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젠더트러블_ 2장_윤명_샘.hwp

가끔 여성 억압의 역사라는 우연성을 만들어준 상상의 관점을 제시한 가부장제라 불리는 것 이전의 시대는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부장제 이전의 문화 상황으로 되돌아간 것은 가부장제의 자기물화를 폭로하려는 의도였지만, 그런 가부장제적 기획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물화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가부장제라는 개념이야말로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에 놓인 명백한 젠더 불균형을 간과하거나 축소하는, 보편적 개념이 될 위협을 받았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상상 속 과거에 기댈 때에는 다소 주의가 요구된다. 남성적 권력의 자기-물화된 주장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여성적 경험의 물화를 발전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엥겔스의 이론이나 사회주의 페미니즘 같은 구조주의 인류학에 뿌리를 둔 페미니즘의 입장 전반에는 젠더 위계를 설정한 역사나 문화 속의 계기와 구조들을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한다. 그러한 구조나 실마리가 되는 시기를 따로 분리해 취급하려는 것은 여성들의 종속을 자연질서에 귀속시키거나 보편화하려는 보수반동 이론들을 거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젠더 위계에 대한 이같이 강력한 비판이, 문제가 되는 규범적 이상들을 수반하는 가상의 허구를 이용하고 있는지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은 섹스/젠더의 구분을 지지하고 표명하려는 몇몇 페미니스트들에게 전유되었다. 그들의 입장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복종하는 여성으로 변해버린 자연스러운, 혹은 생물학적인 여자가 있다. 이런 시선에서 볼 때 섹스가 문화적, 정치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섹스는 법 이전에 존재한다. 이를테면 친족 법칙에 복종해야만, 혹은 복종한 후에라야 의미화되기 시작하는 문화의 원재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로서의 섹스, 혹은 문화적 의미화 도구로서의 섹스 개념은 담론적인 구성물이다. 이는 자연/문하 구분의 당연한 토대이자 그 구분이 지탱하는 지배 전략으로 작동한다. 문화와 자연 사이의 이분법적 관계는 위계관계를 발전시킨다. 그 관계 안에서 문화는 자유롭게 자연의 의미를 부과하고, 그에 따라 지배 모델의 의미구조와 기표의 이상성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자연을 자신의 무한한 용도에 맞게 전유되는 타자로 해석한다.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구조주의의 보편화된 틀이 자연에 관한 문화적 배치의 다양성을 감소시켰다고 주장했다. 자연을 유일하고 담론 이전에 오는 것으로 가정하는 분석방식은, 주어진 문화 맥락 안에서 무엇이 자연의 자격을 부여받는지그리고 그것은 어떤 목적에서인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없다. 섹스란 명칭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라면, 그 명칭은 가장 날것을 가정하게 되므로 언제나 이미 익힌 것으로 입증된다. 그리하여 구조주의 인류학의 주된 구분법들이 붕괴되는 것처럼 보인다.

섹스를 젠더로 변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기술한다는 것은 젠더의 구성성, 즉 그 부자연스럽고 비필연적인 위상을 확립할뿐더러 비생물학적 관점에서 억압의 문화적 보편성을 세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메커니즘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상상만 할 뿐인가?

<!--[if !supportEmptyParas]--> <!--[endif]-->

구조주의의 비판적 교환

구조주의 담론은 친족의 모든 체계를 특징짓는 교환을 규제하는 보편적 구조가 있다고 주장하는 레비-스트로스처럼 법을 단일한 것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친족의 기본 구조에 따르면, 친족관계를 강화하고 변별화하는 교환 대상은 결혼제도를 통해 하나의 부계혈통이나 다른 부계혈통에게 선물로 주는 여성이다. 신부는 일군의 남성들 간의 관계어로 작용하며, 하나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도, 그 정체성을 다른 것으로 교환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녀는 정체성 부재의 장소가 됨으로써 남성적 정체성을 반영할 뿐이다. 변함없는 남성들은 결혼이라는 반복된 상징적 변별화 행위를 통해 정체성의 특권을 환기시킨다.

레비-스트로스가 친족관계를 설명하면서 드러난 구조적 체계성은 인간관계의 구조를 정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보편적 논리에 호소하는데, 보편성의 가정에 대한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보편적 논리 속 정체성의 전제들이 갖는 위치 및 이런 정체성의 논리가, 이 논리가 기술하는 문화적 현실 속에 종속된 여성의 위상과 맺는 관계이다. 교환의 상징적 특성이 또한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라면, 그 보편적 구조가 정체성은 남성에게 분배하고 종속적이거나 관계상의 부정혹은 결핍은 여성에게 분배한다면, 이같은 논리는 그러한 관점에서 배제된 하나, 혹은 일단의 위치들로부터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친족의 대안 논리는 어떠한 것인가? 정체성의 논리체계는 어느 정도로 줄곧 사회적으로 불가능한 정체성의 구성을 요구하는가? 그 논리에 의해 결과적으로 은폐된 이름 없고 배제된, 하지만 이미 전제되어 있는 관계를 차지하도록 말이다.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를 효과적으로 비판하려면 레비-스트로스가 정의한 상징계의 위치 변경이 필요한지를 묻고 있다.

레비-스트로스에게 남성적인 문화 정체성은 부계 계승 씨족들 간의 외적 변별화 행위를 통해 성립된다. 여기서 관계 내부의 차이는 헤겔적인 것, 즉 구분되는 동시에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남성과 그 남성 간의 변별화를 가져오는 여성 사이에 성립된 차이는 헤겔의 변증법을 완전히 비껴간다. 다시 말해, 사회적 교환이라는 변별화의 계기는 남성 간의 사회적 유대로 나타난다. 그 유대는 구체화된 동시에 개별화된 남성적 관점들 간의 헤겔적 통일성이다. 두 씨족 모두 유사한 정체성, 즉 남성적, 가부장적, 부계 계승적 정체성을 갖고 있어서 추상적 층위에서 보면 이는 차이 속의 동일성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짐으로써 스스로를 포괄적인 남성문화의 정체성 안에서 개별화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변별화 기제가 젠더 기능을 이런 식으로 분배한 것일까? 레비-스트로스의 헤겔적 경제를 명백하고도 남성이 개입된 방식으로 부정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변별화된 차연이 전제되고 또 배제되는 것인가? 이리가레의 주장대로, 이 남근로고스 중심 경제는 결코 표명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전제되는 동시에 부정되는, 차연의 경제에 근본적으로 의존한다. 사실 부계 계승 씨족 간의 관계는 동성사회적 욕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억압되고, 따라서 비난당하는 섹슈얼리티이다. 결국엔 남성들의 유대에 관한 남성 간 관계이지만 여성들을 이성애적으로 교환, 분배함으로써 발생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만일 상징계에서 배제된 성의 영역이 존재하고(근친상간), 그 배제된 영역이 범위 안의 모든 것을 전체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상징계의 패권주의를 폭로할 수 있다면, 이 배제된 성의 영역을 상징 경제의 내부나 바깥에 위치시키는 일이 분명 가능할 것이다. 또 그러한 위치 변경의 관점에서 배제된 영역이 개입될 전략을 짜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다음에 이어질 구조주의 관점에서 성차의 생산을 설명하고 있는 구조주의적 법과 서사에 대한 재해석은, 그 법에 전제된 고정성과 보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계보학적 비판을 통해 법의 우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생성력을 폭로하고자 한다.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법은 족내혼을 금지하는 친족 경제 안에 위치해 있다. 레비-스트로스에게 근친상간은 사회적 사실이 아니라 확산된 문화적 환영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욕망의 주체가 이성애적 남성성을 띤다고 가정하고 이렇게 주장한다. “어머니나 누이에 대한 욕망, 아버지 살해와 아들들의 후회는 분명 역사상 특정 위치를 차지하는 하나의 사실, 혹은 일군의 사실들과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도 이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상징적인 꿈을 표현한 것이리라.”

또한 레비-스트로스는 무의식적 근친상간의 환영에 대해 정신분석학의 통찰을 긍정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런 꿈의 마술, 인간의 미지의 사상을 만드는 꿈의 위력 () 그 꿈이 어떤 행위를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언제 어디서나 문화가 그 행위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 다소 놀라운 선언은 금기의 효과를 추정하기가 퍽 어렵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해준다. 금기가 존재한다고 해서 결코 그 금기가 효과적으로 수행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금기의 존재는 차라리 근친상간의 욕망, 행위, 실은 널리 확산된 근친상간의 사회적 실천이 바로 그 금기를 성애화한 덕분에 효과를 발휘한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이런 사회적 환영은 어떻게 생산되며, 실제로 그 환영을 금지한 결과 제도화된 것인가? 더 나아가 근친상간의 금기가 금기 없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재생산하는 사회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어머니와 아들 간의 이성애적 근친상간 행위는 물론, 그러한 환영에 대한 금기마저 문화의 보편 진리로 선언된다. 이성애와 남성성의 성적 작동원인을 모두 자연의 섭리로 예속시키는 것은, 어디에도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이 기본 구조주의 틀 안의 어디에나 전제되어 있는 담론의 구성물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2. 라캉, 리비에르, 그리고 가면의 전략들

라캉의 관점에서 젠더 및 섹스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라캉 언어 이론의 목적 자체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라캉은 서구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존재론에 주어진 우선성을 반박하면서 존재란 무엇인가?/ 무엇을 가지는가?”라는 질문이 부권적 경제의 의미화 실천을 통해 어떻게 존재가 제도화되고 배치되는가?”라는 그 이전의 질문에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존재와 부정,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은 아버지 법과 그것의 변별화 기제라는 구조를 갖는 언어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물은 존재라는 특징을 띤다고 여겨지고, 그 존재론적 제스처가 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의미화의 구조 안에서만 가동된다. 그 의미화 구조는 상징계처럼 그 자체가 존재론 이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루스라는 존재’, 즉 성차를 자신의 인식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법의 의미화를 공인하는 그 존재에 대한 선험적 탐구가 없다면, 존재론 자체에 대한 탐구에 접근해볼 길이 없다. 팔루스(being)’과 팔루스 가짐(having)’은 언어 안에서 다양한 성적 위치/위치 없음을 의미한다. 팔루스(이성애화된) 남성적 욕망의 타자가 될 뿐 아니라, 그 욕망을 재현하거나 반영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여성적 타자성 안에서의 남성성의 한계가 아니라, 남성적인 자기 이론화의 장소를 구성하는 타자이다. 여성에게 팔루스은 팔루스의 권력이 반영된다는 것, 그 권력을 표시하는 것, 팔루스를 체현하는 것, 팔루스가 스며들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그 정체성의 타자, 부재, 결핍, 번증법적 확증이 되어남근을 의미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라캉은 팔루스를 결여하고 있는 타자가 팔루스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권력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여성적 위치(팔루스를 결여하고 있는 타자)가 휘두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팔루스를 가진남성적 주체는 팔루스를 결여하고 있는 타자를 확인해주고, 타자는 그에 따라 확장된의미에서 팔루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존재론적 성격은, 존재의 외관이나 효과라는 것이 언제나 의미화의 구조를 통해 생산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상징적인 질서는 팔루스 가짐(남성의 위치)’과 팔루스(여성의 위치이라는 상호 배타적인 위치를 통해서 문화적 인식 가능성을 만든다. ‘이다가지다의 이분법적 분리라는 관점에서 정체성을 세우려는 모든 노력은 비실재적인 구성물의 토대가 되고, 상징계와 실재계의 통약 불가능성을 표시하는 필연적인 결핍상실로 되돌아가게 된다.

( 남성적 주체는 의미들의 기원이며, 의미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남성 자신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는 자율성은 자신의 토대가 되는 동시에 자신의 영원한 비토대의 가능성이기도 한 억압을 감추려 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 구성과정은 여성으로 하여금 그 남성적인 힘을 반영해줄 것을, 또 어디서든 그 망상적 자율성이라는 실제의 힘을 확인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존성은 남성적 주체에 의해 부정되는 동시에 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확증을 주는 기호로서 여성은 위치가 변경된 모성의 몸이고, 개체화 이전의 주이상스를 회복하겠다는 헛되지만 끈질긴 약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성의 갈등은 자율성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엄격히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율성은 또한 억압과 개체화 이전의 완전한 쾌락으로 되돌아갈 것을 약속할 것이다.)

여성은 남성 주체가 스스로 기반하는 위상의 실제를 반영하거나 재현할 힘과, 그 힘이 철회될 경우 남성 주체라는 위치의 근본적인 환영을 깨버릴 힘을 보유한다는 의미에서 팔루스것으로 언급된다. 분명한 남성 주체라는 위치의 반영물이자 보증물인 팔루스이기위해서, 여성은 다른 아닌 남성이 아닌 것이어야하며, 여성의 결핍 속에서 남성의 본질적인 기능을 확립해주어야 한다. 따라서 팔루스이다라는 것은 언제나 어떤 남성 주체를 위한 존재를 의미하며, 그 나성 주체는 ‘~를 위한 존재(being for)’를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증폭시키려 하는 것이다. 라캉은 남성이 여성의 의미를 만들거나, 여성이 남성의 의미를 만든다는 개념에 반대한다.

남성은 팔루스를 가진다라고는 해도 결코 팔루스이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즉 페니스는 법의 등가물이 될 수 없고 그 법을 완전하게 상징화할 수도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팔루스를 가진다는 위치를 차지하려는 모든 노력에는, 필연적 불가능성이나 전제된 불가능성이 들어 있다. ‘가지다이다라는 둘의 위치가 결국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로 여겨질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는 이렇게 반복된 불가능성을 표명하고 실행하도록 강제된다.

그러나 여성은 어떻게 해서 팔루스처럼, 즉 팔루스를 체현하고 확증해줄 결핍처럼 보이는가’? 라캉에 따르면, 이는 가면, 즉 여성적 위치 그 자체의 본질적 요소인 우울증 효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이기(being)’, 즉 팔루스에 대한 존재론적 특징이 가면이라면, 그것은 모든 존재를 보이기’, 즉 존재의 외양이라는 형식으로 환원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 결과 모든 젠더의 존재론은 외양의 작용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가면은 그에 선행하는 어떤 존재나 존재론적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가면으로 가려지고 폭로될 수 있는 여성의 욕망이나 요구, 다시 말해 정말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적 의미화 경제의 종국적 파열이나 위치 변경을 약속할 여성적 욕망이나 요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