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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45~1947년 중앙의 정치 상황

12장 결론: 부정된 해방

 

1946년이 끝나갈 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두 개의 한국이 모습을 갖췄다. 해방 뒤 첫해는 정치·사회적 혼돈이었다. 그러나 남북 두 체제가 견고히 자리 잡으면서 해방으로 일어난 풍부하고 창조적인 계획은 무산되고 다양한 세력은 압살됐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해방의 선물이자 도전인 진정한 독립국가를 수립할 기회는 사실상 사라졌다. 일본의 지배를 벗어났지만 소련과 미국의 지배로 넘어가면서 해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458월에 나타났다고 생각한 통일된 공화국은 환상으로 밝혀졌다(543).

이승만이 남한 정치를 장악한 기술은 경이로웠다. 그가 실질적으로 전개한 한 가지 운동은 이승만 운동이었다. 그는 뛰어난 독주자였다. 45년 후반 귀국해 수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모으고 자신을 더 필요로 하는 정치 지망생들 가운데 연합 세력을 뽑았으며, 자기 이익에 따라 수많은 정파를 조정하고 미군정에 자신의 특유한 장점을 팔았다. 이승만은 미국의 마음을 가장 잘 꿰뚫었다. 미국은 그의 정치적 기술과 우익에 대한 장악력, 한국 독립에 일생을 바친 애국자라는 그의 명성을 필요로 했다. 이승만은 애국자라는 권위와 공산주의에 맞서는 확실한 방어벽이라는 두 가지를 제공했다. 그 또한 자신이 남한의 최고 권력자로 떠오를 수 있는(546) 환경을 제공하고 공산주의의 침투로부터 남한을 보호하는 것 때문에 미국을 필요로 했다. 그는 본말을 전도시키는 데 대단히 능숙했다.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의 모든 일에서 고도의 기술을 보여주었다. 그의 또 다른 뛰어난 기술은 인내였다. 46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시도한 좌우합작 시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합작은 실패했지만, 군부와 국무부 안에서 이승만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세력은 사라졌다.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투쟁에서도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승만은 침묵을 지킨 반면 다른 정치 세력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의 정책이 무너지자 하지는 이승만과 한민당에게 의지하게 됐다(547). 워싱턴이나 서울에서 국제협력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정책은 우익의 반대에 부딪혀 무너졌다. 이승만과 연합 세력은 미군정에 긍정적으로 공헌한 것이 거의 없지만 남한에서 실질적인 거부권을 행사한 부정적 음모는 풍부했다(548).

북한은 남한을 기대에 차서 응시하고 남한은 북한을 조심스럽게(553) 바라보며, 소련은 작은 노력으로 많은 열매를 딴 데 만족한 채 주둔했고, 미국은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명예와 위신 그리고 안정된 남한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면서 47년이 밝았다.

전후 미국 정책의 핵심은 공산주의의 활력(554)과 세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국제협력주의자와 일국독점주의자 사이에서 이것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의 문제였다. 둘 모두 봉쇄 정책에서 타협점을 발견했다. 위험도가 낮은 전략으로, 새로운 세계질서에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치는 두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았다. 봉쇄는 국제협력주의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반대자와 지지자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이었다. 봉쇄정책은 상반된 견해를 근본적으로 수용한 데 성공했으며 이런 의견 접근은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46년 초에 이뤄졌다.

한국의 봉쇄 정책에서 하지는 남한을 북한의 공산주의와 국내의 혁명에 대한 방벽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는 방벽을 지켰으며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통제권을 유지하는 것이 태평양 안보의 핵심이며 한국인의 열망보다 우선시해야 한다는 미국 정부 전체가 공유한 기본 정책을 실시하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된 조치를 시행했다. 하지는 냉(555)전이 시작된 초기 국면에 현실적으로 행동한 인물로 평가받게 됐다.

하지와 트루먼은 성격이 매우 비슷했다. 둘 다 루스벨트의 국제협력주의를 거의 따르지 않았으며 전형적인 일국독점주의와 봉쇄 정책을 신봉했다. 삼성조정위원회가 입안한 일본 항복 이후의 한국 정책에는 철저한 토지 개혁과 대일 협력자의 축출, 노동조합의 조직과 개혁 지원 같은 혁명적 내용도 일부 있었지만 미국이나 미국에 협력한 한국인의 이익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런 정책을 옹호한 인물은 점령 정책에서 제외됐다. 정책의 차이는 공산주의의 발호를 막는 데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가 하는 문제로 해결되었다(556).

1949년 국무부에서 한국의 해방에 대한 연구서를 편찬했는데 인공은 공산주의자에게 장악돼 통제되고 있으므로 군부가 우익 세력과 손잡았다고 했으며 그것이 남한의 정치권력이 발전하는 유형을 만들었고 통일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군인들이 신탁통치를 오해한 것을 비난하면서 더 좋은 길은 국제협력주의적 경로하고 주장했다(558). 미국이 인공을 인정한 뒤 다국적 신탁통치를 실시해 한국을 통일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지만 군인들이 실권을 장악해인공과 신탁통치의 장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하지는 매클로이, 조지 케넌, 해리먼 같은 저명한 외교관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국제협력주의자는 좀더 유효한 한국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신탁통치안에는 큰 장점이 하나 있었다. 한국인의 가장 근본적 요구인 통일을 구상한 미국의 유일한 정책이었다(559).

미국 지도자들은 한국에서 추구한 정책에 신념을 가졌다. 그러나 자국의 역사적 경험에 따라 생각이 형성됐기 때문에 한국에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미국인의 견해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한국을 개조할 권리를 가졌으며, 미국의 동기는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은 식민지 유산을 완전히 재건하는데 한국인의 필요와 요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미국이 실패한 본질적 원인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에게 해방 첫해는 가혹한 시련의 도가니가 됐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지배 세력은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560).

한국전쟁의 기원 2부 12장(브루스커밍스24.1.2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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