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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 「아미앵에서의 주장」 中, <『자본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맑스주의와 계급투쟁>(pp.57-74)
<『자본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진영은 『자본론』의 이론들을 형이상학적 테제로 치부하면서 자신들의 ‘진부한 이야기들’(57)을 반복하고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착취의 메커니즘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당사자로서 현실에서 겪고 있는 모든 형태의 노동, 임금, 실업의 양상들에서 『자본론』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 ‘계급투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58)를 시도하고 있는 ‘지식노동자’(58)들도 『자본론』의 열렬한 독자입니다. 저는 어떤 위치에서 『자본론』을 읽어 나갔고, 읽고 있는지 생각해보면서 발제를 시작합니다.
두 가지 곤란
『자본론』을 읽어나가는 과정에는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두 가지 곤란함이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그중에서도 정치적인 곤란함을 ‘결정적’(58)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각각의 정치적 위치(정치적 성향이 아닌!)에서 마주하게 되는 곤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처럼 자본주의 착취를 직접 겪지 않는 한, 혁명적 투사라 할지라도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58)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노동자도 혁명적 투사도 아닌 이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선입견’(58)에 지배되고 있으며 이를 변혁시키기 위해 큰 노력과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명료한 상황에서 변화를 위한 과정이 매우 어려운 작업임을 상기하게 합니다.
거기에 이론적인 곤란함으로 이론적인 작업 습관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들은 ‘이론 속으로 전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끈질기고 주의 깊고 참을성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59)한다는 어색함, 그리고 거짓된 ‘사이비 과학이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조작물’(58)에 의해 마주하게 되는 거짓 이론들의 문제들을 해쳐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곤란한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자본론』은 ‘순수이론적인 저작’(59)으로서, 그 이론의 개념들에 의해 서술되는 과정의 추상성과 체계성을 파악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에서 난이도 있는 작업임이 분명합니다.
잉여가치와 초과근무시간
알튀세르는 『자본론』의 제2편<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를 시작으로 1권을 읽고, 1편의 이해를 시작(단지 시작! ㅜㅜ)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1편 <상품과 화폐>먼저 읽다가 접하면서 대부분은 포기하거나 혹은 이해했다고 믿는데 후자의 경우 상태가 더욱 나쁜 것이며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해해야 할 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을 이해했을 공산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60)
알튀세르는 1권의 심장부를 ‘잉여가치 이론’으로 3편과 4편에서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는 계급착취의 현상, 계급투쟁에 있어 매우 결정적인 이론임을 강조합니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일수와 관련된 것으로, 노동자들은 자본가 계급에 투쟁하여 노동 시간을 합법적으로 제한하였지만, 그럼에도 합법적․비합법적으로 노동일을 연장시키려 하는 시도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거기에 정상 임금보다 높은 수준의 임금을 지불하는 ‘초과근무시간’이 ‘매우 비싼 기계들을 24시간 내내 돌리는’(61) 것이자 ‘가능한 빨리 소모’(61)하고 있는 ‘기만적인 외양아래, 노동자들에 대한 추가적인 착취’(61)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어 짧게 사견입니다. 대부분의 언론에서 초과근무에 대해 논하는 논조는 초과근무를 하고 있지만 수당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부당함을 고발하는 경우는 많지만, 초과근무 자체의 기만적인 착취적 메커니즘에 대해 조명하고 정당한 노동과 고용에 대한 관점을 가진 경우는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국내 뉴스기사 검색․분석이 가능한 빅카인즈(bigkinds.or.kr)에서 2020년부터 지금까지의 ‘초과근무’를 키워드로 관계도와 연관어 클라우드를 뉴스 기사에서 추출해 본 결과는 아래와 같았는데, 공무원들의 부정수급이나 부패, 코로나로 인해 변한 초과근무 양상들에 대한 기사들은 확인 가능합니다. 하지만 초과근무 자체에서 오는 일반적인 노동자들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관점을 깊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림1] 빅카인즈 ‘초과근무’ 뉴스 검색결과(키워드 관계도(좌), 연관어 클라우드(우) / 2020년~2023.02.08)
다시 돌아와서 4편의 ‘상대적 잉여가치’는 1-2차 산업에 이르는 형태의 변화(현대적으로는 3차, 4차 산업까지도 봐야겠지요), 기술적 발전에 따라 유래하는 생산성의 증가, 기계의 도입에 의한 시간의 단축과 생산물 증가, 그리고 ‘노동리듬(속도)’(62), ‘생산성 향상에 의한 실업’(62)에 대한 것으로 여기에서도 착취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대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착취의 메커니즘’(62)의 증명, 생산성의 향상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의 증대를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맑스는 노동자의 이런 계급투쟁과 착취에 대항하는 투쟁을 증명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생산성과 계급투쟁
계급투쟁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발견’(62)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노동이 가치대로 지불되고 있다는 ‘부르주아적 신비화’, 그리고 다양한 임금 형태들을 통해 노동자들에게서 계급투쟁 의지를 파괴하려는 ‘함정’(63)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노동자들이 먼저 겪는 임금의 문제, 생활수준의 문제들은 최종적으로 ‘계급투쟁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는 노동 연장-임금 하락의 두 가지 기본적인 자본주의 체계의 착취에 의한 대항이 ‘자본가의 착취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근본적인 두 가지 목표’(63)라는 것에서 그렇습니다.
알튀세르는 계급투쟁의 근본적 원리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생산성 증가 → 임금 향상이라는 논리는 개량주의자들이 지니는 환상으로, 실제 임금 하락을 은폐하려는 경향에 대해 상기하고 임금 하락에 대한, 그러면서 임금 증가를 위한 투쟁을 진행해야 합니다.
2. 노동일 연장과 임금 하락에 대항하는 투쟁은 생산성의 문제가 아닌, ‘경제적 계급투쟁의 문제’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3. 경제 계급투쟁은 착취를 강화하려는 것에 대한 방어적 투쟁으로, 이를 공격적으로 전화(64)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계급투쟁을,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의 우위 없이는 비정치적이고 단순한 경제투쟁으로 이끌릴 위험이 있음을 경계합니다(64). 반면 경제투쟁이 없는 정치투쟁의 우위는 주의주의로 이끌리게 됩니다. 따라서 국내적인 특수성은 염두에 두면서 국제적으로 계급투쟁을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눈덩이’와 학살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들로부터 수탈한 잉여가치를 끊임없이 자본으로 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65) 그렇게 자본주의는 자본을 “끊임없이 ‘눈덩이처럼 증가한다’는 사실”(65), 이렇게 자본이 재생산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이런 재생산의 방식이 ‘제국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자본가는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상호침투’, 식민주의 형태로 “‘세계의 나머지’를 직접 초과착취”하면서 금융자본을 형성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형성한 제국들 사이에서 식민지 전쟁, 제국주의간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은 잠시나마 이러한 제국주의적 양상이 최후국면으로 돌입한 것으로 보이게 했지만, 제국주의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생명과 자본을 위한 학살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8편의 <본원적 축적>에서, 부를 축적했다는 부르주아적 신비화를 폭로하고, ‘대부자’들의 사이에서 막대한 자본이 ‘축적’된 이후 자본주의가 발생하고, 그 축적을 위해 강탈, 약탈, 학살이 이루어져 왔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본국에서는 학살 없이 기능하면서, ‘제3세계’들의 나라에서 여전히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인민들은 스스로 조직하고 무장하고 방어하고 투쟁과 승리를 쟁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전망도 없는 현재, 우리들은 혁명이 아닌 제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방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황금법칙……
알튀세르가 조언하는 『자본론』을 읽는 순서, 그리고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할 부분들, 소개한 입문서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이해도 한결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맑스가 노동자를 위한 언어로 쉽고 명료하게 서술했으나, 과학 이론으로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자세로 과학적인 설명을 하고 있음에서 마주하는 곤혹스러움을 넘어설 수 있는 단계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황금법칙’으로 “노동자들이 과학에 관해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모든 진정으로 과학적인 설명들에 고유한 곤란들을 극복할 수 있다.”(68)는 법칙을 실천하기 위한 우리들의 결심, 아니 ‘자신들의 이야기’임을 발견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맑스주의와 계급투쟁>
알튀세르의 한 가지 견해
우리는 맑스 이후로 과학으로 확립된 그의 과학 이론과 철학은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경제(노동)-정치-이론에서의 투쟁이 나타나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은 대립되는 다른 계급 관점들에 대항하여 이론에 있어서의 하나의 계급 관점을 나타낸다’(69)는 사실, 맑스-레닌주의의 철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관점에서 세계적인 혁명의 전환을 돕는 ‘결정적인 고리’(69)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우리가 『자본론』을 읽으면서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혹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것에 의해 각인되고 침투되었다’(70)는 것을 알게 된다 설명합니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법칙들을 발견하고, 이로 인해 우리들의 사회계급투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계급투쟁을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단순한 결과물로 간주해왔던 왜곡에 대해 지적하며, 사회계급, 계급투쟁은 파생된 결과가 아닌 한 가지 사실임을 강조합니다.
맑스가 그의 책에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를 단 이유는, 부르주아지의 경제주의적 환상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경제와 정치를 분리시킨 부르주아적 환상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정치경제학 전체, 우리들의 ‘생산․유통․자본 분배의 제조건들’(71)에 사회계급의 존재, 그리고 계급투쟁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순수한’ 생산은 없으며 ‘순수한’ 유통도 없고, ‘순수한’ 분배도 없다. 모든 경제현상들은 최종적으로, 다시 말해 그 ‘외관’상으로는 계급관계, 그리고 적대적인 계급관계, 즉 계급투쟁의 관계인 사회적 관계하에서 발생하는 과정들이다.”(71)
‘생산력은 착취관계인 생산관계의 지배하에 있는 노동과정 속에서 실행된다. 노동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임금을 받고, 따라서 착취당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노동력만을 가지고 그것을 팔 수 밖에 없는 임금노동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생산수단을 가지고 그것을 이용하여 그로부터 잉여가치를 끌어내기 위해 노동력을 사는 자본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대적인 계급의 존재는 생산 자체 속에, 생산 자체의 중심 속에, 즉 생산관계 속에 포함되어버린다.’(71-72)
우리는 생산관계의 지배적인 구조들의 상황 속에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존재 조건이 재생산을 통해서 지속되고 있음을 밝혀줍니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자계급에 대해 영원히 계급투쟁을 이끌어가면서 자본주의의 체계를 안정화하고 지속화하고 있습니다.
‘부르주아지는 착취의 물질적․이데올로기적․정치적 조건들을 영속화시키거나 재생산함으로써 이 계급투쟁을 이끌어간다.’(73)
부르주아지는 노동의 생산관계 구조 속에서, 또한 생산 밖에서도 계급투쟁을 이끌어가고 있는데, ‘노동자계급을 굴복시키기 위한 국가의 역할, 국가의 억압장치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정치체제․학교․교회․커뮤니케이션)들의 역할이 개입’(73)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ISA(Ideological State Apparatus)에 대해서는 다음 챕터에서 읽어나가기로 하지요.
우리가 『자본론』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가 노동 착취에 의해 생산양식을 지속하는 구조라는 것을, 계급투쟁에 대한 다른 생각들을 가지게 되면서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의 ‘휴머니즘적인’ 환상(73)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계급투쟁은 자본부의 사회와 함께 시작했고, 자본주의 사회 초기부터 당시 무장해제되어 있던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하여 비길 데 없이 잔혹하게 계급투쟁을 이끌어온 것이 부르주아지이다.’(73-74)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맑스의 이론을 통해 계급투쟁의 동기와 실제를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충분히 숙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튀세르는 인상적인 인용구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마오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처럼. “결코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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