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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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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초 혁명을 강조하는 움직임은 북한 국내와 해외에서 모두 뚜렷이(98) 높아졌다. 1950년 봄 공산 진영은 냉전의 심화와 미국 정부 안의 위기를 감지하고 세계적 규모로 이념 투쟁을 강화했으며, 북한의 논조는 이런 경향을 반영했다. 북한은 가까운 앞날에 남한을 해방시킬 것이라며 군사력과 계급 투쟁을 강조했고 1950년을 결단의 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을 그들이 남한을 공격할 것이라는 조짐이라고 말한다면, 타이완 해방에 대해 중국이 거의 동일하게 표현한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99).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미국인의 북한 방문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며, 미국과의 관계가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뉴욕타임스 특파원 월터 설리번은 19502월 김일성의 전기적 정보 등을 알기 위해 취재하고 싶다고 북한에 요청했다. 그는 긍정적인 회신을 받아 4월 초 홍콩으로 갔고 중국 상인들이 소련 화물선으로 북한까지 인도하기로 했다. 620일 설리번은 평양의 내무성에 최종 방문 승인을 요청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했고 전쟁이 터졌다. 설리번은 남한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자신의 방문을 막으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나 영국 정보기관은 알고 있었고 그래도 방문한다면 암살될 것이라는 소문은 서울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시점이 중요한데 북한은 늦어도 5월 중순까지는 방(101)문을 허용할 의사가 있었으나 6월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1950년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

전쟁 직전 북한 지도부의 공식 성명에서는 소련이 한국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찬미했지만, 실제로는 문화적경제적 원조만 언급했다. 19503월 허헌은 500여 명의 한국 학생이 소련에서 공부하고 있고 북한의 학교에는 소련이 교사와 교과서가 있으며, 대규모 원조도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소련군은 철수하면서 한반도 문제는 한국인 스스로 해결하도록 맡겨뒀다고 했다. 소련 군사고문은 CIA가 추산한 2000명보다 훨씬 적었다. 전쟁 전 한국 국방장관은 소련 군사고문의 전체 숫자를 120명으로 봤다. 소련은 북한 인민군 1개 사단마다 15명 정도의 고문 장교를 두었으며 506월 이전 북한 인민군에는 10개 이하의 사단이 있었다. 북한 공군에는 15명의 소련 고문밖에 없었다. 고문이 모두 120명 정도였고 1개 사단마다 15명이었다면 1개 대대에는 한 두명 정도의 소련인 고문밖에 없었던 것이다(103).

훨씬 개연성이 낮은 주장은 북한이 바라지 않은 전쟁에 뛰어들도록 소련이 북한에 명령할 수 있었다거나 소련이 북한에서 그처럼 뚜렷하게 허약한 지배력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이다(104).

 

북한에 대한 소련의 군사 지원

조선인민군의 장비는 대부분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넘겨준 것이었다. 49년 몇 달 동안 대규모의 장비를 수송했으며 4910월부터 중무장한 전차 부대가 38도선 바로 북쪽에 배치됐다. 소련도 전쟁 동안 북한에 자신들의 무기를 팔았다. 조선인민군의 대포는 미국에 맞서 싸우기에는 매우 약했지만 소련은 조선인민군에게 자국의 정예부대를 파견하거나 중화기를 제공하는 것을 계속 자제했다. 남한과 북한의 두드러진 차이는 공군력이었다. 북한은 프로펠러 추진 전투기와 경폭격기를 보유했다. 소련은 근접지원항공기(105) 150대 이상 제공 합의, 48년 철수 때 93대 남겨두었고 김일성 생일에 더 제공했다. 이 항공기는 모두 45년 이전의 구식이었으며 제트기 같은 기종은 없었다. 미 공군은 이것들을 며칠 만에 궤멸시켰다. 군사 장비는 대부분 만주를 거쳐 들여왔으며 나머지는 동해안 항구들을 거쳐 반입했다. 소련제 장비는 소련이 2차 대전 때 만주 관동군을 공격한 무기였으며 인민해방군과 가오강의 동북인민정부를 위해 남겨둔 것이었다. 5045월 대량의 무기가 반입됐으며 조선 출신 병사 수만 명도 함께 들어왔다.

북한은 소련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병기창이 있었고 이를 이용해 기관총박격포포탄을 생산했다. 소형 장갑차는 개전 초기에 활약했다(106). 공군력은 북한이 뚜렷이 우위였다. 소련은 중국이 제공할 수 없는 무기를 북한에 제공함으로써 중국과 영향력을 경쟁했다. 중국 전투에 참전했던 수천 명의 병사가 고향으로 돌아온 시기와 일치했다.

 

북한 군사 행동의 징후

19506월 무렵 북한의 남침 관련 경보는 정보장교들에게 흔히 있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북한의 침략을 처음 예측한 것은 1946년 봄이었으며 그 뒤 4년 동안 비슷한 내용을 여러 번 반복했다(108). 1949년 여름 무렵 전쟁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에 1950년 정보 자료는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49년 식견 있는 미국인들은 남한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북한의 위협과 병력 이동을 그런 맥락에서 파악하여 남한의 행동에 대한 방어책으로 예측했고 심지어 이해할 수 있는 조치라고 생각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 모두 1950년 여름에는 침공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110). 문제는 공격이 임박했다는 실제적 증거가 무시되거나 묵살됐다는 것이다. 당시 정보 보고는 공격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공격 임박 정보는 49년 가을에도 강력했지만 그때조차도 예측할 만큼 강력하지 않았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은 19506월이 아니라 19496월 무렵 남한을 멸망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고 499월 이후 실질적인 전시체제로 이행했다. 49년 전투의 결과는 북한의 역량을 분명히 보여줬다. 주요 전투에서 한국군을 섬멸했다(111).

조선인민군의 전력은 실질적으로 향상되었다. 중국에서 오랜 전투 경험을 지닌 병사들이 돌아온 것과 관련이 깊었다. 수천 명의 한국인 젊은이를 중국 전선에 보내면서 김일성은 그들이 전투 경험을 쌓고 중국에 상부상조를 강력히 요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1950년 인민해방군은 본토에서 국민정부군을 완전히 몰아냈고 한국 출신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112). 4월 하순 38도선을 따라서 북한과 남한은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배치했으며, 조선인민군은 부대에 따라 방어적 배치나 공격적 배치를 선택했다. 624일 조선인민군의 병력 배치는 뚜렷이 임박한 남침을 보여주지 않는다. 인민군 전체 병력 79700명 가운데 2990명만 38도선 부근에 집중된 반면 5만 명 가까운 병력이 진남포~원산 북쪽에 있었다(113). 한국군 전체 병력 87500명 중 32500명이 38도선에 있었으며 38선에서 56km 또는 하루 행군 거리 안에 35000명이 있었고 먼 내륙지역에는 2만 명만 있었다.

625일 시점에 조선인민군은 한국군이 그 전해 여름에 달성한 수준에 이르렀을 뿐이다. 북한은 중국에서 귀환한 군인들이 병력에 포함되어야 했기에 전쟁이 시작됐을 때 여전히 병력 증강을 마친 상태가 아니었다. 9월 무렵까지 북한은 5개 사단을 더 배치했으며, 그제야 전쟁을 수행하는 데 훨씬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다(114).

 

북한의 동기

북한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매우 큰 침공을 개시한 까닭은 몇 가지 동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19506월 공격을 선택한 까닭은 동기들 가운데 어느 것도 6월 하순 시점에 침공을 개시한 동기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련의 입장은 위험성을 내표한 북한 지도부와 거리를 두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고 싶지 않지만 전쟁은 이익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공산권에는 이익이다. 미국이 개입하면 북한이 질 가능성이 더 크다. 그 경우에도 세계의 공산주의자에게 교훈을 줄 것이다. 중국 참전 가능성은 커(115)지고 미국에 맞서 피를 흘릴 것이며 우리에게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아무 소득 없이 인명과 재화를 낭비하게 될 것이다.‘ 19506월 소련은 위기로 가득 찬 1950년 초반의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외교적 접근을 하고 있었다.

알려진 주장 중 하나는 북한이 지도부의 파벌 다툼 때문에 침공했다는 것이다. 박헌영 일파는 남한에 있는 기반을 잃을까 우려했고 전면 공격을 일으키면 대중이 호응해 봉기해 공산주의의 승리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116). 박헌영은 짧은 글을 통해 1949년 가을 이후 한국군의 진압 작전이 강화된 것, 남한 유격대가 쇠퇴하고 있는 까닭을 설명하려 했다. 조선 인민은 반도가 전화 속으로빠지기를 바라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117) 유격대에 참여해 평화통일을 위한 투쟁을 확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토지문제가 맥락에서 중요해진 것은 49년 이승만이 발표한 토지개혁안 때문이었다. 625일 시점에 서유가 이전된 토지는 전혀 없었다. 여름 곡물 수화기였는데 이전의 두 차례 수확이 모두 풍작이어서 남한 경제가 호전되어 보였고 농민을 유격대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계획대로 507~8월 토지 개혁이 이뤄지고 예상대로 남한에 풍작이 들었다면 유격대의 빈농 기반은 심각하게 무너졌을 것이다(118).

박헌영은 북한 정부에서 외상이었는데 영향력이 거의 없는 자리였다. 이 시기 김일성과 최용건이 불화했다는 증거는 없다. 실제로 최용건은 5028일 조선인민군 창군 기념일에 김일성을 수령이라고 선언했고 박헌영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그 표현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박헌영은 군사 경험이 없고 김일성과 최용건은 유격대 경험을 공유해 친밀했는데 박헌영의 견해를 두고 충돌했을 것으로 보기 어렵다. 남한 유격대의 패배와 임박한 토지개혁은 한국의 어떤 공산주의자라도 정규전을 지지할 좋은 이유였다. 조선인민군은 남한 유격대가 아니라 자신들이 해방자라고 남한 시민에게 거듭 강조했다. 전쟁 패배의 책임을 박헌영 일파에 전가한 것은(119) 1953년이 돼서야 유용해진 전략이었다.

또 다른 주장은 북한은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하기 전에 통일을 추구하려고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묘한 시점 요소가 있다. 19505월에 처음으로 북한 문서는 이승만이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50년 시점에서 분단을 영구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한국인은 없었다. 이것도 625일 시점을 선택한 까닭을 설명하지 못한다. 미국의 개입을 불러올 위험성이 높은 총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통일을 실현할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120).

한 가지 동기는 일본의 부흥과 일본과 이승만 정권의 경제·군사적 관계를 북한이 경계했다는 것인데 50년 초반에 증거는 많이 존재한다. 북한은 미국 제국주의를 끊임없이 비난했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심장병처럼 생각했다(121). 당기관지 1월에 실린 기사에는 494월에 체결한 한일 무역협정은 일본의 석탄과 남한의 광물자원 교환이었고 미국은 무역을 늘리라고 독촉했다. 신성모는 맥아더와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비밀리에 만났다. 미국은 남한이 일본과 호혜적 관계의 가치를 인식했고 이승만은 남한과 일본이 공동의 적을 갖게 됐다고 했다. 모든 것의 배후는 월가의 자본가와 일본의 배금주의자이며 자유무역의 허울 아래 남한을 다시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했다(122).

2월 중순 이승만은 일본을 방문해 평양을 자극하는 선동을 쏟아놓았다. 북한 자료는 이승만과 맥아더가 한국에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계획한 것은 이 방문 기간동안이었다고 단언했다. 또 남한의 숨겨진 목적은 미국의 재촉에 따라 일본과 일정한 종류의 동맹을 맺는 것이라고 판단했다(123).

미군 방첩대 장교의 하수인이었던 문학봉에 의하면 이승만과 맥아더는 2월 회담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군을 미국의 지휘 아래 두고 옛 일본군 장교들과 협력하며, 한국군 장교를 일본에서 훈련시키고 동아시아 전역에서 전쟁을 촉발하는 데 남한이 주도적 역할을 하기로 합의했다. 북한이 일본 군국주의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중공업의 부활 그리고 일본이 남한과 다시 결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점은 명확하다. 이승만은 일(126)본을 격렬히 증오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 그는 일본과 한국 경제를 다시 연결시키려는 미국의 염원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시카고트리뷴 특파원 월터 시먼스는 4911월 남한은 놀라울 정도로 일본화된 상태로 남아있었다고 썼다. 지식인들은 일본과의 경제 협력이 대외무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며 텅스텐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렸지만 대부분 일본으로 보내졌고 한국 쌀 10만 톤이 일본으로 수출됐다.

이승만은 216일 도쿄로 갔다가 이틀 뒤 돌아왔다. 여러 정부 당국자 및 의원과 함께 맥아더와 세 번, 요시다와 한 번 회담했다. 그는 공동의 적 공산주의에 대해 자주 언급했으며 남한을 위한 일본의 경제적·기술적 원조를 촉구했다. 또한 귀국 기사에 한국군이 한국의 자(127)유를 위해 싸우는 것은 () 일본의 자유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그것을 비난했고 일본의 방어선으로 남한의 역할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한국의 대통령은 1980년대까지 없었다. 이승만은 한국군 장교를 일본에서 훈련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 윌러비가 옛 일본군 군국주의자들과 만났다(128).

한국전쟁 직전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 일본의 지도를 적극적으로 따르겠다는 의사를 계속 드러냈다. 3월 채병덕은 일본으로 가서 무기 계획에 사용할 기계를 얻으려고 했다. 다음 달 대한국민당은 일본과 반공 전선을 수립하려고 한다고 말했으며 5월 한국은행은 도쿄에 지점을 열었다. 이듬해 텅스텐코발트망간을 포함한 광석 260만 톤을 일본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19506월 노련한 사업가 박흥식은 일본인 친구와 지인이 많았다. 그는 한국은 38(129)에서 평화의 보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본과 공존해야 할 운명이라고 했다. 일본은 남한의 원자재를 사야 하며 한국도 최대한 일본의 상품과 기계를 살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흥식은 2차대전 이전에는 일본만주한국타이완이 경제적으로 통합돼 하나의 유기체를 이뤘지만 지금은 경제적 일제성이 결여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130).

한국전쟁의 기원2-2 1부14장(브루스커밍스24.5.9).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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