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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2-Ⅰ』 7장 남한 체제에 대한 저항, pp357-395 / 2024.04.18. 테츠(哲)
테츠(哲) 2024. 4. 18. 17:36
7장 남한 체제에 대한 저항
“2차 세계대전 직후 국가기구가 무너지면서 모든 곳에서 정치적 공간이 생겨났다. 좌익은 중앙에서 주변부까지, 서울에서 가장 작은 향촌까지 모든 행정 단위에서 자신들의 조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향식 관료주의화는 자발적이고 활발한 정치활동의 폭을 축소시켰다. 치안 유지 기관은 기능을 회복하자 곧장 서울 인민위원회를 폐지하면서 우선 중앙에서 권력을 공고히 한 뒤 곧이어 국가기구의 하부에 있는 좌익을 척결하기 시작했다. …… 좌절감에 기반한 봉기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1945년의 무너진 희망으로 되돌아갔다. 봉기는 철저히 탄압되었고, 참가한 대중은 도피할 곳을 찾았지만 아무 데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946년 좌익은 참패했고 우익은 활력을 되찾았다.”(357-358)
○ 1946년 역사적 사건들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 조선공산당 지휘하에 위조지폐 만들다 적발
‣ 공산당 활동 불법화 공표 및 공산당 간부 체포령
1946년 7월 각 지역 농민 봉기 : 전농 중심 쌀 회득 투쟁 전개
1946년 9월 총파업 : 조선공산당 박헌영 계열, 부산지역 철도노동자 중심 총파업
1946년 10월 1일 대구 : 대구 10.1 사건 경찰 발포로 민간인 사망
‣ 전국 규모 시위로 확장되며 경찰력의 한계를 마주하자 족청, 백의사, 서북청년회 등 각종 반공우파단체의 테러 및 좌파 탄압 확산
1947년: 의미 없는 1년
[그림1] 남한의 좌익 중심인물 허헌, 박헌영(출처 : 위키피디아)
브루스 커밍스는 1947년을 ‘1946년의 실패의 패러디가 1년 동안 연출’(358)된, 미국 정책에 불필요한 시간이었다고 평하며, 당시의 정치적 분열이 가져온 혼란 상황에서 정치조직 안에서의 좌익의 움직임을 추적합니다. 1946년 11월 허헌,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 주도로 남조선 좌익정당이 모여 결성된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은 ‘남한의 정치를 급진화해 중심부에서 좌익을 조직하고 편성하려는 뚜렷한 시도’(359)를 보여줍니다.
1947년의 남로당은 1만 명의 당원, 활동가 60만 명 정도로 추산되어 당시 남한의 좌익 세력이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1년의 기간 동안 북한과 남로당의 관계를 단정 짓는 자료는 없지만, 일부 문헌에서 발견되듯이 1948년부터는 남로당이 북한의 지휘 아래에서 정치적 공작에 들어가고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김일성 노선을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지시나 원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남한 좌익의 중심인물인 박헌영은 무력 지원을 받지 못한 ‘전통적 세력이자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361)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남로당은 남한의 좌익으로서 인민위원회를 수립하려는 투쟁을 전개하며 ‘해방 이후 발전한 좌익에 대한 민중의 자발적지지’(362)를 받는 세력이었지만 경찰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되었습니다. 1947년 3월 대규모 파업, 8월 대중 시위를 명목으로 수천 명의 좌익 관계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침체된 상황이 됩니다. 미군정은 체포를 대체로 지원하면서 테러행위를 벌인 우익에 대한 처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1947년 경찰 수가 식민지 시대보다 두 배 정도 많았으며, 좌익 단체의 정치 활동은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촌락에서 전개된 투쟁
중앙 중심의 정치권력과 관료 제도의 중앙 권력 지배가 미치지 못하는 군단위 이하의 농촌 지역에의 혁명과 동원 방식은 유효했고, 이에 촌락 단위에서의 봉기 대처와 관리 필요성을 느낀 정부는 일본 식민지 시기 고도화된 경찰 중심의 억압체제와 지주의 영향력을 통해 위협을 종식하고자 했습니다. 좌익은 당연히 관료 조직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더욱 고립된 촌락으로 향했습니다. 정부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청년단체 들을 임시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에 1946년 도시에서 전개되었던 항쟁은 농촌 지역으로 전파되는데 전개는 도시의 양상과는 다르게, ‘완전히 좌경화된 촌락’(366)과 파견된 서북청년회 등의 우익 청년 단원들과의 대립으로 인한 소요적 사건들이었습니다. 이런 소요가 지역적으로 일어나며 1천명 이하의 규모의 대립적인 소요와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들이 전국적으로 발생한 것을 다수 서술하고 있습니다.(366-369) 경찰은 서북청년회를 보호하고 마을 주민과 농민들을 사살하며 소요를 해산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이승만 정부와 경찰 조직은 우익 청년 단원들을 지역에 파견하여 주민을 재교육시키고 자경단을 조성하여 좌익 단체와 지역에서 경쟁하면서 정치적 동원에 개입됩니다. 우익에 의한 향촌의 조직화는 이후 한국 전쟁에서도 향촌을 방어하고 조직하고 통제하는 근거가 됩니다.
“이 단체는 향촌에 혼란을 일으키고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켰지만, 이후 남한 정치의 표준적 특징이 된 초기의 성공으로 주목해야 한다. …… 이런 세력은 효과적인 정치 수단이 됐으며, 한국 정치에는 늘 나약함과 파벌주의가 있다는 생각이 거짓임을 증명했다. 처음으로 우익은 대중의 동조를 획득하는 데서 좌익과 경쟁했다.”(370)
이런 갈등이 표면화되는 계기는 정부의 가혹한 곡물 징수 정책과 토지제도, 곡물 배급에 대한 농민의 불만이 극도에 이르면서 발생한 것입니다. 수취 할당량의 대부분을 대지주에게 배정하지 않고 소농에게 걷는 경우가 많았고, 공무원들이 ‘정치적 고려’(371)를 통해 국가 배급을 사유화하여 농민에게 적절하게 배급이 돌아가지 않았으며 소작농들은 큰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은 향촌 조직화가 쉽다고 판단했으나, 이를 좌익을 ‘보호한 방법이자 실패의 원인’(371)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1946년 대규모 소요가 파도처럼 넘실대며 퍼져나가면서, 한 마을이나 지역은 당구공이 서로 부딪치듯 다른 마을로 조금씩 밀고 들어갔지만, 1년 뒤 대부분의 조직자는 움직이지 않는 당구공처럼 멈춰 있었다. 잡다한 농민의 집합을 자루에 담긴 감자로 묘사한 마르크스의 유명한 비유는 꼭 들어맞았다. 아무튼 고립된 향촌에서는 정치 운동을 계속 전개할 수 있는 이해관계를 공유한 공동체가 생겨날 수 없었다.”(37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의 가족적 특성을 이해하는 서술도 매우 놀라운 부분입니다.
“한국 농민은 자기 일에서도 정치에서도 가장(家長)이었다. …… 연장자가 좌경화하면 가족이나 가문 전체가 따라갔다. 한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마을이 많았다. …… 그 결과 경찰은 일종의 연좌제를 시행했고 가족 안에 좌익이 한 명만 있어도 모든 친척이 감시받게 됐다. 아무리 역겹더라도 그 방법은 효과적이었다.(그것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 기능하는 표준적 방법이다.)”(372)
향촌에서 우익과 좌익의 대립은, 우위를 차지한 가문과 불이익 받는 가문의 대립적인 모습도 보이고 있으며, 마을 안에서 좌익과 우익이 흩어져 존재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햇필드가와 매코이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대신 김씨와 박씨의 싸움이 된 것이다.”, 372)
향촌에서 인민위원화가 강력했던 지역은 좌익 세력을 유지했고, 이는 지하화하여 전라도, 경상도, 동해안 북부 연안지역 등에서 세력을 유지했고, 잘 조직된 형태로 존속되고 있었지만, 1946년 봉기 이후 수많은 지도자들을 잃었습니다. 이후 지속적으로 지역에 파견된 우익 청년 단체들이 점점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한 지역의 정치활동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로 경쟁하지 않으며 인접지역권을 형성하고, 경찰과 지역관리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합니다.
제주도의 반란
[그림2]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2013)
“내가 관심을 가졌던 제주도는 수많은 죽은 사람과 함께, 일본으로 도망친 수만 명과 함께, 살아남은 노인들의 증오에 찬 시선과 침묵과 함께 오래 전에 사라졌다.”(374)
제주도에서 인민위원회를 둘러싼 갈등은 ‘내전적․혁명적’(374) 특징을 보임을 조명하는데, 1945년 8월 제주도에 인민위원회가 세워지고, 미군은 제주도를 무시하며 좌익 세력이 제주도에 자리잡게 됩니다. 다만 이 세력은 “코민테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인민위원회가 평화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진정한 공동체적 지역”(376)으로 온건한 성향을 보였으나, 이승만 집권 이후 정부와 경찰의 폭력이 섬을 분열시킵니다.
당시 도지사 유해진은 극우인사로, 극우 청년단체와 연결되었고, 경찰인력을 중심으로 좌익에 대한 폭력, 허가받지 않은 곡물 징수 등 문제를 일으켰고, 미군정 당국자는 유지사를 해임할 것을 건의했지만, 윌리엄 F. 딘 장군은 이를 무시합니다. 1948년 3월 1일 경찰이 2천 5백명을 체포하고, 고문과 사망 사건이 4.3 봉기를 불러왔다고 평가합니다. 서북청년회의 광범위한 테러가 원인을 제공하였고 제주도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4.3 봉기는 제주도 북부 해안을 따라 일어났으며 유격대를 조직하고 경찰서를 습격합니다. 이 유격대는 4천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10분의 1이하만 무기를 소지하고, 남로당에서 잠입시킨 조직책이 6명 이하, 북한의 개입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합니다. 유격대는 일본이 제주에 건설한 동굴․지하도․방어 참호, 소형 화기 등을 사용하여 공격했으며, 유격대에 동조하는 도민들로부터 식량 지원을 받습니다.
경찰 조직 외에도 국방경비대가 투입되어 유격대와 반란군 토벌을 벌였으며, 보갑제와 마을 주민 이주 등의 초토화 작전, 미군의 군사적 협조 아래에서 공식정보로는 422명이 사망, 6천명이 체포되었으나, 1948년 12월 비공식 정보에 사망자가 5천명이 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 시점에서 유격대 중심세력은 무너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하지만 1949년 3월에서 4월에 높은 수위의 반란이 나타나고, 3월 한국군 4개 대대가 추가 투입되며 반란군을 산악지대로 몰아넣었으며, 8월 반란군 지도자 이덕구가 살해되며 일단락 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총 약 2만 ~ 3만명 사이의 제주도민이 학살당한 최악의 폭력 상황에서, 제주도는 파괴되었고 서북청년회 잔인하고 폭력적인 관리 하에 ‘정치의 묘지에 남은 평화’(383)를 유지합니다.
여순반란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 반란 진압 임무를 맡은 국군 14연대, 6연대 군인들이 출동을 거부합니다. 경찰과는 달리 국방경비대와 국군 내부에는 ‘이질적인 정치적 성향을 띤 세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좀더 심층적인 문제’(385)가 반영된 것으로, 군내 좌익세력의 색출 과정에서 연대장과 휘하 대대장 한 사람이 체포된 것을 발단으로 봅니다.
10월 19일 지창수 상사는 공모자 6명과 14연대를 장악하기 위해 연설하고, 40명의 동조자를 얻어 무기고를 접수한 뒤 반란이 급속히 확대됩니다.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보성, 남원 등 호남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갑니다. 브루스 커밍스는 여순반란의 궁극적인 원인은 ‘인민위원회가 존재한 지역에 실시한 정치의 실패’(387)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경찰과 다르게 국방경비대에는 좌익과 공산주의자들이 공존하는 상태였고, 경찰과 국방경비대는 대립과 분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반란 이후 해당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재건되고,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이 제창되었으며, 경찰들이 학살되었지만 지역 주민들 다수는 이를 지지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당시 지방 출신의 지도자들이 여수인민위원회에 자리하였으며, 남로당과 전평, 지역 인민위원회 지하요원들이 지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사태를 이끌어 갑니다.
반란 직후 북한 자료에서 군대를 이끄는 김지회 중위가 조선노동당의 세포 지도자였고, 남한 출신 60명 정도가 11월 남파되었지만, 여순반란이 직접 북한의 조종을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북한의 반응은 매우 조심스러웠고, 38선 주변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언급됩니다.
6명에서 시작해서 40명의 동조자, 이것이 2천명의 세력으로 확장될 정도로 전라남도에 반란의 불씨가 심어있었다는 것으로, 실제 반란군을 이끄는 노련한 혁명가는 부재했으며 반란군은 죽거나 투옥됩니다.
반란이 일어난 시점에 이승만은 일본에 갔다가 이튿날 돌아와서 송호성 장군을 사령관으로 반란군 진압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실제 반란군을 진압한 것은 정일권 채병덕, 김백일 등의 젊은 장교와 미군 고문들의 영향력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군 지휘관들이 개입하고, 미군 수송기가 병력과 무기를 수송했으며, 미국 정보조직이 협력하면서, 실제 ‘자발적이고 조직화되지 않은’ 반란은 금방 봉쇄됩니다
격파된 반란군은 지리산에 들어가고 10월 28일 반란군은 시가지 대부분을 포기합니다. 이후 여수를 재장악한 경찰과 김종원 부대를 대표로 군대에 의한 잔악행위가 벌어지면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투옥되고, 좌익으로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사람은 사살되는 등 처절한 보복이 이루어집니다.
11월말 3천 7백명 규모로 보고된 반란군 중, 1천명이 산에서 유격대로 활동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군사재판에 회부된 사람중 866명이 사형되었으며, 이후 광주에서의 정치범 일제검거로 3천명이 체포되는 등 반란군 색출이 상당기간 지속됩니다.
이 과정에서 협조적인 반란군은 관대한 처벌을 받았습니다(박정희가 언급됩니다. 이 이력으로 그의 공산주의자 가능성이 제기되었다는 코멘트가 있습니다.). 반란으로 한군국의 유용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이를 통해 광범위한 숙군(군부 내 좌익세력 숙청 작업)이 있었고, 이승만은 반란을 이용해 자신의 반대 세력 공격을 강화합니다.
이승만은 중앙신문과 세계일보를 비롯한 4개 신문사를 폐쇄하고, 미군 잔류 반대 논설에 대한 금지, 북한에 대한 괴뢰 어휘 사용, 광범위한 정치인 체포,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킵니다. 11월 말까지 19명의 국회의원, 그리고 2만 3천명이 정치범으로 수감됩니다. 서북청년회원들은 경찰 훈련을 받고 지역 경찰로 임명됩니다.
“이승만은 …… 이 반란 사건을 이용해 자신의 통치 행위에 제기된 모든 저항을 탄압했다. …… 그것은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일으킨 즉흥적이고 대단히 멍청한 반란으로, 전라남도의 강력한 좌익 기반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을 뿐이다. …… 이것은 남한 좌익의 묘비명이었다. 대중적 기반은 있었지만 지도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활동가들은 반란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것을 혁명이라고 불렀다. 여수의 역사적 중요성은 3년에 걸친 좌익 활동이 실패의 막을 내렸다는 그 반란적 특징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격대의 투쟁을 본토로 확대하는 데 촉매로도 작용했다.”(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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