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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자아의식의 여러 단계(‘신 앞에서라는 규정하에 있어서)

 

우리가 이제까지 문제 삼아 온 자아의식의 상승은 인간적인 자아또는 인간을 척도로 하는 자아의 규정 내부에서 일어났다. 그렇지만 자아는 그것이 신에 대한 자아라는 사실에 의해 새로운 성질과 새로운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p.164).

 

신이 관념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아도 많으며 자아가 많으면 많을수록 신의 관념도 많다(p.167).

 

죄란 인간이 신 앞에 절망하여 그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것 또는 인간이 신 앞에 절망하여 그 자신이려고 하는 것이다(p.168),

 

신앙이란 자아가 자기 자신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을 자각적으로 신에 기초를 두게 하는 것이다(p.170). 죄의 반대는 신앙이다(p.171).

 

인간의 죄는 신에 관계하고 있다는 점에 좌절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뛰어난 것으로 만들려 하기 때문에 좌절한다(p.172).

 

기독교는 이 개체의 인간, 즉 개성적인 인간이 신 앞에 현존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p.175).

 

그것을 믿을 수 없는 겸손한 용기를 가지지 못한 자는 누구나 그것에 좌절한다. 왜일까? 그것은 그에게는 너무 높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p.176).

 

2장 죄의 소크라테스적 정의(定義)

 

죄는 무지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것이 소크라테스적 정의이다. 나는 기독교적인 것을 염두에 두면서 그것을 예리하게 표현하기 위히여 소크라테스적인 정의를 이용하려고 생각한다(p.181).

 

기독교가 질적으로 가장 결정적으로 이교와 구별되는 개념은 다름 아닌 죄의 개념, 죄에 관한 교설(敎說)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교도나 자연인이 죄가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단정하고 그것을 시종일관하고 있다(p.184).

 

그래서 소크라테스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아진다. 누군가가 올바른 일을 했다면 물론 그는 죄를 범한 게 아니며, 그가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정말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그를 올바르게 움직여 그가 올바른 일을 실행하게 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와 이해를 일치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무지이다(p.191).

 

요컨대 그리스 정신은 인간이 지식, 올바른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정을 행한다는 사실을 단언할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p.194).

기독교는 올바른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올바른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기독교는 인간은 올바른 것을 이해하고서도 행하기를 포기하거나 혹은 올바른 것을 이해하고 있으면서 감히 부정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p.195).

 

인간이 이런 기독교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좌절을 야기하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것은 믿지 않으면 안 된다(p.195).

 

3. 죄는 소극성이 아니고 적극성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죄는 적극성이라는 이 기독교적인 것만을 고집한다(p.201).

 

다만 다른 사람들이 다투어 기독교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에 몰두해 있는 이런 사변적 시대에 나는 기독교적인 것은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도, 또 개념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한다(p.202).

 

앞에서 말한 죄의 정의에 의하면 죄를 구성하는 것은 신의 관념에 의해 무한히 그 도가 강해진 자아와 행위로서의 죄에 관한 최대한의 의식이다. 여기에서 죄가 적극성이라는 사실이 나타난다. 죄가 신 앞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바로 죄의 적극성인 것이다(p.204).

 

보잘것없는 일에만 열중하며 어리석은 타인의 흉내만 내는 인생, 죄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무정신적이어서 죄라 부를 가치조차 없고 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입으로부터 토해 낼뿐 뒤처리하려 하지 않는 이런 인생의 어디에서 본질적인 의미로서의 죄의식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p.207)

 

생각건대 신앙인이란 사랑하는 자이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사림이 있다 해도 신앙인에 비하면 그 열정 면에서 그는 풋내기에 지나지 않는다(p.209).

 

그가 사랑한다는 것이 뜻있는 일이라는 것을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고 해 보자.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당신들은 생각하는가?

또 사랑하고 있는 자가 자신의 사랑을 변호하는 따위의 짓을 하리라고 여러분은 생각하는가?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의 사랑을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증명하려 하거나 변호하려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랑은 모든 이유나 변호 따위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p.210-211).

 

기독교계는 스스로 그 본질로부터 멀어지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생활은 엄밀한 기독교적인 의미로는 죄라고도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무정신적인 것이다(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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