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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2-Ⅱ』 15장 전쟁 직전의 남한, pp131-185 / 2024.05.23. 테츠(哲)
테츠(哲) 2024. 5. 23. 19:50
15장 전쟁 직전의 남한
1950년 남한에서는 미국이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미국대사관 설치, 가장 규모가 큰 원조사절단과 군사고문단 파견, 고위 관료의 방한 등 군대와 정치, 경제, 문화(유학, 영화, 라디오, 야구, 도서관 등)에 이르기까지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1억달러 규모의 경제․군사 원조에 군사장비와 무상원조 규모 등을 통해 미국의 자금이 남한에 유입되고, 이는 대부분이 국방과 국내 치안에 사용되면서 이승만의 국가정책을 유지하는데 사용됩니다.
“일본 바로 옆”: 한국의 경제적 존재 이유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상호보완적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경제협력국의 애드거 A. J. 존슨을 비롯 앨버트 모머스 상원의원의 발언을 사례로 들며, 미국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따라 한국을 원조하는 것은 일본을 원조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고, 그런 가운데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식민지배의 아픔은 ‘사소한 잘못’(135)이라고 치부합니다.
이런 미국의 판단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일본 바로 옆에 있으므로 일본과 경제․재정 관계가 긴밀해질 것이며, 한국을 강화시키면 우리가 그 지역에서 어떤 군사작전을 펼칠 경우 군사적 자산이 될 것”(136)으로 다루어 집니다. 반면 한국의 전통적 생각은 독립된 국토를 가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두가지 ‘모순된 논리’(136)가 한국전쟁에 작용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입장은 트레이스 부히스가 추진한 한-일 경제 통합 계획인 소위 “대동아공영권” 계획(136)으로 보아 당시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국가간 경제 계획과 통합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일본에의 미곡수출이 제안되었는데, 이에 이승만 정부는 쌀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설득하여 쌀 수출을 하였고 식 량을 대체하기 위해 미국의 대체 곡물(미국산 밀가루, 옥수수, 밀, 쌀 등)을 들여왔으며, 이로 인해 한국은 ‘미국에 식량을 의존하고 미국산 곡물에 높은 이익을 보장하는 시장’(137)이 됩니다.
1950년 6월 8일 남한과 일본은 3500만달러 규모의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의 관리 체제 아래에서 ‘한국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경제 정책은 거의 없게 됐다.’(138)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원조 아래에 남한은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며 통화 안정과 외환보유율 유지 및 관리, 해외무역 규제 감소 등 남한에 수출 산업을 육성하는 전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원조 과정에 미국이 감독권을 갖고 외화 지출을 감독하며 전략물자의 운송까지 관리하게 됩니다.
이를 ‘새로운 식민주의적 측면’(138)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김일성은 이런 남한을 비난하였으며, 남한의 고위 각료는 외화 지출에 대한 미국의 동의가 필요한지 알지 못했고, 미국의 원조 계획 아래에서 외화․자원․미곡의 관리와 수출이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이승만 정권의 재정 불이행에 따라 인플레이션 문제와 예산 균형 문제들이 발생했는데, 그 이유를 자유주의적 정치형태와 자유주의적 경제 원칙이 동일한 모습으로 이는 ‘한국의 사회와 정치․경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껍데기만 남은 것’(139)으로 정치 경제의 실태는 자유주의와는 정반대의 상황에서 폐쇄적이고 보호주의적인 시장의 모습을 보입니다.
미국은 이런 이승만 정권의 생존력을 걱정했으며,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다행이 1949년 풍작으로 인해 파멸적 상황은 피했지만, 여전히 “원시적 수준”과 “최저 생존 수준에서 사는 것”(140)으로 평가되며 국가의 미곡 분배에 의존하는 상태에 놓입니다. 1949년 6월 토지개혁 법안이 가결되며 토지 재분배가 시도되지만, 이런 개혁은 시도되지 않거나 연기되었으며 전통적인 지배권한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군사 관계
한국군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미제 무기를 사용하고 미군 편제를 모방하였으며, 1949년 10만명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외 3만 3천의 예비군, 5만 1천의 경찰, 6천 7백의 해군, 1천 8백의 공군 등 19만명 수준을 유지합니다. 500명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이 유격태 탄압, 병사 훈련, 운영, 예산, 한국인 장군의 억제 등의 임무로 지속적으로 개입하였으며, 1949년 철수하며 무기와 군사장비, 일본에서 노획한 무기를 포함 1억 1천만 달러 규모를 무상으로 제공합니다. 당시 규모는 방어군 수준으로 충분하다는 판단에서 였고, 이는 남한의 공격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공세를 목적으로 군사원조가 충분하지 않다는 허위 정보를 유포하면서 더 많은 미국의 지원을 바랐지만, 미국이 북한의 공격과 남한의 공세를 사이에 두고 군사 지원에 대한 판단을 미묘한 입장에서 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림1] YAK전투기, F-51전투기(출처 : 위키피디아 & 공군)
당시 남한의 가장 큰 약점은 공군력으로 지적되어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전투기 지원 및 훈련기 지원이 요청되었지만 미국 국방부는 이를 반대하고 남한의 공군력 강화를 약한 상태로 유지하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요청에 따라 러셀 E. 랜들 준장을 고문으로 초청해 AT-6 연습기를 개인기업을 통해서 구입하면서 벌어지는 군사무기 로비와 착복의 흔적 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로버츠 장군은 당시 10만 한국군의 훈련 성과를 강조하며, 미국 군사고문들에 의한 안정화 상태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저자는 1949년의 열세 상태와 한국군 부태의 참상을 묘사하며 한국군이 무능한 상태였고, 훈련 수준도 충분하지 않았음을 설명합니다. 군대 훈련계획이 세워지지만 일정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당시에도 유격대 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로버츠 장군은 한국군 군대를 이동 배치하며 6월 25일 전쟁 이전 몇주 동안 38선 주변으로 한국군 2/3 이상의 병력이 배치되었습니다.
38선 주변과 서울 이북에 군사 장비도 배치되면서, 개전한지 몇 주 만에 남한 군사 장비 70% 수준을 잃은 것으로 보고됩니다. 이에 대해서 1950년에도 1949년과 비슷한 국지전 양상을 예측한 것으로 보이고, 이승만을 비롯 방어보다는 공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1950년 6월 미국 군사고문단 중 고위 지휘관들이 은퇴 및 자리를 비우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로버츠 장군은 남한 군대의 공세를 억제해 왔으나 6월 25일이라는 위기의 순간에 부재했다는 이유로 일부 역사가에 의해 전쟁 공모자로 묘사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한국 군대에 공세에 필요한 규모의 원조를 하지는 않았지만, 미군은 항모를 배치하고 전투기 비행을 펼치는 등 한국에서의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군사력을 과시합니다.
“혼수상태의 위원회”
많은 연구가 유엔 한국위원회가 6월 전쟁 발발 이후 유엔이 북한을 규탄하고 참전하도록 설득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으로 사태를 관찰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브루스 커밍스는 그 과정을 ‘추문에 가까운 것’(148)으로 평가하며 상반된 평가를 보입니다. 유엔 한국위원회가 거의 활동하지 않았고 정족수도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무관심한 유엔과 내전의 위기 사이에 자신들이 끼어 있다고 생각했고 빠져나가기를 바랐다.’(149)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엔도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하는 것을 우려했으며, 공세적인 움직임과 이승만을 우려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유엔의 군사 감시 요원들을 남한은 회유하려 하고, 이동을 제한시키려 하였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명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남한의 군사행동 지향을 우려하는 모습을 보이며, 내전의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 판단하려 했고, 남한에 책임이 있음을 암시하지만, 1949년 9월 대부분의 위원이 출국하게 되면서 유명무실해집니다. 이런 상태를 미국 대사관 보고서에서는 ‘혼수상태에 빠진 위원회’(150)라고 조롱합니다.
1950년 유엔 한국위원회가 다시 구성되지만 군사감시 요원의 인원 구성은 제한적이었고, ‘한국에 체류한 미국의 부속적 존재’(151)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남한이 ‘외국인 시찰자를 다루는 유명한 방법’(152)이라는 유쾌한 서술처럼, 유엔 한국위원회는 활동 가운데 한국 정부와 군대, 동원된 환영 행사 등으로 활동과 일정에 지장을 받았고, 오히려 남한 측의 북진 주장 연설회에 다니며, 이승만 정권의 의견을 듣고 다른 세력과 접촉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압력으로 이승만에 우호적인 대표들을 보내오도록 하는 등 위원회 활동에 제한적인 요소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호주와 인도 대표 등 일부의 유엔 이념에 충실한 위원회 인물들이 북한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물밑작업 뒤에 6월 10일 38선 부근 여현역 지역에서 회동을 하지만, 백선엽 장군의 발포와 북한군의 대응사격 등으로 회담은 공포 분위기에서 2시간여 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후 북한군 사절 3명이 남한으로 넘어와 이승만 정부 이외의 지도자들과 대화를 하려 하지만 이들을 체포하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이후 반대선전에 활용됩니다. 여현역 회동은 당시 김일성의 승인, 5월 30일 선거 이후 온건파의 국회 진출에 따른 대화 가능성, 중국의 유엔 가입 가능성 등을 두고 보아 대화를 진전시킬 수 있었던 기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5월 30일 총선거
50월 30일 두 번째 총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의 참패 사이로 중도파와 온건파가 국회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승만 정당(대한국민당, 독촉국민회 등)과 김성수를 비롯한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으로 나뉘어진 상황이었지만 ‘누가 행정부를 운영하고 누가 경찰과 군대를 통수해야 하는가’(156)의 문제 이외에는 서로 견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우파와 중도파 사이에 큰 차이가 없고, 좌익 세력은 파괴된 상황에서 남한의 정치 세력은 서울에 집중되고, 지방에서의 영향력은 미약했으며,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다른 정당들인 김구파의 한국독립당, 여운형과 김규식의 온건파(조선인민당 등)는 소멸 직전의 상태로, 체제 전복 혐의만 있으면 투옥되던 시기의 정치적 편향성 상태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승만의 선거는 ‘미국을 기쁘게 한다는 것 외에는 성가시고 하기 싫은 일’(157)이었으며, 좌파 정치인이 세력을 차지할 것을 우려하며 선거를 연기하려 하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5월 30일 선거가 이루어집니다.
선거 과정에서 보수파의 충돌, 공무원 관료와 경찰의 개입, 선거 브로커의 표 매매, 청년단체의 선거운동, 국가보안법의 정치적 남용 등의 사례들이 언급되고 있으며, 이승만은 중도와 좌파 세력을 탄압하고 투옥합니다. 이승만의 체제를 ‘전체주의적 정치를 추구했지만 미흡한 상태의 근사치’(158)라고 묘사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선거 개입에도 불구하고 중도파와 온건 좌파의 무소속 위원들이 대거 당선(대한국민당 62명, 친이승만계열 청년단체 22명 / 민국당 48명, 무소속 60명, 중도파 24명)되며 이승만 정당 출신이 대부분 낙선하게 됩니다. 이런 선거결과에 대해 이승만의 지배력에 대해 미국은 우려를 표했지만, CIA는 민국당이 이승만을 위축시키기를 기대하며 민국당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세력이 활성화되어 경제 정책을 잘 수행하기를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이 세력을 잃는 것에 대해서 미국의 원조 및 정치적 구상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며, 이승만은 이런 상황에서 온건파 당선자를 공산주의자이자 ‘용공인사’(공산주의자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에 동조하는 일, 159)로 비난합니다.
중도와 온건파의 당선으로 북한이 대화를 위해 접촉한 일이 있었을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많은 무소속 의원들이 전쟁 이후에도 서울에 남고, 주석에는 약 60명의 국회의원들이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남북 지도자 회담을 추진하고, 여운형, 김구, 김규식을 위한 특별 성명의 발표, 인민위원회 복구 등을 주장하였으며, 이런 상황에 대해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는 38선의 철폐와 통일을 갈망하는 남한 여론과 혼란상태에 대해서 우려와 내전의 전초 단계라는 우려를 표합니다.
평양에서도 이승만을 비롯 민족 반영자 9명의 체포 영장 발부, 남북 의원 회의 개최, 남한 국회의 최고인민회의 통합 요구 등의 선전 행동을 벌이는데, 이런 행동에 대해 공격 의도를 감춘 징조로 보기도 하지만, 저자는 연막작전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선거 결과가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예견하는 징조로 보고 있습니다.
북한은 조만식과 남로당 중심인 김삼룡과 이주하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하는데, 이는 전쟁 발발 직전인 6월 23일까지도 교환 방식을 논의할 정도로 의견 일치를 하지 못하고, 6월 26일 김삼룡과 이주하는 총상되고, 조만식과 그 친족도 북한에서 처형됩니다.
혼란―나라를 구하려는 이승만의 노력
이승만 정권은 북한 문제, 선거 패배로 인한 국회 세력 약화와 파벌 투쟁, 내무부와 경찰, 군대, 정보기관 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보수야당(민국당)과 충돌하게 됩니다. 공개된 관료조직 이면에는 ‘공개되지 않은’ 비공식적 조직(162)이 실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세력에 이승만은 자신들 측근으로 교체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이들은 미국이 선호하는 인사와는 조금 다른 성향을 보였습니다. 1949년 차기 내각에서 이상만 측근으로 구상된 이범석, 김석원, 정운수, 윤치영, 장석윤(몬태나 장), 백성욱 & 손재평, 이시영, 안호상, 문봉제 등의 인사들이 소개(163-167)되는 가운데 이 내가 구성에 얼마나 큰 문제가 있었는지 다음 서술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승만의 부패한 측근 임영신은 상공부 장관에 취임해 일본인이 남겨놓은 적산을 측근들에게 나눠주는 조정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163) -1950년 대한정치공작대 사건
이들은 민족주의자이거나 미국의 간섭에 저항하는 성향을 가졌으며, 장세스와 관계를 맺는 친중적인 성향을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조선민족청년단을 이끌며 군과 경찰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범석 같은 인물을 미국은 경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승만 추종 세력은 정치 자금을 모금하고 내부 세력을 장학하지만 이들 인물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습니다. 이들은 부패하고 비윤리적이며 무능한 인물로 미군 군사고문단과 미국 대사관은 평가하였으며, 이들을 배제하려 하지만 이승만과의 연결고리 때문에 강하게 추진하지를 못합니다.
이승만의 반대세력인 민주국민당의 김효석, 조병옥 관련 인물들에 대해서는 해임카드를 사용하면서, 자신들 세력 인물들을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경찰과 군을 움직이며, 정보기관 “대한관찰부”에 배치하고 이승만을 위한 일들을 처리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또한 이들은 미국의 군사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급진적인 발언 및 신경적인 반응을 보이며 1950년 5월 북한의 침공이 임박하였다고 말하며 미국을 설득하려 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연기’(169)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6주 동안 불길한 침묵’(169)이 이어지는 가운데 조선인민군의 남하 배치 시작과 북한의 움직임은 이승만 정권의 내부 붕괴와 파벌 투쟁 중에 있었기에 남한의 행정부와 입법부를 분열시키면서, 이승만 반대 세력인 중도파를 포섭하려 한 것으로, 이에 동조했던 정치인들이 침공 이후에 서울에 남아있었던 것은 아닌지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깊어지는 남한과 중국의 관계
이승만의 인사 임명이 미국의 의향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이범석 등의 남한 활동 부대와의 관계보다 중국 국민당과 장제스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움직임들이 미국의 관심을 끕니다. 장제스와의 연결 관계, 일본 식민지 시절의 중국에의 망명과 민족주의적 성격,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관행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대부분 허세에 가까운 발언들에도 남한의 북진에 국민당을 끌어들이려는 발언과 구상들이 이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1949년 8월 장제스가 방한하고, 국민정부군 고위 장군들이 서울을 방문하면서 북진과 타이완 침공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한에 국민당 기지 설치 등의 ‘정말 터무니없는 일’(172)들의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중국 국민정부군과 이범석의 회동에 대해 미국과 영국 외부부가 반응을 보이며 중국인 동태를 파악하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17일 주미 중화민국 대사 웰링턴 구가 타이완 방어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국민당과 한국의 협조(중국 공격을 위한 공군기지 제공 등)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며 북한을 자극하고, 이야기들에 신빙성이 더해지고 장세스의 망명 요청 등에 대한 이야기들도 제기됩니다.
홈부르크 모자를 쓰고 참호에 선 덜레스
전쟁 발발 1주일 전인 6월 19일(20일 38선 시찰한 것으로 나옴), 국무장관 고문 존 포스터 덜레스의 38선 방문에 대해 ‘그것은 우습고 재미있고 비논리적’(176)이었다는 서술에 그의 방문이 전쟁을 유발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며,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추적합니다. 원래 타이완 방문 예정에서 주미 한국대사와 CIA의 북한 공격 임박 예보에 한국을 시찰하기로 했고 민국당 지도자 장면과 회동합니다.
북한 침공에 대한 경고에 미국이 애치슨라인을 넘어서 완충지대에 대한 대처와 방어해줄 것을 바라는 입장에, 덜레스는 미국이 조약 의무가 없어도 참전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소련에 경고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 국무부의 관심은 이승만 정권과 5월 선거 결과에 따라 이승만 정권 투쟁과 내부 붕괴에 대한 징후의 문제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북한의 침공에 대해 ‘안심시키는 강력한 성명을 발표’(178)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승만 정권이 바란 것은 미국의 방어에 대한 보장이었으며, 공격이 예고되는 가운데 미국의 지지를 바라는 상황이었습니다. 덜레스의 방문은 일본 주변 지역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확인시키고 국회 연설, 38선 시찰, 기자회견, 유엔 한국위원회 회의 참석, 이승만과의 회담 등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연설에 대해 남한은 방어에 대한 ‘확고한 보장의 증거’(180)로 보았지만, 미국 내부의 비약적인 정책적 전환이 일어나지는 않았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덜레스의 방한이 ‘이승만과 전쟁을 유발하려는 음모’(180)를 꾸민것이라 비난하며 덜레스와 맥아더가 이승만의 전쟁 유도에 동의했다는 비난 주장을 되풀이하지만, 덜레스와 맥아더는 오히려 일본-타이완 정책에 대해 의견이 달랐고, 애치슨과 덜레스는 이승만의 억제에 관심이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덜레스는 ‘전혀 바뀌지 않은 이승만’(183)을 만났지만 그와 공모했다는 증거는 없고, 오히려 ‘큰 성공을 거뒀고, 정치적 야심을 품었으며, 규정을 존중하는 이 인물이 반격 정책을 시행하겠다는 허세를 부리려고 이승만의 수준까지 자신을 낮췄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184)며 덜레스에 대한 비난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덜레스는 애치슨의 정책을 위해 방한하였으며 그의 남한 방문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의견에 반박합니다.
[그림2] 덜레스의 38선 시찰, 덜레스(출처 : 책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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