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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45~1947년 중앙의 정치 상황

8장 지방 인민위원회의 개관

 

한국에서 인민위원회는 지방에 기반을 두고 그 지역을 책임진 매우 드문 정치조직이었다. 1945~1947년 지방 정치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하려고 한다. 인민위원회부터 설명하기 시작해 농민 항쟁에서 마칠 것이다(355). 일제강점기 토지 소유의 집중, 시장경제 도입, 산업의 성장, 식민지 동원 정책, 인구의 대규모 이동 등으로 흩어졌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남부 지방 전역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지주는 일제에 협력했다는 오점을 가졌고 한국인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는 점에서 징용됐던 농민들을 특히 격분시켰다. 그들은 아직도 농민 의식에 갇혀 있었지만, 꼭 더 낫다고만 말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노출돼 버렸다. 징용된 사시리에 깊은 분노를 품고 농업으로 돌아왔으며 한국 농업 구조의 기본 방향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또렷이 인식했다. 수많은 농민 노동자가 농민 정치가로 변모했다(356).

정치와 환경 사이의 특정한 관계를 밝히려고 하나 수학적 정확성을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농촌 정치에 중요한 상관관계는 인구 이동, 소작과 지주의 비율, 지리적 위치, 교통·통신 시설, 영향력을 갖지만 자료가 거의 없는 농업의 상업화 수준이다. 상업화는 군산·목포·부산 같은 미곡 수출항과 가까운 지역에서 빠르게 진행됐으며 정치 활동도 활발히 전개됐다. 상업화된 지역에서 정치의 흐름은 다양한 형태로 농민 계급에 영향을 주었다.

인민위원회 이해의 고려 사항은 미국통치기로 넘어가는 공백기의 길이, 군정과 지방 인민위원회의 정책 대립, 인민위원회 구성 등 대부분 정치적 문제다. 인공과 인민위원회가 끝내 소멸된 주요 원인은 미국과 한국의 권력 때문이다. 인위적 정치 세력이 자발적 조직보다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려(357)준다.

건준의 지방 지부는 해방 며칠 만에 13개 도에 설립됐다. 인민위원회는 최말단 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정 단위에서 번성했다. 지방 인민위원회에는 농민조합·노동조합·치안대, 학생·청년·여성 단체가 참여했다. 정치 운동으로 한반도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조직부·선전부·치안부·식량부·재정부가 있었고 지역에 따라 생활 복지, 난민의 귀향. 소비자 문제, 노사 관계, 가장 빈번하게 소작료 문제를 다루는 부서를 두었다. 본국으로 떠나는 일본인에게서 작은 가옥부터 큰 공장까지 그들의 자산, 관리 책임을 양(358)도하는 각서를 얻어냈다.

누가 조직했는지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돌아온 학생과 석방된 정치범은 당의 세포조직을 발전시킨 공산주의자였다. 학생과 제대한 군인, 지방 명망가와 지주, 일제강점기 관료까지도 위원회를 조직했다. 폭발적 조직화의 일부였다(359).

농민이 급진화된 것은 일본의 속박에서 풀려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 뒤에는 토지 관계에서 부당하게 대우받고 박탈당했다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360).

모든 지방에서 완전히 새로운 경찰력이 나타났고 새 위원회가 행정을 인수했으며 일본인·한국인 지주는 재산을 위협받았다(361). 뚜렷한 특징은 변화가 그 지역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다는 점이다. 변화는 외부에서 강제된 것이 아니었다. 몇 주 동안 건준, 인공, 인민위원회는 한국인 정부로 기능했다. 특히 농촌지역에서 우익세력은 완전히 무력해졌다. 1945년 가을 인민위원회가 불법 단체로 규정된 후 이 소식은 들불처럼 퍼져나갔으나 폐지 통지가 전달되는 데는 몇 달이 걸렸다.

인민위원회는 대중의 지지, 지방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 대중적 통신수단의 장악, 대중적 강령을 지녔고 신속(363)하게 처음 행동했다는 이점을 모두 가졌다. 1945년 지방 인민위원회는 자치 정부를 세우려는 자신들의 시도가 실패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민위원회 관련 한국어 자료는 드물다.

이 장에서는 지방 인민위원회가 강력했거나 허약했던 요인을 폭넓게 논의할 것이다. 문제는 수학적 용어로 인구 변화, 소작지 상황 등의 변수와 연결시킬 지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용(364)되는 정치적 지수는 선거에 참여한 투표율이다. 상호 관계를 다룬 근사치일 뿐이다(365).

 

인구 변화

농민사회의 뚜렷한 인구 증가와 離散은 농민을 전통에서 이탈시켜 사회·정치적 동원에 이용할 수 있게만든 주요 요소였다(365). 지역 간 대규모 인구 이동은 남한에 중요한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북한의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남한 출신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징용이나 토지 상실, 사회적 지위 하락으로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노동자가 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임금노동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특히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좌익 사상에 영향을 받고 한국인으로서 가혹한 차별을 받았다(366).

전라북도는 급진적 활동이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다. 이곳 인민위원회는 초기에는 강력했지만 세력을 유지하지 못했다(367).

 

교통과 통신 상황

인민위원회 통치가 지역에는 철도가 놓인 곳도 있고 놓이지 않은 곳도 있었다. 부산부터 진주까지 서쪽으로 놓인 노선에 인접한 지역을 제외하면 철도와 가까운 지역들이 좀 더 쉽게 진압될 수 있었다. 제주도처럼 서울에서 경찰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철도가 없는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를 무너뜨리기가 훨씬 어려웠다. 도로와 철도가 잘 갖춰진 지역인 전라북도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쉽게 진압되지만 강원도에서는 권력을 잘 유지했다(370).

근대화 지수는 경상남북도가 가장 높고 충청남북도, 강원도가 가장 낮다. 세 도에서 인민위원회가 번창한 주요 요인은 전체적으로 낙후됐다는 의미인 지리적 고립성에 있었다. 근대화는 인민위원회 성장에 해롭지는 않았지만, 세력을 유지하는 데는 불리했다. 급진주의가 일단 시작되면 후진성은 인민위원회를 타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371).

 

토지 소유관계

1945년 토지 소유관계의 불공평에서 한국을 뛰어넘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깊은 불만은 인민위원회를 지지하고 소작제도와 쌀 공출 방법, 지주제를 겨냥한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의 공격에 농민이 공감하게 했다. 해방된 한국에서 정치적 담론을 지배한 토지 문제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집단과 계급을 분포시킨 주요인이었다(371).

비참한, 굴종할 수밖에 없는 소작농들의 생활은 지식인과 급진주의자들이 좀 더 정확히 깨달았다. 대체로 그들은 자신의 미약한 존재가 위협받지 않을 방식으로만 분노를 표현했다. 평소 농민은 복잡한 관계와 분열, 그리고 관습 때문에 무력했다. 농민이 분석적 의미에서 계급, 사회변혁을 일으키는 힘으로 행동하는 것은 자신들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자각해 변화를 일으킬 기회를 포착할 때였다. 북한 각 도의 소작농 비율은 남한보다 낮지 않고 높다면, 북한이 가난했기 때문에 철저한 사회 혁명이 일어났다는 이론은 설득력을 지닌다. 전면적인 토지 개혁을 실시한 첫 주요 사례인 북한의 사회 혁명은 소작 문제가 남한 대부분의 도보다 심각하지 않은 지역에서 일어났다(372).

전라북도는 높은 소작률과 과도한 지대, 지주가 가장 많이 밀접한 지역이었다(373). 일본인 정착민은 전라북도의 5.7%를 소유하거나 관리했는데 전남의 2, 남한 나머지 도의 6배였다. 빈곤 지수가 가장 높은 전북과 경기도 인민위원회는 강력하지 않았으며 쉽게 해체됐다. 농촌의 착취가 심각한 도일수록 인민위원회도 강력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실제로 반대가 사실에 가깝다. 기동력을 보유한 전국적 경찰 조직의 지원을 받을 경우, 소작률이 높은 지역에서 지주의 권위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구속력을 가진 구조를 나타냈다. 정치권력의 문제이기(374)도 한 접근의 문제는 덜 착취당한 지역에서 농민의 급진 운동이 더 많이 나타난 까닭의 일부다.

전북과 경기는 토지 가격과 생산성이 높고 쌀 이윤 핵심지역이며 지주-기업가의 거점 지역이었다. 이런 여건은 1945년 이후 전북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영향력을 중화시켰다. 소작률이 가장 높은 군에서 급진주의가 약했다. 급진주의는 소작률과 반비례한다. 인구 이동이 많고 급진화된 군들의 소작률은 급진화가 낮은 군보다 평균 12%가 낮았다. 소작률과 토지 가격이 높은 지역에서는 지주계(375)급이 강력했고 양극화도 좀 더 빨랐으며 적응력도 뛰어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쉬웠다. 중농은 더 많은 토지와 부를 모으려고 했다. 경제적·사회적 변혁에 더 활발히 반응하고 농민의 정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중농의 향배가 농민 혁명의 진로에 결정적 의미를 갖게 된 까닭이다. 소작률이 중간 정도인 주변적 농촌지역인 제주도, 동해안 북부 지역에서 자유롭게 행동하고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았다(376).

 

지리적 위치

교통·통신 거점과의 인접성은 인민위원회의 세력을 유지하는 것을 막았다. 지리적 고립은 권력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미국의 관심 밖에 있었던 제주도로 다른 어느 곳보다 인민위원회가 번성했다(376).

 

공백기의 길이

일본에서 미국의 통치로 넘어가는 공백기가 길수록 인민위원회는 강력했다. 시간은 강력한 인민위원회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 요건이었다. 시간은 조직자들이 위원회의 힘을 혁명의 추진력으로 바꿀 수 있게 했다(377).

 

정치적 전사와 지표

1930년대 적색농민조합이 활발했던 군과 해방 뒤 인민위원회가 다스린 군은 뚜렷이 일치한다. 적색농민조합이 있다고 보고된 남한의 37개 군 가운데 25개 군을 1945~46년 인민위원회가 통치했다 (377). 이것은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이 난데없이 출현한 것은 아님을 알려준다. 1946년 중반 농민조합의 세력은 경남과 전남에서 가장 강력했다. 농민조합 세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거의 없으나 남한의 좌익 조직은 우익 조직보다 자기 세력을 좀 더 사실에 가깝게 묘사했다(379).

인민위원회 통치 지역
1930년대 적색농민조합 지역

미군의 각도 점령

군정 세 시기(380).

1 장교로 구성된 시찰단이 부산 등 주요 지역에 도착해(9.16) 국기를 게양하고 상황을 관찰한 기간
2 야전부대가 점령한 기간, 194512월까지
3 전면적 군정을 시행하고자 훈련하고 준비한 민정반(미군정청 직속 중대)이 점령한 기간, 1945년 말 각 도에 배치

남아 있는 일본인이 공산주의자라고 알려진 한국인보다 자신들과 더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지는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일본군이 철도, 전력·수도시설, 식량 창고, 형무소 등을 지키게 했다. 부산 등 주요 지역에서 미국 시찰단은 일본군 파견부대를 이용해 치안을 유지했다. ·일 혼성부대는 한국인의 시위를 여러 차례 진압했다(380).

점령군의 주요 임무는 치안을 유지하고 지방행정을 약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야전부대는 상징적 존재였으며 직접 군정을 시행하지 않았다. 지방행정의 책임은 지역 사단장에게 있었다. 40사단 부대는 10월 초 경상도에 도착했다. 96사단은 서남부 지역을 점령하기로 돼 있었으나 중국으로 보내지고 제6사단으로 대체했다. 6사단 부대들은 10월 중순 인천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1110일 전술적 점령은 완료됐다. 야전부대는 군정중대가 도착하면서 교체됐다. 군정중대는 야전부대가 이미 지방 인민위원회의 권한을 승인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방에 따른 정책의 차이는 인민위원회가 뿌리내리는 데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다(382). 정책의 차이는 1946114일 전면적인 군정이 시작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다(383).

1945년 가을 야전부대의 남한 점령
한국전쟁의 기원 2부 8장(브루스 커밍스 24.1.14).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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