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부 1945~1947년 중앙의 정치 상황
9장 지방 인민위원회의 운명
인민위원회가 소멸한 근본적 원인은 그들을 적대시한 미국의 권력이었다. 인민위원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끝내 파괴됐다. 남한의 몇몇 고립된 지역에서는 군정이 실시된 3년 내내 영향력을 행사했다(387). 인공에 공산주의자와 좌익이 존재하고 인공이 소련의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은 남한 전역에서 인민위원회를 탄압하려는 미국을 정당화했다.
미국 그리고 그들과 연합한 한국인은 해방 기간의 정치적 갈등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는 주요 방법은 중앙권력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11~12월 군정 정책 입안자들은 인민위원회를 제거해야만 지방에서 대안적 정치조직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뢰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조직과 국가경찰을 이용해 인민위원회와 그 산하 조직을 무너뜨리고 진공상태를 만들어 우(388)익과 보수 세력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의 지도자들은 대중의 지지 기반이 갖는 중요성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았다. 관료 기구와 경찰을 장악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옛 체제가 유지된다면 그것이 권력을 장악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미국인들보다 더 잘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민위원회가 대부분 해체된 뒤 그것을 대체한 대중적 정치 조직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대중과 지방은 다시 중앙권력에 휘둘리게 됐다.
미국이 개발도상국에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는 뛰어났지만, 정치조직을 형성하는데 미숙했다.(새뮤얼 헌팅턴) 미국은 기존 정치조직을 대체할 지방 정치조직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했으나 한국의 보수 세력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줄 수는 없었다. 문제는 미국이 그런 임무를 감당할 수 없는 정치집단을 지원하기로 한 편협한 결정이었다(389).
전라남도 인민위원회
1945년 전남은 교통·통신이 불편하고 낙후했다. 동척이 경영한 경작지의 소작농 비율이 가장 높은 도였다. 동척의 소작농은 전남 논의 46%를 경작했다. 그러나 인구 이동은 다른 곳보다 크지 않았고 해방 이후 평균 13%에 그쳤다(390). 1930년대에 도 밖으로 유출된 사람이 다른 도보다 훨씬 적었다. 농업 관계는 약화했지만, 돌아온 노동자-농민의 대규모 유입이 없었기 때문에 농민 봉기는 특별히 심각하지 않았으며 일정 기간 지속도지 못했다.
초기 전남 인민위원회가 성장한 주된 원인은 일본과 미국 지배의 공백기가 길었기 때문이다. 10월 22일 첫 군정중대가 도착했을 때 인민위원회는 사실상 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392). 인민위원회의 구성은 복잡했다. 해방된 한국에서 정치적 정통성에 대한 주요 시험은 일제에 협력했는가였다. 대일 협력의 오명을 피하거나 마을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고 인정된 전통적 지방 지도층은 지방 인민위원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소련의 농민평의회들처럼 인민위원회는 ‘혁명의 외피를 갖춘 예전의 마을 회의에 지나지 않았다.’(393).
전남에서 야전부대의 점령이 길어지자, 인원 부족으로 미국은 자주 인민위원회를 통해서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것은 권위를 승인해 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군정청은 모든 군에서 일제강점기에 근무한 한국인이나 보수 세력을 임명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1월 후반까지 각 도에는 일본인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널리 남아 있었다. 일본인 도지사 야기 노부오(394)와 전직 도 재무국장 임문무가 제출한 비밀 명부는 한국인 도지사를 뽑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395).
도 경찰은 일제강점기에 경찰에서 근무한 한국인들을 고스란히 보유했으며 그들과 이전 일본인 경찰 간부의 추천에 따라 인력을 보충했다(396).
광주 인민위원회가 발행한 『전남신보』를 정간시키고 검열받도록 했다. 목포위원회의 신문도 정간됐다. 전남 군 인민위원회 대부분은 미군 야전부대의 지원을 받은 경찰의 탄압을 받아야 했다. 인민위원회가 다른 세력과 긴장하면서 공존한 지역에서는 그 뒤 반란이 일어난 사례가 많았다(397).
여수·순천·광양·구례 지역에서 제69 군정 중대는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이 ‘인접 지역’에 국한된다고 생각했고 대부분의 특징이었다. 인민위원회의 전국적 성격을 깨닫지 못해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주었다. 이 지역은 인구 이동 비율이 도 평균보다 높아 추가 인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군은 광양에서 강력한 인민위원회에 의지해 행정을 처리했고, 구례와 순천에서는 보수적 성향에 만족했으며 여수에서는 좌익을 진압하지 않았다. 잔존 세력은 살아남았고 1946~47년 대체로 그 지역이 ‘적화됐다’고 봤다. 69중대의 방임 정책과 여수·순천 반란은 서로 관련이 있다(398).
미군은 전남의 군마다 완전히 다른 정책을 폈다. 진도·해남·완도·강진의 인민위원회와 치안대를 사실상의 행정부로 인정했다. 강력했던 원인은 지리적 거리였다. 모두 섬이거나 섬과 비슷한 반도였다. 진도와 완도는 본토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지리적 거리는 성장을 촉진했고 지방자치주의로 이끌었다. 인민위원회가 강력했던 것은 지리적 원격성 및 일본과 미국 지배 사이의 긴 공백기 때문이었다.(399). 미군은 네 개 군 모두 광주 경찰 본부에서 특무반을 구성해 지방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지도자를 대체했다. 경찰 특무반이 지도자들을 체포한 뒤 광주에서 대체 경찰 부대가 파견됐다(400). 강진의 일부 읍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도 경찰은 폭행 죄목으로 수많은 사람을 체포했다. 완도에서는 탄압이 몇 달 동안 이뤄졌다. 다른 지역도 같은 과정을 거쳐 재편했다(401). 그러나 미군은 ‘좌익’이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신뢰를 잃은 옛 총독부 경찰력을 사용하면서 진정한 무능이 나타났다. 미국은 실효적 지배를 확대해 나갔다(402).
5월 군정은 공장 운영 제도를 바꿨다. 군정이 공장을 직접 관리하고 ‘산업자문심의회’의 추천으로 관리인을 임명해 종업원을 고용하는 형태였다. 목포 주변은 지주-기업가 중심이었으며 미곡 무역은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새로운 부를 축적할 기회를 제공했다. 전라도 지주계급은 경상도보다 주장과 신념이 강했다. 이곳 인민위원회는 경상도보다 쉽게 무너졌다. 전남은 1946년 후반 봉기에 휩싸였지만, 전북은 비교적 평온했다. 강력한 조직과 보호가 없는 농민은 소작지로 되돌아갔다(403).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전북은 소작률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80%였고 익산·김제·정읍은 95%였다. 고창과 순창은 한민당의 김성수와 김병로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중심 지역이었다. 전북은 일제 후반에 큰 인구 이동이 나타났고 도로망이 발달했으며 전주와 군산 지역은 한국에서 가장 교통이 편리했다. 적색농민조합은 옥구·부안·정읍에만 침투했다. 인구 변화와 급진주의의 뚜렷한 관련성이 처음 나타난 것은 여기다. 군산·옥구·익신 지역의 높은 인구 증가(404)율과 강력한 인민위원회는 미곡 수출의 거점인 군산항으로 귀국한 한국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원과 순장의 인민위원회가 강력한 것은 산악으로 둘러싸인 지형상의 특징이 작용했다. 강력한 위원회는 서로 반대편에 위치했다. 남원·순창은 동남부에, 무주는 동북부에, 군산·옥구·익산은 서북부에 위치했다(406). 미군은 옛 경찰을 다시 고용하고 예전 관리들을 중심으로 새 군청을 조직하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관리 가운데서 도지사를 다시 임명했으며 일본인 도지사의 고문이었던 윤산희를 고문으로 두었다. 일제강점기 에모토 호쿄로 개명해 군산에서 검찰로 근무한 한국인을 전주지방검찰청장으로 임명했다. 1946년 ‘한국화’ 정책의 ‘모범’지역으로 일컬어졌다(407).
그러나 재채용된 사람들은 너무 권위가 없어 미군이 작은 일까지 동행해야 했다. 도 경찰은 남원에서만 맞설 수 있었는데 이것이 1945년 11월 남원 사건을 불러왔다. 인민위원회가 일본인 재산을 양도받은 것을 모두 군정에 반환해야 한다는 것을 거부했는데 전주 경찰서장이 부대를 이끌고 지도자 등을 체포한 뒤 조용해졌다.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존재한 군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일어났고 주로 일본인의 금품과 재산을 강탈했다는 죄목이 씌워졌다(408).
1945년 이리에 한민당 지부가 설립됐다. 한민당 지도자들은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지방 군수·경찰서장·신한 공사 직원이나 지방 관료 기구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소수의 개인이 있다면 대중의 지지보다 훨씬 낫고 강력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410). 미국은 자국의 후원으로 재편된 군을 인수한 관리들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현재 질서를 바꾸거나 개혁하려고 하면 의심했다. 해방 후 전북의 정치는 이분법적 논리가 횡행하고 있었다. 관료나 경찰, 지주는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몇 시간 안에 이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신속히 이동할 수 있었다. 접근의 편리함을 차이를 만들었다. 전북에서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발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장애는 높은 땅값, 지주의 압도적 세력, 높은 소작농 비율이었다. 전북은 부유했기에 지주와 중앙정부의 큰 관심을 끄는 지역이 됐다. 김성수는 일제강점기 온건한 인물로 알려졌고 학교 경영은 한국인들이 출세한 기회를 제공하고 민족적 전통을 보존하는 수단이 됐다. 군산 거점 산업화도 부농과 지주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411).
지주 제도는 소작농을 다양한 방법으로 통제했다. 한국인 지주가 더 많아 전통적 관계가 덜 무너졌다. 민족적 분열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전북의 한국인 지주는 일본과 가깝다는 오명을 피할 수 있었다. 일본인 지주가 많았는데 돌아가면서 소작농에게 토지를 팔거나 버린 것은 소작농의 지위라는 집단적 문제를 개인적 방법으로 해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전북 소작농의 연대를 약화했다. 전북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인구 변화가 적었다. 소작농의 생활은 어려웠지만 토지를 잃거나 경작지를 빼앗기는 곤경은 겪지 않았다. 쌀 수출 등의 활동으로 분화된 지주계급은 강제적 방법보다는 보수를 넉넉히 지급하면서 소작농을 좀 더 유연하게 통제했다(412).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인민위원회 세력과 급진성은 다른 모든 도보다 앞섰다. 인민위원회는 남해군을 뺀 모든 군에 존재했고 5개 군을 제외하고는 일정 기간 행정을 담당했다(412). 인구 변화율이 높았으며 가장 근대화된 지역이었다. 소작률은 중간 정도였고 적색농민조합은 1930년대 부산 서쪽의 군 대부분에서 존재했다. 인민위원회가 장악한 17개 군 중 15개 군의 1944~46년 인구가 20%이상 늘었다. 마산과 진주, 의령은 75%, 70%, 73%였다. 한국에서 인민위원회가 가장 견고히 자리 잡은 곳은 인구 변화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경남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던 부류도 많았지만, 북한과 만주에서 돌아온 인물도 많았다. 미군은 인민위원회를 뿌리 뽑으려고 했지만(414), 깊은 실망감과 분노를 지닌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면서 좌절됐다.
경남·경북은 반항적 경향이 짙었다. 식민 지배의 색채가 뚜렷했다. 일본인과 가장 활발히 접촉하고 큰 변화가 일어난 곳이었다. 또 분리주의적 전통을 갖고 있었고, 좌익 중 예안파 지도자 김두봉과 여운형의 측근 장건상은 동래 출신이었고 김원봉은 밀양이었다. 경남 공백기는 상당히 짧았다. 부산의 혼란은 극심했으나 치안대와 인민위원회는 일부 지역만 담당했다. 그러나 노동자위원회는 수많은 공장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415). 일본인 관료는 한국의 정치권력과 자치 정부를 공산주의와 긴밀히 연결시켰고 미군을 설득시켰다. 한국인 경찰은 치안유지 핵심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10월 초 미군이 군을 장악했을 때 인민위원회는 거의 모든 군을 통치하고 있었다(416). 야전부대는 인민위원회 문제에 계속 개입했다. 인민위원회도 난폭하고 위험한 행동으로 맞섰다. 둘의 충돌은 1945년까지 폭력적 무질서를 야기했다(417). 미군이 철수하면 인민위원회가 다시 장악했고 그러면 미군이 다시 돌아왔다. 하동·통영·양산·고성·함안 등에서 일어났는데 통영에는 계엄령을 선포했다(418).
인민위원회는 ‘급진 세력’이나 공산주의자가 선호하는 인물을 골라 조직한 것이 아니었다. 지도부는 지방 지주부터 자작농과 소작농, 일제 치하 관료, 30년대 농민조합 지도자와 공산주의자까지 걸쳐 있었다. 공산주의든 아니든 정치조직은 현재의 요구와 불만에 호소해 지지를 얻어내는 능력에 성패가 달려 있다. 경제적·사회적 불만에 더해 수많은 공산주의자가 감옥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공산주의가 갖게 된 정통성의 후광에 힘입어 여러 인민위원회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촌로와 면 인민위원회 의원은 서로 겹쳐있었다. 미군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보았고 인민위원회의 급격한 좌경화를 초래했다.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와의 연합이었던 인민위원회는 일제 치하에서 단련된 경험 덕분에 강인하게 투쟁할 수 있었다. 군 인민위원회는 1946년 봄에도 여전히 강력했다(419). 미군이 쌀을 공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세력이 유지됐음을 입증했다. 46년 가을 여러 군에서 유혈 폭동이 일어났다. 진압된 뒤에야 비교적 통제됐다. 그러나 전남과 다르게 전면적 숙청을 거듭 시행해야 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배마다 가득 탄 사람들은 인민위원회에 새로운 인력 공급원이 되었다. 그들은 넓어진 시야를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 풀어야 할 원한이 있었고 미국이 구축한 정치적 질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420).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사라진 주요 원인은 강력한 무장 세력의 부재와 주민들을 정치적 적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의 무능이었다(421).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1944~46년 인구 증가는 전국 두 번째로 높았다. 대구를 둘러싼 중심부의 군에서는 그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존재했으며 1946년 가을 봉기의 거점이 됐다(421).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이 사회적 혼란을 이끌었다. 노동자를 해외나 북한으로 보낸 관료에게 앙갚음을 한 사례가 많았다. 인민위원회가 통치한 8개 군 중 6개 군은 해안이나 경북 경계지역이었다. 완전 소작농은 35%로 중간 수준이었고 다른 도보다 대체로 넓은 면적을 경작했다. 경북 상황은 복합적이었다(423). 경북의 대체적 흐름은 안동·군위·의성·달성·예천·영천 등 중심부에 위치한 군에서 드러나며 여수·순천과 비슷한 정치적 정세가 나타났다. 강력하지만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한 인민위원회가 여러 세력의 반대와 공존한 상황이다. 1946년 가을까지 간헐적으로만 탄압받았기 때문에 지지 세력을 규합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경남보다 많은 지지를 받은 보수 우익 정당과 자주 공존했다. 인민위원회를 탄압하는 것은 쉽지도 순조롭지도 않았다. 미군들은 대구에서 일본인 관료들을 한 달 동안(424) 현직에 유임시켰다. 일제강점기보다 50%가량 더 많은 경찰을 고용했다. 경찰력의 증강은 전후 한국에서 동원 체제가 강화되고 통제의 필요성이 높아진 상황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다.
1946년 여름 우익과 좌익은 서울의 좌우합작위원회의 활동에 맞춰 합작을 추진했다. 대구지역평의회였다. 우익과 좌익이 불안하게나마 공존하면서 대구의 정치를 경북 여러 군의 정치와 일치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야전부대는 45년 10월 모든 군을 점령했다(425).
각 군정중대는 인민위원회 지도자를 추방하고 대구 도청이 임명한 군 관리를 임명했다. 기준은 일제 치하에서 근무한 경험과 분량이었다. 경남처럼 일본 등지에서 돌아온 사람이 계속 유입된 것은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면 새로운 인물이 자리를 대체할 수 있었다. 세력을 유지한 핵심적 환경 요인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었다(426). 좌익과 우익이 결정적 우세를 보이지 못한 채 공존한 상황은 해안에 인접한 군에서 널리 나타났다. 총과 배급권을 가진 사람이 한국에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하지 장군의 관찰은 분명 정확했다(427).
인구 변화가 크고 좌익과 우익이 긴장 속에서 공존한 중심 지역의 군에서는 여러 인민위원회가 46년 가을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미군은 물론 인민위원회와 관련되지 않은 한국인 군청 직원은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이 면 행정을 맡도록 허락함으로써 그 위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뒤 14개월 만에 경북 전체에 거대한 봉기가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봉기에 필요한 조직력을 공급했고 급격한 인구 유입은 기꺼이 무기를 들려는 분노에 찬 사람들을 공급했다(429).
충청남·북도 인민위원회
군정이 실시된 남한에서 가장 치안유지가 잘되고 쉽게 통치된 지역이었다. 충남 서부와 서북부, 충북 남부에서만 어려움을 겪었다. 두 도는 농업이 중시이었다. 충북은 교통이 매우 불편한 산간 지대가 많다.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인구 변화는 전국 평균보다 상당히 낮았다. 소작률은 경상, 전남보다 높았다. 충북은 일본군에 자원한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쓴 사람들도 있었다.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었다. 공백기는 충북보다 충남이 더 길었다(430).
군정중대는 11월 초 충남북에 모두 도착했다. 상대적으로 편리한 통신 덕분에 순조롭게 지배할 수 있었다. 일제는 대전을 철도의 요충지로 만들고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간 유용한 도로를 놓아 충남에 훌륭한 교통망을 건설했다. 충청지역은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가 깊고 오래 지속된 곳이었다. 미군이 진주할 당시 거의 모든 군은 인민위원회의 지배하에 있었으나(433) 군정은 각 군을 통치하는 데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46년 가을 봉기가 일어났을 때 미군은 이 도가 ‘남한에서 우익이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했다(434).
충북보다 충남이 좀 더 다루기 힘들었는데 공백기가 좀 더 길었기 때문이었다(435).
해방 전후 경찰이 정치권력의 최고 대행 기관이었다 46년 1월 대전에서 열린 군 인민위원회 집회에서 대표자들은 경찰의 박해가 조직 활동을 가장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옛 경찰력이 해체되지 않고 약간 느슨해진 도에서 더욱 그랬다. 농민은 자신이 탄압 대상이 될 때 조직 운동가의 호소에 호응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치 조직자들에게 조직 지배 아래 있는 농민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준다. 1946년 10~11월 충남 서북부 4개 면과 충북 영동군의 중대한 혼란은 이곳에서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진압된 뒤에도 일정 기간 소멸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충청도는 인민위원회가 성장하기에 적절한 조건이 아니었다. 비교적 짧은 공백기와 편리한 교통·통신 덕분에 중앙의 지배는 손쉽게 다시 확립될 수 있었다. 여기서도 중요한 점은 인구 변화가 비교적 적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 시기 인구 유출이 극히 적었고 해방 뒤 돌아온 사람도 적었다. 일본에서 미국 한국의 지배로 쉽게 이행될 수 있었다(436).
강원도와 경기도 인민위원회
두 도는 모든 측면에서 대조적이었다. 경기도는 교통·통신·산업 시설을 갖춘 반면, 강원도는 가장 더딘 도였다. 강원도는 인구 변화가 컸지만 다른 도와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경기도는 대체로 보수적이었다. 소작농의 비율은 전체에서 매우 높았다. 강원도의 소작률은 제주도 외 가장 낮았다. 적색농민조합은 해안의 군들에서 강력했다. 미군 진주 전 서울의 건준과 인공의 우세는 경기도 전역에(437)서 인민위원회의 급속한 확장을 초래했다. 그러나 편리한 통신과 높은 소작률 때문에 몇 주 만에 소멸했다. 서울에 집중된 강력하고 기동력 있는 경찰의 존재는 지방 인민위원회를 더욱 쉽게 해체시켰다. 강원도는 반대였다. 46년까지 지배적 위치를 유지했다. 미군은 강원도 해안 지역 군을 점령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산맥을 가로지르는 철도나 고속도로가 없었다(438).
강릉은 남한에서 좌익이 가장 강력한 군으로 지목됐다. 30년대 적색농민조합 지도자가 해방 뒤 인민위원회도 이끌었다. 삼척도 비슷했다. 해안 지역의 상황은 46년 7월 좌익과 수많은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이 체계적으로 탄압받아 감옥에 비참하게 투옥되면서 약간 바뀌었다. 46년 가을 삼척, 강릉에서 봉기가 일어나 47년 태백산맥에서 유격전으로 나아갔으며 그 뒤 전투에서는 현지 주민과 북한에서 내려온 한국인이 충돌했다.
9월 미군이 진주한 뒤 경기도는 큰 문제 없이 접수되었다. 경기도의(439) 정치적 사건은 장택상을 수도경찰청장에, 구자옥을 도지사에 임명하면서 잘 장악됐다. 장택상과 구자옥은 한민당의 중요한 초기 지도자였으며 경기도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을 신속히 소멸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46년 중반 경기도에서 인민위원회가 활동했다는 보고는 거의 없다(442).
제주도 인민위원회
제주도는 소작률이 매우 낮았고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은 대부분 자작농이었다. 직업 구조는 상당히 다양했고 주민 49%만이 농업에 종사했다. 철도는 없었고 섬 외고가 지역을 잇는 좁은 도로가 하나 있었다. 해녀가 조개류와 해초류를 채취하는 영세한 산업 때문에 인구는 여성이 훨씬 많았다. 제주도는 식민지 시대에 많은 인구가 일본을 오가면서 재일 한국인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일본과 형성한 이런 긴밀한 관계와 잦은 접촉은 수많은 제주도 출신 한국인을 급진적으로 만들었다(443).
44~46년 25%의 인구 증가율이 나타났다. 공백기도 남한에서 가장 길었다. 적색농민조합이 활동했고 19세기에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인민위원회가 발달하는 데 이상적 환경을 제공했다. 건준 지부는 45년 10월 제주시에 설립되었다. 미국 조사단에게 건준활동에 개입말 것, 일본과 경찰의 무장 해제하고 추방할 것, 행정권을 건준에 이양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만 받고 본토로 돌아갔다. 지방 자치 기관이 섬 전체에 퍼졌으며 곧 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꿨다. 보안대·청년 단체·농민조합·공장관리위원회·소비조합 등 여러 조직을 거느렸다. 자발적이며 독특한 형태로 결성됐다. 공산주의자는 지도부에 있었지만, 인민위원회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학습 모임과 강좌를 개설해 체육과 오락 활동을 가르쳤다. 학교들을 관할했으며 『제주신문』을 발간했다. 45~46년 제주도는 거의 다 인민위원회가 장악했다. 제주도는 본토에 집중한 미국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444).
미군은 인민위원회가 수적으로 매우 우세하며 온건한 정책을 따른다고 봤다. 실제로 온건한 정책은 아주 매력적이어서 우익은 인민위원회가 더욱 강력해질지 봐 걱정했다. 46년 3·1 독립운동 기념한 시위에 섬 전체의 인민위원회는 수만 명을 동원했다. 미군이 임명한 도지사 박종훈은 대일 협력자였고 신임 제주 경찰 서장 신우경은 일제강점기의 특고경찰이었다. 한라단 같은 우익 단체도 있었다. 경북처럼 오랫동안 좌익과 우익이 공존했다. 46년 가을 과도입법의원 선거에서 제주도에서는 2명의 좌익이 당선됐지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행방불명됐다. 제주도의 직업 구성이 다양하게 분화돼 있던 것도 인민위원회가 발전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농민 인구의 분화는 전통과 단절시켜 정치적 참여 등 새로운 형태의 활동에 가담하게 만든다(445). 남한에서 가장 좌익이 강력했던 강릉이 직업 분화 순위가 1위이다. 인민위원회가 통치하지 않은 울산과 안동은 2위와 6위였지만 두 군 모두 강력한 인민위원회와 산하 조직이 있었으며 안동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면을 장악했다(447).
결론
인민위원회가 오랫동안 발전하는 데 이상적 환경을 다음과 같다. (1)30년대나 40년대 초반 인구가 줄었지만 해방 이후 급증했다. (2) 농민이 주로 소작농은 아니며 지주계급의 권력 구조를 침식하거나 약화시킨 상황에서 일정한 독립성과(447) 영향력을 가졌다. (3) 일본에서 미국으로의 지배간 긴 공백기가 있다. (4) 통신과 교통이 상대적으로 불편하거나 인민위원회가 그 수단을 장악했다. (5) 급진적 농민운동의 경험이 있다. (6) 직업 구조가 상대적으로 분화됐다. (7) 정치적으로 복합적인 상황이 전개됐다. 제주도는 이런 특징을 모두 지녔으며 그 정도 또한 다른 지역보다 컸다. 인민위원회는 깊이 뿌리내려 48년까지 섬을 지배했으며 전후 아시아에서 가장 잔혹하고 지속적이며 집중적인 토벌 작전을 전개한 뒤에야 뿌리 뽑을 수 있었다.
근대적 정치가 전개된 시와 좌익 정당과 노동조합,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가 노련하게 상대한 곳은 해방 뒤 좌익이 급속히 몰려들었지만 미국은 관료 조직에게 그들을 억제하는 데 충분한 동력을 제공했다.
군 수준에서는 근대적 정치와 전통적 정치가 가장 복잡한 형태로 섞였다. 경상도의 인민위원회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전라도에서는 처음에 강력했지만, 새 지도부에 예 세력이 섞이고 인구 변화가 크지 않아 세력을 유지하지(448) 못했다. 저항은 산발적 농민 봉기의 형태로 나타났다. 인민위원회에 반대하는 한국인 지도층이 나타났는데 토착의 전통적 지도층이 존속된 까닭은 식민 지배의 영향력이 적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면 단위의 정치는 전통적이었다. 좌·우익 대립은 대부분 파벌 대립이었고 좌익 지도자 다수는 근대 정치의 겉모습을 한 마을 원로였으며 농민은 전통적 반란의 형태로 저항했다. 인민위원회나 급진주의에 대한 탄압은 상위 행정 단위에서 시작돼 그 아래로 옮겨갔다. 인민위원회 탄압이 이뤄지면서 중앙집권화가 강화되고 하달식 명령 체계가 확립됐지만 인민위원회는 반대로 자발적이고 상향식 의사 전달을 구현함으로써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자발성은 인민위원회의 큰 약점의 하나였다. 인민위원회는 밀폐 공간처럼 자신이 관할하는 군의 사무를 다스리는 데 만족하면서 다른 지역의 사건에는 대체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분할되고 특정 지역에 치우친 인민위원회의 행정은 일종의 세포 구조를 가졌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급적 구조는 아니었다. 이런 구조적 약점을 이용해 각 단위를 다른 단위와 분리해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민위원회를 탄압하는 것(449)은 쉬웠다.
인민위원회가 패배한 가장 핵심적 요인은 미국의 권력이었다. 대중의 지지를 받았으나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적·체계적으로 뿌리 뽑았다. 이런 조치가 남한 농촌의 정치적 통합과 참여에 미친 영향은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450).
'세미나 발제문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전쟁의 기원』 2부 11장 브루스 커밍스 2024.1.27. 바다사자 (0) | 2024.01.27 |
---|---|
『한국전쟁의 기원』 2부 10장 브루스 커밍스 2024.1.27. 바다사자 (1) | 2024.01.27 |
『한국전쟁의 기원』 2부 8장 브루스 커밍스 2024.1.7. 바다사자 (2) | 2024.01.14 |
『한국전쟁의 기원』 2부 7장 브루스 커밍스 2023.12.24. 바다사자 (0) | 2023.12.24 |
2023.12.17. 『한국전쟁의 기원』 6장 발제. 풍경 (1) | 2023.12.17 |
- Total
- Today
- Yesterday
- 옥중수고
- 알튀세르
- 마키아벨리
- 무엇을할것인가
- 레비스트로스
- 생산관계
- 로마사논고
- 헤게모니
- 의식과사회
- 프롤레타리아 독재
- 개인심리
- 생산양식
- 스피노자
- 루이 알튀세르
- virtù
- 루이알튀세르
- 안토니오그람시
- 공화국
- 검은 소
- 한국전쟁의기원
- 신학정치론
- 그람시
- 브루스커밍스
- 딘애치슨
- 야생의사고
- 이데올로기
- 옥중수고이전
- 집단심리
- 이탈리아공산당
- 계급투쟁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