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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한국

11장 북한의 대중 관계

조선인민군은 소련군의 전술과 중국 공산 세력의 전투 방식을 혼합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는 북한적이다. 중국에서 대부분을 배웠지만, 소련으로부터는 원하는 것만 받아들였으며 반드시 해야 하는 것만 했다. 북한은 중국을 모방하는 것은 어느 정도 용인했지만, 그 밖의 나라를 모방하는 것은 철저히 반대했다(507). 미국의 중대한 실수는 첫째, 북한에서는 중국의 영향이 소련의 영향보다 컸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둘째, 혁명적 호혜주의의 관계는 북한과 중국을 결부시켰다. 셋째, 그런 관계는 매우 강고해 현재의 관점에서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을 이유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북한은 김일성의 신화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를 숨기려고 했다. 미국 CIA는 소련이 전면전의 위험 때문에 자국군을 한국에 투입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소련이 중국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통제하려고 한다고 파악(508)했지만, 소련이 상황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졌는가 하는 측면은 잘못 파악했다.

1947년 스트롱은 북한을 방문하고 소련 외교기관은 중국 공산주의자를 승인되지 않은 비합법 정권으로 취급하면서 그들을 계속 봉쇄하고 있으며, 북한은 자국과의 국경 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내전이나 마오쩌둥 사상과 직접 접촉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1931년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일본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중국인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자신과 동지들은 중국과 통일성을 높이려고 늘 노력했으며 중국 의용군창설에 자신의 유격대는 32년 가입했다고 말했다(509). 그러나 1949년까지 중국의 영향력은 소련 이론가들의 눈을 피해 침투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은 김일성과 그 동지들이었다. 소련이든 김일성이든 무정의 개인적 영향력, 주더 같은 유력한 중국의 군사 지도자와의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했다. 중국의 영향력을 침투시킨 주요 인물은 김창만이었는데, 그는 김일성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출판물에서 김일성을 일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던 두세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마오쩌둥주의 강조는 1947년 여름 김일성의 독자적 지도 방법이 등장한 것과 정확히 같은 시점부터 시작됐다. 김일성이 사용하는 내용과 용어는 중국공산당의 실천에서 직접 온 것이었다. 김창만은(510)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한국의 독립과 민주주의의 실제적 운동과 융합돼야 한다고 말했다. 북조선노동당 이론지의 언어는 마오쩌둥 사상을 답습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김창만은 마오쩌둥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으면서 그의 말투를 차용해 김일성의 입(511)에 전달해준 복화술사였다. 스탈린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사상을 표절하지도 않았다. 마오쩌둥주의의 영향은 최고 지도자와 지도 방법의 핵심에 침투했다. 중국 고전에서 모범을 가져와 자국의 상황에 적용하였고 당시 고전은 마오쩌둥주의였다. 그는 핵심 지도층을 당 지부와 사업 단위에 비치하고 그 핵심을 대중과 긴밀히 결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으로써 김일성이 제시한 핵심 지도층이라는 동심원 개념과 대중노선을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512). 김일성이 마오쩌둥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핵심 지도부를 강조한 것이다(513). 김일성의 생각은 핵심 지도부가 촉매이며 핵심 지도부와 접촉함으로써 대중의 창조성은 촉발된다는 것이다.

소련의 이론가의 당연한 두려움은 마오쩌둥과 그의 교의가 아시아 혁명에서 지도적 위치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연안파가 1948년 침체하거나 지도부에서 실각한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소련군이 한국에서 철수했을 때 마오쩌둥주의는 다시 강조됐고, 김일성의 지도와 깊이 연결돼 있었다(514).

 

1949~1950년 소련군 철수와 중국 영향의 유입

1948년 말 스탈린은 붉은 군대 2개 사단을 철수했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북한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514). 중국에서 싸웠던 수만 명의 한국인은 귀국했다. 소련군이 철수하고 북한군과 연결된 중국이 그것을 대체한 영향을 스탈린이 잘못 파악할 리는 없었다. 극동에서 소련 군사력의 한계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한국이라는 화약고로부터 소련을 멀리 두려는 욕망 때문에 그가 소련군을 철수시켰다고 본다. 그때 이후 김일성은 자신의 지휘를 받는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을 뿐 아니라 두 공산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교묘히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소련과 북한의 군사 관계는 위성국 형태와 달랐다.

한국전쟁 동안 포로로 사로잡힌 북한 해군은 동해안의 주요 항구인 원산에서는 1948년 이후 소련 함정이 정박한 적이 없으며 잠수함이 입항한 적도 없었다(515). 소련이 선호한 전략은 중국 동북부의 중요한 공업지역에서 소련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북한의 에너지 원료, 철도, 항만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핵심 목표는 아니었다. 강대국 사이의 분쟁이 일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주요 관심이 아닌 지역에서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권리를 확보하려고 했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정책에 가까웠다.

소련과 북한의 관계는 소련이 단추를 눌러 북한군을 명령에 따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49기본 원칙(516) “외국 경제에 종속되지 않도록 한국의 자주성을 보장한다는 내용이며 군사 관계에서도 동일한 것이었다.

중국의 한국인 군대는 1930년대 만주나 옌안에서 싸운 다양한 부대에서 비롯됐다. 조선의용군과 이홍광 지대였다. 이홍광 지대는 1935년 만주에서 죽은 한국인 유격대원의 이름에서 따왔다. 조선의용군은 1946년 동북민주연군과 통합됐다고 하지만 그 이름은 계속 사용됐다. 국공내전이 확대되면서 규모가 급속히 커졌는데 국민당이 한국인 주민을 학대한 결과 많은 한국인이 공산군에 가담하게 됐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엄청난 전략적 축복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47년 초 수만 명의 북한군을 파병해 마오쩌둥과 협력했다(517) 식량과 원자재를 제공했으며 싸울 부대를 재편하고 휴식과 오락을 누릴 장소로 북한을 개방했다. 안둥과 신의주는 공산군 병사의 주요 교대 지점이 됐다.

4610월 국경도시 안둥이 함락된 때부터 그런 협력이 시작됐으며 475월 무렵 만주의 중국 공산군의 15~20%가 한(518)국인이었다. 김책의 3만 북한군이 4월 만주로 이동했고 유격대 지휘자 무정은 한국인 6, 중국인 6, 소련인 2명으로 구성된 군사합작위원회의 북한 대표였다.

47517일 북한과 중국은 방위협정을 체결하면서 북한이 중국을 지원하는 수준과 중국군이 북한에 숙영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했다. 493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때 북한과 중국은 상호 방위 협정을 비밀리에 체결했다. 북한군 7만 명을 중국으로 파견하고 그 대가로 침공에 필요할 경우 중국군 20만 명을 파병하기로 약속했다. 조선의용군은 옌지(연길)에 사령부를 두었으며 강신태(519)가 지휘했다. 이홍광 지대는 48년 인민군과 통합했다. 병력은 1만 명으로 이홍광은 35년 사망했지만 중국 국민당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520). 핵심 장군 중 방호산은 황푸군관학교를 다녔고 33년부터 중국공산당원이었다. 인민해방군 제166사단 지휘관이었는데 조선인민군 제6사단의 기반이 됐다. 김웅도 황푸군관학교에서 공부했다. 인민군 지휘관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조선인민군을 지배한 것은 중국에서 참전한 인물들이었다. 헌신적 애국자였지만 풍모는 거칠었고 정치 감각도 없어 북한의 김구라고 할 만했다. 김일성 측근인 박일우는 무정을 도와 조선의용군을 재편했다. 484월 당시 제3사단 최고지휘관은 방호산·왕지인·홍림·노철용이었는데 모두 중국에서 오래 참전한 인물이었다. 중국 공산군 출신 최덕조는 진남포에서 조선인민군 서부 사령부를 지휘했다. 팔로군 중위였다(521). 대부분 30대였다. 만주에서 활동한 유격대는 포함되지 않았는데 김책·최용건·김일·김일성이다. 소련군 출신의 고위 장교가 있다는 증거는 없다. 중국에서 싸웠던 숫자는 10만여 이었다. 505월 하이난섬의 마지막 전투까지 내내 싸웠다. 이런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522).

귀국한 숫자는 10~15만 정도이며 조선인민군 전체 병력은 506월 무렵 95,000명 정도였으며 4~5만이 중국에서 참전한 경력을 지녔다. 이것은 한국전쟁이 시작됐을 때 북한군은 예비역이나 중국에 있던 병사가 더 많았다는 뜻이다. 한국전쟁 동안 조성된 전력은 중국공산군의 한국인은 조선의용군, 이홍광 지대, 동북민주연군, 북한 파견 한국인 부대, 만주 치아마쓰와 룽칭촌에 있던 군사훈련학교 졸업생 등이었다(523).

10만 명이 넘는 북한군이 국공 내전에서 싸웠으며 북한이 중국 혁명에 피 흘려 기여했기 때문에 중국의 도움을 강력히 요청할 수 있었다(525).

 

군대 통제라는 문제

1946년 김일성이나 소련은 조선의용군이 무기와 장비를 지니고 북한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무정과 그 밖의 연안파를 두려워한 결과였다(525). 그러나 김일성은 연안파와 협력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며 김일성 자신이 중국공산당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소련이 김일성과 연안파의 제휴를 두려워했다고 생각된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한국인들을 귀국시켰다.

김일성의 수법은 청년을 강력한 부계적 방식으로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이었다. 효도의 의무라는 원천을 이용하고 그 의무의 대상을 가정에서 김일성, 나아가 국가로 옮긴 것이다. 김일성은 권력과 만주 유격대의 정통성의 상징으로 홍보되었다(526). 1950년 초반 조선인민군 창군 1주년 기념일에 김일성은 처음 수령으로 불렸는데, 최고 지도자, 정복 영웅을 뜻하는 고구려식 표현으로 북한은 자신을 고구려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며 우연이 아니었다. 김일성과 만주 유격대원들은 혁명적 군사 지도자였으며 부대와 지도자 사이에는 명확한 서열이 없었다. 유격대는 가족 같은 () 동지애 정신으로 연결됐다. 유격대(527)에서는 많은 교육과 양육이 시행돼 젊거나 경험이 적은 사람이 유격대 관습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소규모 근거지에는 유격대원의 가족이 살면서 자급자족 부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북한의 민족적 유아론곧 때 묻지 않고 자족적인 한국인의 공동체라는 이상의 기원이다. 이것은 이후 줄곧 북한 조직 형성의 모범이기도 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유격대인데 그 밖의 모든 것을 낳은 어머니 같은 조직이며 전통이고 41년 북한의 새 지도자가 태어난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것은 모두 김치처럼 한국적인 것이다(528).

인물 공   적
김일 1985년까지 김일성의 최측근, 조선인민군이 소련군과 30년대 유격대를 모범으로 삼고 있다고 했지만 중국에서 쌓은 군사적 경험은 언급하지 않음.
강건 1918 경북 상주 생, 33년 김일성 부대에 들어감. 김일성 부대를 조선인민군의 중심이라고 함.
최현 12세 때 항일 투쟁에 참가, 32년부터 김일성과 함께 행동함. 유격대원의 강한 신념 강조
박훈일 자신의 부대를 이끌었고 한국인과 중국인 유격대의 결속을 강조했지만, 소련의 도움은 언급하지 않음.
오백룡 아버지가 3·1운동에 참여해 체포된 뒤 만주 이주. 김일성은 늘 학습조를 만(529)들어 임시 학교로 만들었다고 언급함
박길성 혁명 가정에서 태어나 김일성에게 양육됨, 17세인 34년에 김일성 부대에 들어갔고 42년 전사함.
허형식 경북 선산 출신, 국민당에게 고문을 받아 사망함.
최용건 별도의 독립 부대를 이끌었지만 김일성 부대를 만주 항전의 중심이라고 함.
조선인민군은 선진 군사과학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발언한 측면에서 김일성의 핵심 세력과 달랐음.
무정 가장 적게 언급한 사람. 그는 자신이 30년부터 참전했으며(김일성보다 2년 앞서) 항일 유격 투쟁에서 김일성의 지도력을 조선의용군과 연결시킴.

조선인민군 창군 2주년까지 당 기관지는 김일성 계열 유격대원을 찬양했다.

 

1950년 조선인민군 창군 기념일은 김일성이 스탈린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처음 등장했다(531).

 

마오쩌둥의 승리하는 다루기 힘든 영향: 동방은 붉은가?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북한에게 안전한 후방 지역을 제공하고 남한을 위태롭고 매우 취약한 지역으로 바꿔놓았다(531). 단결이라는 표현은 군사적 동맹보다는 북한과 중국의 결속에 가까웠다. 이 표현은 소련과는 사용하지 않았다. 소련은 북한에 우호적이거나 사심 없는 지원을 제공한다고 늘 묘사됐다.

 

소련의 원자폭탄

자본주의 세계 체제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공동 지원을 바랐다. 김일성은 독립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자유 이 두 가지 이익을 모두 갖고 싶어했다. 498월 소련이 원자폭탄을 실험하면서(533) 공산주의 세계도 진동시켰는데 북한에 큰 영향과 용기를 줬다. 소련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지속된 코민포름과 공산주의자·좌익 세력 연합을 통해 세계 규모의 평화운동을 시작하는 작전을 전개해 큰 성공을 거뒀다. 자신감의 광채를 내뿜었다 (534).

북한은 중국의 승리와 소련의 원폭을 공산 세계가 승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또 모스크바가 핵우산을 한반도까지 펼치기를 바랐는데 특히 소련이 과거에 일본이 흥남에 세운 공장 시설에서 원폭 계획에 분명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535). 1950년 초반 북한은 미국이 가장 두려워한 바로 그것 때문에 큰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것은 원자폭탄의 지원을 받는 거대한 공산주의의 단결된 세력이 유럽과 아시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김일성 체제는 소련의 힘을 지나치게 평가했으며, 대단히 한국적인 방법으로 스탈린을 북한 방어로 유인하려고 했거나 적어도 미국의 접근을 막으려고 했다. 1950년 초반 북한은 일종의 전시체제 상태에 있었다(536). 전쟁이 일어나기 꼭 1년 전인 1949625일 김두봉은 민족의 세 가지 과제를 열거했다. 그것은 미국 축출, 이승만 정권 타도, 국토 통일이었다. 인민군은 언제든지 싸울 준비를 철저히 갖춰야 한다는 수준까지 깊어졌다. (537).

 

결론

북한은 유격대 출신이 통치했으며 격렬한 불굴의 민족주의자였다. 대부분 만주의 거친 환경에서 성년이 되었고, 지극히 가난한 한(537)국인들 사이에서 힘들기만 하고 보상은 없는 장기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북한의 지도자들은 민족주의자 가운데 민족주의자였으며 한국인 열성분자 가운데 열성분자였다. 그들은 모스크바의 공산주의자와 월가의 국제협력주의자를 모두 철저히 경멸했다. 중국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깊이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공산군에 있는 한국인은 완고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지니고 있으며 만주에서 중국과 소련의 협력을 의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북한이 중국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만주에서 일본 및 중국 국민당에 맞서 함께 싸웠기 때문이었다. 20년 가까운 동맹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중국을 존경한 한국의 전통과 존중하고 우대해온 중국의 역사를 북한이 이용한 측면도 있다(538).

김일성은 중국 내전에 수만 명의 한국 청년에게 필수적인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이승만은 허공에 대고 엄포를 놓으면서 군대를 신뢰하기 어렵고 무능한 장교 집단으로 바꿔놓고 미국이 자기편에서 싸우도록 만들려고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반면 북한은 3년의 공백 동안 실전 훈련을 쌓은 가공할 군대를 양성했다.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외국 침략자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군대를 갖게 된 것이었다. 미국은 이런 역사와 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평양에 있는 한국인들을 크게 잘못 판단했다(539).

 

한국전쟁의 기원2-1 2부11장(브루스커밍스24.5.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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