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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한국
6장 남한의 체제
해방 후 남한의 근본적 갈등은 지배층과 좌익 및 공산주의 지도자(287)들 사이의 대립이었다. 예일대학의 인류학자 코닐리어스 오스굿은 통일은 한국인이 가장 관심을 갖는 문제였고 그들은 분단 정책을 결코 지지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추진할 수 있는 유일한 노선은 일제에 봉사한 경찰을 즉시 축출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며 강력한 지지를 받는 ‘중도’ 정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객관적인 외국인 관찰자들은 남한 체제에 곧잘 혐오감을 드러냈다(291). 미국이 보인 태도의 층위는 여러 개였는데 그 체제를 냉소적으로 지지하는 것부터 시작해 달갑잖은 자식을 냉정하게 거부하는 아버지 같은 태도와 미국이 허용하는 정치적 범위를 결코 넘어서지 않는 개혁의 요구에까지 걸쳐 있었다. 미국 사회에서 방법론을 중시하는 중도파가 지닌 위상은 한국에서는 비현실적이고 허약해 보였으며 친공산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짖지 않는 개처럼 조용히 있는 것은 미국이 한국 사회의 철저한 혁신을 지지한다는 표시가 되기도 했다. 냉정한 사실은 미국의 고위 정책이 남한의 경찰국가를 훨씬 더 선호했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한국과 미국의 합작품이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세력은 김성수 일파였다. 그들은 전망을 가진 기업가가 아니라서 중요한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런 기회는 식민지 정부였고, 그들은 이(292) 정부와 긴밀히 협력한 결과 한국 최초의 재벌이 됐다. 국가에 순종하는 기업은 한국 경제의 활력의 원천이었고,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는 정체된 자본주의와는 달랐다. 이것은 60년대 경제성장의 토대를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의 교과서적 설명과는 맞지 않았다. 양반과 지주계급은 외부의 도전에 대단히 약하고 무너지기 쉬었다는 것이 몇 세기 전부터 계속된 한국 정치의 흥미로운 특징이다. 조선은 지속 기간에 비해 너무 빠르고 갑작스럽게 전복됐다. 한국은 내부의 강력함과 외부의 허약함, 내재적 안정과 외인적 변화가 동시에 나타나 주목할 만한 사례다. 동일한 양상은 전후 시기를 특징지었다. 강한 외면은 약한 내면을 감추고 있다. 카드로 만든 엉성한 집을 권력의 견고한 피라미드로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293). 카드로 만든 집은 강력한 접착제로 붙이면 지탱할 수 있다. 접착제 역할을 하는 요소는 대부분 권력의 상층부에 있다. 서울의 중앙정부와 주요 관료들이다. 붕괴가 시작되는 것은 이것이 잘려나갈 때뿐이었다. 한국의 상부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완강했다.
한국의 모든 통치자는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의 모든 사람에게 올바른 생각을 심어주고, 균일한 사고방식을 강요해 하나의 정신 상태에 이르게 함으로써, 논리와 주장에 영향받지 않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것이 안정적 통치의 본질이자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 한국 정치 문화의 유형은 대단히 지속적이지만, 독특한 동질성과 오랜 기간의 쇄국 그리고 몇 세기에 걸친 생산양식의 상대적 안정성에서 대부분 발원했다(294).
대중을 조직하는 데 성공한 정치 지도자들은 북한과 동일한 힘의 근원에 의지했다. 내부에서 단결하고 외부의 침입에 저항하자는 호소였고 다른 모든 것에 맞서 한국의 본질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1947년 이후 그 체제를 강화하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익의 대중정치가 발달한 것이다(295).
전형적인 미국인인 하지는 미국이라는 파편화된 환경에서 유럽적 정치 용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주의에서 벗어난 정치를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라는 병리적 현상, 즉 정상적 궤도를 벗어난 두 진영과 친숙한 중도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김일성과 이범석은 김규식보다 한국의 중도에 훨씬 더 가까웠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히틀러보다는 고종과 비슷했기 때(296)문에 한국의 보수적 정치를 다루는 방법을 알았던것이다. 이승만 체제는 산만한 권위주의였고, 나치의 악마 같은 힘은 없었다. 어느 쪽에 찬성하는가보다 어느 쪽에 반대하는가를 더 잘 아는 부정의 이념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반노동자·반자본가라는 성격을 부분적으로 가진 반자유주의이며, 자본주의를 거의 존중하지 않았다. 민족과 국가의 권위를 찬양하고 운영에서 의지를 중시했으며 풀뿌리 조직에 관심을 보였다. 피지배층에게 사회적 상승과 권력 획득의 기회를 개방하고 야당의 존재 기반을 박탈하는 단일한 대중정당이 존재했다.
남한에는 단일한 대중정당이 없었고, 지주는 귀족이자 자본가였지만 중간적 존재였으며 변화하는 과정에 있었다(297).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내전 이후의 스페인과 더 비슷해졌다. 산만한 권위주의였다. 적극적인 지지 대신 묵인에 만족하는 우익의 일상적 정치였다. 남한의 ‘파시즘’은 북한의 ‘공산주의’와 매우 비슷했으며 중국의 검증을 거친 서구의 이념을 비서구적 맥락에서 적용한 것이었다. 이승만과 이범석은 장제스의 경험을 우익의 모범으로 삼았고 이승만은 국민당 체제와 장제스가 신구 이념을 혼합한 것을 본받아 막연히 이해한 유럽 파시스트 정치 방식을 동양의 전통과 유교에 여과시켰다. 그 결과 파시즘화한 한국 정치가 나타났다(298).
청년 단체의 대두
남한의 청년 단체는 강력한 정치조직이었으며 대부분 북한에서 피란 온 젊은이였다. 경찰을 보조하고 파업을 분쇄하거나 시위를 무너뜨리는 사복 요원으로 활동했다(298) 모든 정단에 ‘청년’ 조직이 있었고 연령은 대략 18~35세였다. 좌익에는 조선청년총동맹, 우익에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서북청년회·대동청년단·광복청년회·대한독촉청년총연맹이 있었다. 이 중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은 하지가 자금을 지원한 미군정의 공식 기관이었다. 청년 단체를 조종한 것은 이승만·이범석·조병옥·장택상 같은 가장 유력한 우익 인사들이었다(299). 조선민족청년단은 정치인을 다룰 때 중국으로부터 받은 영향에 일본의 수법을 혼합했다. 이범석은 장제스를 숭배하는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장제스의 무도한 청년단체 ‘남의사’와 협력했다(300). 미국인이 가장 싫어한 것은 이범석의 민족주의였는데 그것은 그를 믿을 수 없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국민과 인종은 동일한 의미였다. 전형적인 조합주의적 방식으로 계급 투쟁, 상층와 하층의 차별은 잊어버리고 한 가족으로 단결하록 한국인에게 호소했다. ‘한국인이 된다’는 것의 본질적 의미는 시민과 국민이 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인은 불쾌해했지만(301) 이에 관한 한 좌익과 우익의 의견은 일치했다. 파시스트의 정치 원칙은 일치를 중시하는 것인데 한국인은 분열 때문에 식민지라는 재앙이 닥쳤다고 생각했다. 파시즘이 경제분야에서 지향한 자립은 한국의 전통적인 사실이자 이상이었다.
군정청이 조선민족청년단을 지원한 까닭은 좌익의 위협과 46년 가을 청년 단체가 급증한 데 있었다. 하지는 족청이 국방경비대와 함께 남한 군대를 창설하는 기반이 되길 바랐다(302). 47년 족청 단원은 20만 명이었고 각 도와 지방의 훈련소는 63개, 수원에서 파견된 사관은 2주의 훈련 과정을 거쳤다. 지방조직은 면 단위에서 10명을 1개 조로 하고 10개 조를 모아 군 단위에서 100명으로 구성된 조직을 이뤘는데 중국의 보갑제를 모방했으며 공산주의자의 세포조직에 대항하려던 것이었다(303). 족청의 교육활동의 초점은 ‘공산주의와 그 위협에 대한 모든 사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304).
서북청년회
서북청년회는 비열하지만 고전적이며 순수하고 단순한 반동적 테러의 전형이었다. 대부분 토지를 빼앗기고 피란한 난민 가족에서 채용되었다(304). 좌익에게 ‘보복하려는 적대감’에서 그들과 견줄 만한 단체는 없었다. 지도자 문봉제는 이승만의 심복이었다. 서청은 북한에서도 지하조직을 운영했으며 47년 남한의 모든 주요 도시에 지부를 두었다. 활동 자금은 부유한 피란민과 단원들을 파업 분쇄자로 이용한 사업가들에게서 나왔다(306). 조선민주청년동맹 단원의 고문을 지휘한 김두한을 미군 방첩대가 체포했으나 법원은 진술만 들은 뒤 벌금형을 선고했다. 그를 지원해준 인물이 벌금을 내준 덕분에 풀려났다.
47년 무렵 좌익의 주요 청년 단체는 조선민주청년동맹이었다. 남로당의 입장을 지지했으나 이 단체가 조직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는 증거는 없다. 경찰이나 교위 관료의 지원을 받지 못했으나 이 단체의 활동은 금지됐다
군정의 강력한 탄압 뒤 우익은 모든 단체를 규합해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지도자인 이청천은 장제스의 또 다른 동맹자로 중국 국민혁명군의 장교였으며 임시정부의 ‘광복군’을 이끌었다. 그는 47년 19개 청년 단체를 자신의 지휘 아래 통일시켜(307) 대동청년단을 출범시켰다. 또 이승만의 남한 단독선거 계획을 지지했다. 이범석은 이청천의 강력한 경쟁자가 됐다. 이런 조직은 개인이 권력을 얻는 데 훌륭한 수단이었다. 이범석은 초대 국방장관이 됐고 후에 국무총리에 올랐다(308).
한국전쟁 동안 우익 청년 단체는 포로수용소의 공산주의자들에 맞서는 주요 조직적 세력이었고 공산 포로들에게 가혹 행위와 고문을 광범위하게 자행했다. 공산주의자의 폭력은 그들과 대조적으로 일정한 목적이 있는 데다 매우 적었으며 대부분 전전 사회에서 ‘높은 명당과 권위를 지닌 가문 출신이었다’
하지의 국방경비대는 45년 기존 정책에 반발해 창설됐고 그가 바란 대로 한국군의 모체가 됐다. 군대 창설의 이런 비정통적인 방식은 청년 단체 지도자들이 군대 안에 자신들의 강력한 추종 세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였으며 이는 이청천과 이범석 그리고 여러 지휘관 사이의 끊임없는 개인적 충돌로 이어졌다(309).
조합주의로 조직된 노동
45~47년 한국의 노동자들은 토착 좌익 조직인 전평이 완전히 장악했다. 47년 전평은 해체되고 대한노동총연맹으로 대체되었다. 이 단체는 정권이 통제하는 조직이었으며 기업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상명하달식으로 노동자의 협조를 얻었다. 노총은 오늘날에도 남한의 주요한 노동조합으로 남아 있다. 전평은 해방 직후 한국의 공장 대부분에 결성됐던 노동자 위원회에서 발전한 것이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지 않았다. 좌익이었지만 당의 노선을 따르지는 않았다. 노총의 핵심 인물은 전직 교사인 전진한이었는데 이승만과 김구에게 돈을 받아 조직에 사용했다. 47년 3월 22일 좌익 노동조합은 24시간 파업을 결행했고 참여 노동자 2,718명이 체포되었으며 조직원은 노총 소속 인물로 교체됐다. 46년 10월과 47년 3월 파업은 ‘우익 노(310)동조합이 파업 분쇄자로 활동하고 중요한 공장과 공익 시설에서 거대한 권력을 장악할 기회가 됐다. 미군 사령부는 전평에 행사된 광범한 체포와 폭력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311). 51년까지도 전진한이 계속 노총을 운영했으며 CIA는 그를 이승만의 가까운 친구라고 파악했다(312).
47년 7월 19일 여운형을 암살한 19세의 한지근은 소규모 우익 테러 단체에 소속돼 있었다. 그는 김구에게 충성했으며 미국인은 김구가 암살에 관여했다고 판단했다(313). 여운형과 김규식은 암살의 위협으로 미군정에 여러 차례 경호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14). 여운형는 일제 치하에서 경찰로 복무해 증오의 대상이 된 인물들이 해방 뒤에도 계속 경찰에 남아 있는 것을 가장 강경하게 비판한 인물이었다. 또 그는 이승만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비공산주의자 남한 지도자였다. 45년 여운형은 해방된 한국에 기여할 수 있는 유능하고 적합한 지도자였다. 강인한 성품에 사람을 휘어잡는 열정적 웅변가인 그는 한국 민중의 열망을 대변했으며, 한국 사회의 독특한 계급 구조를 체현했다. 농민층과도 친밀했지만 주위에 자본가도 있었다. 그는 열렬한 민족주의자였고 식민지 기간에 굳건히 저항했으며 하지와 일정한 거리를 두어 그의 적대감을 샀다. 또한 김일성과 약간의 동지적 우정도 쌓았는데, 그것은 한국이 내전을 치르지 않고도 통일될 수 있었던 어떤 방법이 있었음을 여전히 암시한다. 마니교와 비슷한 전후 한국 정치의 이원론적 세계에서 차이를 연결하고 정당들을 통합하려던 인물은 참으로 드물었다. 여운형은 1940년에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존경받은 유일한 정치가였다(315).
1947년 말 한민당의 중진 장덕수도 암살됐는데 송진우 암살이 재현된 것이었다. 두 사건 다 암살범은 김구와 관련 있었고 동기도 같았다. 미군은 그 부하들을 구속하는 것 외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316).
남한 체제의 이념
이승만은 40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했으나 민주적 권리, 공정한 경쟁 또는 소수에 대한 관용 같은 미국의 이상을 흡수했다는 증거는 없다(316). 이론에서는 단호한 자유주의자였지만 행동에서는 위선이었다. 통치의 첫 번째 원리는 올바른 사상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었고 그것이 현실과 자주 괴리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통치 원칙은 이론과 실천에서 한국 유교와 서구 파시즘, 민주주의적 구호, 중국 국민당의 허세와 불운, 일본의 효과적 통치 방법을 혼합한 것이었다. 유교와 중국 국민당의 영향은 뚜렷했으며 일본의 영향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관료 제도의 운영에 깊이 뿌리 내린 것을 감안하면 매우 중요했다(317).
이승만의 ’일민주의‘는 쑨원의 ’삼민주의‘를 본뜬 것이었다. 국민과 민족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318). 일민주의는 다른 대안을 인정하지 않고 아무 의심 없이 충성을 바치는 정신 상태로 이것은 한국 정치의 오랜 관행이다(319). 50년 초 중고등학교 교장 수백 명이 이 이념을 교육받았고 도덕교육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를 전파했다
교육자 안호상
안호상은 철학자에 가까운 인물로 1920년대 후반 독일 예나대학에서 유럽 사상을 공부했다. 미국인들은 그를 한국의 나치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이 시각은 김치만큼이나 한국적이었다. 소박한 파시스트였고 전통적이며 절충적인 지배층의 시도를 보여주었다(320).
48년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자마자 안호상은 이단적 교사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사상을 조사하고 교정했다(321). 그 결과 교사 임면부터 교과서 내용까지 모든 것에서 식민지 시대의 중앙 통제적 형태가 유지됐다. 남학생은 검은 교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깎고 아침에 교련수업을 받는 30년대 군국주의적 관행이 유지됐다. 70년대 학교들은 형태 면에서 식민지 시대의 작은 박물관이었다. 안호상은 49년 ’학도호국단‘을 창설해 청년 단체 개념을 학교에 도입했는데 좌익적 성향을 띤 학생 조직을 정부가 통제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제도였다. 모든 남자 중학생은 정기적 사상 심사와 필수 군사훈련을 받았다(322).
실제로 한국 파시즘은 조직화가 부족했고 잦은 실수를 저질렀다. 더 중요한 사실은 무분별하게 목적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323).
청년 단체가 불법적 탄압의 주요 수단이었다면, 관료 조직은 실효적 탄압을 수행하는 기구였다. 조병옥과 장택상 등이 대표한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른 강력한 지휘 아래 내무부, 경찰, 사법·재판 기관, 교육기관, 군부의 관료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신속히 처리했다. 숙련되고 정직하며 겸손한 많은 공무원이 매우 낮은 임금으로 공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영역에서 잘 조직되고 일관되며 효율적인 구조를 갖춘 이런 관료 제도는 방종에 빠진 이승만 정권의 강력한 버팀목이 됐다. 이것은 한국 체제의 강점이었다(324).
이승만은 49년 ’보도연맹‘을 창설해 공산주의자로 분류된 사람들을 전향·재교육시키려고 했다. 이 조직에 가입하려면 범죄를 완전히 인정하고 자백서를 제출하고 신념을 철회하고 관련자와 자신이 과거에 한 모든 활동의 정보를 내야 했다. 정치적으로 전향시키는 맹렬한 노력이 전개됐지만(325) 1949년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념 때문에 사살됐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국가의 학교 제도는 생각과 마음을 감시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반공은 정치교육의 주제였다. 남한의 경찰이 ’무능하다‘는 인상을 불식시킨 것은 국가가 정치와 사상을 통제한 결과다. 한국에서 정치적 생각에 대한 속박은 다른 나라보다 매우 강하다. 남한과 북한의 한국인은 창조적이고 풍부한 지성을 지녔지만, 45년 이후 반도를 집어 삼킨 갈등으로 황폐해지고 왜곡됐다(326).
한국의 체제는 언제나 권위주의적이었다. 이는 식민지 시기의 유산이자 미국이 국가의 탄생에 관여한 데 따른 후유중이었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의 어떤 것도 이승만 정권의 공포정치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327).
한국의 자유주의와 이승만의 적대 세력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세력은 한국민주당이었다(328). 한민당은 일제 강점기에 오염되지 않은 젊은 지도자들이 성장한 1970년대 초반까지 이런 미지근한 반대 세력의 중심을 이뤘다. 한민당은 기본적 자유와 인권, 이승만의 독재적 행정권에 맞서 의회의 특권을 옹호한 세력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겉모습일 뿐이고 구성원 대부분은 지주, 지방 유력자, 옛 양반 출신이었으며 자원의 분배와 부의 관리를 둘러싸고 중앙 권력과 싸웠다. 이승만은 국왕 역할을 하고 의회는 지주의 이해관계가 결집된 기관이었다. 토지와의 관계를 끊고 산업에 투자한 한민당 세력에게 초기 토착 산업을 육성하려는 측면에서 국가 관료는 한민당의 협력자였다. 한민당에 있던 자본가들은 김성수처럼 지주 권력이라는 전통적 특권과 지위를 산업적 투자라는 더 큰 보상과 결부시키는 데 관심을 두었다(329).
중도파가 견고한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중도파를 추구하는 것을 실패가 예정된 것이라고 비난하는 일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부르주아 없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잘못된 정책이지만 그것이 추구하는 것은 미국적인데 그래야만 개입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에 대국적이고 통찰력 있는 정책을 적용했다면 여운형과 조선인민공화국에 권력을 이양했을 것이다. 그가 어떤 형태의 합작에서 공산주의자보다 우위에 섰다면 한국은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가거나 미국과 중립 또는 협력관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가 그보다 우위에 섰다면 미국은 군대를 철수하고 개입에서 손을 씻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김일성이 이끄는(331)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국가사회주의, 민족지상주의 체제가 나타났을 것이며 소련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방벽이 됐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수백만 명의 살상과 수입 년에 걸친 대립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규식 | -온화하고 경험이 풍부하며 박식하고 학구적 인물로 독립운동에 기여해왔다 -열렬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었으며 미국의 요구에 의해 원칙에 따른 독립성을 지킬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강력한 추종자 집단을 갖지 못했고 광범한 사회 세력을 대표하지도 못했다. -한국을 휩쓸고 있던 강력한 흐름과 접촉하지 않았다(332). -하지에게 김일성의 강력한 민족주의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원칙 때문에 분단된 남한 정권을 지지하지 않았고 미국은 그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기간에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넘어갔으며 영예롭게 살았다. |
안재홍 | -친미적 온건파로 남조선과도정부 민정관을 지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한에서 삶을 마쳤다 |
홍명희 | -1948년 평양에 남아 그 정권에 참여했다. -남한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김규식과 협력하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 여운형과 김규식의 중간에 위치한 비공산주의자였다. -1920년대 동아일보사에서 간부로 근무했고 반일 활동으로 투옥됐었다(334). |
장면 | -이승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미국 온건파가 선호한 인물이다. -지주 가문 출신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한국전쟁 당시 주미대사였다. -강력한 민족주의를 지니지 않았다. 진실하지만 유약한 민주주의자였다. -1960~61년 허약한 과도정부를 이끌게 됐지만 주한 미국 대사관과 CIA 한국 본부장의 조언 없이는 어떤 중요한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가 미국과 맺은 관계는 사대의 고전적 사례를 보여주었다. |
유진오 | -1948년 헌법의 대부분을 작성했는데 이승만이 트럭을 몰고 지나갈 수 있는 큰 구멍을 남겼다. -식민 체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극도의 반자유주의자였다(335). |
온건파와 자유주의자들은 한국 민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한국 대중에게 그들의 서양 지식과 교양은 낯설기만 했다. 대중은 정당정치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333). 많은 온건파가 남한보다 북한을 선택했다는 것은 미국인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다. 여운형의 가족 대부분은 그곳에서 삶을 마쳤으며 딸은 현재 그 정권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334).
이승만의 지도력
이승만은 1945년 이전에는 김구·김일성·김원봉·김규식보다 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의 독립을 널리 선전한 사람이었지만 40여 년 동안 일본으로부터 안전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의 흥분한 말투와 고령은 자신의 목적을 숨기거나 미국인과 흥정하기 위한 유용한 책략이었다. 추종자 집단을 운영한 정도의 정치적 경험밖에 없었고 45년 이전에는 통치의 경험도 없었으며 식민지 시대이 관리로 구성된 정권을 이끌었으나 미국이라는 존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듣기 좋은 수사를 사용하고 상대의 경계심을 풀고 민주주의의 상징을 사용하는 방법을 빠르고 완벽하게 습득했다. 하지는 그를 가장 잘 알았으며(337) 한국에 도착한 지 1년도 안 돼 이승만을 깊이 혐오하고 불신했다. 그럼에도 하지가 이승만을 지지한 것은 철저한 실용적 반공주의의 기준에 따른 선택이었고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는 이승만의 부정한 정치자금과 미국인 지지자와의 관계, 테러와 암살에 그가 개입한 정황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338).
CIA는 ’이승만의 궁극적 목적은 자신이 그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었다. 출세에 이용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이든 거리끼지 않고 사용했지만 공산주의자와 연결되는 것은 늘 거부했다. 이승만의 지성은 천박하고 비이성적이며 유치하기까지 하지만 그는 대단히 기민한 정치가였다‘고 평했다(340). 영국 등 미국 동맹국 기관의 평가는 더 신랄했다. 위험한 파시스트나 정신이상자로 규정한 보고서가 작성되기도 했다(341). 미국인들에게는 완전히 한국인이고 한국인들에게는 완전히 외국인인 이승만은 매우 낯선 혼성체였다. 그는 가부장제적 특질에 마키아벨리즘을 더했는데 그것은 그의 두 번째 본능으로 지성이 아니라 그의 뼛속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 비합리성의 합리성의 특징을 체현했다. 적대 세력에게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협박 효과가 있는 한계치까지 행동하거나 그 선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342). 그에게는 미국인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미국인에게 그는 적당한 선에서 필요했고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연로한 서재필이나 무능한 장면, 김구나 김일성은 진정한 한국인이었으나 미국인들은 그들에 대해 잘못 평가했다(343).
이승만과 미국인
이승만에게 중요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정부 내의 개인적 내각, 측근이었던 ’사설 고문단‘이었다. 비공식적 존재인 미국인들이 이승만에게서 보수를 받았고 미국 대사관은 이들을 싫어했다. CIA는 프란체스카 리의 영향력을 너무 높게 평가했다. 이승만은 사적 영역에서 영향을 행사하는 힘을 잘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그녀가 만만찮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리버는 이승만의 연설문을 많이 썼고 해럴드 노블은 각료보다 쉽게 집무실을 드나들었다(344). 해럴드 노블은 선교활동 가문으로 그의 아버지는 1980년대에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을 가르쳤다. 노블은 군 정보부에서 근무했으며 이승만과 하지·무초의 교섭을 자주 중재했다. 해럴드 레이디는 남한 정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의 하나로 1949~50년 대한민국과 일본의 중요한 무역 협상에서 책임자로 일했다. 측근에는 대한인국민회의 오랜 지지자들도 있었다. 임병직이 가장 유명한 인물로(345)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부여의 지주 가문으로 아버지는 군수를 지냈따. 이승만의 비서와 고문으로 일했으며 CIA는 그를 이승만의 분신이라고 지칭했다(346).
미국은 이승만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철저한 감독과 침략 수단의 직접적 사용 금지, 원조 자금 지출과 통화 거래 통제, 정책 문서의 입안, 지속적인 정보 수집을 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에 한국의 모든 외화와 금 보유고를 이송할 것을 검토했으며 그를 사임시키려는 위협과 실제 계획을 추진했다. 이 정권은 전후 아시아의 그 어떤 나라보다 미국이 창조한 산물이었으며, 장제스의 국민정부보다 훨씬 더 그랬다. 게다가 군과 경찰의 작(347)전통제권 같은 한국 주권의 일부를 양보하고 한국전쟁 이전 미국과 중국 국민정부에게 해군과 공군 기지를 제공하려고 했다.
이승만은 부인까지도 믿지 않았다.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의 모든 행동을 무초에게 알려주었고 패트릭 번 신부를 거쳐 무초에게 정보를 전해주기도 했다(348).
이승만과 그 세력이 경외심을 품었던 한 사람의 미국인이 맥아더였다. 일본 제국을 패배시킨 그는 정복자의 역할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1948년 10월 도쿄에서 이승만을 만났을 때 맥아더는 그가 미국을 방어하듯 한국을(349) 방어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발표하고 이승만에게 인정했다(350).
대일 협력의 문제
이승만은 특히 경찰과 군대에서 친일 세력을 강화하고 보호했는데 일본을 철저히 비판함으로써 이를 위장하려고 했다. 경찰 간부들은 완전히 친일파로 구성됐으며 새로 조직된 군대도 나을 것이 없었다(350). 국방경비대는 처음에 6개 여단으로 출발했고 대부분 일본군에서 장교로 복무한 인물들이 지휘했다. 그런 인물은 1여단장 김석원·김백일·원용덕·채원계·이준식· 채병덕 총사령관 등이었다. 이승만은 세 가지 기준으로 장교들을 평가했다. 자신에 대한 맹종적인 충성, 일본인에게 특기 높은 평가를 받은 것, 북한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이 세 조건은 이승만을 자신들의 보호자로 만들었고 이범석 같은 지도자가 쿠데타를 시도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일조했다
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키고 조사와 체포를 권고할 수 있는 위원회를 설치했으며 49년 특별(351)히 악질적인 비밀경찰 몇을 투옥했지만 이승만은 이들의 기소를 방해했다. 9월 ’민족 반역자‘로 기소된 241명 중 1명만 감옥에 남아 있었고 116명은 보석으로 풀려났으며 124명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같은 달 일본군 장교를 지낸 원용덕 장군은 체포된 유격대 9명에 대한 군사재판을 주도했고 그들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전쟁이 격화되면서 국회는 1951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완전히 폐지했다. 부유한 친일파들은 혐의를 벗었다. 일제에 협력했던 유력한 은행가들도 자리를 보전했다(352). 경제 분야에서도 진일 세력은 다시 사업을 할 준비를 갖췄고 이것은 미국의 지역적 전략을 보완하는 데 필요한 사항이었다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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