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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남한 단독정부를 향해

 

 

미군이 진주한 뒤 나타난 정치권력의 기본 도구-관료제도경찰군대-와 관련된 미국 정책의 유형은 한국이 분단된 나라이며 미국과 소련이 관리하는 지역 사이에는 협력이나 정책의 상호 보완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미국과 달리 소련은 북한을 점령한 직후 인민공화국을 인정했다. 그 결과 두 외국 세력은 정치적 성격이 전혀 다른 한국인들과 연합하면서 완전히 다른 구조에 입각해 정책을 실시했다.

미군정과 연합한 한국인이 대부분 과거에 일본과 협력했다는 오점이 있어 대중의 지지를 받거나 군정 외부에서 정치조직을 세우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미군정의 목표는 미국의 정책에 자신의 민족주의족 자격증을 빌려줄 수 있는 애국적이고 믿을 만한 한국인을 모으는 일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귀국과 정무위원회

1945년 하지와 고문들은 임정에 관련된 이숭만김구 같은 인물이 미국의 정책을 도울 수 있는 대중적 지지와 정통성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국무부는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개인적 야망이 있으며 다소 무책임하다고 판단했으며 망명자들만임정을 지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 국민을 진정으로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한국인 단체는 없다고 판단했다. 국무부 극동국장 존 카터 빈센트는 한국 국민이 자신의 정부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허락하여야 한다는 일본 항복 이전의 국방부 결정을 유지려 했으나 국방부 차관보 존 매클로이는 공산주의자가 활동하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 주도하의 정부를 수립해 질서를 회복할 조언자를 발탁하고,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선거를 치를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는 것, 즉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군정에 동의했다.

단독정부 수립 결정은 19451120일 윌리엄 랭던의 전문에서 분명히 언급하였고 신탁통치안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인은 자기 생전에 조국을 되찾기를 바라며 어떤 형태라도 외국의 후견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이 사실이다. 김구 집단은 해방된 한국의 첫 정부로 경쟁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임정의 귀국은 불만이나 비난이 제기되지 않는 건설적 한국 정책을 시도할 기회를 미국에 제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랭던의 이 보고서(정책의 개요-257~258p)19462월 대표민주의원, 1947년 남한 과도정부, 1948년 이숭만 정부의 최종적 권력 인수를 가져온 정책을 만들어 냈다.

정무위원회와 관련된 제안은 일국독점주의적봉쇄 정책의 고전적 표현이며, 소련을 설득해 미국의 방침에 동참시키려는 정책을 포기하고 우리의 조건에 따라 협력하라고 말한 것이다. 빈센트 같은 국제협력주의적 전략가는 계획에 반대했다. 그러나 랭던은, 미군정은 이미 워싱턴의 반대에 개의치 않고 독자적 정책을 추진할 마음을 굳혔다.

임시정부를 이용하기로 결정한 군정의 첫 성과는 19451016일 이승만의 귀국이었다. 이승만은 맥아더가 제공한 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주미최고 책임자를 자처하는 이승만에게 국무부는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육군성과 전략사무국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승만은 굿펠로의 중재로 일본전선의 배후에 한국인을 침투시키려는 육군성의 계획에서 연락을 담당하는 인물로 승인 받았다. 또한 이승만은 조선의 국왕처럼, 미국인에게 호의의 대가로 한국에서의 일정한 양보를 제공했다. (1946년 중반 한국 자원의 양보와 관련해 이승만이 돌베어굿펠로와 거래한 사실이 드러나자 굿펠로는 한국을 떠나도록 강요받았다.)굿펠로는 전략사무국 고위관료로서 이승만을 일본에 보냈고, 맥아더. 굿펠로, 하지는 국무부의 기존 정책을 따르지 않기로 공모했다. 그들은 단순히 일국독점주의와 봉쇄정책을 지지하는 인물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정책 그리고 해방 또는 반격을 옹호하는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을 한국으로 귀국시킨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인들은 전설적 애국자를 잠깐이라도 보려고 이승만이 묵고 있는 조선호텔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승만은 누구인가? 1945년 당시 이승만의 가장 큰 이점은 그와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고 미국인은 더 적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보학(譜學-계보에 관한 학문) 전문가로 일했다. 이승만은 문과 과거시험에서 여러 번 낙방했다. 그뒤 배재학당에 들어가 영어를 공부했다. 서재필을 따랐지만 위상은 높지 않았고 독립협회와는 느슨하게 연결됐다. 그 직후 정치활동 때문에 투옥돼 수감되었고, 1905년 미국으로 떠나 조지워싱턴대학 2학년에 입학했다. 졸업 뒤 하버드대학 문학석사, 프린스턴대학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실이 한국 장년층에 명망을 얻게 되었고, 1910에 잠깐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1945년까지 미국에 머물렀다.

미국에 30년 넘게 머무르는 동안 이승만은 망명 정치가가 됐다. 직업없이 한국인들의 기부에 기대어 살았다. 그는 고집쟁이었는데, 1919년 임정 지도자들은 그를 독선과 권한침해로 고소하고 1925년 임정에서 추방했다. 1943년 재미한인연합회는 한국인들이 힘들게 번 돈을 남용하고 자기 이름을 알리는 데만 힘썼으며 타협하지 않는 완고한 인물이라 맹렬히 비난했다. 북한에 있는 반대파들은 미국인 같은 한국인이라 불렀다. 이승만은 외국인의 약점을 이용해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한국의 고질적인 술수와 약자가 강자를 제어하는교묘하고 중요한 외교술에 통달하게 된 곳은 한국이었다. 1945년 이승만은 70세 고령이었지만 하지 같은 미국인이 그를 엄청난 존재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한국인은 오랜 기간 망명한 애국자로 이승만을 환영했다. 인공의 허헌은 그는 평생 우리나라를 위해 싸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인공 주석으로 뽑았다고 말했다. 조선공산당의 해방일보도 평생을 한국에 바친 이혁명가의 귀국을 보도했다.

귀국한 뒤 이승만은 우익과 좌익을 통합하는 인물로 자신을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한민당과 조선공산당, 일부 인공 지도자와 그 밖의 단체를 대한독립촉성중양협의회라는 조직으로 결집시켰다. 그러나 1020일 미군 환영행사에서 그는 소련의 북한 정책을 비난했다. 또한 그는 인공을 참여시키거나 그들과 함께 일하자는 요청을 거부했다. 그 결과 좌익과 다수의 온건파는 이승만의 단결을 친일 한국인과 봉건 잔재를 포용하되 좌익 항일 투사를 제외하는 일관성 없는것으로 보게 됐다. 박헌영과 여운영 같은 좌익 지도자들은 1023일 독촉 창립총회에 참석했지만 112일 두 번째 모임이 열릴 때는 탈퇴했다.

이승만은 한국민주당과 연합했다. 한민당 지도자들은 이승만이 애국자로서 일정한 정통성을 자신들에게 주기를 바랐다. 그 결과는 결혼이었다. 계속해서 이승만은 인공과 좌익 전체를 맹렬히 비난했으며, 소련과의 관계를 손상시켰다. 또한 충칭에서 공산당을 제외한 김구 등을 귀국시키려한다고 털어 놓았다.

중국인 관료는 19455월 충칭에서 중국의 후원과 보조를 받으며 활동하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에 있는 한국인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모두 한국에 뿌리가 없고 추종자도 없다고 전략사무실에 말했지만 우궈전박사는 대원수(장제스)는 한국 임시정부 구성원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고, 미군정은 김구를 스튜에 필수불가결한 소금으로 묘사했다. 하지는 한국의 정치 사건은 극동 전체, 특히 중국의 정치 사건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중국에서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장제스는 민주국가가 된 한국이 측면에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김구를 후원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은 한국의 급진 세력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핵심은 극동 전체가 공산회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는 김구 휘하의 우익세력이 김규식과 김원봉이 이끄는 세력보다 먼저 서울로 돌아와햐 한다고 분명히 요구했다. 임정이 정부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을 국무부가 계속 반대했기에 군정은 김구에게 정부로 행동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구와 그의지지자 14~15명은 1123일 서울로 돌아왔고, 123일 김규식. 김원봉과 20명 정도의 지지자가 뒤따랐다.

불행하게도. 김구와 그 추종자들은 이승만보다 효용과 신뢰가 크지 않았다. 게다가 임정 요인들은 남한에서 목격한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신익희의 개인적 기록에 따르면, 통역관을 매수해 도총. 군청. 경찰에 자리는 얻은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 모두 뿌리 뽑는 동시에 외국에 의존하려는 정신도 없애햐 한다고 밝혔다.

 

좌익에 대한 탄압

군정은 인공을 보수세력을 지원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로 봤지만 인공이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의 범위를 명확히 알게 됐다. 군정은 좌익을 제거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좌익으로 기운 조직을 와해시키고 우익세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인공에 동조적인 매일신보를 탄압, 남한 언론의 본보기였다. 한국의 모든 언론 단체는 항의했다. 매일신보서울신문으로 다시 창간돼 한민당 지도자인 하경덕이 운영했다.

군정은 여운형과 그 지지자들에게 인민당을 결성케 했다. 노동 대중의 행방을 목표로 한 30개 항의 강령을 두었다. 한민당, 조선공산당과 자신을 차별화했다. 인공보다 좀더 온건한 세력을 흡수하고 인공의 적대자들이 인공을 과격한 세력 조직으로 묘사하기 쉽게 만듦으로써 인공을 약화시켰다. 19462월에 인공과 인민당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뭉쳤다.

군정이 임정을 과도적 또는 잠정적 정부로 세울 계획을 비밀히에 입안하고, 1120~22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는 하지의 요구인 공화국 명칭을 없애고 정당으로 다시 조직하려는 것이었다. 전국 대표자600여명이 참석했으며 허헌이 의장으로 주관했다. 참석자들은 군정 지지를 표명하고 38도선 이남에서 그 권한을 인정했지만 하지의 요구는 거부했다.

인공대표자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까닭은 네 가지다. 첫째, 군정은 임정이 정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둘째, 군정은 인공이 정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공의 지위와 관련된 모든 결정에는 소련도 참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셋째, .군 위민위원회 대표자들은 국호와 정부의 지위가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데 핵심 사항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넷째, 군정이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있으며, 인공이 군정의 주요 임무-일본인의 무장해제와 축출-에 협조하고 지원하겠다는 표명했으나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36년전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중대한 시기에 다시 직면했다고 여겼다.

하지는 맥아더에 보낸 전문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의 활동이 이전처럼 지속된다면 한국이 독립할 준비가 됐다고 평가되는 시간은 크게 늦춰질 것이다고 했다.

맥아더는 하지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하지는 1212일 공개적으로 인공을 비판하고 그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 뒤 공식 기록에서는 인공에 소속된 사람을 공공의 적으로 일컬었다.

115~6일 남한과 북한 전역의 노동조합 대표자가 서울에 모여 분산된 조합을 하나로 통합, 허성택이 이끈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였다. 전평 집행부는 10명으로 일제 강점기에 정치범으로 투옥된 바 있었다. 강령은 8시간 노동제, 임금과 노동 조건 개선, 아동노동 금지 등을 규정했다. 전평은 1946년 중반까지 남한 유일의 노동조직이었으며, 모든 공업 도시에 지방평의회를 둔 것으로 보인다. 남한의 노동조합은 짧은 기간 안에 일본인이 소유했던 공장 시설을 모두 장악했다. 군정이 우익세력을 지지하면서 노동조합 정책의 쟁점은 통제를 벗어났다. 그 결과 전평은 광범하게 탄압의 대상이 됐다.

군정은 비폭력적이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노동조합을 통제하려고 했다. 군정법령 192조는 일할 수 있는 권리는 존중되고 보호돼야 한다는 노동보조 조항이었지만, 법학자 에른스트 프랭켈은 이 조항은 피고용자를 해고에서 보호하지 못했고, 3자가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라 했다.

128일 파업을 금지하고 중앙노동조정위원회 설치를 규정한 군정법령 34호가 공포됐다. 비슷한 위원회가 지방에 설치됐고, 임명된 위원은 산업노동자나 그들의 대표가 아니라. 사업가나 전문직 종사자, 고용주였다. 그 위원회들은 경제적 영향력을 정치적 권력으로 변화시키는 전형적인 도구였다.

군정이 노동조합과 그들이 관리하던 공장을 통제하는데 사용한 방법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을 군정에 귀속시켜 한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관리하는 것이었다. 군정이 375개 정도의 공장과 상점에 관리자를 임명했다. 엄청난 부패가 작용했다.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뒤 대부분 공장의 완전한 소유주가 됐다. 남한의 기업가들은 스스로의 노력보다 정권과 유착에 의존해 존속했다.

128일 지방 농민조합 대표자와 그 밖의 정치 지도자들은 전국농민조합연맹, 곧 전농을 결정하고 김진영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전농은 인공의 토지 개혁 강령을 지지했다.

 

토지미곡정책

군정은 소작인을 위해 가혹한 소작제도를 개혁하고 미곡 유통 구조를 폐지해 경제를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기존의 토지 관계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한국인들과 정치적으로 결탁했다. 군정은 토지제도와 미곡경제에 관한 법령 두 건을 공포했다. 군정법령 9호는 다음과 같다.

현행 계약에서...소작인이 경작한 작물로 그 뒤 어떤 사람이 납부하는가에 상관없이 총액의 3분의 1일 넘지 못한다.“

이 법은 지주가 정당한 이유 없이 소작인과 맺은 계약을 파기하는 것도 금지했다. 두 번째 법령은 미곡을 자유롭게 팔 수 있는 시장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소작료 제한은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법령이 강제 수단이 아니므로 지주는 이를 무시했다. 자유시장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완전한 재앙이었다. 한국 농민의 절대다수는 잉여 생산물을 시장에서 거래하기는커녕 지주와 중개인에게 착취당했다. 자유 시장은 투기. 매점. 과소비의 열풍이었다. 통화팽창과 기아, 경제 붕괴를 불러왔다.

19462월 군정은 자유시장 정책을 철회하고 하루에 1인당 1홉을 배급하라고 지시했다. 전쟁 동안 일본이 허용한 분량의 절반이었다. 자유시장의 정책의 실패를 회복하는 방법은 사실상 일제의 제도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조선식량영단,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수입품통제회사와 그 밖의 운송. 유류.석탁 관련 독점기업이 포함돼 있었다.

신한공사는 군정명령 52호로 창설, 194511월부터 운영됐다. 동양척식회사에 소속된 모든 토지와 약 102000개의 일본인 회사 및 개인 그리고 19개의 공업. 기술. 광업회사가 소유한 토지를 감독하고 관리했다. 비료와 간척, 토지 등기, 토지 임대계약 및 식량조달과 관련된 모든 세부 사항을 관리했다. 신한은 군정 기간에 다른 기구들보다 좀더 성공적이고 효율적으로 기능했다. 동척에서보다 더 많은 부정과 부패가 나타났다. 경찰은 공출독려반을 조직해 가혹하게 쌀을 공출했고, 인민위원회나 농민조합과 연계된 농민을 적발하기도 했다.

1945~1946년 군정은 미곡을 수집할 다른 방도를 시도했다. 50명의 사업가로 구성된 애국자위원회를 조직해 농민들에게 비축해 놓은 쌀을 내놓도록 설득하게 하였는데, 성과는 없었다. 1213일 대한경제보국회를 조직한 부유한 지주들은 미곡 수집을 돕는 것보다 이승만과 임정 지도자들에게 자금을 공급하는 일에 치중했다. 지방을 돌며 이승만에게 기부할 부자들을 찾았다. 이 조직은 지주. 은행가. 사업가. 기업가 집단이었는데, 보국회는 2000원을 빌려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공했다.

굿펠로는 미국에서 이승만을 후원하는 단체를 결성, 이승만이 남한 최고 권력자가 됐을 때 이권을 얻으려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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