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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45~1947년 중앙의 정치 상황

7장 국제협력주의적 정책과 일국독점주의적 논리: 경직되는 중앙의 태도, 1946

 

19459~12월 미국의 한국 정책은 다국적 신탁통치에 대한 공식적 약속 또는 국제협력주의적 방법, 실질적 봉쇄에 대한 실제적 약속 또는 일국독점주의적 방법, 이 모순된 두 가지 방법이었다. 군정 정책은 상층부의 권력 배치곧 관료 기구를 지휘하는 집행 기구의 구성과 구조를 마련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1946년 정책들은 대부분 즉흥적이고 반작용적으로 형성됐다는 특징을 보였다(293). 공포로 위축된 한국 지배층과 군정 사령부, 워싱턴의 일국독점주의자들은 국제협주의적 방법과 신탁통치에 맞서 뭉치게 했다(294).

 

후견과 독립, 민족 반역자와 애국자: 신탁통치를 둘러싼 혼란

모스크바 합의에는 4대 강국의 신탁통치안이 들어 있었다. 소련은 미국이 주도할 가능성이 있는 다국적 기구보다 한국의 독립 정부를 수립해야 자신들의 이익을 더 잘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모스크바에서 소련이 한국 신탁통치에 찬성한 것은 타협이자 얄타 정신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아울러 소련은 한국 신탁통치에 찬성하면 동유럽과 관련된 자신의 구상에서 미국의 묵인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미국의 초안은 미·소 양군 사령부가 합동 행정부를 세워 무역·교통·화폐 같은 문제를 다루자는 제안이 들어 있었다(295). 한국이 독립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될 때까지 한국을 통치하도록 규정했다. 제안된 신탁기간은 5년이었다. 소련의 초안은 한국인으로 구성된 과도정부를 수립하고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해 정부수립을 돕는다는 내용에 차이가 있었다. 최종안에서 신탁통치안은 약화됐다.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과는 한국 정부가 신탁통치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수립될 것이었다(299). 협정은 오직 미국과 소련의 협력만이 한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했다. 주로 남한에서 군정과 한국인의 행동 때문에 합의는 하룻밤 사이에 무너졌다. 군정 사령부는 다른 연합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군정을 중심으로 결집하면 신탁통치를 피할 수 있다고 한국인들을 부추겼다 (297).

하지는 10월 중순부터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남한 분단 정권 수립에 협력할 한국인 집단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한민단은 미국의 단독 후견을 지지했다(298). 김구는 송진우에게 반탁운동을 지원하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한현우를 통해 저격했다. 그러나 좌익이 송진우를 죽였다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 1229일 하지가 한 무리의 한국인들에게 신탁통치 반대를 지시했다. 모스크바협정의 실제 내용은 신탁통치 이전 과도정부 수립이었지만 군정은 신탁통치 강행 세력은 소련이라는 오해가 한국에서 널리 퍼지도록 묵인했다.” 299) 모스크바협정을 처음 보도한 서울신문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말했다.

반탁운동은 김구가 남한에서 쿠데타 시도로 이어졌다. 전국적 파업을 호소하며 임정을 즉각 한국의 정부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쿠데타는 쉽게 진압됐고 김구의 위신은 크게 손상돼 그와 임정은 사실상 회(300)복되지 못했다. 김구의 계획은 한국의 즉각적 독립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임정 지도자들은 인공 지도자들과 연합체를 구성하려 했는데 김구의 쿠데타 시도가 무산되면서 함께 끝났다. 임정이 모스크바협정에 반발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한국 과도정부-자신들의 한국 임정이 아니라-와 관련이 있었다. 김구 실패 후 반탁운동의 주도권은 이승만과 한민당으로 넘어갔고 그 운동은 반공·반소 운동과 구분할 수 없게 됐다.

한민당과 군정청 안의 연합 세력에게 신탁통치 분란은 중대한 기회가 되었다. 지도자들은 매우 계산적이었다. 제 기득권을 지속하는 것을 빼고는 국민에게 아무것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애국자로 부각시키며 자신의 논리에 일정한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었고 국가적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기회를 제공했다(301). 속절없이 왜곡된 모스크바협정은(302) 반공·반소 운동을 격렬히 전개하게 했고 극우 세력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정책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또 좌익 세력을 매국적 세력으로 보이게 하려는 음모를 시도했다.

·우익의 진정한 합작은 소련과 미국이 협력하는 전제조건이었으며 좌익은 1946년 초 여전히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우세했다. 우익은 반탁운동을 미국과 소련 사이를 틀어지게 만들 수 있는 수단으로 봤다. 13일 신탁통치를 반대해 온 좌익 집단은 입장을 바꿔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협정의 전체 내용을 찬성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우익과 남한의 역사 서술은 물론 미국 역시 모스크바나 평양에서 지시한 결과라고 주장했다(303). 좌익 신문들은 이 입장을 지지했다. 우익의 선전은 효과를 발휘했다. 좌익은 소련과 결탁했다는 협의를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미국은 독립의 옹호자로 등장했으며, 남한에서 좌익의 지지는 일시적이지만 뚜렷하게 감소했다.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박헌영의 기자회견이었는데 <뉴욕타임즈> 기자 리처드 존스턴은 소련의 신탁통치와(304) 신탁 후 소련에 통합시키는 방안을 박헌영이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는 철회 기사를 내라는 요청들을 묵살했다. 박헌영의 명성은 이 사건으로 심각하게 손상됐다. 이틀 뒤 타스 통신은 소련은 한국 과도정부를 조기에 수립하자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305). 신탁통치 분규는 세계 전체에서 미국과 소련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데 중요한 사건이었다.

소련은 토착 좌익 세력이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어 유리한 위치에 있고 자신들의 이익을 모스크바협정의 이행과 상관없이 관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무너진 사태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소련은 이 사태를 미국과의 협력은 미국의 조건을 따를 때만 가능하다는 신호이자 배신행위로 해석했을 것이다(306).

캐는·하러 먼·트루먼 등은 한국 내부 사정을 전혀 모르면서 자신들이 들은 것을 동유럽 사건에 비춰 해석했다. 한국 상황을 알던 소련은 미국인의 배신이 모스크바협정을 명백히 위반하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진실은 공포에 사로잡힌 한국 우익과 일국독점주의자 한국의 미국인들이 국제협력주의적 정책에 맞서 도발적이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면서 협정의 한국 관련 사항을 위반했다는 것이다(307).

 

궁지에 몰린 하지

하지와 고문들이 공동 신탁통치든 다른 방법이든 한국에서 소련과 협력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군정을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남한에서 친미적 기반을 다지려고 일방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한국 문제에 대한 하지의 처방은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분단을 지향하는 일국독점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하지는 미국이 모스크바협정 대신 영구히 분단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309).

하지의 지지자들은 군정이 정책 지침을 받지 못했다고 국무부의 비판에 대응했다(310). 정말로 아무 지시로 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받은 지시는 반공적이고 친미적 방향을 고수하는 한 시행할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혼란은 미국의 정책을 수립한 수뇌부의 갈등과 모순을 드러냈다. 하지는 지지를 받으며 남한에 반공 방어벽을 쌓기 시작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면서 정무위원회의 계획을 추진하는 명목상의 수반에서 임정의 김구 세력은 제외됐다. 김구 등은 방향을 돌려 하지를 배신했다(311). 하지는 이승만과 그의 독촉 그리고 한민당 지도자들에게 돌아갔으며 미소공위에 그들의 가치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모스크바협정의 진정한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군정의 핵심 과제는 한국 과도정부의 모체로 남한 정치단체의 연합 전선을 만드는 것이 되었다. 대표민주의원을 새로 조직된 한국 정부이자 주요 정당의 연합체라고 표현했다. 설계자는 프레스턴 굿펠로와 이승만과 하지였다. 좌익, 김규식과 온건파는 참여하지 않았고 우익 단체들만 참여했으나 언론과 소련에 미리 알리지 않고 신속히 이뤄졌다(313). 실제 세력에 비례해 대표권을 주면 남한에서 어떤 식으로 해도 좌익이 다수를 차지할 것이 분명했다(315). 군정은 대표민주의원 안에 우익의 우세를 확보하려 했다. 대표민주의원은 28명의 최고정무위원으로 구성됐다. 24명은 우익 정당 출신이었고 4명은 좌익이었는데 지주 출신으로 브라운대를 졸업한 백상규만 참석했다. 인공 지도자는 모두 불참했다. 대표민주의원은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적 과도정부 수립 임무와 외국과 협상하는 것이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통일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대표도 민주도 의회도 아니었다.

군정은 대표민주의원에 수송 차량을 제공하고 1인당 한 달에 3000(200달러)를 지급했다. 김성수가 100만원(67,000달러), 대한경제보국회에서 200만원을 기부했고 대부분 이승만과 미국의 그의 계좌로 들어갔다(316). 하지는 눈감아주었고 좌익을 비판했다. 여운형을 완전한 공산주의자로 해석했다. 군정은 조선공산당과 인공의 온건한 좌익을 급진파"와 분리하고 고립시켜 남한에서 연합을 이루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대표민주의원 지도(317)자들은 좌익과의 연합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좌익은 조선공산당부터 김원봉이 이끈 임정의 좌익 계열까지 아우른 연합 전선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해 대응했다. 민전은 인공의 직접적 계승자였다. 서울 중앙인민위원회를 대체하고 지방의 지부는 인민위원회에 기초를 두었다“. 민전 창립총회는 215~16일 종로 YMCA 빌딩에서 열렸다. 박헌영·허헌·이강국·한빈·김원봉·홍남표·여운형이 연설했다. 남한의 민전 핵심 지도자 가운데 소련에서 훈련받거나 지령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남한 우익세력과 김일성의 임시인민위원회에 대응한 조직이었다 (318). 북한으로부터 독립적이었다. 민전은 남한의 토착 좌익의 산물이었다. 미국은 이런 차이를 간파하지 못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남한 과도정부로

320일 미소공위가 열리기 전까지 미국의 한국 정책은 굳혔다(319). 국제협력주의자는 힘을 잃었다. “효과적 통제를 강조하는 국무부의 정책이 워싱턴과 서울을 모두 지배했다(320). (1)군정이 추진한 정책을 사실상 승인했다. (2) 소련은 미국의 한국 정책을 묵인하며, 소련이 묵인하지 않는 계획은 남한에서만 시행된다. (3) 한국의 토착 좌익은 소련의 지배에 사용되는 도구로 생각된다는 것이다(321).

 

미소공위의 협상

예비회담은 미국이 북한에 쌀을 공급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국무부는 쌀 문제를 무시하면서 소련이 남한에 석탄 공급을 거부했다는 사실만 정치문제로 삼기로 했다. 미소공위는 320일 대표 5명씩 참석하여 열렸으며 각 진영은 다수의 정치·경제 전문가와 고문의 도움을 받았다. 한국 과도정부 수립에 한국의 어떤 집단과 논의할 것인지 명확히 합의하지 못했다. 미국의 제안으로 공위는 316일 무기한 중단됐다. 소련은 모스크바협정을 강경하게 비난한 한국의 정치 단체들은 협정의 이행과 관련해 협의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남한에서 반탁운동의 흥분이 가라앉은 뒤 신탁통치를 일관되게 지지해 온 나라가 미국이라는 사실은 명백해졌다(322). 더 중요한 점은 군정이 지원한 대표민주의원이 반탁·반소 시위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소련이 알았다는 것이다(323).

10차 회의에서 미소공위는 한국 정치단체들과 협의하는 방안을 거의 타결했다. “협의 대상이 된 모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협정을 인정한다고 선언해야 하며 공위에서 결정한 사항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11차 회의 때 미국은 앞선 회의에서 합의했던 사항을 번복했다(324). 15~16차 회의에서 협의 대상 문제를 둘러싸고 밀고 당기는 논쟁을 벌였고 그 뒤 1차 미소공위는 중단됐다. 11차 회의에서 미국은 군정에 충성스런 한국인을 거부하고 협의 대상으로 좌익인 민전과 온건파 정당만 남겨두거나, 소련에 반대함으로써 한국 문제를 소련과 협조할 수 없도록 몰고 가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325). 미국은 소련과의 논쟁을 민주적 자유라는 본질적 문제와 관련된 차이로 다시 해석하려고 했다. 한국에 처음 도착한 미국 대표들은 민주적 자유가 보장됐다는 추정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정의 정책을 받아들인 한국인에게만 보장됐을 뿐이다. 소련 대표단은 남한에서 군정이 인민공화국을 비롯한 좌익 단체를 탄압한 사실을 지속적으로 부각시켰다(326). 특히 인민위원회와 관련 조직이 남북 두 지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 주장을 되풀이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소련이 점령한 북한 지역까지 확대되기를 바랐으며 소련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한국 정부가 미국이 점령한 남한지역까지 넓혀지기를 기대했다는 데 있었다(327). 언론의 자유 문제는 군정이 쟁점을 호도하고 소련을 중상하려는 허구적 문제였다.

 

미소공위를 전후한 좌익 탄압

223일 군정은 법령 55호로 정당등록법을 공포했다(328). 법령의 목적은 경찰이 좌익을 색출해 체포하고 조직을 해체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공위를 휴회하자고 최종적으로 제안한 핵심 요인은 대표민주의원의 명백한 무능함에 있었다. 그래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고 극우 세력을 배제하려고 했고 우익의 문제가 내부적 약점과 대중적 지지의 결여때문이 아니라 좌익의 지속적 존재 탓으로 돌리려고 했다(330). 3~4월 군정은 남한 좌익을 뿌리 뽑으려는 정책을 결정했다. 9월 이후 탄압은 미소공위가 진행되면서 강화됐고 공위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남한에서 좌익을 뿌리 뽑기 위해 점령 지역을 청소하기로결정했(331). 이승만은 독촉의 조직 활동을 고무하려는 목적에서 지방을 순회했다. 경찰이 이승만을 지원한 것은 군정 정책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이뤄졌지만, 이승만은 정읍 연설에서 남한 단독정부를 요구하면서 이 범위를 넘어섰다(332).

하지는 이승만의 행동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지지하는 우익 청년들의 주동자들에게 짧은 구류를 선고하고 지위를 지지한 대동일보를 일시적으로 정간시켰다. 경찰은 지폐위조단을 적발했다. 조선공산당 최고 간부 이관술·권오직·박낙종에게 체포 영장이 발부됐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333). 이 사건을 기회로 남한 전역에서 다양한 좌익 단체의 본부를 수색했다. 특별 표적은 조선공산당 인천지부 지도자 조봉암이었다. 투옥됐다가 풀려난 그는 박헌영을 비판하면서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9월 말 조선공산당 지도자 대부분은 투옥되거나 수배 중이었다. 군정은 독촉이 좌익을 잠식하길 바랐으나 결집력을 보여준 부류는 대일 협력자와 한민당 세력뿐이었다. 지방에서 자력으로 살아남은 우익 정당 조직은 없었다(335).

 

좌우합작위원회와 과도입법의원

1946년 가을에 과도입법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군정은 극우 세력과의 관계를 느슨하게 하고 온건파 및 진보적인 한국인과의 관계를 형성하기로 결정했다. 하지의 이런 결정은 대표민주의원의 무능하고 서툰 정치적 행동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었다(336). 하지는 육군 중위 레너드 버치에게 온건파는 포함하되 극좌와 극우는 배제하는 중도파 합작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여운형과 김규식의 약속을 얻는 데 집중했다. 좌익의 압력을 받는 여운형을 미국 진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여운형은 거절했다. 순종적이고 우유부단한 동생 여운홍은 인민당을 떠나 사회민주당을 세우는 데 동의했다(338). 사민당 강령에는 반소 내용이 들어 있었고 군정에서 자금을 받았다. 여운홍과 사회민주당의 책략에 여운형은 크게 당황했지만, 민전이나 인민당을 떠나지 않았다. 여운형은 박헌영을 이기기 위해 미국과 연합할 의사가 있었지만, 민전의 광범위한 조직 기반과 자신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여운형은 실용적으로 그리고 기회주의적으로 미국의 점령은 지속될 것이며 좌익의 주도권 다툼에서 미국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봤을 가능성이 크다(339).

722일 좌우합작위원회가 첫 모임을 가졌다. 우익에서는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김붕준이 참석했다. 좌익에서는 여운형·허헌·김원봉·이강국·정노식이 참석했다. 여기에 제외된 모든 정치지도자나 단체는 이를 치명적 위협으로 봤다. 박헌영은 강하게 반발했다. 5개 요구안(모스크바협정 전면지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 개혁, 친일파·민족반역자·파시스트 정치 활동 금지, 남한 권력을 인민위원회에 이양, 군정 아래 과도적 입법기관 반대)를 받아들이면 합작을 지지하겠다고 제안했다. 민전은 좌익이 합작위원회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그들이 요구를 가결했으나 여운형과 김원봉은 민전 회의에서 이런 입장에 반대했다(340). 여운형과 박헌영은 좌익 주도권을 놓고 투쟁했다. 여운형은 박헌영이 합작에 반대하라는 북한의 지시를 받았으며 박헌영을 투옥시켜야 한다고 암시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합작을 돕는 길은 좌익을 체포하는 것이라고 믿게 됐다. 좌익에 대한 급습은 민전 내부의 분열을 표면화했다. 여운형이 인민당 당수와 민전 의장단에서 물러난 직후 인민당은 조선공산당과 합병해 노동당을 만들었다. 이는 좌익이 합작위원회에 참여하는 데 반대한다는 의미였다(341).

죄악 진영이 분열하고 박헌영과 이강국의 체포영장이 발부된 뒤 합작위원회는 다시 회의를 열었다. 남한과 북한의 좌우합작을 거쳐 모스크바협정에 따른 과도정부 수립을 요구했고 지주에게는 조건부로 보상하지만, 농민에게는 무상분배라는 토지 개혁을 촉구했다. 불행히도 합작 노력은 가을 인민 봉기가 일어나면서 무산됐다. 이승만은 합작 노력과 반대 노선을 걸었고 박헌영처럼 탄압받지 않았다. 한민당은 합작 구상을 전면적으로 반대했다. 합작위원회의 토지 개혁안을 반대했으며 합작위원회 와해를 자기 공로로 돌렸다(342).

버치는 합작을 추구했지만, 상관의 도움이 부족했고 중도파에 힘을 실어주면 좌익과 우익을 이끌 수 있을 거라는 그의 견해는 틀렸다. 중도파는 기반이 없었지만, 좌익은 강력한 조직과 대중적 지지를 받았고 우익은 부유층과 관료 기구에 의지했다. 미국의 수용 기준은 우익과 좌익에 대한 실제 대중적 지지 분포와는 별개였다. 오히려 배제당한 쪽은 남한 전역에 걸쳐 강한 조직을 대표하는 사회 세력이었다.

5월 공위가 중단된 뒤 군정의 정책 입안자들은 민주적 선거를 구상했다. 기본적 자유라는 근거를 부여하고 민의에 따른 통제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343) 생각했다. 군정은 선거를 한국화 정책의 부속물로 생각했다. 한국인들은 입법기구 설립이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전조로 생각했다. 하지는 과도입법의원을 미국 상원처럼 소수로 이뤄진 기구에서 약간 변형된 것으로 구상했다. 90명 가운데 절반을 임명할 권리와 절대적인 거부권을 가졌다. 선거가 치러지는 과정은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뽑는 제도와 유사했다(344).

과도입법의원은 특정한 선거구를 설치해 뽑지 않고 55만 명마다 1명씩 할당됐다. 서거는 10월 인민 봉기가 일어나는 동안 치러졌고 너무 빨리 실시되어 선거가 있는 줄도 몰랐던 한국인이 많았다. 서울 출마자는 여운형을 빼고 모두 한민당이나 독촉 출신이었다. 여운형은 낙선했다. 하지는 과도입법(345)의원 가운데 나머지 45명을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에서 지명했다. 그러나 우익은 지지자 14명을 거기에 끼워 넣었다.

 

결론: “불만의 소리

좌익은 우익이 101로 우위를 차지한 고문단과 우익이 454로 우세한 대표민주의원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좌익 지도자에 대한 광범한 탄압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진행된 합자기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으며, 관료 체제에 부속된 무력한 입법기구를 창출할 목적에서 치러진 부정선거에 반대한 행동 때문에 비판받았다. 진정한 문제는 군정의 행정 관료와 그들을 선발하고 역할을 지시한 미국의 정책에 있었다. 우익과 일제 치하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계속 우위를 차지한 현상은 우연이 아니라 미국 정책의 직접적이고도 필연적인 결과였다. 의식 있는 한국인은 직접적인 기본 행정 외에 미국이 착수한 거의 모든 사안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좌익도 물론 불만을 품었다(347).

한국에 대한 워싱턴의 생각은 국제협력주의적 희망과 한국 현실 사이를 계속 오갔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일국독점주의적 논리가 분명히 승리했다(349).

한국전쟁의 기원 2부7장(브루스 커밍스 23.12.24).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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