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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06 작성자 안녕(윤채영)
5. 정체성, 성, 그리고 본질의 형이상학
버틀러는 정체성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젠더 정체성’ 논의인데 왜냐하면 ‘사람’이란 ‘젠더의 인식 가능성(gender intelligibility)'이라는 합의된 기준에 따라 젠더가 될 때에만 비로소 파악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철학적 설명에서 개인의 정체성의 구성에 대한 질문은 개인의 어떤 내적 자질이 자기 동일성이나 연속성을 확립하는지를 거의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정체성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을 통해 확보되는 한 ’비일관적‘이고 ’불연속적‘인 젠더 존재의 문화적 등장은 ’사람‘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심을 품게 만들며, 이런 젠더 존재는 ’사람‘으로 정의되는 문화적 인식 가능성이 있는 젠더 규범을 따르는 데 실패한 존재이다.
법은 생물학적 섹스, 젠더, 성 습관, 욕망들의 ‘표현물’이나 ‘결과물’의 인식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구분한다. 성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생각은 이러한 일관된 젠더 규범의 모태를 통해, 일관된 정체성을 낳는 규제적 관행을 통해 생산된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젠더 정체성은 이러한 규범에 따르지 못하고 이런 정체성의 지속과 증식은 인식 가능성의 영역의 한계와 규제적 목적을 드러냄으로써 젠더 무질서라는 경쟁적이고 전복적인 모태를 펼칠 비판적 기회들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인식 가능성의 모태’는 무엇인가? 그것은 유일한가? 무엇으로 구성된 것인가? 만약 정체성이 담론적 관행의 결과라면 젠더 정체성은 강제적 이성애로 규명될 규제적 관행들 사이의 어떤 관계로 구성될 것인가?
프랑스 페미니즘과 후기구조주의 이론 영역 안에는 섹스 정체성 개념을 생산한 것으로 매우 다른 권력체계를 간주하는 다양한 입장들 간의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이리가레는 오직 남성적 성만이 존재하며 그들은 ‘타자’의 재생산 속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킨다고 했다. 또한 서구문화의 관습적 재현체계 안에서 여성은 ‘주체’모델로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재현이라는 체계가 재현의 페티시(숭배의 대상.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는 어머니의 남근 부재를 대체하는 대리남근)를 구성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 재현 불가능한 까닭이다. 본질의 존재론에 따르면 여성들은 있을 수 없고, 그야말로 차이의 관계이며, 배제된 것, 영역이 스스로를 소거하는 수단이다. 또한 이미 남성적인 주체의 단순한 부정이나 ‘타자’로만 이해될 수 없는 ‘차이’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핵심은 섹스라는 개념이 패권적 언어 안에서 하나의 본질로 형이상학적으로말해 자기 동일적 존재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외관은 어떤 섹스나 어떤 젠더가 ‘되는’사실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은폐하는 언어와 담론 수행의 왜곡을 통해 획득된다. 이리가레의 관점에서 남녀의 남성적, 여성적 특성만이 아니라 여성, 남성을 가정하는 본질적인 젠더 문법도 이분법의 실례이며 이것은 전복적인 다양성의 장인 여성성을 침묵하게 만들면서 일의적이고 지배적인 남성성, 남근로고스중심주의 담론을 효과적으로 은폐한다.
푸코는 성의 범주는 섹슈얼리티의 규제적 경제체제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푸코가 보기에 본질적인 성의 문법은 이분법의 각 용어에 인위적인 내적 일관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양성 간의 인위적인 이분법 관계 또한 강요한다. 이러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분법적 규제는 이성애적, 재생산적, 법의학적 헤게모니를 파열시키는 섹슈얼리티의 전복적 다양성을 억압한다.
이성애적 헤게모니의 파열과 위치 변경을 통해 성의 범주 자체가 사실상 일소될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푸코와 위티그는 일치한다. 위티그는 강제적 이성애 상황에서 남성성은 표시되지 않은 채로 있고 오직 여성성만이 성의 범주로 표시되며 이러한 이분법적 규제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을 수행한다고 했다. 보부아르나 위티그가 보기에 여성을 ‘섹스’와 동일시하는 것은 여성 범주를 그럴듯하게 성별화 된 몸의 특징들과 융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에게 남성들이 향유하는 자유와 자율의 허가는 거부된다. 섹스는 여성 혐오의 제유(synecdoche: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은유법의 일종)라는 제스처를 통해 그 사람의 자기결정적 코기토(I think)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여성은 유일한 젠더가 되고 남성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이 된다.
위티그는 강제적 이성애주의의 전복이야말로 성의 속박으로부터 해방 된 진정한 휴머니즘을 여는 길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떤 텍스트에선 ‘레즈비언’이 실존적 행위주체로서 강제적 이성애 체계의 초월을 약속하는 제3젠더로 등장하는 것 같다. 또한 남근로고스중심주의를 벗어한 에로스 경제의 확산 및 확대는 섹스, 젠더, 정체성의 허상을 깰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위티그의 해방에 대한 기획과 레즈비언과 여성을 구분하는 것은 젠더에 선행하는 ‘사람’을 옹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행동은 성의 범주 자체를 생산하고 당연시한 것에도 책임이 있는 본질의 형이상학에 동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니체에 관한 해설에서 미셸 아르는 수많은 철학적 존재론이 ‘존재’와 ‘본질’이라는 환영에 갇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환영은 주어와 술어의 문법적 공식이 본질과 속성이라는 존재론적 실체를 반영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구성들은 단순화, 질서,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설정하는 인위적인 철학 도구를 만들어 냈지만 결코 사물의 진정한 질서를 드러내거나 재현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비판은 젠더 정체성에 대한 대중적이고도 이론적인 사고를 지배하는 심리적 범주에 적용 가능한 지침이 되었다.
사실 문법에 대한 신뢰는 그저 한 사람의 생각의 원인이 되는 의지를 전달한 것이 불과하다. 즉 주체 에고, 개인은 수많은 거짓 개념들에 불과하다. 이들은 처음부터 언어적 실체만 갖고 있던 허구적 통일체를 본질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위티그는 불어의 젠더 문법에 대한 정치적 분석을 통해 젠더의 표시가 없으면 사람이 언어 안에서 의미화 될 수 없음을 입증하려 했다. 위키그에게 젠더가 ‘철학에 속한다’는 것은 ‘논증 불가능한 자명한 개념으로서의 몸’에 속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점은 대중 담론에서 젠더를 섹스와 혼동되어 체현된 자아와 통일된 원리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방식 때문에 더 확실해진다.
섹스가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자아를 지칭하는 장소에서의 젠더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만, 또 섹스가 이성애적이어서 자신이 욕망하는 다른 젠더와의 대립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변별화하는 장소에서의 욕망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만 젠더는 섹스, 젠더, 그리고 욕망에 관한 경험의 통일성을 의미할 수 있다. 젠더의 내적 일관성이나 통일성은 대립적이고 안정적인 이성애를 필요로 한다. 이분법적인 젠더 체계 안에서 젠더는 이성애 형식으로만 식별되고 표현되고 섹스, 젠더, 욕망 각각의 내적 일관성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분법적 관계의 전략적 위치 변경과 그 관계가 의존하는 본질의 형이상학은 여자/남자, 여성/남성의 범주가 유사하게 이분법적 틀 안에서 생산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푸코는 은연중에 이러한 설명에 동의한다. 푸코는 책에서 모든 성차의 범주화에 선행하는 성의 범주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섹슈얼리티 양식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분절되고 이분법적인 성의 범주화를 전술적으로 생산해내면 ‘섹스’를 성적 경험, 행동, 욕망의 원인으로 가정하게 되어 그 생산장치의 전략적 목적을 숨길 수 있다. 또한 분명한 성의 범주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모든 담론적 설명 안의 근본적이고 인과론적 작용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원인 같아 보이는 것이 실은 성적 경험을 규제하고자 하는 체제의 생산물임을 폭로한다.
영속적 본질이 강제적인 속성의 정렬을 통해 일관된 젠더 연쇄로 생각된 허구적 구성물이라면 본질인 젠더나 명사인 남성, 여성의 존속 가능성이 의심되는 것은 당연하다. 인식 가능성의 연속적이고 인과론적 모델에 순응하지 못한 속성들의 불화 작용 때문이다. 따라서 영속적 본질이나 젠더화된 자아의 외관은 문화적으로 설정 된 규제가 생산해낸 것이다. 이러한 허구적 생산을 폭로하려면 이미 만들어진 언어의 틀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속성들의 이탈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자체가 우연히 만들어진 일관성에 불과한 것이라면 본질의 존재론 자체가 인위적 효과이며 애초에 불필요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명사가 아니다. 젠더의 본질적 효과는 젠더 일관성의 규제적 관행 때문에 수행적으로 생산되고 강제되어 왔다. 젠더는 목적한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하는 수행적 ‘행위’이다. 젠더의 표현물 뒤에는 어떠한 젠더 정체성도 없으며 정체성은 표현물에 의해 수행적으로 구성된다.
6. 언어, 권력, 위치 변경의 전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과 문헌에서는 행위 뒤에 행위자가 있다고 가정하며 행위주체 없이는 어떤 행위 작용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사회의 지배관계를 변화시킬 잠재력도 없다고 주장해왔다. 위티그의 이론은 행위 뒤에 행위자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원인을 결과로 혼동하던 설명방식들을 반박하면서 젠더의 수행적 구성은 문화의 물질적 실천 속에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성은 자연질서에 속하며,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 ‘지각 가능하도록 주어진 것’ ‘육체적 특질’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적이고 직접적인 지각이라고 믿는 것은 단지 정교한 신화적 구성물, 즉 ‘상상적 구성물’일 뿐이다.
"one is not born a woman" p.48
위티그는 ‘섹스’를 제도화 된 이성애가 작동되는 표식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이리가레의 것과는 다르다. 이리가레는 젠더 표식을 남성 패권적 의미화 경제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며 남성적 의미화 경제는 자아 연구의 사유기제를 통해 작동되어 사실상 서양절학에서 존재론의 영역을 결정지어왔다. 이리가레에게 다른 언어나 의미화 경제의 가능성만이 젠더 표식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그러나 위티그에게 언어는 구조상으로 결코 여성혐오주의적이지 않지만 적용에 있어서 여성 혐오주의의 도구나 수단이 된다. 표면적인 ‘이분법’ 관계야말로 여성적인 것을 배제하려는 남성주의 책략이라는 이리가레의 입장에 대해 위티그는 그러한 입장이 이분법을 재강화 할 뿐더러 여성성의 신화를 재유포시킨다고 주장했다.
위티그는 여성을 복종시키거나 배제하려는 언어 권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언어를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제도로 여긴다. 언어는 개인들의 실천이기도하며 ‘섹스’라는 언어적 허구는 강제적 이성애 쳬계로 인해 생산, 순환되는 범주라고 주장한다. 위티그는 성기 중심으로 조직된 섹슈얼리티 자체를 문제시하고 여성의 재생산 기능을 여성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일에 저항하는 대안 경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성기중심의 성욕성이 발달학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위티그는 뒤집기하여 프로이트가 지적한 미발달 성욕의 특성들을 안정화시키고 성기기 이후의 정치학을 효과적으로 채택한다. 그러나 젠더 표식의 행위를 우연적인 것, 근본적인 것, 심지어 없어질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그녀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는 젠더 표식이 발생하는 언어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평가 절하로 보일 수 있다.
라캉에게 성차는 남성적 ‘주체’란 근친상간을 금지하고 이성애적 욕망이 무한한 위치 변경을 강제하는 법이 생산한 허구적 구성물이며 여성성은 주체의 표식이나 젠더의 ‘속성’이 아니다. 여성성은 상징계가 의미화한 결핍을 의미하며 이 상징계는 성차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는 변별화된 언어규칙이다. 남성적 언어 입장에서 상직적인 법, 금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개체화와 이성애화를 경험하게 한다. 여자아이의 욕망의 좌절은 그 아이에게 모성성의 상징을 받아들여 친족의 법칙을 영속화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여성적/남성적 입장 모두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젠더를 생산하는 금지법을 통해 제도화되지만 오로지 상상계의 무의식적 섹슈얼리티의 생산을 통해 제도화된다.
성차에 대한 페미니즘의 접근은 여성성을 이론화하고자 한다. 여성성을 본질의 형이상학의 표현물이 아니라 배제를 통한 의미화 경제에 기반하고 있는 부인 때문에 발생한 재현 불가능한 부재로 이론화하려는 것이다. 여성성은 거부/배제된 것으로서 헤게모니 개념체계를 비판하거나 붕괴할 가능성을 형성하게 된다.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은 성차야말로 물화된 일련의 성적 대극성을 경솔하게 모사한 복제물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이러한 비판은 무의식이라는 매우 중요한 차원을 간과한 것이다. 무의식은 억압된 섹슈얼리티의 장소로서 일관된 주체의 불가능성으로 주체 담론에 재등장한다. 남성성/여성성이라는 분리된 축을 따라 구성된 일관된 성 정체성은 억압된 것의 우연한 재등장을 통해 파열되며 정체성을 구성하는 금기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유물론적 입장과 (후기)라캉의 입장 차이는 회복 가능한 섹슈얼리티가 무의식의 약식 안에서 법의 ‘이전’ 혹은 ‘외부’에 존재하는지 아니면 성기기 이후의 섹슈얼리티로서 법의 ‘이후’에 존재하는지에 관한 규범화 논쟁에서 나타난다. 이에 푸코를 끌어 들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푸코는 섹슈얼리티와 권력은 동일한 시간에 펼쳐지는 것이라며 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전복적, 해방적 섹슈얼리티의 전제를 은연중 거부했다. 이런 시간의 양식은 그 전복과 약화 그리고 위치 변경을 통해 성에 대한 헤게모니적 금기들을 다소간 피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를 요구하는 어떠한 규범틀의 관점에서 발생된다. 이러한 금기들을 기반으로 생산된 주체는 어느 정도는 권력의 외부나 이전 혹은 이후에 존재하는 섹슈얼리티에 접근하지 못한다. 법보다는 권력이 사법작용과 생산 작용 둘 다를 포괄하며 권력관계의 모태 안에서 발생한 섹슈얼리티는 단순한 남성중심주의의 복제, 복사, 반복을 넘어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의 경계를 사실상 확장시키는 주체들의 가능성을 작동시킨다.
성기기 이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페미니즘의 규범은 권력관계가 계속해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구성하는 방식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 특정적인 여성 섹슈얼리티나 여성적인 의미를 갖고 생물학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생물학은 운명이 아니라는 페미니즘의 전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여성 섹슈얼리티를 섹슈얼리티의 남근적 구성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특징화한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다.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 안에서 섹슈얼리티를 옹호하는 운동은 섹슈얼리티가 항상 이성애적이고 남근 중심적인 문화관습의 시선의 담론과 권력을 조건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해왔다. ‘남성동일시’의 섹슈얼리티 대신에 우리는 남근적 권력관계의 관점에서 구성된 섹수얼리티 개념을 전대할 수 있다. 이 권력관계는 섹슈얼리티의 권력의 장에서 피할 수 없는 ‘동일시’의 전복 작용을 통해 남근 중심주의의 가능성들을 재상연하고 재분배한다. 문화적으로 구성된 섹슈얼리티를 근본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면 남겨진 것은 섹슈얼리티의 구성을 인식하고 어떻게 행하는가의 문제이다.
페미니즘 성 이론의 관점에서 섹슈얼리티 내에 권력 역학이 곧 이성애적이거나 남근로고스 중심적인 권력체제의 강화나 중대와 같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동성애 맥락 안에 존재하는 이성애 관습을 본래 이성애적인 정체성의 재현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그 정체성을 게이 섹슈얼리티와 게이 정체성 안의 이성애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으로 이해해도 안 된다. 비이성애적 틀 안에서 이성애의 구성물을 ㅂ나복하는 것은 이성애적 원본이 순전히 만들어진 위상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관계는 복사본과 원본이 아닌 복사본과 복사본의 관계이다.
젠더의 통일성은 강제적 이성애의 실천효과이다. 이 실천의 힘은 배타적 생산 장치를 통해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의 상대적 의미를 제한하기도 하고 그 의미들의 융합과 재의미화가 일어나는 전복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만일 섹스와 젠더에 대한 규제적 허구들 스스로가 의미의 증식을 겨루는 현장이라면 그 구성의 다양성이야말로 일의적인 입장의 붕괴 가능성을 제시해줄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주장하려는 것은 젠더라는 것이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젠더는 존재론의 양식으로 젠더를 구성하는 정치적 매개변수들을 그려내는 계보학적 탐구의 대상이다. 이분법 관계의 그럴듯함이 담론적으로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려 하며 한편 젠더의 특정한 문화적 배치가 실재인 것 대신에 자리 잡고 적절한 자기-당연시를 통해 헤게모니를 강화하고 확대한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여성은 만들어진다는 보부아르의 주장에서 옳은 점이 있다면 여성 자체가 과정 중에 있는 용어라는 것, 구성중이고 되어가는 중에 있다는 입장을 따른다는 점이다. 젠더는 오랫동안 응결되어온 단단한 규제의 틀 안에서 반복된 몸의 양식화이자 반복된 일단의 행위이다. 젠더 존재론의 정치 계보학은 성공적이기만 하다면 젠더의 본질적 외관을 젠더의 구성적 행위들로 해체할 것이며 이들을 젠더의 사회적 외관을 감시하는 힘들이 만든 틀 안에 두고 설명할 것이다. 추가적으로 해야 할 과제는 젠더화 된 외관을 통해서만 인식 가능한 주체 개념 자체가 그 우연적 존재론을 구성해온 젠더의 다양한 물화들 때문에 강제로 배척되어왔을 가능성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이 책은 남성 헤게모니와 이성애 권력을 지탱하고 있는 당연시되고 물화된 젠더 개념을 전복하고 그것의 대체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노력으로 계속된다.
어려웠습니다. 충분한 소화를 못해서 정리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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