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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하나의 연구를 위한 노트)349-378p. 2022.09.23. 개벽크
pszizek 2022. 9. 23. 20:44
생산 조건의 재생산에 대하여
마르크스가 언급했듯이, 하나의 사회 구성체는 생산을 함과 동시에 생산의 조건들을 재생산하지 못한다면 1년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생산의 근본적 조건은 생산 조건들의 재생산이다.(349)
그렇다면 생산 조건들의 재생산이란 무엇인가?
생산이란 단 하나의 관점, 나아가 단순한 생산적 실천활동의 관점에서 볼 때 뿌리 깊은 명백한 것들(경험주의적 유형의 이데올로기적 명백한 것들)은 우리의 일상적 ‘의식’과 너무도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재생산의 관점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지극히 어렵다.
설명을 단순화하기 위해, 그리고 모든 사회 구성체가 하나의 지배적인 생산 양식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생산 과정이 정해진 생산 관계 속에서, 또 이 생산 관게 아래서 존재하는 생산력을 가동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사회 구성체는 존재하기 위해서 생산을 함과 동시에, 생산을 위한 생산 조건들을 재생산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것이 재생산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생산력 2)기존의 생산 관계
생산 수단의 재생산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2권에서 입증했는 바, 이제부터 (국민 경제 회계 분야에서 일하는 경제 전문가들이나 현대의 ‘거시경제 이론가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은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의 재생산, 즉 생산 수단의 재생산이 보장되지 않고는 생산은 없다는 것이다.(350)
ex) 섬유공장에서 모직물을 생산하고 있는 x라는 자본주의자는 원료와 기계 따위를 ‘재생산’ 해야 한다.(351)
생산력의 재생산
우리는 생산력의 재생산이 아니라 생산 수단의 재생산에 대해 언급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산 수단과 생산력, 즉 노동력의 재생산을 구분짓는 것이 무언인지를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재생산의 물질적 과정의 존재에 대한 어림잡은 감을 얻을 수 있었고 기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고찰로는 완전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처럼 거의 알 수가 없는 중요한 이유는 노동력의 재생산이 결국은 기업 밖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352)
노동력의 재생산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이러한 양적가치(임금)가 오로지 ‘생물학적인’ 최저 임금의 필요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최소 임금(마르크스는 영국인 노동자에겐 맥주가, 프랑스 프롤레타리아에겐 포도주가 필요하다는 점을 주목시켰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최소 임금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또한 지적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최소 임금이 이중적으로 역사적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가 계급이 ‘인정한’ 필요한 것, 노동자 계급에게 역사적으로 필요한 것에 의해 규정되는 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투쟁(이 투쟁은 노동 시간의 증가와 임금의 삭감에 대항하는 이중적 투쟁이다.)에 의해 불가피하게 된 역사적으로 필요한 것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353)
노동력의 다양화된 자질의 그 재생산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보장되는가? 노예제와 농노제 사회 구성체들에서 진행되었던것과는 달리, 노동력의 자질 재생산은 더 이상 ‘현장에서’ 보장되는게 아니라 점점 더 생산의 외부에서, 그러니까 자본주의적 학교 제도와 다른 기관들 및 제도들에 의해 보장되는 경향이 있다.(어떤 목적을 지닌 특별법이 관련되어 있다.)
노동력의 재생산이 노동력의 자질을 요구할 뿐 아니라, 동시에 노동력이 기존 질서의 규범에 복종하는 예속의 재생산, 노동자들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는 예속의 재생산과, 착취와 억압 담당자들이 지배 계급의 지배를 ‘말을 통해’서 보장해 줄 수 있도록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잘 다룰 줄 아는 능력의 재생산을 요구한다고 말하겠다.(354)
달리 말하면, 학교뿐만 아니라 교회와 같은 다른국가 제도들 혹은 군대와 같은 다른 장치들은 ‘전문 지식’을 가르치지만, 지배적 이데올로기에의 예속이나그것을 능란하게 다루는 솜씨를 보장해 주는 형태들로 가르친다. ‘이데올로기의 전문가들’(마르크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생산·착취·억압의 모든 담당자들은 피착취자(프롤레타리아 노동자)이든, 착취자(자본가)이든, 착취의 보조자(간부)이든,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대사제든 자신의 임무를 의식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이 이데올로기에 어떤 명분이 되었든 젖어 들어야 한다.(355)
위의 언급을 통해 우리는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현실의 효과적인 존재를 알아보게 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재생산에 대한 우리의 분석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는 위와 같은 문제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 말하는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한번 커다란 우회를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우회를 위해선 우리는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문제를 다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
마르크스가 모든 사회의 구조가 특수한 결정에 의해 분절되는 ‘수준들’이나 ‘심급들’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말했다. 이 수준들은 다름 아닌 하부 구조 혹은 경제적 토대(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체’)와 상부 구조이다. 상부 구조는 그 자체 두 개의 ‘수준들’ 혹은 ‘심급들’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법률적·정치적인 것(법과 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종교적·도덕적·법률적·정치적 등의 여러 이데올로기들)이다.(356)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형태로 사유 된다.
1) 토대에 대해 상부 구조의 상대적인 자율성이 있다.
2) 토대에 대한 상부 구조의 ‘역방향 작용’이 있다.(357)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 그리고 토대에 대한 상부 구조의 역방향 작용이라는 부수적 용어들로 지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는 바로 재생산에 입각해서 상부 구조의 존재 및 본질이 지닌 핵심을 특징짓는 것을 생각하는 게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본다. 건물의 공간적 은유 개념적 대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 존재를 지시했던 여러 문제들이 밝혀지기 위해선 재생산의 관점에 서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근본적 주장은 재생산의 관점에서만 이 문제들을 제기하는 일(따라서 대답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358)
국가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단호하다. 즉 국가는 <공산당 선언>과 <브뤼메일 18일>에서부터(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고전적 텍스트들에서, 무엇보다도 파리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텍스트들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 억압적 장치로 명료하게 간주되고 있다.
국가는 지배 계급들(19세기의 부르주아 계급과 대지주 ‘계급’)로 하여금 노동자 계급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보장해 노동자 계급을 잉여 가치의 갈취 과정(다시 말해 자본가의 착취)에 예속시키도록 해주는 억압 ‘기계’이다.
국가 장치는 부르주아지와 이들의 제휴자들이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해 전개한 계급 투쟁에서 ‘지배 계급들에 봉사하는’ 집행 및 개입의 억압적 힘으로 국가를 규정하는 바, 진정 국가이며 그것의 근본적 ‘기능’을 진정으로 규정하고 있다.
묘사적 이론에서 단순하게 이론으로
우리가 건물의 은유(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와 관련해 주목했던 것처럼, 국가의 본성에 대한 이와 같은 제시는 아직 부분적으로 묘사적이다.(359)
우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마르크스의 국가 이론이 부분적으로 ‘묘사적’으로 남아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이 우선 무엇보다 의미하는 바는 이 묘사적 ‘이론’이 의심의 여지없이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의 시작 자체이고, 이 시작은 이론의 이후 발전에 있어서 본질, 다시 말해 결정적 원리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360)
사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묘사적 이론이 옳다고 말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그것의 대상에 대해 제시하는 정의를 그것이 관계하는 영역에서 관찰 가능한 막대한 대다수의 사실들을 일치시킬 수 있기 떄문이다. 그러니까 국가를 억압적 국가 장치 안에 존재하는 계급적 국가로 규정하는 정의는 억압의 영역들이 어떤 것이든 억압의 다양한 범주들에서 관찰 가능한 모든 사실들을 명백하게 밝혀 준다.(361)
우리는 이 묘사적 이론을 단순하게 그냥 이론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다시 말해 국가의 메커니즘들을 국가의 작동 쪽에서 보다 전진시켜 이해하기 위해, 국가 장치로 국가를 규정하는 전통적 정의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게 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362)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의 본질
우선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국가(와 그것의 장치 속에서 그것의 존재)는 국가 권력에 따라서만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모든 정치적인 계급 투쟁은 국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의미는 특정 계급이나 계급들의 연합 혹은 계급들의 분파들에 의한 국가 권력의 보유, 다시 말해 국가 권력의 쟁취이나 보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차적인 명시는 우리로 하여금 한편으로 정치적인 계급 투쟁의 목표인 국가 권력과 다른 한편으로 국가 장치를 구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ex) 19세기 프랑스에서 부르주아 ‘혁명들’(1830년, 1848년), 쿠데타들(1958년 12월 2일), 국가의 붕괴들(1870년 제국의 붕괴 1940년 제3공화국의 붕괴), 소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부상(프랑스 1890-95년)
국가 권력과 국가 장치의 이와 같은 구분은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과 <프랑스에서 계급 투쟁> 이후로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에 명료하게 속해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362)
‘마르크스의 국가 이론’을 요약하기 위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전학자들이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했다.
1) 국가는(억압적) 장치이다.
2) 국가 권력과 국가 장치를 구분해야 한다.
3) 계급 투쟁의 목표는 국가 권력과 관계가 있고. 따라서 국가 권력을 보유한 계급들(계급들의 동맹, 혹은 계급 분파들의 동맹)이 그들의 계급적 목표들에 따라 국가 장치를 이용하는 현산과 관련이 있다.
4) 프롤레타리아는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 장치를 파괴하기 위해선 국가 권력을 장악해야 하고, 일차적 단계에선 이 국가 장치를 프롤레타리아의 전혀 다른 국가 장치로 대체해야 하며, 그 다음 단계들에서는 국가의 파괴(국가 권력과 모든 국가 장치의 종말)의 과정인 철저한 과정을 가동시켜야 한다.(363)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영역에서 우리를 앞서 있었지만 자신들의 경험과 방식이 함축하고 있는 결정적 진보를 체계화하지는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이 영역 속으로 조심스럽게 진입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의 경험과 방식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실천의 영역 속에 머물렀다.(363)
국가 이론을 진전 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국가 권력과 국가 장치의 구분뿐 아니라, (억압적) 국가 장치 쪽에 분명히 있지만 그것과 혼동되지 않는 또 다른 현실이다. 우리는 이 현실을 그것의 개념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라 부를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AIE)들이란 무엇인가?
그것들은 (억압적)국가 장치와 혼동되지 않는다. 마르크스 이론에서 국가 장치(AE)는 정부(내각)·행정공무원·군대·경찰·법원·감옥 따위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우리가 이제부터 ‘억압적 국가 장치’라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억압적이란 형용사가 지시하는 것은 문제의 국가 장치가 최소한 극단적인 경우(왜냐하면 예컨대 행정적 억압은 비물리적인 형태들을 띨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을 통해 기능한다’는 사실이다.(364)
- 종교적인 AIE(상이한 여러 교회들의 체제)
교육적인 AIE(공립과 사립의 상이한 ‘학교들’의 제도)
가족적인 AIE
법률적인 AIE
정치적인 AIE(다양한 정당들을 포함하는 정치 제도)
조합적인 AIE
정보의 AIE(언론·라디오-텔레비전 따위)
문화적인 AIE(문화·미술·스포츠 따위),(365)
본질로 들어가보면 AIE들과 (억압적)국가 장치를 구분시켜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 차이이다. 억압적 국가 장치는 ‘폭력을 통해 기능하는’ 반면에,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기능한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국가 장치는 억압적이든 이데올로기적이든, 동시에 폭력과 이데올로기를 통해 ‘기능’하지만, 하나의 매우 중요한 차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과 (억압적)국가 장치를 혼동하는 것을 막아준다.(366)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주로 이데올로기에 따라 작동하지만 부수적으로는 억압을 통해 작동한다. 예컨대 학교와 교회는 제재·배제·선별 등의 적절한 방식들을 통해 선생들과 학생들을 ‘길들인다.’ 또 가족도 그렇고, 문화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검열만을 언급해도 된다.)따위도 마찬가지이다.(367)
그 어떠한 계급도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에 대한 헤게모니를 동시에 행사하지 않고는 국가 권력을 지속적으로 보유할 수 없다. 이에 대한 하나의 사례로 국가 권력을 쟁취한 소련 프롤레타리아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미래와 사회주의로의 이동을 다만 보장토록 하기 위해(무엇보다도) 학교라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혁명시키고자 했던 레닌의 끈질긴 고심이 그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 계급 투쟁, 그것도 흔히 치열한 형태의 계급 투쟁이 노리는 목표일 뿐 아니라 장소일 수 있다는 점이다. 권력을 잡은 계급(혹은 연합 계급들)은 (억압적) 국가 장치에서만큼 AIE들에서 수월하게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368)
지적사항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보면 우리가 제시한 주장이 근거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점에서 분명히 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고전적인 마르크스 이론을 계승하게 된다. 한편으로 국가 권력과 다른 한편으로 국가 장치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덧붙이고자 하는 바는 국가 장치가 두 개의 집단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억압적 국가 장치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을 나타내는 기관들의 집단이다.(369)
생산 관계의 재생산에 대하여
즉 생산 관계의 재생산은 거의 대부분 한편으로는 국가 장치들, 억압적 국가 장치와 다른 한편으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속에서 국가 권력의 행사를 통해 보장된다.
앞에서 언급된 3가지 특질
1) 모든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억압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동시에 작동하며, 그 차이는 (억압적)국가 장치가 주로 억압을 통해 지배적으로 작동하는 데 비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주로 이데올로기를 통해 지배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2) (억압적)국가 장치는 하나의 조직화된 전체를 구성하며 이 전체의 상이한 구성 성분들은 국가 권력을 보유하고 있는 지배 계급들의 정치적 대표자들에 의해 적용된 계급 투쟁 정책의 통일적 지휘 아래 집중화되고 있는 반면에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다양하며, 서로가 별개이고,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며’, 다음과 같은 모순들에 하나의 객관적인 장을 제공할 수 있다.
3) (억압적)국가 장치가 권력을 쥔 계급들의 계급 투쟁 정책을 실현하는 대표자들, 그러니까 권력을 쥔 계급들의 대표자들의 지도 아래 통일되고 집중화된 조직에 의해 보장되는 데 비해, 상이한 여러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사이의 통일성은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인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보장된다.(370)
본질적으로, 억압적 국가 장치의 역할은 궁극적으로 착취 관계인 생산 관계를 재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정치적 조건들을(물리적 혹은 비물리적) 힘을 통해, 억압적 장치로서 보장하는 데 있다. 국가 장치는 많은 부분 그 자신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뿐 아니라(자본주의 국가에는 정치인 가문들, 군인 가문들이 있다.), 특히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 움직이는 정치적 조건들을 (가장 난폭한 물리적 힘에서부터 행정적인 단순한 명령과 금지, 공개적 혹은 암암리의 검열 등에 이르기까지) 억압을 통해 보장한다.(371)
왜 학교 장치는 사실상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들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인가? 어떻게 그것은 작동하는가? 현재로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1) 모든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그 어떤 것이 되었든 모두가 생산 관계,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착취 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동일한 결과에 공헌한다.
2) 그것들 각각 그것에 고유한 방식을 통해 이와 같은 유일한 결과에 공헌한다. 예컨대 정치적 장치는 정치적 국가 이데올로기, 즉 간접적(의회주의적인) 혹은 직접적(국민투표)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개인들을 예속시킨다. 또 정보 장치는 신문 · 라디오 · 텔레비전을 통해서 모든 ‘시민들’의 머릿속에 일상적인 적정량의 민족주의 · 국수주의 · 자유주의 · 도덕주의 등을 각인시킨다. 문화적 장치(국수주의에서 스포츠의 역할은 으뜸이다.)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적 장치는 설교에서나 여타 탄생 · 결혼 · 죽음의 큰 의식 행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3) 이와 같은 연주는 경우에 따라 모순들(이전의 지배 계급들의 잔당들에서 오는 모순들, 프롤레타리아와 이들의 조직들에서 오는 모순들)에 의해 동요되는 유일한 하나의 악곡에 의해 지배된다.
4) 이러한 협력 속에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가 지배적인 역할을 진정으로 수행한다. 학교는 온갖 사회 계급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유치원에서부터 신구의 여러 방법을 통해 수 년 동안, 그들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전문 지식’(프랑스어·산수·자연사·과학·문학) 혹은 단순하게 말해 순수 상태의 지배 이데올로기(도덕·시민 교육·철학)를 주입시킨다. 이 기간 동안 어린아이는 가족이라는 국가 장치와 학교라는 국가 장치 사이에 꼼짝 못한 채 가장 ‘취약하다,’ 16년째쯤 되어서 엄청난 수의 아이들이 ‘생산’의 현장으로 떨어진다. 그들은 노동자와 평범한 농민이 되는 것이다.(376)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의 생산 관계, 다시 말해 피착취자와 착취자 그리고 착취자와 치착취자와의 관계는 특히, 지배 계급 이데올로기의 대대적인 주입 속에 포장된 몇몇 정해진 전문 지식으로 결국 귀결되는 내용을 통해서 재생산된다.(377)
자본주의 체제의 사활이 걸린 이런 결과를 낳는 메커니즘들은 보편적으로 지배적인 학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연적으로 포장되어 있고 은폐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이데올로기는 지배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즉 학교를 이데올로기가 없는 중립적 세계로 표상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형태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378)
교회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역할에서 오늘날 학교에 의해 대체되었다. 학교는 과거에 교회가 가족과 짝을 이루었듯이 가족과 짝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학교(그리고 학교-가족 커플)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이룬다고 생각한다면 이 위기는 정치적 의미를 띠고 있다. 이 국가 장치가 세계적인 계급 투쟁에 의해 그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하나의 생산 양식에서 생산 관계의 재생산하는 데 지배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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