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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945~1947년 중앙의 정치 상황
11장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북한에서는 해방 뒤 9개월 만에 지주제도가 사라지고 토지는 재분배됐으며 산업이 국유화되고 식민지식 공장시스템을 뿌리 뽑았으며 남녀평등을 확립하는 급진적 개혁이 이뤄졌다. 1년 만에 강력한 대중정당과 초보적인 군대가 조직돼 통일성을 부여했다. 48년 9월 공식적으로 출범했을 때 북한 공산주의 특징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민족주의의 강조, 지도자의 절대적 역할 중시, 포괄적 통일전선, 민족적 색채가 짙은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의 이념적 혼합이었다. 최소한의 유혈만으로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이뤄졌다(489).
1945년 남한과 북한의 전통적 관계가 급격히 역전됐다. 북한은 근대적 산업 관계로 진입함으로써 새로운 생산양식에 기초한 역동적 기반을 사회에 제공했다. 국경 지대에서도 항일 유격전의 지도부가 생겨났다. 결과 북한에 젊고 역동적이며 진보적인 세력이 모여들었다. 북한의 산업적 발전은 새로운 기초에 입각한 근대 국가의 출현을 자극했다. 북한에서의 관리와 계획의 필요, 산업과 연관된 통신과 교통의 총체적 조직, 노동력과 물자의 안정적 공급의 필요성은 국가의 기능을 요구했다(490).
식민지 체제의 해체는 치밀하게 조직되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정치체제를 북한에 남겼고 즉시 각 분야에 배어있는 식민지적 왜곡을 재편하고 개혁했다.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 서구의 연구자가 없다는 사실은 현재 서구의 역사 서술과 전후 북한의 현실 사이에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견해차가 나타난 까닭 중 다음 사항은 특히 중요하다(491).
1 | 소련에 의해 혁명이 진행됐기 때문에 스탈린주의 사회주의의 폐해가 이 시기 북한 특징이다. |
2 | 서구의 역사 서술은 남한을 옹호했기 때문에 문헌들이 편견을 갖게 되었다. |
3 | 북한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솔직하고 철저하게 서술하지 못해 학술적 가치가 떨어진다. |
4 | 자유민주주의적 노선이 식민지 이후의 발전 방법이라고 여긴 미국인에게 제3세계의 혁명은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
5 | 한국의 혁명가는 아무도 서구와 연관되지 않았다. 그래서 기존 지식을 버리고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
소련의 점령
소련은 일본군과 신속하고 광범한 교전을 벌여 군사·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 소련은 부산까지 내려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소련의 온건한 태도의 배경으로 (1) 한반도 절반이 소련의 안전을 보장한다면 쓸데없이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고 (2) 급격한 일본의 패망은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관련된 소련의 계산을 틀어지게 만들었다. 종전이 급속히 이뤄졌을 때 소련의 한국 정책은 대체로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고 미국의 남한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소련의 국내중심주의와 동유럽에 초점을 맞춘 외교 정책이 전개된 기간이기에 한국은 뒷전이 됐다. 소련은 만주나 한국을 완전한 위성국으로 만들 재원도 의지도 없었다. 만주를 포기하고 더 많은 자치를 북한에 허용했다. 기본 목표는 한국이 소련 극동 지역을 공격하는 기지가 다시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한은 행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493).
만주와 한국을 장악한 소련은 광대한 내륙지역으로 뻗어갔지만 이를 지원할 산업과 농업 기반이 없었다. 소련이 중국과 한국에만 초점을 맞춘 근본 원인은 이것이었다. 소련은 한국에 진입하면서 준비가 부족했다. 또 북한의 일본인은 소련에 전혀 협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장·탄광·은행·공식 기록 등을 파괴했다(494).
8월 25일 평양의 소련군 사령부는 지역 건준 지부가 총독부의 권한을 인수하는 것을 허락하고 일본인의 주요 재산을 즉시 국유화했다(495). 소련은 북한에 일정한 종류의 사회주의적 정권을 수립하려고 계획했다. 소련에 거주한 다수의 한국인을 데리고 들어왔으며 그 일부는 소련 공산당원이었다. 인민위원회의 확대는 북한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편리한 대중적 지역 기반을 제공했으며 9월 중순 무렵 지방 인민위원회를 이용해 업무를 추진하고 식민지 유산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북한 대중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점령 초기 심각한 오점을 남겼다.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강간과 약탈을 자행했는데(496) 소련군의 행동은 거의 통제되지 않았으며 북한에서 추진한 소련의 노력에 악영향을 끼쳤다. 소련이 만주 공장을 해체해서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으나 몇 사례를 빼고 증거는 없다. 철거는 일본인이 자행한 파괴에 기초했다. 이 시대 서구의 저작은 대체로 소련이 북한에 저지른 약탈을 강조하고 인종적으로 차별했다고 서술한다. 공정하려면 미국인은 나았는지 물어야 한다(497).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어디나 있었다. 미군 수뇌부부터 분명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올름스테드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인에게 관심을 가진 미군은 5% 정도였다. 소련군의 수치는 15% 정도로 추정됐다. 소련인이 한국인을 하인으로 고용한 사실은 찾지 못했다.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미국인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소련인과 한국인의 관계는 대체로 다정했던 반면 농촌의 한국인은 미국인에게 “무뚝뚝하고 무례하며 차가웠다”(498).
하의상달의 정치
8.22. 소련은 평남 건준과 평양시 건준을 병합했다. 평양 건준 구성원이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정치범이었는데 새 조직을 인민정치위원회라 불렸다. 조만식은 계속 위원장을 맡았고 오유선과 현준혁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현준혁은 30년대 초 좌익의 항일 시위를 이끈 학생 지도자였으며 남한의 허헌이나 이강국 등과 비슷하게 단순한 좌익이었다. 8월 말 인민위원회는 북한 전역에서 나타났는데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균형을 이뤘다. 소련은 좌익에게 동등한 지위를 확보해주었다. 소련이 각 도 인민위원회를 지배하거나 조종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45년 12월 소련은 군정을 시작하지 않았고 민정 담당관도 없었으며 중앙정부를 수립하지 않았다. 미국 정보기관은 소련이 ‘북한이 서울의 중앙정권에 다시 복속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했다(500).
45년 내내 위원회들이 서울을 정치의 중심으로 계속 인정하고 온건한 민족주의자를 포용했다. 조만식의 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즉시 승인하고 9.6. 그 휘하에 들어갔다. 북한에서는 북조선 5도행정국을 설치했지만 중앙정부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실질적인 정치적 중심은 아니었다. 그 보호 아래 실질적인 권력은 각 도 인민위원회가 행사했다(501).
46년 4월 인민위원회 구성 |
도 인민위원회 위원 45~47명, 직원 315~423명 군 인민위원회 위원 15~17명, 직원 25명 시 인민위원회 위원 25~27명 면 인민위원회 위원 7~9명, 부서 5개 |
해방 뒤 6개월 동안 정책이 지역에서 상부로 스며든 정도는 다양한 지방 신문에서 나타난다. 신문들은 교육·의료·사법·삼림 관리 등과 관련된 새로운 정책을 상세히 보도했다. 도의 치안을 맡은(502) 보안대는 “10개 항목의 지침”을 받았는데 인민에게 친절하고 규율 잡힌 사회생활을 보였고 미국 정보기관은 보안대가 유일한 경찰이라고 보고했다.
10월 중순 부유한 지주는 추방됐고 폭력적으로 제거되었다. 식민지 시대 고관 친일 인사는 해방과 함께 재빨리 남쪽으로 피신했다. 해방 뒤 북한에서 혁명이 큰 유혈 사태 없이 신속히 이뤄진 부분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인민위원회가 모든 수준의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광장을 제공했고, 항일 경력에서 기본적인 정통성을 가진 지도자들이 이끌었다(503).
소련은 미국과 완전히 상반된 정책을 따랐다. 소련은 한국인에게 재량권을 주고 뒤로 물러났다. 해방 뒤 몇 달 동안 북한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계급 구조가 완전히 역전됐다(504).
상명하달의 정치
인민위원회의 구조는 세포 조직의 모습을 띠었기 때문에 명령 체계와 규율있는 위계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다. 북한 지도부는 중국과 소련 혁명을 모두 경험했으며 해방된 한국에서 자발적 농민 봉기가 시작돼 자신들의 눈앞에서 터져나올 것 같은 상황과 마주쳤다. 그 결과 지도부는 중앙과 주변의 요구를 결합하고 스탈린의 상명하달 방식과 마오쩌둥의 대중노선을 혼합한 이념을 구현해야 했다(505).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를 섞은 독특한 사회주의, 한국적 사회주의가 나타나게 됐는데 이런 혼합을 만든 핵심 인물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의 집권
10월 중순 김일성은 외국군 사령관에 의해 자기 동포들에게 거창하게 소개됐다. 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북한의 지도자로 임명됐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김일성도 지지자들에게 신격화되고 성인으로 떠받들어졌다(506). 김일성은 소규모 유격대를 이끌고 여기저기서 비교적 사소한 항일 투쟁을 전개했지만 소련이 그를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하면서 결정적으로 부각됐다(507).
1931년 이후 공산주의 운동에는 일관된 중앙 지도부가 없었다. 김일성보다 규모가 크거나 활발하게 일본에 맞서 싸운 민족주의나 공산주의 세력은 없었다. 충칭의 광복군은 45년 600명 정도였지만 대부분 기초적인 군사 훈련이나 전투 능력밖에 갖추지 못한 학생·지식인·정치가로 구성됐다. 김일성은 휘하에 수백 명의 무장 병력을 거느렸다. 그 밖의 한국인 망명 지도자들은 무정과 옌안파를 빼고는 홀로 귀국하거나 무장이 해제된 채 가까운 지지자들과 함께 돌아왔다. 이것은 김일성의 가장 중요한 이점이었다(508).
김일성이 소련에 있던 기간은 30년대 중국 공산유격대와 함께 참전한 기간보다 상당히 짧은데 그동안 그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김일성이 북한에서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자신의 선택이기도 했다. (1) 그의 항일 경력은 모든 세력에게 알려진 상태였다. (2) 그는 체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변절하지 않았다. (3) 자신이 통제하는 무장 세력을 거느렸다. (4) 정열적이고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대중의 호응을 받을 수 있도록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융합했다. 당시 33세였는데 아버지 세대의 실패를 경멸했던 신세대를 대표했다. 그 결과 세대 사이의 분열은 남북을 분단시킨 여러 요소에 추가됐다(510).
김일성은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보다 좀더 민족주의적이었으며 비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서도 그렇게 인정받았다. 1월 초 신탁통치 논란 이전까지 소련이나 한국 최고 지도부 모두 북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관료 조직은 도 단위로 기능했고 도청 소재지의 인민위원회가 수뇌부를 형성했다. 경찰력은 인민위원회와 함께 출범한 치안 유지 부대가 구성했다. 여러 정치 기구는 서울을 나라의 중심으로 계속 인정했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논란은 이런 분권적 체제를 끝냈다. 2월 초 북한 단독 행정 기구의 기초가 드러나고 곧 근본적 사회 개혁이 추진됐으며 북한의 군사 기구가 출범했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합도 신탁통치 문제로 깨졌으며 온건한 민족주의자는 계속 세력을 잃었다(512).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은 필연적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순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한이 먼저 움직였다.
북한의 중앙집권화
북한 중앙집권화는 45년 12월 17일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지도자로 취임하면서 시작됐다. 단독정부 수립 결정은 아니며 강력한 당 중앙의 출현을 의미했고 중앙집권화의 중심 기구가 됐다(513). 12.17. 회의는 한국 공산주의가 발전했기 때문에 중요했다. 김일성의 연설을 관통한 세 주제는 지도자·조직·대중노선으로 지금까지 북한은 거기서 떠나지 않고 있다. 이 시점부터 두 개의 중앙이 존재했으며 북쪽이 중앙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기존 공산주의자들의 격렬한 논쟁을(514) 불러왔으며 전평 같은 전국적 좌익 조직은 남한과 북한의 활동을 분리시킬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이 거느린 공산주의자들은 헌신적 지지자로 구성된 핵심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한 뒤 그 핵심이 해방된 한국의 정치가 만들어 놓은 산만한 상황을 지배할 때까지 끝없이 확장하는 동심원 형태로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15).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월 미소공위의 첫 회담 후 남한에서 모스크바협정을 따르지 않기로 한 움직임이 분명해진 뒤 결성됐다. 소련은 북한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조만식의 지도력을 희생시키면서 모스크바협정에 한국인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신탁통치”라는 용어는 “후견”으로 표현됐다. 모스크바협정에 불안을 느낀 한(516)국인 사이에서 폭넓은 공개 토론이 이뤄진 뒤 소련과 북한 지도부는 미군정이 협정을 이행하지 않는 대신 대부분 반탁 우익 인사로 구성된 대표민주위원을 남한의 협의 기구로 제시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민위원회 조직은 자발성과 범위에서 독특했지만, 수평적이고 누층적이라는 약점을 가졌다. 남한의 인민위원회는 중앙집권적이고 서열화된 조직의 강력한 탄압을 견디지 못했다. 중앙의 확고한 의지는 북한 체제가 존속하는 데 필수였다. 즉 북한에서는 강력한 국가가 사회 변혁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사회에 주장해야 했다. 남한에서는 강력한 중앙 관료 체제가 기존 지배층의 사회 지배를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데 이용됐다. 둘 모두 중앙은 다양한 창조적 정치 활동을 끝장냈다(517).
한국인은 근거지에서 대중을 조직한 경험이 없었다. 볼셰비키처럼 기존 행정 기구를 탈취해 이용하지도 않았다. 한국에는 한국인이 한국의 특성에서 이끌어 낸 혁명이 필요했다. 첫 임무는 인민위원회의 행정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북한 정권은 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인민위원회의 구조 위에 건설되었다. 평남 시·군 인민위원회 간부들은 63시간의 조직활동, 21시간의 일반적 지도방법, 6시간의 시국 문제를 학습했다. 지도자들은 도청 소재지와 평양으로 가서 지도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중앙은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을 인민위원회에서 제거할 수많은 기회를 가졌다(518)
대부분 문맹이던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의 조합원은 단기학교와 야간학교에 들어가 읽기·쓰기·산수와 집중적인 정치 학습을 받았다. 46년 5월 전평 북한지부는 서울의 중앙 조직에서 독립했다. 전국적 조직이 다양한 계기로 분리된 것은 북한에서 노동자계급의 강세 및 농민의 약세와 관련된 것으로 북한에는 산업노동자계급이 있었지만 남한의 상황은 달랐고 대부분 소작농이었다.
경찰의 역할은 치안대·보안대·적위대·민위대 등이 했다. 일제강점기 경찰은 대부분 쫓겨났다. 새로운 지방경찰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었다(519). 4월 말 중앙은 전국적 보안대 조직 내부에 적절한 지휘 계통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적절한 인원을 배정한 것은 중앙이지만, 각 도의 실질적인 임명과 배치는 해당 인민위원회가 맡았다. 그 결과 주민의 호응을 얻고 지방에 뿌리내린 경찰이 나타났다. 북한 경찰은 “일제의 폭정-고문에 따른 자백-의 상징”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
북한에서 나타난 첫 정치군사학교는 45년 11월 창설된 평양학원이다. 46년 7월 장교 훈련학교가 설립되고 46년 8월 정규 국가보안부대 훈련소가 문을 열면서 첫 정규 부대가 배출됐다. 45년 평양육군사관학교는 김책이 교장을 맡아 보(521)안대 장교를 양성했다. 보안대와 철도경찰이 북한 인민군의 기반이 됐지만 46년 말 이전에는 북한에서 군대를 창설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미국 역사 자료는 북한군의 실질적 창건을 46년 9월로 보고 있다. 해방 전 항일 무장 단체는 김일성이 이끈 세력과 무정·김두봉 등이 지휘한 옌안파였다. 북한군은 이 두 세력을 병합해 태어났다. 김책의 지휘 아래 평안남도에 설치한 소규모 보안대 사관학교와 최용건이 이끈 5도행정국 및 후신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산하의 보안국과 연합해 자신들의 무장 단체를 창설했다(522).
팔로군과 함께 싸운 한국인 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해방 전 300명 정도였으며 8.15. 이후 만주를 거쳐 신병을 모집하면서 귀국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26세의 김강으로 팔로군에서 젊은 시절 대부분을 보냈고, 김호는 36세로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 병력은 국경에서 소련군에게 가로막혔는데 북한으로 가려면 무장을 해제해야 했고 보병은 대부분 만주로 돌아갔다. 소련이 무장해제시킨 것은 미국과 맺은 협정을 철저히 따른 결과였다. 조선의용군 무장 병력은 만주로 돌아와 팔로군과 함께 싸웠으며 몇 년 동안 머물면서 병력을 늘리고 전투 경험을 쌓았다. 49년 중국 내전이 끝났을 때 수 만명의 한국인 정예부대는 조선인민군의 주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북한군이 두 어머니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일성의 유격부대와 예안파 부대다. 하나는 북한에서 보안대와 철도경찰을 거쳐 성장한 반면 다른 하나는 중국 내전을 겪으면서 숙련되었다(523).
소련과 미국 모두 45년 가을부터 한국에서 군대 창설을 시작했지만, 소련의 정책은 미·소의 협정을 준수해 북한 영역 안에서만 이뤄졌다. 미군정 사령부는 국내의 치안 문제 및 북한과 만주 모두 조선의용군이 있다는 것 때문에 남한 영역 안에서만 군대를 창설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중 국경을 존중해야 하는 경계선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김일성 세력과 조선의용군 모두 소련이 아니라 중국과 만주에서 전개한 항일 투쟁의 산물이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소련은 성장을 촉진했지만 그것은 한국인의 군대였다(524).
사회혁명
북한은 사회를 재편하는 근본적 개혁을 추진했는데 46년 이런 개혁이 이뤄진 뒤 한반도 통일은 혁명이나 반혁명을 거쳐야만 달성될 수 있었다. 남북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계급 갈등이며, 기존의 정치·민족주의·지역·세대 갈등이 주변에 있었다(524).
3월 북한에서는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리부터 문제 해결에 착수했고 지주계급의 권력을 무너뜨렸다. 잃을 것 없는 빈농과 농촌 노동자를 동원해 15,000개의 농촌위원회를 조직하고 개혁을 밀어붙였다. 토지 개혁위원회의 조직과 개혁 추진은 1,000명 정도의 도시 노동자가 농촌으로 가서 집중적 선전을 펼쳐 수백만 명을 동원하고 전국적 대중운동으로 이뤄졌다. 개혁위원회는 빈농이거나 소작농이었다. 상부조직에서 파견된 노동자·간부의 도움을 받아 지주의 모든 재산을 기록하고 재분배를 위해 압류했다. 그 뒤 ”반동분자“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고 토지를 빼앗긴 모든 농민에게 명단에 참가하게 했다. 부재지주는 항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재분배를 위해 토지를 몰수당했다(525).
소작농에게 18~60세 남성은 1점, 18~50세 여성은 1점, 15~17세 소년은 0.7점, 어린 아이는 0.5점이 부여됐다. 각 가족의 총점과 제공된 토질의 차이에 따라 토지를 재분배했다. 토지가 몰수된 지주 가호는 모두 4751호였다. 북한의 토지 개혁은 중국과 북베트남보다 덜 폭력적이었다. 개혁이 비교적 쉽게 이뤄진 까닭은 첫째, 대부분의 지주는 이미 남한으로 피신했으며, 둘째, 황해도와 평남에서만 매우 높은 소작률을 보였다. 소규모 자작농이 많았고 논보다 밭을 경작했으며 검소하고 강인해(526) 계급 갈등이 그리 격렬하지 않았다. 토지 개혁의 결과 농민은 큰 혜택을 입었다. 셋째, 집단화를 추진하지 않았으며 토지 사유를 인정했다. 넷째, 38도선을 오갈 수 있고 지주가 남한으로 피신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남한 정치의 좌우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고 온건 좌익을 약화시키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전시효과’도 낼 수 있었다. 이러한 북한 개혁의 위협은 남한에서 온건한 토지 개혁의 기회를 줄였고 농민을 좌익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북한 개혁은 크게 성공했는데 대학살이 일어나지 않았고 부지런한 북한 농민은 바라던 것을 얻었으며 공이 강한 소리를 내면서 남한 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토지 개혁의 두 가지 특징이 더 있다. 첫째, 아시아 나머지 국가에 모범으로 널리 선전됐다. 둘째, 자애로운 지도자가 모든 농민에게 토지를(527) 한 구획씩 준 것 같았다. 김일성의 상명하달식 방침이 마오주의와 합치되지는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도 옌안시기에 매우 온건한 토지 개혁 정책에 따랐다. 토지 개혁은 마오주의와 소련의 방식에 한국의 독자적 방식을 섞은 것이었다.
토지 개혁이 이뤄진 뒤 노동법이 곧 제정됐다. 46년 6월에 공포돼 하루 8시간 노동제와 사회보험제도를 실시하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며 성별에 상관없이 같은 노동에 같은 임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다음 달 남녀평등 관련 법률이 제정됐다. 주요 공장과 기업은 국유화된 반면 중소기업은 도·군 인민위원회가 관할해 투자와 생산활동을 장려케 했다. 경제와 특(52)히 주요 산업은 질서를 회복하고 46년 말 생산 증가를 기록했다.
해방된 한국에서 어느 쪽도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 여유는 없었다. 방법에는 서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목적과 목표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으며, 선택해야 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나 히틀러의 파시즘을 겪으면서 폭력과 정치의 온갖 모습을 경험한 소련인은 한국의 상황에 익숙했고 그에 맞춰 행동했다(529).
통일전선 정책
결속은 김일성에게도 중요했다. 연배가 높은 좌익과 강력한 옌안파의 확고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북조선공산당과 옌안파를 통합해 재조직하는데 지치지 않고 노력했다. 김일성과 신민당 지도자 김두봉은 두 당의 합당을 위한 계급적 기반을 이해했다. 북조선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반면 신민당은 많은 지식인과 소시민을 포함했다. 두 당을 합치는 것은 북한의 ”인민“의 정의에 포함되는 모든 계급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8.29. 회의가 열려 통일전선 정책을 승인하고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했는데, 이 당이 지금까지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 김두봉이 북로당 위원장에 올랐고, 김일성은 주영하와 함께 부위원장에 취임했다(530).
김일성은 늘 ”한국 우선논자“였다. 맑스-레닌주의자라기 보다는 혁명적 민족주의자였다. 맑스-레닌주의는 중요했지만 2차적이었다(531).
1년 뒤 북로당원은 40만명에 가까웠다. 세계의 어떤 공산주의 정당보다 인구에서 당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북로당이 해방 뒤 북한에 ”조직사회“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북로당의 결성은 김일성·김두봉·무정을 뭉치게 했고 북한의 좌익 세력을 결속시켰다.
김두봉은 1888년 경남에서 태어난 저명한 한국어학자였다. 19~45년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해외에 머물렀다. 42년 옌안으로 가 그곳의 정치학교의 교사가 됐으며 조선독립동맹의 최고 간부가 됐다. 다소 유약한 모습의 박학한 지식인으로 배후에서 북로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지도부에 있었다(533).
무정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명확하고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22년 중국으로 건너가 군벌 옌시산 아래서 군사적 경력을 시작했고 포병 전술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27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홍군의 포병대장으로 장시성에서 장정에 참가한 30명의 한국인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옌안에 도착한 뒤 조선의용군을 지휘해 포병 지휘관으로서 팔로군과 함께 싸웠다. 주더와 가까웠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무정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보안대 포병 부대장이라는 비교적 낮은 군사적 지위에 있었다. 너무 거침없이 말하며 성격이 과격했다고 하는데 부하들로부터 헌신적 충성을 받았다. 소련과 김일성은 무정이 가진 중국과의 연줄을 두려워했다. 그는 북한군을 훈련하는 데 집중한 반면 김두봉 등은 옌안과 한국인을 정치적으로 지도했다
이 기간에 박헌영은 남한 좌익 세력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46년 가을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과 김두봉이 권력을 장악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534). 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소련은 상황이 허락했다면 박헌영을 선호했을 것이다. 그는 맑스-레닌주의에 좀 더 정통했고 수 십년 동안 공산주의 운동 경력을 가졌으며 김일성보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였기 때문이다(535).
남쪽으로 부는 북풍
북풍은 피난민이 천천히 유입되면서 옮겨갔으며 트로이 목마 같은 효과를 주었다(535). 소련과 북한은 남한의 한국인에게 인민위원회가 실질적 통치 기구라는 사실을 확신시켰다. 46년 북한의 토지 개혁은 남한에 특히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 남한은 토지 개혁을 높이 평가했고, 각 도에서 일어난 수많은 농민 봉기에서는 북한과 같은 토지 개혁을 요구했다. 첫해 동안 북한의 수많은 피난민이 끊임없이 남한으로 밀려왔다. 45년 가을 피난민은 대부분 만주와 북한에서 남한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농민이었다. 46년 봄 토지 개혁과 그 밖의 조치는 상층계급 난민을 증가시켰다. 지주·상인·의사·변호사·기술자·교사·공무원이었다. 피난민의 흐름은 자연적·정치적 요인 모두에서 자극받은 것이(536)었다.
남에서 북으로 가는 인구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수십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을 떠나 북한으로 갔다. 북한은 남한으로의 이주를 조장했는데 첫째, 돌아온 피난민은 남한의 식량 공급과 구호시설에 부담을 줄 것이며 불만을 품은 하층계급이 될 것이었다. 둘째, 불만을 품고 토지를 몰수당한 상층계급을 남한으로 보낼 수 있음과 동시에 지주계급을 다뤄야하는 곤란한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문제를 온건하게 해결할 가능성은 사라졌으며 미국에게는 공산주의와 반동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 밖에 남지 않았다. 오갈 수 있었던 38선 덕분에 그들은 급진적 개혁이 가져올 계급 사이의 충돌을 늦출 수 있었다. 넷째, 대규모 난민 가운데 자신의 공작원을 침투시킬 수 있었다(537).
결론
소련은 자신들의 최소 목표-국경을 맞댄 우호적 국가-와 해방 시기 한국인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권을 창출하는 데 효율이 매우 높은 전략을 추구했다. 한국인에게 재(537)량권을 준 그들의 정책은 적은 비용으로 순조롭게 점령을 시행할 수 있게 만들었다.
최고 지도부는 좌익 연합으로 구성됐는데 김일성과 그 동맹 세력, 김두봉·무정과 옌안파, 소련에서 귀국한 부류, 잔류한 좌익과 공산주의자 등이었다. 이 지도부는 인민위원회의 대중적 기반 위에 자리 잡았으며 근본적 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다. 효과적인 경찰과 군대도 보유했다.
진정한 혁명 정권이 되려면 독립을 달성하고 소련의 영향력에서 분명히 벗어나야 하기는 했으나 북한의 상황은 분명히 흑자였다(538). 1946년 말 북한은 정체와 폭력이 계속되던 남한에 가공할 도전을 제기했다(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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