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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945~1947년 중앙의 정치 상황
5장 새 질서의 구출: 미군의 진주와 정부·경찰·국방 정책
파괴하고 창조하는 일을 통해 문제의 핵심으로 다가갈 수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위대한 혁명적 사고는 옛 사회의 폐허에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됐으며, 이것은 미국이 해보지 못한 경험이다. - 루이스 하츠
정책과 결정의 핵심은 선택이다. 점령군은 1945년 후반 중대한 선택을 내렸고 2년 뒤 우익 독재정치가 승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미국의 구상을 규정한 한국의 정치 상황은 좌익의 혁명적 공세였다. 인민위원회·노동조합·농민조직과 연합한 인공을 모든 정책과 결정의 기준으로 삼았다(201).
미국의 목표는 소련의 영향을 받은 외부적 혁명 세력과 국내의 자생적 혁명 세력의 차단할 방파제를 세우는 것이었다. 1945년 미국의 노선은 국제협력주의적 노선이었다. 그러나 남한에는 일국독점주의자가 훨씬 더 많았다. 일국독점주의자들의 한국 정책 “기본 원칙”은 질서있고 효율적으로 운영되며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한국을 만드는 것이고, 한국 국민의 협력을 얻는 것보다 중요했다“. 한국의 일부를 물리적으로 점령해 다른 세력이 독자적으로 상황을 장악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202).
한국 전체 또는 일부를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신탁통치의 목표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국무부와 연관된 소수의 진보적 국제협력주의자는 군정청의 정책에 반대했다. 이는 한국 정책의 모호함을 해소했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이 세운 계획의 의도와 목표를 손상시켰을까? 아니면 냉전의 전조였나?(203).
인천과 서울: 새로운 우방과 적
하지와 제24군단은 9월8일 새벽, 인천항에 도착했다(203). 오후1시 상륙을 시작했을 때 하지의 몰지각한 발언은(한국인과 일본인을 ”같은 굴에 사는 고양이“) 한국인을 분노하게 했고 그가 한국인의 열망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튿날 반도 호텔에 사령부를 만들고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공식적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았다. 그날 밤 미군은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했다. 그러나 총독 아베를 포함한 총독부 업무를 계속 유지시켰다(204). 이유는 전쟁이 끝났다는 단순한 안도감과 일본인의 순종적이며 협조적인 태도와 처음부터 한국인보다 일본인을 좋아했음에 있다. 일본인은 협조적이고 질서를 지키며 고분고분하다고 여겨진 반면, 한국인은 완고하고 다루기 힘들며 반항적으로 봤다. 워싱턴 국무부는 강력히 반대했으나(205) 하지의 결정에는 (1)맥아더가 일본에서 기존 기구를 이용해 통치하려고 결정한 것, (2)인공이 권력을 인수할 가능성이 작용했다.
9월 12일 아치볼드 아널드 소장이 총독이 됐다. 행정부를 ”군정청“으로 바꾸고 영어는 공식 언어가 됐다. 초기 국면에서 미국의 주요 정보원은 아베의 심복 오다 야스마였다. 일본인과의 관계가 발전한 뒤에야 한국인 지도자들과 첫 접촉이 시작됐다(206).
”현지 사람이나 조직화된 정치단체가 군정의 정책 결정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점령군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며칠 만에 제24군단은 한민당과 관계를 형성했고 그 뒤 그것은 미국의 시각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인 정보 제공자는 하나같이 한민당 지도자였다. 이 시기 미국인에게 인공이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이며 ”민족 반역자“ 집단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려는 것이 한민당의 목표였다. 미국은 서울의 정치 상황에서 쏟아진 악의적 선전을 사실로 믿었다. 한민당은(208) 생존을 위해 싸웠고 인공이 보유한 대중적 지지와 조직적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의 무지가 아니었다. 한민당 지도자들은 미국인의 정치적 한계를 정확히 측정했으며 그들이 듣고자 하고 믿고자 하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 결과 미국은 인공에 대한 반대를 뚜렷이 표명했다. 한민당이 ”한국 국민의 절대다수를 대표하는 유일하고 주요한 민주 정당“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런 판단은 그 뒤 미국의 정책이 형성되는 데 참으로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민당은 일제가 만들어놓은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정치체제를 장악하려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미국의 공감을 얻는 데 전력을 쏟았고(209),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성공을 거뒀다. 미국은 한국 국내의 혁명적 흐름을 저지하는 데 의지할 수 있는 충성스러운 동맹이 필요했다. 스스로를 해방자라고 여긴 미국인들은 자신의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민주적일 것이라는 평가를 내려야 했다(210).
1주(9월 8~15일) 만에 한국에 있던 주요 미국 장교들은 일본인의 명령을 따랐던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지지 세력이 될 것이며 반대 세력은 소련에 가까(211)운 이적 분자가 되리라고 판단했다. 이는 낯선 상황의 정치적 갈등에 미국의 대응하는 방식이 보편적이고 뿌리 깊은 가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냉전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212).
10월 9일 베닝호프는 한민당 지도자들을 군정 내부, 이른바 고문단으로 끌어들이는 조직적 노력을 했다(214). 고문단에 참여한 9명은 김성수·김용무·김동원·송진우·이용설·전용순·오영수·강병순·윤기익이었다. 고문단의 9대 1이라는 우익과 좌익의 비율은 실제로 차지한 정치적 영향력 및 대중적 지지와는 정반대였다. 고문단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군정이 도지사를 선출하고 모든 행정 단위에 비슷한 자문단을 구성하는 데 그들의 추천을 받았다. 여운형의 고문단 참여 거절을 불쾌(215)하게 여겼으며 그의 행동은 한국의 합법 정부라고 계속 주장해 온 인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216).
10월 중순 미군정 아래서는 인공의 미래가 없다는 것이 뚜렷해졌다. 미국과 인공의 이념적 부조화와 미국의 자국 중심 정책을 고려하면 인공과의 갈등은 처음부터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문단은 미국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주요 세력이 한민당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217).
한민당이 미국의 후견을 지지했는데, 대부분의 한국인은 ‘후견’에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서 써먹었던 모든 정당화였고 지조 없이 외세와 타협한 행위로 봤다. 몇 년 뒤 조병옥은 한민당이 한반도의 적화를 막으려는 목적에서 후견을 지지했다고 해명했다. 당시 신문들도 그런 한민당의 속셈을 시사했다. 조선공산당은 미국이 한국에 진주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라고 말했다. 10월 20일 열린 미군 공식 환영식을 주관한 사람은 조병옥이었고 이 행사에 귀국한 이승만이 소개됐다. 조병옥과 하지는 이승만을 극진히 환영했고, 이승만은 소련 치하의 북한은 ”노예 상태“에 있다고 비난했다(218).
식민지 관료 기구의 재건
일본은 한국에 강력한 관료 제도, 즉 협력을 강제하는 데 맞춰진(219) 중앙집권적이고 지나치게 비대했지만, 통제와 지배에 대단히 효율적인 총독부 구조가 고스란히 물려졌다. 식민지 시대 부와 권력을 유지한 지방의 대지주에게는 해방 이후의 공백을 메우며 중앙 관료 기구로 진입할 기회가 주어졌다. 소련의 묵인 하에 서울을 점령한 미국은 ”거대한 문어 같은 관료 기구“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38도선 이남의 모든 사회 구조는 미국의 손에 들어왔다. 미국의 점령 계획은 군정이었다. 행정 공백에 대한 미국의 첫 대응은 식민지 통치 기구 자체를 부활시킬 뿐 아니라 위부터 아(220)래까지 일본인 관료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고문은 고위직에 한국인을 추천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한국인 관료들을 승진시켜 일본인들이 차지했던 자리를 채웠다. 대부분 이전에 총독부 관료였거나 한민당 당원이었다. 군정의 인사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총독부 관료 기구를 존속시키기로 한 결정이었다. 일본에서 미국은 국가를 약화시켰는데, 한국에서는 오히려 체제가 강화됐다. 한국의 모든 제도는 권력 유지와 급속한 산업화에 집중되었다. 핵심 문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특권을 유지하는데 목표를 두었다는 것이고 시대착오적이었다는 데 있다(221). 1945년 가을 북한에서 철저한 숙청을 단행했다. 북한에서 축출된 관료들이 남한에 넘어오면서 한국인 고위 관료는 자기 자리를 지키려면 남한의 개혁을 방해해야 했다. 미군 사령부와 한민당이 자신의 적극적 동맹 세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하민당 지도자 상당수가 관료 기구의 요직을 차지했다(222).
군정이 강압적 기구인 경찰과 사법기관을 한민당 지도적 인물에게 맡긴 사실의 중대한 의미는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남한에서 좌익을 진압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223). 군정이 좌익 인사를 요지기에 임명한 사례는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한민당 외에 등용된 인물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관료였거나 그 시기에 출세한 부류였다. 한민당 지도자들은 근대적 정치의 본질-대중의 지지를 얻고 지도자와 국민의 신뢰 관계를 형성하면서 유권자의 의사를 대표하고 적극적으로 정책을 개발하는-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군정은 한국 사회에서 행정 기구가 갖는 권력을 이해하지 못했고, 임명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크게 평가했으며 한민당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224). 한민당은 능력에 맞는 자리에 임명된 것이 아니라 폭력적 수단을 실질적으로 독점한 직책에 배치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소수의 우익은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했다(227).
사법과 경찰 기구
1945년 말 사법과 치안 기구와 관련된 주요 결정이 내려졌다. ‘한국화’ 정책이 처음 시행됐는데 1945년 11월 사법부에서 완성됐고 그 뒤 미국인은 한국인 직원의 고문 역할만 했다. 한국화는 일본인이 통제하던 사법 기구를 한국인에게 돌려주었을 뿐이며 한국인 직원과 관련된 구조의 근본적 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227).
군정은 일제강점기 총독부 법무국에 근무하던 한국인을 모두 유임시켰는데 대체로 대일 협력자였다. 대법원이나 고등법원의 고위직에는 판사나 검사로 10년 이상 근무했거나 변호사나 법학 교수로 15년 이상 경험을 가진 사람이 임명됐다. 군정기의 법률과 재판 제도는 일제강점기의 법률과 군정 고유 권력에 기초한 특별법을 혼합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여러 법률을 존속시키고 군정의 결정에 반대하는 한국인에 대한 특별한 권한을 유지했다. 1908년 육군 형법, 1910년 집회 취 체력, 1936년 불온 문서 임시 위에 법, 1907년 보안법 2호 같은 법률도 효력을 유지했다(228). 그러나 군정은 반체제 세력을 진압하는데 점령군이 가진 고유 권한에 더 크게 의존했다. 군정에 ”유해하다”라고 판단한 모든 행동을 막았다. 한국 언론은 군정청의 재판과 처리 절차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어떤 전문가도 정치적 속셈을 가진 한국인이 장악한 사법부에서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했다.
해방 시기의 비극과 미국의 무거운 책임은 군정 동안 국가경찰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났다. 대일 협력자와 우익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반혁명 세력의 전형적 수단으로 남용했다(229). 우익에게 경찰은 정치 투쟁에서 필수적 자원이었다. 미국인들도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그 쓰임새를 발견했다. 정치단체와 정치 집회의 등록·통제·감독, 인쇄물·신문·영화의 사전 검열, 쌀 수집 작업의 감독과 참여, 비밀경찰과 정보원 조직의 운영, 사상통제 활동이 포함됐다. 그런 기능은 중앙의 통제를 받아 한국 사회의 가장 밑바닥까지 침투한 치밀한 조직이 수행했다. 일제강점기 경찰은(230) 도 경찰본부의 지휘를 받았으며 도 경찰본부는 서울 본부의 명령을 받았다. 지방 사회를 통제하는 유일한 제도는 경찰과 군수·지방 유지, 특히 지주 사이의 연결망이었다. 미군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지방은 치안대가 치안을 유지했는데 그들은 지방 인민위원회의 지시를 받았다. 군정 초기 경찰은 사실상 무력했다.
미군이 일제 경찰 조직과 한국인 경찰을 유지하기로 선택한 까닭은 좌익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231).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였던 동안 독재적 억압의 도구로 너무 쉽게 사용됐다는 판단에 따라 경찰력을 폐지했으나 한국에서 그런 개혁은 좌익에 대한 공포와 군정청의 무신경 탓에 이뤄지지 않았다(232). 남한에 있던 경찰의 수를 거의 두 배로 늘리고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경찰을 대거 다시 채용했다. 경사 이상의 간부 가운데 80% 정도는 일제강점기 경찰이었다.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 비율은 경무부 고위직에서 가장 높았다(234). 북한에서 피신하거나 해직된 일제강점기 경찰 간부의 다수는 남한으로 와서 군정청 경무부에 합류했다(236). 경찰의 조직적·기술적 능력이 남한 좌익 세력을 종식시키는데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을 볼 때 경찰의 축출과 변화를 거부한 하지의 결정은 옳았다. 그러나 그런 정책의 대가는 컸다. 전체주의와 동일한 경찰의 결집력있고 고도로 통합된 조직 하에서 국민은 전체주의의 강압에 억눌리게 된다(238).
국방경비대의 출범
군대를 창설하게 된 것은 10월 15일 남원 인민위원회와 국군준비대 지부가 경찰·미군과 충돌한 남원 사건이었다. 서울 군정 당국자들은 남원 사건을 군정의 시책에 대한 인공의 일반적 저항으로 받아들였다(239). 군정은 한국군을 창설할 권한이 없었다. 소련이 북한에서 그런 시책을 추진했다는 증거도 없다(240). 군정이 국방경비대를 창설한 것은 남한의 혁명적 상황에 대응한 조치의 하나였다. 10월 중순 남한 전체에 인민위원회·농민조합을 비롯한 좌익 조직이 있다는 보고는 하지를 민감하게 만들었다(241). 가장 불안했던 점은 인공이 거느린 국군준비대였다.
12월 26~27일 인공의 국군준비대는 서울 대회를 열었는데 서울 주위의 지부에서 300여 명, 지방에서 대표 160명이 참석했다. 김일성·김원봉·이청천·무정이 명목상의 지도자로 선출됐다. 1946년 1월 초순 경무부와 미(242)군 헌병대는 국군준비대 훈련학교를 습격했다. 1945년 12월 5일 국방경비대의 장교들에게 군사영어학교가 창설됐다. 1기생으로 선발된 60명의 장교 가운데 다수가 1948년 이후 한국군 상부를 지배했다. 이들은 세 집단 출시이었다. 20명은 일본군, 20명은 만주 관동군, 20명은 임정과 중국 국민당 계열의 광복군 출신이었다. 만주 관동군에 배속된 한국인 장교는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뒤 한국과 중국의 항일 유격대를 진압하는 주요 임무를 도왔다.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창설됐다. 광복은 200명으로 구성된 3개 지대로 구성되었다(243). 광복군은 1945년 11월 개별적으로 남한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는 임정과 광복군을 이용해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 임정과 광복군 인사의 귀국은 대체로 미국이 정책을 수립하고 그것이 실패한 핵심적 요인으로 작용했다(244).
한국으로 돌아온 광복군 인사들은 ”친일파로 널리 낙인찍힌“ 일본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국방경비대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참여했을 경우 ”소란스럽고 불만스러운 소수“이자 불만을 가진 ”대일 협력자“로 간주됐다. 더구나 광복군인 기초적인 군사훈련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게다가 자격에 일제 치하에서 투옥된 경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 때문에 국내와 국외에서 저항한 한국인들은 배제됐다. 그 결과 국방경비대와 한국군은 ”일본군 출신 장교“의 전유물이 됐다.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군사영어학교 1기나 국방경비대 간부훈련학교 1~2기 생이며 이승만 아래서 한국군이나 1961년 군사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채병덕·장도영·최창언·최경록·정일권·강문봉·김재규(245)·김홍준·김백일·김석범·김동하·백선엽·박정희·박임항·박기병·양국진·이종찬·이주일·이한림·윤태일 등이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다수의 일본인·한국인 고위 군인을 전범으로 재판해 처형하고 ”육군·해군·지원예비부대에 소속됐던 모든 장교를 자동적 추방 대상“으로 정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런 장교들은 국방경비대의 지휘권을 받았다. 이런 기이한 현상은 일본군에서 복무한 한국인 장교들조차 부끄럽게 생각했다(246).
미군은 남한 국경을 방어하는 군사훈련 대신 폭동 진압 기술에 초점을 맞췄다. 군정은 국방경비대를 경찰의 핵심적 예비 병력으로 생각했다. 국방경비대와 경찰은 1946~1950년 남한 곳곳에서 일어난 심각한 폭동을 진압하는 데 사용된 주요한 두 가지 무기였다. 국방경비대는 체포할 권한이 없었지만, ”그것을 항상 무시하면서 마음대로 체포하고 영장 없이 수색했다“. 그들은 1948년 제주도 유격대와 싸우고 여수·순천 반란을 진압하면서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그러나 반란 진압에 국방경비대를 동원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로 드러났다. 경찰과 달리 국방경비대에는 많은 좌익이 들어갔다(247). 좌익 군사 단체 구성원은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고 우익은 좌익의 입학을 막기 위해 자질과 사상을 확인받았다. 그 뒤 한국인들은 신병의 사상 검증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국방경비대에 좌익의 침투를 허용했다.
하지와 그의 고문들은 좌익에 맞설 수 있는 어떤 집단이든 배경에 상관없이 포용했다. 그러나 일제 치하 경찰과 장교를 후원하면서 군정은 돌아오기도 빠져나가기도 어려운 길로 스스로 떨어졌다. 애국자들은 대일 협력자와 일하지 않았다. 미국인은 대일 협력자를 민주주의자로 변모시키려고 했다. 본말이 전도됐다. 하지와 그의 고문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한국인에게 애국자의 역할을 주고 ‘미국이 남한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새로운 정책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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