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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책을 시작하며-미국 외교정책의 방법과 이론에 대한 회고
과학과 신비:“고도로 비선형인 불안정한 자유경계의 문제”
전후 미국의 외교정책을 관찰하면 어떤 사람이 “중앙에 앉아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같은 일을 하도록 명령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결정론적 비인과성을 산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별적 정치 사건은 구조적이기도 하고, 임의적이기도 하며, 규칙적이기도 하고 예측할 수 없기도 하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한 역사를 요약하고 초월하기도 하며, 선택이라고 불리는 예측할 수 없는 간섭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는 인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정치에는 늘 비밀스럽고 예측하기 어려운 측면이 반드시 존재한다. 새로운 법칙을 만든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신의 일과 위치라는 형태로 특정한 역사⦁사회구조⦁정치를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그런 상황을 자신이 선택할 수는 없다. 그저 자신의 성향에 따르고 그런 개인의 충돌이 거대한 규모의 결과를 낳는다고 상상하면 역사의 발전은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충돌은 인간이 서로 협력하거나 반목하는 ‘변증법적 운동’이다. “토대가 되는 여러 조건, 물질성의 구조, 초기 상황, 외부와 내부 요소의 지속적 작용,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힘의 균형에 전적으로 지배되는”심층적 구조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 구조는 궁극적으로 희소성과 필요성이라는 구체적 조건이며, 인간의 변증법은 그런 구조 안에서 작동한다. 그 방법은 원칙적으로 현실적 지식을 모두 이용해 이런저런 일어나 사회적 총체를 설명하는 어떤 것이 돼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런 총체적 조사는 “실증주의(경험적으로 주어진 사실에 인식의 대상을 제한)에서 벗어난 특정한 구조⦁관계⦁의미를 드러내야”한다. 인간이 세계에 늘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처럼, 그렇게 함으로써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우리가 살고 있는 “실천적 분야”를 다시 조직하는 새로운 해석을 도출해야 한다.
니체는 지식이 발달하지 않은 초기 단계보다 인과관계를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됐다고 쓴 바 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라고 부르는 “수많은 계기의 연속”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 의미
에서 니체는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하나의 연속체이며 거기서 몇 조각을 분리해낸다.” 어떤 것이 갑자기 나타나면 우리는 그것을 “원인”이라고 부르지만 “이런 갑작스런 순간에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무수한 과정이 있다.” 니체는 원인과 결과를 “임의적인 분할과 단절의 관점”이 아니라 “연속체이자 끊임없는 흐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은 하나의 결과였지만, 서구에서는 그 뒤에 일어난 사건을 초래한 “최초의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1950년 6월 25일은 시작부터 잘못 이해된 결말이었다. 한국전쟁의 “첫 상황”은 1945년의 해방이었으며, 해방은 그 이전,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과 근대 세계 체제가 동아시아로 몰려든 시기에 움직인 세력이 만들어 놓은 산물이었다고 생각한다.
1945년은 미국에게도 기초가 마련되는 “첫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으며, 1947년이 냉전의 시작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내정 개입주의자의 대외정책과 그것을 국내에 적용하기 위한 국가기구가 탄생하는 분명한 계기가 됐다. 1945년 한국의 첫 상황은 봉쇄적 점령 정책을 촉진시켰고, 1947년에 지배적 세계정책이 됐으며, 한국정책은 미숙한 것으로 평가됐다. 봉쇄는 미국 제국주의가 적대 세력에 맞서는 전형적인 논리였다. 그 논리는 세계 전체보다는 팽창주의나 반격이라고 불린 국내의 다른 논리와 혼동됐다.
미국 외교정책의 이론을 향해
미국 외교정책을 만든 세력을 그동안 계속 잘못 이해한 까닭은 그릇된 이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매번 참사가 일어났지만, 그것은 그 자체의 원칙을 갖지 않은 독특하고 일시적인 일탈, 예외로만 간주됐다. 그러나 그 참사들에는 논리가 있었다. 한 정권에서 중대한 전환이 이뤄지고 다음 정권에서 승인됐다는 것, 이런 조정을 이루도록 도운 핵심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점진주의와 미국의 달걀
미국은 “자유를 기반으로 태어난 나라”로, 자유롭지 못한 사회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며, 치열한 계급투쟁이 비교적 드물었기에 점진적 정치가 나타난 것이다. 즉 미국은 세계의 나머지 나라를 이해하지 못해 서로 충돌할 것이다.
계급 투쟁의 목적과 그 결과로서의 국가
미국 사회는 1930년대 불황을 거치면서 드러난 계급투쟁은 정당제도는 물론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뉴딜정책을 추진하는 관료기구가 구성되면서 국가는 계급투쟁의 목적이 됐으며, 소수자가 상승 이동을 추구하는 무대가 됐다. 뉴딜국가는 신흥 자본가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고 결속하는 데 기여했다. 국가는 개별 경영자나 기업이 아니라 총괄적 구조를 가진 하나의 실체로 파악된 새로운 다국적 자본주의의 이익을 보장했다. 이 연합은 자신이 세계로 진출하는 것을 도와줄 국가를 필요로 했다. 국가는 또한 미국 사회의 하부까지 영역을 넓혀 노동조합이나 시민의 권리 요구를 용인하지 않는 취약한 자본주의로부터 노동계급과 소수자의 이익을 수용하고 보호했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 의미하는 것이다.
1930년대 이후 국가는 자본가계급 내부의 갈등이 펼쳐지는 무대가 됐다. 자본가계급은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발달한 기술을 보유하고 노동자와 협력하는 전국적‧국제적 자본으로서 거대한 관료기구 안으로 점차 편입되면서 세계시장을 목표로 이윤을 추구하는 주식회사였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의 요구에 영향을 받는 쇠퇴하는 지역적‧ 전국적 자본으로서 미국 국내시장을 장악하려는 소규모 기업이었는데, 대개 개인이 경영하는 곳이었다. 이 두 경향이 외교정책에 반영된 결과를 슈어만은 제국주의/국제협력주의와 팽창주의/자국중심주의라고 정의했다. 국제협력주의가의 모범은 영국으로 그들의 목적은 세계의 광범함 지역을 이윤추구와 계몽을 위해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런 대립은 이후 모든 정권의 모습을 만들었다.
지배자와 이해관계 세력
이러한 방식으로 미국이라는 국가를 본다면 누가 대통령인가 하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그것은 국내의 투쟁에서 이기는 데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행정부의 수장은 국가의 의지를 체현하고, 사회가 널리 공유하고 있는 열망을 대변하며, 국민이라는 “가상의 공동체”를 상징하거나 국경바깥에서 일어나는 “이해관계”를 위해 행동하기도 한다. 국가는 그저 자본가의 손발이 아니라 자본가가 활동하는 무대를 보장한다. 대통령의 주요역할을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있다. 어떤 의미에서 전후의 미국대통령은 세계의 행정수반이었다. 그러나 전후시기 국내 반대세력으로 “앵글로색슨의 호수”의 배타적 영주이자 일본을 비롯해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고자 했던 전형적인 영웅적 관료 맥아더가 있었다. 그와 그 지지자들은 전후시기 자유주의자 또는 국제협력주의자의 패권에 가장 강력히 맞선 존재다.
국제협력주의/제국주의와 팽창주의/민족주의
국제협력주의나 제국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폴라니가 강조한 “자유주의적 원리”에 입각해 간접 통치와 시장원리, 문호 개방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상업계급의 지지에 의존하고 그 자유방임과 자유무역을 수단으로 널리 이용한다”. 폴라니는 자유주의적 교리를 “사회 보호의 원칙”과 구분했다. 여기서 국가는 국제사회의 경쟁에서 발생하는 역류(逆流)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기구다. 이것은 팽창주의/민족주의적 경향에서 나타나는 국가론이다.
미국이 세계 문제에 적극 개입한 것은 늦은 시점인 1940년부터였다. 늦었던 까닭은 영국 해군과 태평양⦁ 대서양이라는 두 대양에 대한 방위 때문이었고, 당시 국내시장이 매우 넓고 생산성이 뛰어났던 것도 원인이었다. 미국인에게 미국의 사업은 국내 사업이었다.
미국 외교정책의 요소: 국제협력주의⦁ 봉쇄⦁ 반격
한 “극단파”는 실질적 세계주의 또는 일원적 세계주의를 표방하는 좌파적 국제협력주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헨리 월리스가 대표하는 이 노선을 선호했다. 또 다른 “극단파”는 반격을 주장하는 세력으로, 공산주의를 말살하고 그 동맹 세력을 제거해 전 세계에서 미국의 단독주의를 실현한다는 이상을 궁극 목표로 삼았다. 두 세력 모두 자본주의적 관점에 섰다. 헨리 월리스는 1944년 부통령이었고, 1948년 공산주의자와 교류했다는 혐의로 조롱받고 세력을 잃었다. 1947년 제임스 버넘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독점적으로 보유해 세계 제국으로 올라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논지는 이성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 이 세 세력의 갈등이 펼쳐지면서 미국 정치권에서 합의된 중간 지점이 형성됐다. 그 결과 버넘 세력을 포함시켰다.
국제협력주의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세계에 적용한 것으로 세계시장 체제를 규제‧ 관리하고, 문호 개방 정책 또는 광대한 지역 정책에 규제를 가미한 것이며, 자유무역과 경제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개방성을 추진하고 장벽을 제거하며, 경제 침체와 다루기 힘든 나라들을 길들이는 데 필요한 규제를 두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비유:문호개방
경제적 내용: 영토획득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제국주의.자유무역 세계경제, 장벽(보호무역주의) 철폐, 패권국인 미국, 첨단 기술과 경쟁력을 가진 산업의 연합
정치적 내용: 세계는 유엔(법률)의 지배를 받으며, 미‧소‧영‧중의 감독 국가의 집단 안전보장 체제를 형성해 평화를 유지한다.
전략적 내용: 미국은 전체를, 동맹국은 부분을 감독한다. 소련을 안전보장 협정에 끌어들여 세계의 경찰로 함께 활동한다. 영토와 군사기지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 첨단기술과 가동력을 갖춘 해군‧공군을 보유하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념적 내용: 윌슨의 이상주의. 인권과 민주화. 모든 곳에 진보를 가져오고 국가 사이의 관계와 국내 정치, 사회구조를 모두 자유롭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하는 자유무역.
국가의 역할: 행정 수반은 국무부와 군부의 기득권을 희생시키면서 국내를 지배. 외교정책 방향을 대통령이 결정.
사회적 지지층: 동부의 은행가, 첨단 기술을 가진 기업. 친영적, 자유주의적 민주당원, 해군과 공군, 지식인.
봉쇄
국제협력주의와 민족주의가 차선의 세계로 타협한 것, 소련을 국제사회에 끌어들이려는 루스벨트의 구상을 조롱하는 것.
봉쇄는 미국 내에서 격렬한 대립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1949~1951년의 위기 이후 닉슨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소련‧중국과 긴장을 완화하며 1971년 신경제 정책이 발표될 때까지 미국의 패권주의가 유지된 긴 기간 동안 정세는 비교적 안정됐다.
비유: 방벽
경제적 내용: 개방된 체제를 사회주의권 외부에 형성하고, 경제적으로 원조해 광대한 지역의 경제와 안보를 강화한다. 1947~1960년, 달러가 지배한 사실상 미국의 단독주의 시대, 봉쇄의 방벽을 유지하기 위한 국방비 지출이 재정 적자를 유발하여 국내의 경제활동을 촉진했다.
정치적 내용: 미국의 도구로서의 유엔. 집단 안전보장은 미국 경찰의 활동을 촉진함. 소련이 팽창함에 따라 소련 연합의 모든 경계선을 따라 방벽을 설치하고, 그에 따라 이란‧남한‧타이완 등 에서는 국가기구를 강활할 필요가 있음.
전략적 내용: 미국은 전체, 그렇지 못할 경우 대부분의 지역을 감독한다. 방벽을 형성하는 지상군을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며, 광범위한 제국을 관리하려면 엄청난 국방 예산과 수송비가 요구된다. 공산주의의 위협에 둘러싸인 동맹국은 독일‧일본 등에 배치된 미군의 통제를 받는다.
이념적 내용: 현실정치를 이상주의적 수사로 정당화해 실천한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희생한다.
국가의 역할: 행정부는 국가 안보를 중시하는 나라가 출현하면서 관료 조직의 기득권에 복속된다.
사회적 지지층: 봉쇄합의는 1952년 이후 민주당 중도파와 공화당 중도파의 안정된 연합으로 대체, 은행가, 선진 산업 및 농업 관계자들은 원하는 것을 대부분 얻었다.
반격
국제협력주의에 완전히 반대하고 봉쇄에 대체로 불만을 가진 세력이 선호한 전략이었다. 1950년대에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가졌지만 실행된 유일한 사례는 압록강으로 진격한 것인데, 이는 현존하는 사회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던 단 한 번의 철저한 시도였다. 반격의 이상은 공산주의가 없는 세계인데, 그것은 다른 장소에서 불길한 타협을 가져왔다.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 간은 파시스트에 관심을 보였다.
반격론자의 중심부는 유전지대와 남부의 선벨트지대, 공화당 우파였다. 닉슨과 덜레스는 타원형으로 이뤄진 미국 정치의 궤도를 타고 재임하는 동안 이 세 가지 경향 사이를 오락가락했던 기회주의자였다. 이 조류의 위대한 영웅은 더글라스 맥아더였다.
비유: 적극적 행동
경제적 내용: 영토획득이 목적인 제국주의.
정치적 내용: 유엔과 집단 안전보장에 반대함. 방벽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 반공주의를 강화하고 모든 곳에서 반격을 지원한다(이승만‧장제스‧바티스타‧트루히요 등).
전략적 내용: 아시아를 가장 중시. 신세계와 도덕적 외교를 지향한다.
이념적 내용: 억제할 수 없는 미국의 민족주의와 높은 도덕적 기준을 지닌 광신적 애국심, 격렬한 반공주의, 노조를 증오한다.
국가의 역할: 강한 군사 부문과 약한 경제체제. 영웅적 대통령과 피폐한 국무부. 전쟁 자본주의가 필요. 국가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개념은 신중상주의(국가발전을 위해 부국강병주의 채택하고 추진하는 국가 운영 방식)지만, 국내시장에 국가가 개입하는 데는 반대한다.
사회적 지지층: 국내시장을 기반으로 한 쇠퇴하는 기업. 섬유산업. 석유회사. 공화당 우파. 동부세력의 지배와 록펠러 계열. 금융을 관리‧공급하는 동부의 은행들에 반발하는 서부와 선벨트 지역의 유권자. 자유주의적 신학이나 자유주의자를 증오하는 근본주의적 종교 단체. 영국을 싫어하거나 소련을 증오하는 인종 집단.
하츠의 용어에 따르면 국제협력주의는 미국의 시각에 따라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자유주의적 충동을, 고립주의는 다루기 힘든 지역에서 철수하려는 자유주의적 충동을 반영한다. 1950년대의 변화된 상황에 1930년대의 고립주의적 흐름을 적용한 반격은 이런 두 가지 충동에 대한 반응이다.
이 세 가지 정책은 동아시아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전개된 과정과 전후, 즉 1949~1951년의 운명을 결정한 위기를 설명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국제협력주의‧봉쇄‧반격이라는 일반적 범주는 한‧미 관계를 정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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