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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예정된 미로로 들어가는 운명: 첩보원과 투기꾼들

 

한국전쟁의 시작은 첩보 정치과 비밀공작, 탐욕, 과열된 투기 현상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197). “심층에 있는 기본 방침은 선택된 소수에게만 알려지며, 현대사로 간주되는 사건의 대부분은 완전한 선전이자 세뇌에 가깝다“. 전후 역사의 대부분은 감춰져 있으며 비밀 조직은 조직의 규모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여러 사건에 행사했다(198).

1950년 국내외에서 일어난 사건의 핵심적인 문제는 대체로 명확하지 않거나 기밀로 지정돼 있어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시작에 미국이 한 역할에 대하여 새롭게 중요한 질문을 제기할 정도만큼은 알려져 있다(199).

 

중앙 정보기관

미국 정부의 외교 담당 기관들은 팽창주의자와 국제협력주의들이 거대한 권력을 행사하고 거의 감시도 받지 않으면서 정치적 갈등을 벌이는 무대였다. 우리의 가설은 미국 정부가 권력투쟁의 객체이자 주체였으며, 그 무대이자 잔재였다는 것이다. 은밀한 국가기관의 권력투쟁은 더욱 격렬했고 감시와 외부 간섭도 거의 받지 않았다. 그 기관들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공식적인 활동과 그렇지 않은 활동이 겹치는 지점에서 활동한다는 정보기관의 특별한 작동 방식을 강화했다. 전략사무국은 전후 미국 정보망의 모체였다. 47년 트루먼은 CIA의 전신인 중앙정보단을 설립했으며 48년 정책조정국을 만들고 위스너를 수장으로 비밀활동 기능을 추가했다(200).

프랭크 위스너 -냉전 정책인 히틀러의 겔렌 조직(46년 마국아 독일 장군 겔렌을 수장 삼아 만든 대소 첩보 정보조직)을 재창설했으며 덜레스와 일했다. 47년 애치슨은 점령지역에서 정보활동 임무를 맡겼다.
-금융계의 국제협력주의와 유럽 우선주의 공감, 비밀 임무 선호, 비밀 공작 효용을 믿었다.
포스터 덜레스,
조지 케넌
-48년 이탈리아 공산당 반대 운동 지휘
리처드 스틸웰 대령 정책조정국의 극동 부문 책임자, 수십년 동안 한국에 깊이 관여

- 월가의 중진 상당수가 CIA에서 고위직을 차지했다.

- CIA를 자유주의의 온상, 나아가 공산주의자나 소련 정보원의 은신처로 보는 경향이 있던 미국 우익을 이런 자본가들을 비난했다(201).

CIA에 공산주의자는 없었지만 자유주의자에게는 매카시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로 보수주의자에게는 급진주의의 온상으로, 급진주의자에게는 미국 제국주의의 정수로, 중국 로비스트에게는 적대세력으로 존재했다(202).

앨런 덜레스는 미국 정치의 기이한 분열은 교묘하게 이용했다. 유럽에서는 겔렌 조직을 이용했지만 아시아에서는 맥아더와 대립했다. 중국 내륙을 습격하는 CIA와 중국 국민당의 연합 작전을 지휘했으며 중국 로비 자금을 지원했다(203).

정보기관 내부의 갈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CIA와 맥아더의 대립이었다. 양쪽 다 정보가 권력이라는 것을 알았고 서로를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봤다. 맥아더와 윌러비는 2차대전 동안 전략사무국의 활동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윌러비는 필리핀 전역에서 집결시킨 비행기를 진주만 공습 날에 타이완으로 출동시켰지만 일본전투기에 참패했는데 윌러비의 첫 번째 정보 실패였다. CIA가 등장함으로써 맥아더와 후버가 각각 태평양 지역 및 라틴아메리카 정보 독점 상황을 위협했다. 그 둘은 CIA를 동부 기득권층의 집행 기관으로 인식했다(204). 부산 방어선이 긴급한 상황에서도 맥아더는 작전 정보를 CIA에 제공하지 않았다. 중국이 참전하는 큰 위기가 발생하면서 권력투쟁은 CIA의 승리로 끝났고 맥아더는 514월 해임됐다. 윌러비는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맥아더와 윌러비는 사령부에서 생산한 문서를 파기하려고 했다(205). 윌러비는 CIA의 자유주의자들을 체제 전복 세력이라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보고서를 매카시와 앨런 덜레스에게 보냈다.

맥아더는 전쟁 전 한국에서 수집된 정보에 자신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상원 군사위원회와 외교위원회에 말했으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한국은 맥아더와 CIA 사이에 전개된 갈등의 축소판이었다. 윌러비는 북한의 정부·군사·산업기관에 침투하는 임무를 지닌 한국 연락사무소라는 기구를 계속 운영했다. 미군이 철수한 4910월에 설치되었으며 레너드 애벗이 책임자였다(206).

1950년 영국의 첩보활동과 그 이전 일본처럼 미국은 동북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지점으로 남한을 이용했다(207).

 

도너번의 냉전 거점

1952년 타이 대사로 파견된 도너번은 봉쇄와 반격 세력이 워싱턴에서 주도권을 다투던 냉전시기에 CIA에서 중요하지만 가장 인정받지 못한 역할을 했다. 그는 국제협력주의자였지만 반격의 강력한 지지자가 됐으며 형식적 개입주의자로서 두 흐름을 융합했다. 도너번은 버펄로에서 태어난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였다. 1차 대전 때 레인보 사단의 1개 연대를 지휘했다. 20년대부터 모건사와 손잡고 월가의 유력 법률사무소인 도너번·레저·뉴턴 앤드 어바인을 열었으며 30년대 첨단 기술 기업 연합을 구성한 주요 인물이었고 독점 금지법에 맞서(207) 신흥 다국적 석유회사들을 변호했으며 독일 기업과 긴밀한 연관을 맺었다. 그는 소련에 대한 혐오를 일본에 대한 찬사와 결부시켰으며 볼셰비즘을 증오하고 비밀공작을 옹호한 미국 제일의 반공주의자였다. 월가는 전 세계의 정보를 집적한 하나의 섬으로 떠올랐다.

전후 초기 트루먼은 도너번에게 47~52년 미국 정보활동과 비밀공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208). 한국전쟁 전 도너번은 반격을 강력히 지지했다. 미국을 봉쇄에서 반격으로 전환(209)시키고자 49~50년 아시아를 7주 동안 방문했다. 애치슨을 비롯한 월가의 변호사와 은행가들은 전후 세계에서 미국이 맡을 역할을 구상했다(210).

 

동아시아의 비공식적 관계자들: 셔놀트, 폴리, 윌로어, 쿡 그리고 그 밖의 중요 인물

도너번이 워싱턴의 비공식적 정보활동의 제왕이라면 동아시아에서는 셔놀트 장군과 측근 화이팅 윌로어, 윌리엄 폴리, 찰스 쿡 제독이었다(210). 49~50년 장제스 정권의 군사적 지원에 기여했지만 트루먼 행정부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외교정책을 사유화하는 데 큰 진전을 이뤘다. 이들은 이승만에게 그랬던 것처럼 장제스 정권과 밀착됐다(211).

셔놀트는 공군력과 플라잉 타이거스, 민항공운공사 같은 특정 항공사를 소중히 했다. 민항공운공사와 업무를 인수한 에어 아메리카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펼친 팽창주의의 터무니없이 거친 허세와 치명적인 무지를 보여줬다.

민항공운공사의 공동 소유자인 윌로어는 중앙아메리카의 반공주의자와 장제스 지지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줬다. 그는 CIA의 중요한 공작원이었고 53년 온두라스 대사로 나가서 폴리 등을 도와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무너뜨렸다. 둘은 피그스만 사건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 민항공운공사는 48~49년 중국 국민당원이 타이완으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으며 40년대 후반 광범위한 정보·안보 체계를 갖췄다. 거기서 수집된 정보는 칭다오의 미 해병대 기지에 정기(211)적으로 보내졌다. 장제스의 정책을 지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 사이에는 돈도 오갔다.

CIA는 셔놀트에게 호의적이었다. 49년 워싱턴에서 쏭쯔원의 대리인인 코코런이 설립한 유령회사를 거쳐 CIA의 자금도 그리로 흘러들어갔다.

윌리엄 폴리는 셔놀트와 함께 플라잉 타이거스를 설립했다. 장제스를 지지했으며 중앙아메리카에서는 독재자들과 유착했다. CIA의 가장 중요한 중재자인 버넌 월터스는 폴리의 제자였다. 한국전쟁 전 트루먼의 집무실을 몇 차례 출입했으며 48년 트루먼은 그를 브라질 대사로 임명했다. 폴리는 50년대 초반 CIA의 민감한 임무를 많이 수행했다. 51년 위스너를 위해 CIA가 동아시아에서 전개한 작전을 평가하고 인도와 원자폭탄 제조에 필요한 원료 구입 협상을 했고 54년 과테말라 침공을 계획했다. CIA와 피그스만 사건을 계획했다. 닉슨의 오랜 친구였으며 마피아와도 관계가 있었다(212). 49년 후반 폴리는 미국의 타이완 정책 중단에 앞장섰으며 국민정부에 군사 원조와 고문을 보냈다.

쿡은 해군에서 탁월한 경력을 쌓았다. 은퇴하기 전 서태평양 함대사령관을 지냈다. 중미 합동작전부를 거쳐 중국과 관련된 해군 정보활동에도 관여했다. 쿡은 국민당 비밀경찰의 악명 높은 책임자 다이리와 친했다(213).

 

굿펠로의 특수 임무

굿펠로는 동부 기득권층처럼 행동했지만 서부적 면모도 갖춘 데다 광업에 관여한 진정한 팽창주의자였다. 1892년에 태어났고 공화당 보수파 신문 발행인으로 중국 국민당의 중요한 지지자가 된 프랭크(213) 개닛에게서 이글지를 인수했다. 정치 성향은 도너번과 비슷했다. 40년대 굿펠로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직위들을 맡았다. 전략사무국 부서의 책임자로 파괴·전복·게릴라 활동에 필요한 훈련 시설 부지를 워싱턴 일대에 선정했으며 나중에 CIA가 인수했다. 육군 정보 부문의 이익을 보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드러나지 않게 수행했다. 42년 영국 정보기관의 특수작전부와 협의해 세계를 영국과 미국의 책임 지역으로 나눴다. 그것은 막중한 책임이 부여된 비밀 임무였다. 세계를 훑어보고, 자신의 조직이 단독으로든 합동으로든 전복활동과 특수작전을 어떻게 수행할지에 따라 세계를 분할했다.

도너번과 굿펠로는 미국인이 영국에서 비열한 공작을 훈련받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그런 협상의 한 가지 결과는 중국·만주·한국을 미국 정(214)보활동의 영향 범위안에 계속 남겨둔 것이었다. 진주만 사건 이후 두 정보기관 사이에 긴밀한 유대가 시작됐으며 필비가 첫 단계에 관여했다.

굿펠로가 주로 담당한 지역은 극동으로 버마에 게릴라들을 침투시켰으며 중국지역에서 기업 운영으로 위장해 폭넓은 정보 작전을 전개했다. 그는 아시아의 우익 정권과 중앙아메리카의 이해를 결부시켰다. 4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전반까지 델라웨어주에 있는 해외재건회사를 운영했는데 CIA가 소유한 회사였다(215). 그는 매달 워싱턴과 포카텔로를 오갔다. 49년 도너번의 세계무역회사에서 근무했는데 목적은 이승만에게 가장 중요한 미국인 고문이 되려는 것이었다. 그는 사업과 비밀활동을 결부시키는 도너번의 전형적인 행동을 답습했다. 49~50년대 중반까지 굿펠로는 한국과 미국 사이의 사업 거래에서 핵심 중재자가 되는 데 성공했다(216).

 

미로 속의 두더지: 영국의 첩보원

CIA는 공산주의자는 숨겨주지 않았지만 첩보원은 숨겨줬다. 그들은 미국 첩보원이 아니었다(217). 미국의 대동맥에서 헤엄치는 친영과 기득권층이자 공산주의자와 동성애자라는 우익의 공포를 부채질하기에는 이런 최고 특권 뒤에서 꾸며지는 음모만 한 게 없었다. 필비 세력은 반격론자의 편견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후 소련 정보기관이 감행한 공격에 대한 감춰진 역사는 한국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47년 매클레인은 소련에 원자폭탄 관련 정보를 넘겨줘 그들의 핵개발 계획을 도왔지만 한국전쟁이 전개되는 동안 트풘이 맥아더에게 내린 명령을 스탈린에게 알려줬다. 런던에서 극동 담당 부서를 맡은 뒤 508월 워싱턴으로 옮긴 가이 버지스는(218) 50년 초 중·소 동맹을 언급하면서 미국 정부가 정보를 고의로 왜곡해 국민에게 유포했으며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의견 차이-주로 만주 관련 소련의 계획-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과장하고 있으며 허위 정보는 국민당이 아니라 애치슨에게서 나왔다고 보았다(219). 50년 가을 버지스는 미국이 38도선을 넘을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북진 관련 문서를 소련으로 유출했으며 맥아더는 중국이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고 애치슨과 CIA는 이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맥아더와 애치슨은 중국의 참전을 예측하는데 실패했다.

조지 블레이크는 48년 여름 만주·북한·소련 극동 지역을 정찰하면서 50년 비비언 홀트 영국 대사와 함께 북한에 체포됐다. 포로수용소에 3년간 있으면서 소련에 전향했다고 보인다. 베를린 터널은 동독과 소련의 전신을 도청하는데 사용되었는데 그 정보를 소련에 넘겨 레닌상을 받(220)았다. 소련은 서방 인사들이 블레이크에게 접근하는 것을 불허했고 지금까지도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다. 그는 M16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그의 보고서는 영국 외무부 문서철에는 등록돼 있지 않고, 자료도 공개되지 않았다.

필비는 거의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블레이크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2년 동안 서울에 있었으며 극동 관련 정보는 모두 런던의 버지스를 거쳐 그에게 들어왔다. 필비의 가장 거대한 공격은 CIA 방첩활동 책임자 앵글턴을 조종해 그 조직을 큰 혼란에 빠뜨린 것이었다. 간접과 위장 망명자를 색출하느라 CIA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영국 첩보원들은 대립 세력의 연결 고리를 끊었다. 국제협력주의자 앵클턴은 필비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FBI 수사관 윌리엄 하비가 필비의 정체를 폭로했다(221).

누가 누구를 경계하고 있었는지 무관하게 국가안보회의 문서를 읽은 사람은 모두 미국이 한국전쟁에 관여하리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앵글턴이 허위 정보로 필비에게 미국은 남한을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면 스탈린에게 영향을 줬을 것이고 소련이 북한에 전달한 내용에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필비와 버지스 모두 미국 정보 기능, 특히 도너번의 특수활동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222).

 

금광을 모두 점유하다: 황금·텅스텐·흑사·

1897년 헌트는 금맥을 찾았고 모스와 함께 동양합동광업회사를 설립했다. 운산 지역과 그곳의 엄청난 금광은 대부분 고종 가족의 소유였다. 1895년 모스는 가장 먼저 광업권을 획득해 25년간의 운산의 금 채굴권리를 소유했다. 헌트는 모스에게 광업권을 사 공화당원인 파셋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둘은 극동 근대 광업의 아버지로 알려졌다(224). 1945년 이전 한국은 변종 팽창주의라는 미국 제국주의의 한 형태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한반도는 가장 유용한 광물을 수출할 수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1916년 무렵 금 900만 톤의 광석이 운산금광에서 채굴됐으며 전체 가격은 5600만 달러, 이윤은 1500만 달러였다. 30년대 초 동(225)양합동광업회사는 날마다 평균 600톤의 금광석을 분쇄했다. 이 회사의 1900~33년 배당금은 1200만 달러 평균 이윤율은 연간 9%였다.

5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금광회사에 생계를 직접 의존했다. 미국인들은 소수의 뛰어난 한국인 광부를 훈련시켰다. 한국인 광부들은 가장 뛰어났지만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았다. 몇몇 저명한 공화당 가문이 20세기 초 한국 금광의 소유권을 독점했다. 모두 보수적이며 허버트 후버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허스트 가문과 밀스 가문, 퍼셋 가문이 대표적이다(226). 팽창주의의 전형적 방식으로 축적한 그들의 부는 광업과 출판업에 집중됐다. 세 가문은 한국의 동양합동광업회사, 네바다주의 호스테이크 마인, 페루의 세로 드 파스코 동광, 필리핀 최대 목재회사 인설러 럼버 네 회사를 소유했다. 이들 모두 미국 팽창주의 역사의 대표적 사례였다. 홈스테이크와 세로 드 파스코는 가혹한 노동 조건과 가차 없는 파업 파괴로 악명 높았다. 허스트 가문과 밀스 가문은 세로 드 파스코의 최대 주주였으며 J.P.모건이 뒤를 이었다. 그 광산은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걸쳐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이었까지 한국의 금광업은 공화당 우파가 완전히 소유한 자회사가 장악했다.

일본은 미국의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국 팽창주의자들이 한국 금광에서 이익을 얻도록 허용했다(227). 한국은 극동에서 금을 기계로 추출하는 방식이 확립되고 외국이 채굴권을 얻을 수 있던 유일한 나라였다. 39년 일본은 동양합동광업회사의 자산을 800만 달러에 샀는데 그것은 1년 만에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스탈린은 27년 중국 혁명이 혼란에 빠지고 만주에서 일본 세력이 급속히 팽창하자 광물자원이 매우 풍부하지만 벙어가 허술한 소련 극동 지역으로 일본이 진출할 것을 우려했다(228). 인구가 부족하고 광할한 동부는 후방의 침입에 노출돼 취약했다. 일본과 미국이 공동으로 금을 채굴하는 지역과 일치했으며, 후버와 도너번 같은 뿌리 깊은 반공주의자들의 관심을 끌었다(229).

1945년 북한의 금 생산량은 상당했으며 소련인이 직접 경영할 정도로 중요했다. 40년 후반 북한은 금을 대량 수출했고 북한 정부는 시세보다 낮게 금을 대량으로 사간다며 소련을 비난했다.

194510월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밀스 리드는 이승만과 점심 식사를 했으며 하지 장군이 이승만을 한국 국민에게 소개한 환영 행사에 참석했다. 그 뒤 충칭으로 가서(230) 장체스, 쑹쯔원을 만났다. 리드 가문 외 인물들이 한국 금에 계속 관심을 가졌는데 주로 이승만과 그의 세력 그리고 뉴욕주 엘미라의 사업가 집단이 동양합동광업회사에 투자한 인설러 럼버 이사회에 참석한 부류 등이다.

194510월 굿펠로는 이승만의 귀국과 단독정부 수립을 도왔는데 이승만은 동양합동광업회사에 금광 채굴권을 약속했다. 애릭이라는 인물은 서울 근처의 광산을 소유했으며 30년대 동양합동광업회사에 깊이 관여했다. 45~4618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육군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다. 미국인과 친밀했던 저명한 인물 조병옥은 37~45년까지 금광을 운영했으며 허버트 김은 48년 정보활동과 관련해 도너번에게 조언했다

한국의 금이 관심을 끈 건 텅스텐과 모나자이트 같은 다른 물질이 함께 발견됐기 때문이다. 텅스텐을 50년대 남한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으로 60년 전체 수출의 17%, 광물 수출의 42%를 차지했다. 이승만 일파와 정치적 동지들은 텅스(231)텐 계약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을 벌였다.

텅스텐은 1950년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광물이 됐다. 철과 합금하면 인공 다이아몬드처럼 날카롭고 열에 매우 강해져 대전차 탄과 샌형 고속 제트엔진과 폰 브라운이 개발한 미사일을 만드는 데 핵심 물질이 됐기 때문이다. 또 전쟁을 치르면서 물자의 90%를 텅스텐업계의 거물 리궈친의 화창무역공사를 거쳐 중국 남부에서 공급받았다. 인민해방군이 중국 남부로 진군한 것이 세계 텅스텐 시작에 큰 영향을 줬다. 52년 말 텅스텐 가격을 세 배 올랐다(232).

공산 세력이 중국 본토를 점령한 뒤 남한은 텅스텐을 공급하는 주요 대안 지역이 됐다. 상동 광산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광산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매장량을 보유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지휘·감독하면서 한국인 노동자를 필요에 따라 통제하고, 어떤 형태의 수출에도 세금이나 의무나 추가 부담금이 없기를 바랐다. 52년 초 미국 방위조달청은 남한의 텅스텐 광산의 모든 생산량을 장악했다(233). 군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채굴할 미국 민간 기업은 여전히 필요했다. 기업을 선택하는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높은 입찰가를 써낸 기업은 모두 이승만이나 그 세력과 일정한 개인적 관계가 있었다. 19529월 이승만은 아이컬버거사와 계약했다. 125만 달러를 지급하는 것 외에 계약을 이행하지 않아도 책임을 면제해주고 소송도 제기하지 않는 등 여러 특혜를 준 불평등한 계약이었다(234).

모나자이트는 소량의 방사능 물질을 함유한 흑사로 구식이지만 강력한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토륨을 만들 수 있었다. 44년 그로브스 장군은 전 세계의 토륨 공급을 관리하는 극비 계획을 시행했다. 희소 광물이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브라질과 인도는 품질 좋은 모나자이트 모래의 주요 산지였으며 윌리엄 폴리는 두 나라의 공급을 매점하는 데 관여했다. 한국은 핵분열 물질을 입수해 폭탄을 제조하려는 일본의 시도가 진행된 중심지였다. 연합국이 일본에 대대적인 폭격을 퍼부었기 때문에 전력 생산량은 일본 전체보다 북한이 더 많았다(235). 일본은 전력이 엄청나게 필요한 원폭 계획을 한국에서 추진했다. 흥남의 대규모 화학공장이 중심이 됐다. 미국이 일본의 폭탄 개발 계획 관련 문서를 입수했는데 주한 미군사령부 정보부 보고서는 소련이 원폭 계획이 부분적으로 일본의 노력 위에서 이뤄졌다고 확신했다(236).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38도선을 넘을 것인가라는 어려운 선택에 맞닥뜨렸다. 러스크는 소련이 미국을 축출하고자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북진은 소련의 원폭 계획을 약화시킬 효과적 조치가 될 수 있었다. 흥남의 공장 시설은 미국 폭격기들이 대부분 파괴했다. 소련이 이를 묵인했다는 것은 그들이 한국전쟁 동안 대단히 신중했음을 보여준다. 미국이 흥남 공장 시설을 사찰한 뒤 일본이 대량의 납을 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46년 소련은 노동자는 물론 공장 설비를 모두 해체해 자국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한국의 흑사는 대부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국 정보기관이 북한에서 모나자이트를 채굴해 토륨으로 제련하는 데 집중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모나자이트는 텅스텐과 함께 매장됐고 이 들은 금과 함께 발견됐다(237).

콩의 가격 조작

콩을 둘러싼 음모는 한국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발생했다. 뉴욕타임즈는 중국인 51명이 홍콩의 기업을 거쳐 콩의 선물 가격을 50% 올려 300만 달러로 추정되는(238) 이익을 거두었다고 보도했다. 50만 부셸(1350)을 매각한 사람은 장제스의 부유한 친척이었고 뉴욕에 사는 한 중국인 여성은 100만 부셸을 보유했다. 이러한 매점은 전쟁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했다. 2차 대전 기간에 미국이 중국에 제공한 2억 달러가 미국에 사는 부유한 중국인의 계좌에서 발견됐다. 일본은 만주를 식민지로 삼은 기간의 콩을 수출해 현금화하는 주요 곡물로 만들었다. 가오강의 동북인민정부가 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콩은 세계시장으로 흘러나갔다. 도너번의 세계무역회사는 만주산 콩을 취급했고 극동의 무역 대리인은 일본 로비의 주요 인물인 조지프 그루였다.

시장을 매점 할 재력을 가진 재미 중국인은 쑹쯔원이었다(239). 2명의 누이는 장제스·쿵샹시와 결혼했다. 동생인 쑹쯔량은 중국 본토에서 반격 정책을 펼치려고 쑹쯔원의 이해하기 어려운 계획을 의원들과 논의하고 콜버그와 매카시에게 쿵샹시와 자금을 지원하는 등 50년 봄 미국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610일 쑹쯔원은 장제스의 요청으로 타이완에 돌아가지 않았는데 이것은 타이완 침략이 임박했음을 의미했다. 장제스는 쑹쯔원 형제를 중화민국 중앙은행 이사회에서 제명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 AP 통신은 그 주말 이전 마지막 거래에서 콩은 동방에서 팔라는 압력이 계속됐다고 보도했다(240). 이튿날 더 큰 규모의 매각이 이뤄졌는데 전쟁 소식이 알려지기 전에 보도됐다. 전쟁 소식과 함께 가격이 급등했는데 전쟁 전 2주 동안 매각된 콩은 49년 같은 기간보다 3~4배 많았다. 그 운명적인 일요일 이전의 주말이라는 특정한 시점에 대규모 매각을 실시하려고 날짜를 잡은 것이었다. 630일 중국인 53명이 7월 콩 선물거래의 공개 계약 전체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가격이 오르리라고 예측해 투자했다. 쑹쯔원이 이 음모에 가담했다(241).

8월 초 국무부의 에드먼드 클럽은 중국인 투기꾼 집단의 콩 투기에 쑹쯔량이 있다고 파악했고 그는 몇 달 뒤 매카시의 공격을 받아 국무부에서(242) 파면됐다. 조 매카시는 콩 매점에서 이익을 봤다. 515월 굿펠로 대령은 허버트 후버에게 콩가루 견본을 보냈다. 콩을 둘러싼 사기는 누군가 북한의 임박한 침략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시기 선택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측은 상황을 장악하고 있어 타인의 예측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개연성 높은 사건을 순서대로 하면 (1) 장제스에 대한 쿠데타, 이와 함께 미국이 타이완 방어에 개입하고 중국 본토에 통상 금지 조치를 내린다. (2)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 통상 금지로 이어진다. (3) 북한의 침략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 그 시기와 미국의 대응도 알고 있었다. 사태를 감지한 몇 안 되는 사람은 이 세 각본 모두 가능성 있다고 예상했을 수도 있다.

 

결론

첩보원과 투기꾼의 은밀한 행위가 한국전쟁의 기원에 영향을 미쳤다는 명확한 입증은 못했다. 그러나 주요 인물의 연결관계가 존재하고 묻힌 인물을 발굴하고 횡령 사건을 파헤쳐 이 장의 등장인물 및 한국전쟁의 기원에 질문을 던지는데 이바지하려는 목표는 이뤘다고 생각한다(243).

한국전쟁의 기원2-1 1부4장 일부(브루스커밍스24.3.16).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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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2-1 1부4장(브루스커밍스24.3.2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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