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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950년 6월의 서곡>
13장 “연설”: 프레스 클럽에서 제시한 애치슨 방식의 억제
1949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와 반격, 일본의 위치, 중국의 팽창 등을 정책적으로 고려하며 ‘동아시아 봉쇄의 확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에 대한 군사 원조 제공, 중화인민공확국 불승인, 아시아 배후지를 일본 경제의 필요와 연결하는 패권적 구상, 한국 전쟁에서 봉쇄와 반격의 변증법’(51) 등 미국 정부의 필요에 의한 정책적 구상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 1월 12일의 애치슨의 프레스 클럽 연설에 대해 공화당과 매카시로부터 ‘김일성에게 보여준 애치슨의 “청신호”’(52)라는 비난을 하며 연설이 억제력의 실패 사례로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치슨의 남한의 정치적․전략적 가치에서 방어선에서 제외되는 결정에는 조지와 스모크가 제시한 일반적인 대응(군사지원, 간접적 군사외교 지원, 제한된 개입의 축소 등)이 아닌, ‘내전에 사용한 억제’(53)였으며 남한의 방어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애치슨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불문하고, 사회적 통념에서는 애치슨이 실수했으며, 정치적으로도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통념이 자리잡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브루스 커밍스는 그런 통념이 잘못되었고 애치슨의 연설에 의해 스탈인이 남한에 대한 미국의 방어를 오판하게 했다는 전제가 납득되지 않는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어떠하든, 애치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당시 나는 활력과 열정이 넘쳤지만 경험이 부족했고” 준비 없이 즉성에서 연설하거나 다른 사람과 미리 상의하지 않은 경우 “매우 심각한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54)
예측하기 어려운 사태를 포착하고 이해하는 능력
브루스 커밍스는 애치슨의 아시아 정책은 그가 충분히 잘 이해하고 판단했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애치슨이 남긴 기록들을 통해 보았을 때 그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무장관으로서의 정책적 결정을 내림에 있어, 세계를 구획으로 나누어 그 구획들을 전체와 맞춘 뒤 미국과 유럽의 이익에 비춰 검토하고 그 지역에 적합한 정책을 고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을 통찰력과 계획을 가지고 비밀을 유지한 것에 대해 ‘자신만의 구상을 즐겼으며 감춰진 손과 비밀스러운 힘의 행사를 즐겼다.’(56)고 평하고 있습니다.
애치슨이 관리통제국장이던 1941년 일본에 대한 “동결정책”과 일본에 대한 압박의 사례를 들며, 애치슨의 의도를 묘사(57)하는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이런 애치슨이 구축한 세계적인 구상, 일본의 긴장을 유발하여 진주만 공격으로 ‘행동’하게 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우리의 적은 마침내 우리의 난제를 풀어주고 우리의 의혹과 불안을 해소해주었으며, 우리 국민을 국익에 필요한 길고 험한 과정으로 단결시켰다.”(57) / 하지만 진주만 공격에 의해 미군 해군 전력이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는 점에서 상당히 모호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애치슨의 극동 구상
애치슨의 극동 구상은 중국과 소련의 문제를 파악함에 있어 세계경제 부흥에 대치되는 사회주의를 억제하기 위한 봉쇄선을 긋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변부를 둘러싸는 봉쇄선을 긋고, 서유럽과 일본의 산업 경제를 부흥시키며, 개발이 뒤떨어진 배후 지역을 연결하고, 소련과 중국을 균열’(58)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봉쇄와 반격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의 민족주의, 시장의 매력성을 통해 중국과 소련을 균열시키고자 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중국이 농업중심의 경제로서 일부 연안 도시를 제외하면 공업화 능력이 없는 상황으로 시장경제의 매력성은 중국을 끌어들일 가능성이 있었고, 미국 아래 2등 국가 일본의 구상 아래에서 동남아시아 지역을 일본에의 원자재 공급과 시장 역할을 하는 배후지로 포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남한은 ‘부수적 위치’(59)로, ‘도미노 패’(59)가 될 우려가 있는 지역이었지만 봉쇄전략 안에 포함은 해두었습니다. 반면 타이완 또한 중국의 관계에서 도미노 패였으며, 미국내 정치에서 특이한 영향을 미치며 공화당과 우파의 견제와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가 됩니다.
애치슨의 국가 관계를 읽는 합리성에 비해, 민족주의와 내부 사정을 읽어내는 과정에 ‘끔찍한 해석’(60)을 했으며, 민족주의 기반의 ‘역사적․혁명적 세력’(60)을 이해하지 못하며, 북한의 김일성, 베트남의 호찌민 같은 인물을 경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1] 1949년 국무장관 선서, 딘 애치슨의 회상록(출처 : 위키피디아 & 아마존)
1947년 봉쇄정책은 1948년 국민당의 중국 본토 철수와 1949년 상황이 되면서 미국의 중국 정책 구상은 매우 단순해지게 됩니다. 함락 또는 소련으로부터의 분리를 유도하는 것으로, 당시 극동에 자원을 투입하기 어려운 소련의 상황에 비해 미국은 원조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공산 세력과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고 무역을 지속하며 군사적 분쟁을 피하는’(61) 영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경향이 우선되지만 미국 국내 정치와 한국전쟁으로 이런 구상은 무산되지만, 이후 30년 뒤 중국의 행동범위를 제한하는데 이런 구상이 이용되었다 평가하고 있습니다.
중국 내에서는 저우언라이를 비롯 국제협력주의 성격을 가진 세력이 소련에의 의존을 피하고 미국과 관계 수립을 타진하기도 합니다. 당시 티토주의적(1948년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주의 :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위키피디아) 경향에서도 애치슨은 중국을 소련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정책을 주장하며 이것이 프레스 클럽 연설의 주요 목표였다고 주장합니다.
1949년 12월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오래 머물면서, 길어지는 회담은 서로의 대립이 있다는 정보기관의 확신으로부터 중국과 소련의 전쟁 가능성까지 보고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를 바탕으로 애치슨과의 만남 이후 레스턴은 뉴욕타임스의 신년 사설을 통해 중국과 소련의 문제를 통해 서로의 균열을 넓히려 한다는 생각을 표출합니다.
하지만 이를 비웃든 1950년 2월 중․소조약이 체결되며 체면을 구기고, 저우언라이를 비롯 중국 지도부는 단결을 곤고히 합니다. 애치슨이 소련의 제국주의적 음모론을 통해 중국을 분리시키려는 구상은 중국의 ‘혁명적 민족주의’(64)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중국의 미국에 대한 ‘반제국주의적 감정’(64)을 오해한 결과라고 서술합니다.
타이완을 둘러싼 책략
반제국주의에 대한 감정이 소련을 향하게 하여 중국과 소련을 분리시킨다는 구상 아래에, 타이완은 미국의 봉쇄전략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애치슨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라 주장합니다. 애치슨은 타이완을 본토에서 분리시키려 했지만 그것을 통해 중국을 자극하여 소련과 연결되는 것을 경계하였고, 마침 만주와 신장에서 중국과 소련의 영토문제 징후를 확산하고자 하였습니다.
타이완에 대해서는 남한처럼 유엔의 국제적 승인을 통해 미국의 개입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접근했으며, 미국의 국익을 위한 체계 아래에서 접근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타이완의 국민정부는 ‘자제력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고, 미국의 통제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으며, 미국의 전면적 지원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을 본토 수복이라는 어리석은 허세’(65)를 보이는 정부였다는 판단 아래, 미국 정부는 봉쇄 정책을 선택하며 장제스 정부를 밀어내게 됩니다.
봉쇄정책을 위한 반격론자의 억제, 방어 전략의 보안 유지, 지정학적 위치의 고려가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었으며, 이런 부분에서는 남한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미군 아래 정권 창출, 많은 수의 고문단을 통한 통제력 행사, 반격 정책의 가능성 등)
반면 맥아더를 비롯 타이완 방어로 적극적인 대처를 주장하는 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을 빗습니다. 1948년에는 타이완이 미국 정부에 적대적인 정권이 자리 잡는 것이 해롭다고 평가하는 반면, 1950년 트루먼의 기자회견에서 타이완 방위 계획이 없다는 발언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애치슨이 타이완 방어에 대한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적들을 교란하고자 했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프레스 클럽을 향해
이런 상황에서 애치슨은 프레스 클럽 연설을 통해 국가안보회 문서 48의 일부 내용을 공개하기 위한 연설 초안을 준비하면서 ‘측흥적인 실언’(68)이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긴 시간을 극동 전략 구상을 위한 회의와 초안 준비에 할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한은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고 아시아 중 처음으로 언급하며 미국의 의도를 보여주려 하지만 ‘방위선’(69)의 개념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업 중이던 초안은 애치슨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방어선 관련 내용을 직접 정리하며 얄류산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이 언급하게 됩니다.
남한은 직접 방어에 들어가는 일본과는 다르게, ‘위협받는 그 밖의 국가’(70)로서, 스스로의 방어가 먼저이나 상황에 따라 재평가될 수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방위선의 확립이 부주의한 작업이 아니었으며, 많은 계획들과 기존의 방위선의 개념에 기초한 것임을 주장합니다. 물론 기존의 방위선의 개념에서 남한이 포함된 것으로 제시할 수 있지만, 미국의 이익에 연결되지 않다는 판단에서 남한이 예외상태로 놓인 것으로 봅니다.
저자는 애치슨의 구상을 맥아더 등 방위선을 공격과 방어의 두 기능 모두 가능한 ‘“순수하게 군사적인” 고려’(71)로서 보는 것이 아닌, 정치적․경제적 수단을 이용해 동아시아 지역을 확보하고 발전을 통해 확보하려는 세계관을 밝힌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디스를 비롯 애치슨의 연설에 대한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괴리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도, 부주의한 즉흥적 발언도, “정치적” 고려와 “전략적” 고려를 구분하지 못한 것도, 그리고 물로 가장 충격적인 예외와 갑작스러운 반전이라는 평가까지도 일관된 논리 속에서 소멸된다.’(71)
평양의 문맹
애치슨의 연설에 의해 김일성이 남한을 공격하였다 오판했다는 추정들에 대조적으로, 여기에서는 북한이 애치슨이 방위선에 남한을 포함했다 판단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애치슨 발언에 대한 반응은 그가 “극동 방위선”(72)을 구축하려 하고, 일본-오키나와-남한(제주도)-필리핀-타이완에 걸쳐있는 “공격선”(72)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북한의 로동신문 기록을 통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방위선을 공산주의 세력을 분리하려 하는 ‘팽창주의적 선’(72)으로 보았으며, 제국주의적 정책이자 애치슨이 남한을 관통하는 방위선 전략이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직접적 국익 범위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방위선에는 들어 있지 않다’(73)는 판단과는 별개로 남한 원조 법안이 하원에서 2표 차이로 부결되고 이는 외국 원조에 대한 첫 거부 사례로서 애치슨을 곤경에 빠지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애치슨은 이후 남한을 버릴 의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봉쇄선과 남한을 연결하지는 않았으며 이를 이승만의 성격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후 결정은 번복되며 1951년 회계연도에 1억달러 원조가 의결됩니다.
북한은 원조 부결 상황에 대해 이승만 정부가 미국의 원조 없이는 버틸 수 없다고 평가하며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논평하지만, 미국이 남한을 포기하였다 결론짓지 않고, 이후 애치슨이 법안을 되살리는 상황에서 미국의 중국 정책이 실패한 것으로 논평합니다. 평양은 3월 애치슨의 연설을 “아시아의 민족 해방 투쟁에 맞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76)이고 중국과 소련을 분열시키고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며, 남한에 대한 방어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파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애치슨이 공산주의 세력에 ‘청신호’를 켜줬고 억제책이 실패했다는 비판이 6월 25일 전쟁발발 이후 미국 내 정치투쟁이 만들어낸 산물로 봅니다. 공화당이 애치슨의 의도를 잘못 읽고 그의 부하인 케넌도 상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애치슨의 생각을 알지 못했다고 정리하며 애치슨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방어에 대한 애치슨의 생각
애치슨라인을 기조로 그의 방어 구상에서 남한을 포함시킬 경우 타이완도 그와 비슷한 수준을 요구하며 반격 지지자들이 대담하게 나올 우려가 있었다는 점,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을 동시에 억제해두어야 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보험’(78)을 제공할 수 없었던 애치슨의 태도가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애치슨이 구축하고자 했던 방어의 의도는 ‘서방을 건설하는 동안 동방에서 위상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80)것에 있으며, 이를 유엔의 국제적 책임을 통해 보완하려 했고, 그의 방어는 북한․남한․타이완․친국민당 반격론자에 대한 대항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애치슨은 공격이 일어날 것을 고려했는가?
‘수많은 공격의 잠재적 근원 가운데 어느 것이 공격으로 발전할지 예측하는 것’(81)으로서 그의 방어 구상은 여러 가지 공격의 가능성을 제한하도록 방어를 구축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애치슨 연설이 모호한 상황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였다는 그 효과는 완벽했다 평가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여러 대담과 뉴스 기록을 통해서 본 남한은 미국의 방어 전략과 냉전의 구도 안에서 공격의 위기가 있는 곳으로 판단된 것으로 보입니다. 남한은 방어선에서 명확하게 제외되어 있었으며, 남한은 이에 ‘공황 상태에 빠진 반응을 보였다.’(83)며 미국 정책에 대한 당시의 분위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미국인이 논의하기 내켜하지 않는 미묘한 문제’(83)로 지적하는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는 방식에 대해 ‘미국은 다른 나라에 개입하지 않고 부당한 도발이 일어날 경우에만 참전한다는 일반적인 생각’(83)과는 반대된다고 언급하며 전쟁의 징후를 유도하는 발언의 사례들을 진주만의 예시를 들어 제시하며 수정주의 이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적이 첫 포격을 시작하도록 내버려두면서, 여론을 활용해 침략자로 낙인찍고 이를 활용하는 것에서, 당시 한국의 상황에 대한 공청회의 비판에 ‘적의 공격을 권유한 것과 마찬가지’(87)였다는 비판에 옳을 수도 있다고 답하는(텍스트에서 연속으로 2번 강조되고 있음)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도가 당시 미국 내의 고립주의적 태도와 세계적 역할의 국가 안보, 안보 관련 재정 지출의 증액 등과 관련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정황도 서술되어 있습니다.
다만 남한의 공격에 대한 반격은 일본의 방어와 세계 안보에 대한 국가안보회 문서 68에 대한 지지의 결집, 공산주의에 노출된 지점 중 미국이 개입하기 용이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방식이었다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상을 은폐하려 의도했거나, 관련된 정책이 있었는지는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단지 ‘어떤 사태’(88)가 있었다는 표현에서 흥미적인 요소를 불러 일으킵니다.
브루스 커밍스는 애치슨에 대한 비판에 반박하며 그는 한정적 상황에서 봉쇄정책 기반의 방어 체제를 갖추어 공산 세력이 먼저 행동하게 하는 전제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반대로 소련이 오히려 동쪽의 우발적 충돌을 통해 혼란을 일으켜 미국이 “어리석은” 전쟁에 피와 재산을 쏟아붇기를 바란 것(89)이라는 해석도 흥미 있는 예측입니다.
프레스 클럽 이후의 연설: 총력외교와 인도차이나에 대한 관여
국가안보회 문서48의 중국과 소련 분열 유발, 문서68과 ‘총력외교’를 기조로 세계적 역할에서의 국가 안보와 공산 세력의 고립이라는 계획 아래에서, ‘한국전쟁이 아시아에 봉쇄 정책을 적용한 전환점’(89)이라는 평가와 소련을 대상으로 한 대응과 국민적 호소는 북한에 대해 명확한 경고라고 보고 있습니다. ‘애치슨 독트린’이라 불린 억제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방어 체제 아래에서, ‘총력외교’를 전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총력외교”에 드러난 봉쇄와 반격의 변증법(92)이라는 표현에서 애치슨의 구상과 당시 미국의 세계정책의 변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민족의 독립주의적 성격을 보이는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한 군사원조를 통한 대응과 자유주의 국가를 구축하며 냉전의 구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 공산주의의 흐름을 막고자 했던 정책적 선택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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