조한다. 그의 작품은 미래를 수정하듯이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수정한다.”고 말했다.(384) 헤겔적 소급성의 핵심적인 철학적 함의는 그것이 충분근거율의 지배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오직 과거의 원인들의 총합이 미래의 사건을 규정하는 일직선적 인과성이라는 조건에서만 타당하다. - 소급성은 (과거의, 주어진) 원인들의 집합은 결코 완벽하고 ‘충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이유들은 일직선적인 질서 내부에서 그것들의 효과들에 의해 소급적으로 활성화되기 때문이다.(390)
운명을 바꾸기
예정설은 반동적인 신학적 주제이기는커녕 유물론적 의미 이론의 핵심적 요소이다. 우리가 그것을 잠재성과 현행성을 대립시키는 들뢰즈적 노선을 따라 읽는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390) 그리스도 이전에 우리는 숙명에 의해 규정되고, 죄와 그에 대해 죗값을 치르는 순환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우리의 과거의 죄를 없애준다는 것은 정확히 그의 희생이 우리의 잠재적 과거를 바꾸고, 따라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는 것을 의미한다.(391) 순수 과거가 우리 행위를 위한 초월론적 조건인 반면 우리 행위는 새로운 현실적 현실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소급적으로 이러한 조건 자체를 변화시킨다.(392)
미네르바의 부엉이
지식은 알려진 대상에게는 외적인 반면 의식은 그 자체가 실천적인 것, 대상 자체를 바꾸는 행위이다. 주체적 변형의 본래적 순간은 행위의 순간이 아니라 선언의 순간에 일어난다. 이러한 재귀적 선언의 순간은 모든 발언은 어떤 내용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체가 이 내용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도 함께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402)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사유가 사후에야 존재를 따른다는 헤겔의 통찰이다. 그에 반해 마르크스는 사유의 우위를 다시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행위에서는 사유가 존재에 선행할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헤겔의 모티브에서 헤겔의 관념론적 사변의 은밀한 실증주의에 대한 암시를 본다. 헤겔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놔둔다는 것이다.(403) 헤겔이 계속 고수하는 것은 훨씬 더 심오한 전제, 즉 하루의 사건들 위로 황혼이 내리면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갯짓을 시작하리라는 것이다. 즉 항상 끝에 가서 들려줄 이야기, 선행하는 과정의 의미를 (원하는 만큼 소급적으로, 그리고 우연적으로) 재구성하는 이야기 있다는 것이다.(411)
잠재태 대 잠재성
잠재태의 분명한 사례는 주사위 던지기인데, 그것을 통해 이미 하나의 가능한 사례였다는 것이 실제의 사례가 된다. 이것은 6개의 숫자 중 주사위를 던져 어떤 숫자가 나올 기회를 1/6이라는 선-재하는 어떤 가능한 것이 실현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잠재성은 가능한 것들의 집합을 총체화할 수 없으며, 따라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출현하며, 선-재하는 가능한 것들의 집합에서는 어떤 자리도 찾아볼 수 없는 사례 현행화되는 상황을 가리킨다.(419) 헤겔주의자들에게서 핵심적인 질문은 이렇다. 즉 잠재태와 잠재성 사이의 이러한 구분과 관련해 헤겔은 어디에 서 있는가?(422) 헤겔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는 헤겔을 잠재성이 아니라 잠재태의 철학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헤겔이 잠재태의 철학자 자체라는 증거는 엄청나게 많다. 변증법적 과정이란 잠재태들의 영원한 집합의 시간적 전개 아닌가? 하지만 압도적 증거라는 이러한 신기루는 변증법적 과정의 철저한 소급성을 완전히 고려하는 순간 흩어진다. 즉 생성과정은 그 자체로서는 필연적이지 않으며, 필연성 자체의 생성(점진적이고 우연적인 출현)이 된다.(422)
원환들의 헤겔적 원환
라캉의 말을 빌리면, 진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만약 “정신이 정신적인 것은 오직 자체의 결과로서 일뿐”이라면 이것은 헤겔적 정신에 대한 통상적인 이야기, 즉 정신은 자신에게서 자신을 소외시키며, 그런 다음 자신을 그러한 타자성 속에서 인식하며, 그리하여 그것의 내용을 재전유한다는 이야기는 심히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이다. 헤겔에게 정신이 되돌아가는 자아는 그러한 복귀 운동 자체 속에서 생산되며 복귀 과정이 되돌아가는 것은 그처럼 돌아가는 과정 자체에 의해 생산된다. 본질의 외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본질이 자신을 외화하는 과정은 동시에 그러한 본질 자체를 낳는 과정이다. 즉 ‘외화’는 정확히 자신을 외화하는 본질의 형성과 동일한 것이다. 본질은 소급적으로 자신의 외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실을 통해 자신을 구성한다. -본질은 오직 넓은 만큼만 깊다는, 너무 많이 인용되는 헤겔의 발언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먼저 자신을 외화하고 그런 다음 소외된 실체적 타자성을 재전유하는 주체라는 유사-헤겔적 주제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먼저 자신의 타자성을 정립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선-재하는 주체 같은 것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주체는 타자 속에서의 이러한 소외 과정을 통해 출현한다.(429) 헤겔 이후 단절에는 보다 직접적인 용어로 접근해야 한다. 그렇다. 단절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절 안에서 헤겔은 그것의 ‘전’과 ‘후’ 사이의,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탈형이상학적인 19세기와 20세기가 사상 사이의 ‘사라지는 매개자’이다. 즉 헤겔에게서 무엇인가가 일어나는데, 사유의 독특한 차원 속으로의 돌파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탈형이상학적 사유에 의해 진정한 차원이 지워지고, 보이지 않게 되고 만다. 따라서 왜 헤겔 사상은 보아 일찍 또는 보다 뒤가 아니라 이때 나타났는가? 그것은 고대(전근대) 세계로부터 새로운 (근대)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독특한 역사적 순간에 출현했다. 이러한 중간적인 위치에서 헤겔을 짧은 순간 이전이나 이후에는 보이지 않은 것을 보았다. 오늘날 우리 또한 그와 비슷한 또 다른 이행기에 있는데, 헤겔을 반복할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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