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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45~1947년 중앙의 정치 상황

10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

 

1946년 가을, 경상도와 전라도를 비롯한 인민위원회가 장악한 지역을 농민 봉기가 휩쓸었다. 미군정의 1년여의 결과를 뒤집으려고 했다. 봉기의 의미는 세 가지였다.

첫째 군정의 정치·경제·사회적 정책의 실패를 부각시켰다.
둘째 봉기의 실패로 인민위원회 등의 대중조직은 사실상 종말을 맞았다.
셋째 경찰 내부의 우익에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넷째 봉기의 확산은 환경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음을 보여주었다.

이 봉기로 수뇌부는 극심한 공황에 빠졌다. 하지는 봉기가 소련의 지시라고 의심했으나 대체적으로 자생적이라 판단하고 본격적 혁명으로 여겼다. 그러나 봉기가 진압되자 혁명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453). 농민들에게는 필요한 조직이 없었다. 고전적인 봉기로서 동학 이후의 출현한 최고의 농민 봉기였다.

923일 부산 철도 노동자의 파업으로 시작해 곧 남한 전역으로 퍼졌는데 102일 대구 대중 시위는 12월까지 경상남북도·충남·경기·강원·전남으로 파급됐다. 발생 지역은 인민위원회 세력 판도와 비슷하다. 경상도는 30년대 적색농민조합이 있었고 인민위원회가 통치했으며 44~46년 인구 변화가 가장 큰 지역이었다. 특히 대구 주위의 군에서 혼란이 가장 심각했다. 가을 봉기는 인민위원회와 그 연합 세력이 지방 권력을 장악하려는 마지막 대규모 시도였다. 외부 세력이 조장한 것이 아니라 지방 인민위원회 지도자와 지지자들이 깊은 불만과 생사가 걸린 이해관계를 선동하면서 일어났다(454).

1946. 9~12월 봉기지역(좌)과 인민위원회 통치 지역(우) 비교

9월 총파업

46.9.23. 부산에서 8천명 정도의 철도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 남한 철도 수송이 멈췄다. 며칠 만에(456) 총파업 수준에 이르렀다. 서울 295여 개 회사 파업, 노동자 3만 명과 학생 16,000명이 참가했다. 대부분 전평의 후원 아래 동원됐다. 노동자의 요구는 개혁적이었다. 쌀 배급을 늘리고 임금을 올리며 실직자, 피난민에게 집과 쌀을 배급하고 노동자의 조직 결성의 자유를 요구했다. 가장 중요한 요구는 인민위원회로 권력을 이양하라는 것이었다. 군정청은 공산주의자가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하며 한국인이 자치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456).

9.30. 서울 용산역 구내에서 파업참가자와 진압자가 충돌했다. 진압세력은 쇠막대기와 곤봉으로 무장하고 자유신문 사옥을 공격했다. 체포된 노동자는 파업 불참 서약하면 복직됐지만, 거부하면 해고되고 쌀 배급이 중단됐다. 경북, 대구와 인접 군, 국방경비대 경상(457)북도 연대에서는 45년 좌익과 우익이 공존했다. 대구지역평의회는 드물게 성공한 합작 시도였는데 좌익이 존속하고 일정한 합법성을 얻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유혈의 폭력적 갈등 속에 끝났다.

 

10월 봉기

10.1. 경찰은 대구 시위대 한 명을 죽였다. 2일 군중은 시신을 들고 대구 시내를 행진했다. 사건의 지도자는 일본과 만주 징용자 31세의 의대생 채무학이었다(458). 시위대가 경찰서를 접수하자 경찰은 제복을 벗어던지고 피신했다. 피신하지 못한 경찰 50여명을 사로잡아 38명을 살해했다. 죽을 때까지 고문당하고 불태워졌으며 산 채로 피부가 벗겨졌다. 그들이 죽자 그들의 집과 가족이 공격받았다. 도지사를 포함한 공무원들의 집도 약탈했다.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가족을 구타했으며 그들이 존재한 흔적을 모두 없애려고 했다. 극단적 폭력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증오하는 관리를 겨냥한 것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 첫해에 한국인에게 비슷한 잔혹 행동을 했다. 미국인이 그런 공격의 대상이 된 적은 없인들은 식민지 시대의 경찰을 불법적 존재로 봤다. 그들이 전후 한국에서 폭력 수단을 독점한 것은 부당했기에 합법성의 정의에 따르면 그것은 승인될 수 없었다.

10.2. 정오에 미군 탱크가 대구 시내를 순찰했다. 도시 전체 도로는 봉쇄됐다. 오후 7시 계엄령이 선포되고 야간 외출이 금지됐다. 3일 만명의 사람들이 영천 경찰서를 습격해 군수를 살해하고 40여명의 군 경찰을 납치했다. 미군에 의해 치안이 회복되자 생존한 영천 경찰과 우익은 체포된 폭도들의 집을 약탈했다. 영천의 폭력 사태는 대중이 경찰과 공무원(460)을 넘어 지주계급을 공격한 것이었다. 20여명의 지주가 죽임을 당했다. 여름 곡물 공출로 식량 가격이 크게 올라 농민들은 지주계급에 원한이 있었다. 또 봉기 전 45차례에 걸쳐 140여명이 넘게 체포되었기 때문에 봉기가 시작됐을 때 지도자가 없었다(461).

경북 북부 각 군의 소요는 인민위원회의 세력과 일치했다. 10.7. 폭동은 경남으로 번져 진주와 마산에서 가장 심각한 폭력(463)사태가 일어났다. 그곳은 45~46년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미국이 임명한 지방정부를 몇 차례 퇴진시켰으며 귀국한 사람들이 대거 밀려든 지역이었다. 진주에서 한국인 경찰이 발포해 2명의 군중을 사살했다.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는데 시위대는 농민·임금노동자·행상·상인이었다. 체포된 폭도는 대부분 진주 인민위원회나 그 산하의 청년 단체에 소속돼 있었다(464).

서울은 우익이 장악했으며 통신 시설과 경찰, 미군 부대가 있었고 미국은 여운형의 도움도 받았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심각한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다(465). 1946년 가을 남한 전역에서 일어난 지역적 충돌은 서울에서 나타난 좌우 대립의 구조를 반영했다.

충북은 대체로 가을 봉기를 비껴갔다. 인민위원회가 강력했던 영동에서만 소요가 일어났다. 경찰과 우익 세력이 협력하여 신속히 봉기를 막았다.

10월 말 봉기는 전남으로 확산됐다. 11월 첫 두 주 동안 50회를 웃도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부분 몽둥이····괭이··쇠스랑으로 무장한 농민이 파출소를 습격한 것이었다. 전남의 봉기는 10.30. 화순의 광부들이 광주로 행진하면서 시작됐다. 화순은 미국의 고민거리였다. 강력한 인민위원회는 그 지역 광부 수천 명의 지지를 받았다. 화순탄광 생산량은 남한에서 세 번째였지만 46년 절반 가량 떨어졌고 가난에 시달렸다(467). 수없는 사건과 죽음이 기록에 남겨졌고, 또한 의심할 여지 없이 많은 부분이 기록되지 않았다. 11월 첫 두 주 동안 전남의 47개 시·, 모든 면의 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봉기의 조직자들은 전남 농민이 품은 두 가지 기본적인 분노를 이용했다. 그들은 (1) 농민이 미군정의 쌀 공출 정책을 반대하고 (2) (469)시 거주자와 농민 할 것 없이 보편적으로 경찰을 증오한다는 것을 이용했다.

봉기들은 전체적 계획이 없었다. ‘외부 선동가는 말할 것도 없고 조직자도 거의 없었다. 봉기는 대구 지역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퍼진 뒤 서쪽으로 옮겨가 전남까지 이어졌다. 전역에서 농민을 지휘할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은 지방에 존재했고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끌어왔다. 구조는 계층적이 아니라 독립된 세포 형태였다. 공산주의자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토지의 사용 조건과 관계, 불공평한 곡물 공출, 지주·공무원·경찰의 유착에서 연유한 깊은 분노 때문에 전남 봉기가 일어났음을 증거들이 보여준다. 소수의 좌익 자료는 미국의 여러 범죄를 서술했다. 미국은 한국을 자기 식민지로 만들려 하고, 자본가의 이익에 따라 한국을 미래의 침략에 사용할 군사기지로 만들려는 정책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폭동 참가자 회고에서 식민지 시대 경찰의 만행, 가혹한 곡물(470) 공출 정책, 지주와 부농의 곡식 저장, 지방 인민위원회에 대한 조직적 탄압 같은 지방의 문제가 두드러짐을 보여준다.

전북은 가을 봉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11월 중순 남원 순창에서 작은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주에서만 정치범 417명 정도가 전주 형무소를 탈출해 전주 시내를 행진했으나 전주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강원도에서 폭동은 해안지역 군에서 주로 일어났다(471).

46년 봉기는 동학과 비슷했고 기법도 빌려왔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도구를 무기로 삼았다. 언덕에서 봉화를 올리거나 산에서 북을 치는 등 원시적 통신 방법으로 새 군중을 모았다. 경찰·군수·지주와 그 하수인들이 자신을 억압한다는 것을 파악해 목표를 택했다(472).

진압의 방법

진압 방법은 전후 한국 정치에서 나타난 몇 가지 측면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472).

첫째 탄압 세력의 구성에는 정치적 제휴 관계가 나타났다.
둘째 탄압에는 비교적 발달한 교통·통신 시설을 사용한 이점이 작용했다.
샛째 미군의 병력과 무기, 탱크 장비를 지속적으로 이용해야 했다.

경찰과 우익, 특히 우익 청년 단체의 긴밀한 연합은 뚜렷했다. 각 도에서 올라온 미국 보고서는 경찰과 우익 단체의 연합을 중요하게 다뤘다. 군정은 농민 봉기를 진압하는 데 주로 경찰에 의존했다. 우선 도 경찰을 보낸 뒤 필요하면 서울의 경찰이나 미군 야전부대를 투입했다(473). 철도 교통과 크게 발달한 경찰 통신망은 경북의 폭동 진압을 성공으로 이끈 핵심 요소였다. 경찰은 자신들을 겨냥한 폭력에 무자비하게 대응했고 많은 미국인을 놀라게 했다(474). 미군 사령부와 경찰 수뇌부는 전평을 무너뜨리는 데 공모했다. 폭동과 파업을 진압하는 미국의 방법 역시 한국의 방법과 다르지 않았다.

파업과 봉기의 원인

남한 공산주의자가 다른 좌익 조직을 장악하려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서울의 본부 안에 있는 각 정파도 통제하지 못했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는 서울에서 단추를 눌러 지령을 보내 지방의 농민들에게 경찰을 공격하고 곡물 공출 기록을 파괴하도록 할 능력이 없었다. 농민이 가을 봉기에 가담한 데는 좀 더 깊은 동기가 있었다. 북한에서 잠입한 사람이 폭동 기간에 체포됐다는 기록은 없다(476). 469.23.~10.1.까지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은 돌아와 남한의 파업이 박헌영의 작품이라고 군정에 알려주었다. 김일성과 김두봉은 파업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박헌영이 무정과 결탁했다고 했다. 파업의 목적은 박헌영과 무정이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희생시켜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는 데 있었다고 추정된다. 박헌영은 골수 친소파였으며 한국 정부를 소련과 밀접히 연결시키려 했다.

한국 정치 분석에서 문제는 늘 한국 지도자들은 복잡한 사건을 파벌 투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46년 봉기는 어느 한 개인이 일으킬수 없었다는 것은 명백하다(477). 북한이 관여했다는 지적은 토지 개혁이 가져온 전시효과때문이었다. 철저한 토지 개혁과 노동법 개혁은 남한 농민의 불만에 해답으로 다가왔다. 북한의 개혁이 남한에서 큰 공감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가을 봉기는 병리적 이상 사태나 개인적 책략의 결과가 아니라 의미 있는 개혁과 노동조합·농민조합·자치기관을 1년 넘게 요구해왔지만 무시된 한국인의 분노가 정점에 다다른 끝에 발생한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현상이었다. 미국 공식 문서는 이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현지 보고는 모두 토착적 지방 조직이 핵심 역할을 했다고 서술했다(478).

군정 첫해 인민위원회와 농민·노동조합, 그 산하 단체를 조직적으로 탄압한 것이 가을 봉기의 씨앗을 뿌렸으며 막다른 곳에 몰렸다는 절박감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봉기 시기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가을은 한국에서 추수하는 시간이다. 한국 경제는 쌀 본위로 움직였다. 45년 풍작은 자유시장 정책으로 폭리 추구·투기·비축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증발해 버렸으며 사고파는 데 익숙하지 않은 구민의 소비율도 급증했다. 실패로 끝난 군정의 미곡 정책은 일제강점기의 공출제도를 완전히 부활시켰다. 지주에게 이익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인민위원회와 노동조합이 강력한 지역에서는 그들이 쌀을(479) 걷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다음 공출제도로 돌아가려 하면서 공출 능력과 추수하려는 농민의 의지도 크게 무너뜨렸다. 4610~12월의 쌀의 급격한 가격 상승은 파업과 봉기의 원인이자 영향임이 분명하다. 곡물 가격의 폭등은 통화 팽창과 실업으로 이어졌다. 임금 인상은 통화 팽창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12월 실업자는 100만 명을 넘었다(481). 전체 실업자의 68%가 경상남·북도에 있었다. 그 중 58%가 귀환자였다. 경상도는 징용 인구, 경제의 붕괴, 높은 정치적 참여율 사이의 중요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쌀 공출의 감독권은 경찰에게 되돌아갔는데 그들은 일제에 봉사했기에 경멸을 받던 집단이었다. 46년 가을 추수 기간에 경찰이 근본적인 분노의 표적인 된 까닭이다. 공출은 강제로 이뤄졌으며 언제나 정치적 고려에 기초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가축과 그 밖의 재산을 압수해 메웠다. 모든 단계에서 부정이 만연했다. 각 도의 투기꾼은 경찰과 지방 공무원에게 쌀을 사서 주요 도시까지 운송했다(483).

결론

46년 말 좌익 세력이 가장 큰 손실을 입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것은 경찰의 세력과 생존 능력의 전환점이 됐다. 남한의 농민은 경찰 앞에서 크게 위축됐다. 관료 기구의 위력은 부각된 반면 농민에게는 자신의 무력한 모습을 가져다주었다. 체제에 반대한 결과는 죽음과 파괴, 배급표의 상실이었다(484).

한국인 대부분의 의식이 노동자와 농민의 중간 정도에 머물러 있었고 지방 조직은 근대적 정치조직이라기보다 농민 단체였다.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은 서로 연합하는 데 실패했고 세포 조직으로 움직였다. 해방된 한국의 체제에 불만의 절규가 쌓인 것이었다. 봉기는 지방적이고 자연발생적이었기 때문에 근대적 통제 수단에 진압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좌익 지도자들은 농민의 거친 힘을 조직화된 정치로 이끌지 못했다. 남한에서 그들에게 안전 지역이 없었다. 베트남처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중부 고지대도 없었고 옌안처럼 전국을 지배한 정권과 경쟁할 수 있는 근거지도 없었다. 농민을 조직으로 편입시켜 그들을 방어할 핵심 요소를 제공하는 과정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 부족했다. 좌익과 공산주의자들은 파벌로 분화했으며 서울에 지나치게 힘을 집중했다(485).

봉기 이후 한국 농민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을 보호해 준 지방 조직이 소멸됐다는 것이다. 모든 좌익이 연합해야 한다는 민전의 정확한 주장은 부서졌다. 대중적 기반의 큰 상실은 더 과격하고 수용의 폭이 좁은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으로 이어졌다(486).

한국전쟁의 기원 2부 10장(브루스커밍스24.1.2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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