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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한국

10장 소련과 북한

 

루즈벨트가 구상한 국제협력주의는 1949년 강력한 반격의 흐름이 등장하면서 막을 내리게 됐다. 그 구상은 사반세기가 지난 뒤 리처드 닉슨이라는 역설적 존재가 소생시켰다. 소련에 대한 루즈벨트의 계획이 성공했을지는 의심스럽다. 미국이 정치 무대를 장악할 수 있었겠지만 루즈벨트가 소련을 다루기는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473). 소련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과 전후 초기에 형성한 변증법적 대립 관계에서 상호 개방의 경로를 거부했다. 서구 유럽에서 국제협력주의적 개방 체제에 위협을 느낀 것은 소련이었으나 동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반공 진영을 공고히하려고 먼저 움직인 것은 미국이었다.

북한과 만주에 대해 소련은 확정된 정책이 없이 화전농법과 비슷한 전략을 추구했다. 47년 미국이(474) 독일·일본을 세계경제의 성장 동력으로서 산업을 부흥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패권 체제 안으로 편입하자 소련은 동유럽 국가들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스탈린주의자에게 미국의 일본 경제 되살리기는 전쟁 능력을 되살리고 일본과 미국이 남한과 중국 일부 지역, 일본 경제를 세계경제에 경제적으로 다시 통합하려는 시도로 즉각 다가왔다. 효과적인 전략은 모스크바와 연결되고 의존하는 다국적 위성국가 체제를 만들어 일본에 완충 역할을 하고 소련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소련의 논리도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강력한 다국적 지역 단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났다(475). 중국군에는 지역주의가 뿌리 깊었기 때문에 소련과 북한은 옌안과 베이징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동북 지역의군대와 직접 교섭할 수 있었다.

1947~48년 소련과 북한의 전략적 이익은 일치했다. 48~49년 중공군과 북한군이 국민정부군을 중국 동북 지역에서 몰아내면서 북한의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소련에 대한 요구 수준도 높였으나 스탈은 현지 정권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것 외에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었다(476). 스탈린은 유순한 위성정부를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은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유럽에서와 같은 위성 정부 형태를 벗어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잊어버렸다. 한국전쟁 동안 중국과 북한을 모스크바의 도구로 보려는 정치적 필요때문이었다. 소련의 장기 목표는 소련의 방어 체제 안으로 한반도 전체를 통합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사실이었다. 소련은 충분하지 않은 자원이라는 조건을 감안하고 최소 비용을 들여야 했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낮으면서도 최선이 결과를 얻을 수 잇는 전략을 추구했다(478)

1945~46년 소련은 장기적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가 1947~48년 세계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계획을 수립했지만, 중국과 북한의 저항에 부딪히자 그것을 폐기했다. 47~48년 북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강화된 증거가 일부 있는데(479) 소련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다고 생각되는 시기에도 소련의 정책은 모순됐다(480). 소련은 47~48년 한국에서도 지배를 시도했다가 위기가 발생하자 철수했다. 이 지역에서 소련이 추진한 전략의 특징은 낮은 비용으로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한국과 중국과 소련 극동 지방을 통합하는 최대의 성과를 얻으려는 전략은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 정권은 기본적으로 반일적이고 부흥하는 일본에 대해 오랫동안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는 체제여야 했다. 모스크바에 의지하고 전투에 미숙한 코민테른의 한국인들을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30년대 후반 숙청하거나 총살했다. 평양과 하얼빈의 반일 전사는 한반도를 적이 대륙을 침략하는 도약대로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고자 하는 소련의 목표를 잘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의지하지 않은 유격대 전사들은 위성국가의 이상적인 지도자가 되지 못했다. 소련의 전략이 49년까지 추진되지 않은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고 소련이 위험성 낮은 현실 정치를 추진한 것과도 관련 있다. 아래로부터의 한·중 통일전선은 위로부터의 통일전선을 약(481)화 시켰다.

 

소련계 한국인

1940년대 소련계 한국인은 대략 15000~300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서대숙은 300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파악했다. “43인회라는 단체가 핵심을 구성했으며 45년 당시 소련공산당원이었다. 그들은 한국전쟁이 끝날때까지 2차적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김일성의 주요 경쟁 상대는 국내파와 연안파였다. 그들은 56년 사실상 숙청됐다. 지도자는 허가이였다. 그가 소련식 조직 방법을 지지하고 볼셰비키의 전통을 가장 잘 이은 엄격한 인물CIA는 소련인(482)과 한국인을 잇는 핵심 연락책으로 봤다. 또 김파를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평양 정권이 중추로 봤다. 1917년 극동 출신으로 2차 대전 동안 카자흐스탄에서 비밀경찰 요원으로 활동했다. 소련이 진정으로 신뢰하는 극소수의 한국인이었다. 정치보위국장 방학세도 소련계 한국인이었다. 10년 태어나 소련에서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2차 대전 때 붉은 군대에서 복무했다. 45년 소련군 진주 뒤 통역과 첩보원으로 일했다. 북한에서 노획한 문헌에서는 소련계 한국인이 상대적으로 강력했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않는다. 1937년 스탈린은 한국인 20여만 명을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킬 것을 명령했다. 친일 불온 분자를 숨겨줄 가능성이 있다는 인종적 편견에 따른 조치였다. 40년대 김일성과 그 밖의 한국인 유격대(483)도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소련은 한국을 인종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봤다.

한국에서 김일성의 유격대 세력은 소련계 한국인을 포함한 다른 적대 파벌보다 위상을 오래 유지했다. 한국의 상황은 동유럽과 달랐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위성국가가 되지 않았지만 소련은 되도록 적은 비용으로 되도록 큰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했다(484).

40년대 후반 북한에서 소련의 행동에 열쇠를 쥔 인물은 레베데프 소장, 로마넨코 소장, 이그나티예프 대령, 시티코프 장군이었다. 이그나티예프는 한국 정치에서 특히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한국전쟁 때 평양헤서 사망했다. 시티코프는 미소공동위 소련 대표단장이었고 북한 주재 소련 대사였다. 그의 관여 없이는 한 가지 조처도 시행될 수 없었던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의 당 관료였다. 옛 코민테른에서 한국인 공산주의자와 연락책으로 일했으며 괴뢰정권인 핀란드 수반 오토 쿠시넨과 긴밀했기에 괴로정권 세우는 전문가가 됐다(485).

북한이 모스크바와 맺은 관계는 중국의 형태와 비슷했다. 모스크바의 명령 아래 협력하는 중·소의 단일 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 소련의 영향이 만연했기에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인이 보기에(485) 소련에 헌신과 충성한 것으로 보였지만 소련이 중국의 정치·군사적 권력의 핵심까지 침투해 지배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소련군 주둔의 겉모습에 가려 북한과 소련 사회주의가 실제로 다르며 모스크바와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북한은 스탈린주의보다는 마오주의에 가까웠다(486).

 

북한의 정치·경제와 소련

1940년대 후반 북한의 정치·경제를 압축하는 세 가지 특징은 중공업, 노동력 부족,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며 중국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북한은 처음부터 자국을 공업 국가라고 여겼다. 대규모 중공업 설비와 에너지 자원이 있었고 2차 대전 동안 미국의 폭격을 거의 받지 않았다. 에너지 생산도 일본의 두 배였기 때문에 일본은 원폭 개발 장소를 한국으로 옮겼다. 북한은 늘 중공업이 가장 우선됐다. 스탈린주의, 곧 세계체제에서 탈퇴해 자족적 발전이라는 후발국의 공업화 전략이었고 전전 일본의 공업화와 공통점인데 남북한 모두에게 중요한 모범이 됐다. 북한은 늘 노동력이 부족했다. 공장 노동자는 대부분 남한 출신이었으며 동원된 잉여 농민이었다(487). 전문가와 지식인은 남한으로 피신했다. 북한 정권은 노동자와 농민이 세운 것이다. 그들은 45년 이전 문맹이었고 전문 지식이 부족했기에 지식인에게 개방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지식인은 모욕받지 않았다. 노동력 부족은 특히 숙련 직종이 심했는데 사회구조에서 농민 비율이 중국보다 적어 농업을 기계화하고 토지에서 이탈한 농민이 유출되는 일을 막으면서 성장 중인 공업과 긴밀히 연결시킬 수 있었다. 북한에서 붉은 전문가문는 우선 공산주의자인 전문가를 찾고, 그들을 농장과 공장 사이에 놓여 있는 매우 새로운 존재인 무산계급으로 유지시키고 형성하는 것이었다. 북한과 중국 사회주의의 차이점을 많이 설명해주는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지 않고는 북한의 정치·경제를 이해할 수 없다. 북한은 늘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들 중 가장 산업이 발달한 나라였다(488). 1950년대 후반 북한은 주체사상을 세우고 코메콘(공산권 경제상호원조 협의회)에 가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용감한 결정이었다.

일제 때 경험을 쌓은 숙련된 한국인이 경제 발전을 주도했다. 12개년 계획(47~49)은 경성제국대 경제학 교수인 김광진의 지휘 아래 입안됐다. 귀국하지 못한 일본인 기술자는 경제 분야 전반에 걸쳐 활용됐다. 역설적이게도 북한은 식민 지배가 끝난 뒤 사회혁명을 신속히 달성함으로써 거의 비판받지 않고 식민지 시대에 축적된 한국인과 일본인의 전문 지식을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남한은 치안 기관에 근무했던 한국인 전문가를 등용하면서 정통성을 갖지 못했다

북한은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을 뚜렷이 갖고 있었다. 세계 경제에서 탈피하고 자립적 발전을 추구하며, 신중상주의와 수입 대체 정책이라는 급진적 방식을 토대로 급속한 산업 발전을 이룬 가장 이른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정책은 새로운 종속 관계를 막으려고 노력한다는 의미였다(489). 1947년 시작된 경제계획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인재 모집과 집중 교육 계획은 혼합된 체제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하룻밤 만에 무산계급 간부, 노동자, 기술자가 되었다. 절대 다수는 빈농 계급 출신이었다. 이는 북한이 소련의 도움을 기대하면서도 새로운 종속 관계에 저항한다는 의미였다.

47년 북한 전체 예산의 이 산업 건설에, 은 국방에 들어갔다. 최상급 전문가는 일본인이었다. 소련인은 없었다. 선철 생산, 강철, 보통강 생산은 44년의 일본 생산량을 넘는 것이었다. 산업 생산은 4939.6%가 증가했는데 50년 수치는 1~3분기에 49년 총 생산량이 이르렀다. 22개년 계획의 첫 해 목표는 50년 초반에 넘어섰기 때문에 나머지 기간의 목표는 상향 조정됐다(491).

김일성은 북한의 상황에서 무엇이 효과적인지 늘 실용적 관점에서 판단(492)하면서, 의지를 중시하는 중국의 방법과 소련의 유물론적 방법을 빌려왔다. 북한은 각자의 능력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받는다는 사회주의 원칙을 받아들였으며 급진적 마오주의자들과는 달리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493).

정권이 수립된 추기에도 북한은 소련 무역과 중국 무역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수입 경로를 다양화할 수 있었다. 북한에 주재한 소련인 고문은 많지 않았고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19492월 하순 김일성은 한국전쟁 이전 유일한 소련을 공식 방문했다. 외무상 박헌영, 경제·무역 전문가 장시우와 정주낵, 백남운, 홍명희, 김정주가 동행했다. 군사 관계자는 없었다(497). 김일성은 소련이 북한을 해방시킨 것에 감사하고 소련군이 철수한 것도 찬양했다. 3월 김일성은 경제·문화 협정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협정은 관대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았다. 모든 비용을 북한이 지불하게 했으며 2%의 이자를 청구했다. 북한 대표단은 나라를 헐값에 팔아넘기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협상 기간 동안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소련과 북한의 관계는 동지적 국제주의의 한 예이기보(498)다 보수적이고 의심 많은 스탈린이 얻어낸 빡빡한 조건의 거래가 되었다. 물론 소련-북한 관계의 본질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는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실패한 것이었다(499).

 

소련을 보는 북한의 시각

소련은 일본과 중립 조약을 체결했는데 1945년까지 깨지지 않았다. 히틀러와 싸우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항일 유격대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데 신중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45년 전쟁은 예기치 않게 끝났고 소련이 가장 앞서 진군했다. 그리고 한반도를 접수할 수 있게 되자 38도선에서 멈췄다(500).

38년 일본군은 관동군 6개 대대와 만주국군과 경찰 2만 명을 6개월 동안 유격대 진압 작전에 동원했다. 주요 목표는 김일성과 최현이 이끄는 유격대였다. 40년 더 많은 병력이 중국과 한국 유격대 토벌 작전에 착수했다. 대규모 토벌은 2년 넘게 지속됐다. 유격대 수천 명이 소탕됐으나 김일성·김책·최현과 그 밖의 북한 핵심 지도자들, 수많은 중국인 지도자는 살아남았다. 만주 유격대는 소련으로부터 무기나 지원을 받지 못했으며 일본군으로부터 무기와 탄약과 그밖의 물자를 탈취했다. 이들 유격대는 자신들이 일본의 북진을 막고 소련을 도왔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45년 만주와 한국에서 소련이 치른 희생을 불신의 시각으로 바라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501). 한국 분단에 소련이 관여한 것 또한 간접적 비판이나 무리한 설명의 대상이 됐다. 북한 지도부 입장을 생각하면 소련이 한국의 해방에 관여한 것을 상당히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502).

소련과 북한의 관계는 데체로 생각해온 것보다 좀더 복잡하고 불편했다. 서로를 의(503)심하는 두 동맹의 조심스러운 이중주가 딱 맞는 이미지이다(504)

한국전쟁의 기원2-1 2부10장(브루스커밍스24.4.25).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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