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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의 정치: 한국을 둘러싼 국무부와 육군성의 갈등
1947년 초 새로운 정책과 부처 사이의 대립은 한국 정책의 방향을 결정했고, 그것은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유지됐다. 국무부는 한국의 정치‧전략적 중요성을 역설한 반면 군부는 한국의 군사‧전략적 가치는 없다고 주장, 철수하기를 바랬다. 이런 구도는 1950년 6월까지 계속됐으며, 베트남을 둘러싼 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의견차이는 본질로 인한 것이 아니라 부처의 특권과 예산 문제를 둘러싼 것이었다. 육군성 정보책임자 S.J. 체임벌린은 “소련에게 한국은 소련 육군‧공군이 배치돼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지를 보호할 수 있는 완벽한 외부 방어선이 된다.”고 주장했다. 군부의 패터슨은 미국이 남한에 분단 정부를 수립해 승인하거나 그 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 것을 제시하고, 중국의 내전에서 국민정부에 거액을 지원하는 것이 중요 고려사항이라 했다.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는 것은 국무부와 군부의 교착상태를 해결하려는 수단이었지만 본질적인 차이를 만들지 못했다.
워싱턴의 이승만 로비: “나는 이승만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곤경에 빠졌습니다.”
한국을 봉쇄하기로 한 결정은 이승만이 워싱턴에 있을 때 이뤄졌다.
이승만의 로비 방식은 허트스 계열 신문사 특파원 레이 리처즈에게 월급 외에 달마다 850달러를 주면서 “문사조사기금”을 거쳐 기사를 투고하게 했다. 한국 로비에서 영향력이 컸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굿펠로 대령이었다. 1945년 직접 계획한 이승만의 귀국부터 1945~1946년 남한 단독정부 구상과 사실상 1947년 봉쇄 결정까지, 1949년 38도선 주변 전투와 1950년 전쟁의 발발까지, 미국의 한국 정책에 중요한 변호가 일어날 때마다 반드시 등장한다. 존스태거스를 비롯 해럴드 레이디와 측근 몇사람이 포함된 스태거스 그룹은 수익 높은 한국의 몇 가지 사업에 참여해 이승만과의 교우관계를 이용, 미국인 고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올랐다. 이들은 미국 대사관 안에 또 다른 미국 대사관을 만들었다. 이승만에게 보수도 받으면서 정부 각료보다 더 자주 최고위층에 접근할 수 있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1947년 이승만 로비의 목표는 미국이 남한 단독정부를 되도록 빨리 승인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로버트 패터슨 육군 장관이 자신을 이미 “한국의 대통령”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이승만이 만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존 힐드링 장군으로, 애치슨이 한국 봉쇄정책에 적임자라고 생각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힐드링과의 비밀 회담을 인용하면서 “남한의 독립은 곧 사실로 확정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후 한국에서 이승만의 위상은 높아졌다.
유엔이라는 타협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은 분단된 한국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이 사안을 유엔으로 넘기려는 실질적 속셈은 유엔의 보호아래 한국정책을 맡김으로써 국무부는 비용을 들이지 않은 채 국제협력주의의 장점을 재주장하고, 모스크바와 실제로 협상하지 않으면서 다국 간 공동 정책과 합리성의 인상을 얻음으로써 서울을 현상유지, 미국은 봉쇄를 시행하고 그것을 국제협력주의라고 부를 수 있었다.
유엔에서 승인한다는 확약을 받은 것은 소련 정부가 남한을 침략하는 등의 적극적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미국은 겉으로는 모스크바협상과 신탁통치를 계속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기각한 것이다.” 또한 미국 정책 입안자들은 남한 정부 수립 과정에서 준수하도록 규정한 절차를 일방적으로 종결했다. 이처럼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한 결정은 미국 정부의 결정을 승인한 것이며, 미 점령군의 봉쇄정책을 승인한 것이다.
미국의 유엔을 이용한 결과로 도출될 한국의 정부형태를 하지는 정확하게 간파했다. 통일된 정부가 아니라 남한에만 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좌익이 선거를 거부할 경우 이승만과 그지지 세력이 “새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할 것”이고, 반동적 파시스트 정부라고 부를 체제가 수립될 것이며, 그 결과 “전쟁의 결과로만 남북한의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
1947년 4월 8일제안한 2차 미소공위 요청, 소련은 남한과 북한의 좌익 정당과 단체를 협상에 참가시키도록 요구했다. 반면 미국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월 주한 미군 정보부는 2년에 걸친 공동위원회의 최종결과는 전혀없다고 판단, 정기적 회담을 중단했다. 소련은 “한국인은 인민위원회‧중앙인민위원회‧인민공화국을 스스로 수립했으며 남한의 정치‧경제‧민생 문제에 참여하도록 허럭하지 않는 미국의 조치를 비난했다.
유엔과 1948년 선거
10월 17일 미국은 유엔에 대표의회를 구성할 선거를 감시할 위원회를 설치하라고 요청했다. 11월 13일 한국임시위원단의 설립을 승인했다. 위원단에 대표를 보낸 나라는 중국 국민정부. 캐나다. 호주. 필리핀. 프랑스. 인도. 엘살바도르. 시리아였는데, 인도와 시리아를 빼고는 모두 미국의 동맹국이었으며, 인도는 미국에게서 상당한 금액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극우세력만 임시위원단을 환영했다. 1948년 1월 14일 조병옥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공식 환영 행사를 주관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감시원들의 미행을 받으며, 로비와 회유를 받기도 했다.
호주. 캐나다. 인도 대표는 남한에서만의 선거이므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결론내리고 지시를 기다렸지만 잠정위원회는 남한에서만 선거를 승인했다.
3월 10일 호주대표는 임시위원단의 기능과 선거의 유효성을 부정하는 결의안을 썼다. ”현재 선거는 하나의 정당, 한민당이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남한과 북한 모두 선거를 치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황이며, 유엔 총회를 남한 단독선거에 책임을 지는 위치로 끌어들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패터슨도 이 결의안을 지지했으나 결의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한국 임시위원단은 매우 형식적인 성격과 적은 인원을 지니고, 보호를 받으며 신속히 지방을 순회하며 선거절차를 점검했다.
선거는 치러졌고, 유엔이 승리했으며, 애치슨은 트루먼독트린에 입각한 한국 봉쇄의 첫 경기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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