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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트러블 / 2.금지,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적 모태의 생산 /
주디스버틀러 / 2016.11.13.(일) /닥홍
161113 젠더트러블 주디스버틀러 2장3-5절 닥홍.hwp
3. 프로이트와 젠더 우울증
프로이트는 에고 형성과 성격에 우울증 기제가 핵심적이라고 구분은 하지만, 젠더 형성에서 우울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암시하는 수준에 그친다. 프로이트는 사랑했던 사람의 상실을 경험하면서 에고는 그 타자를 에고 자신의 구조로 합체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한 사람이 욕망하고 사랑하던 타자의 상실은 바로 자아구조 안에 타자를 은신시키려는 특별한 동일시 행위를 통해 극복된다. 이러한 동일시가 정체성의 새로운 구조가 된다. 프로이트는 상실한 대상의 내면화와 유지과정은 에고의 형성과 대상 선택에 있어 결정적인 요건이라고 밝힌다. 한편 상실한 사랑의 내면은 젠더 형성에 꼭 들어맞는다. 어린 소년은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아버지와의 관계를 헤쳐 나간다.
프로이트는 남자아이가 왜 어머니를 거부하고 아버지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도입하고 있지만 곧 바로 “부모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양가적 태도는 전적으로 양성애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 내가 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것은 경쟁으로 나타난 동일시에서 발전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분명히 프로이트는 소년이 두 대상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두 개의 성적 기질, 남성적 혹은 여성적 기질 가운데서도 선택해야 한다고 주정하다. 그런데 최초의 기질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성의 어떤 부분을 기질적이라고 부르며, 어떤 것이 동일시의 결과인가? 정말로 양성애 기질을 일련의 내면화의 결과물이나 생산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애초에 어떻게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인 기질을 규명하는가?
프로이트의 최초의 양성성 논의 안에는 동성애가 없으며 오로지 이성들끼리만 매혹된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기질의 존재를 입증한 근거는 무엇이며, 내면화를 통해 획득된 여성성과 엄격히 기질적인 여성성을 딱히 구분할 방법이 없다면 모든 젠더 특유의 유사성이 내면화의 결과라고 결론 내리는 데 주저할 게 무엇인가? 우선 내면화의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아 젠더를 형성하는데 있어 내면화된 동일시 상태를 고찰해보고, 두 번째로 내면화된 젠더 유사성과 내면화된 동일시의 자기 처벌적 우울증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프로이트는 우울증 환자의 자기 비판적 태도야말로 상실한 애정의 대상을 내면화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의 상실을 거부하게 되고 내면화는 신기하게도 상실한 대상을 소생시키는 전략이 된다. 상실이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대상을 향해 느끼는 양가성이 차이가 안정될 때까지 그 대상을 보유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상실한 사랑과의 동일시가 애도의 전제조건이 된다. 동일시는 대상관계를 대체하는 상실의 결과이기에 젠더 동일시는 금지된 대상의 성이 하나의 금지로서 내면화되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동성 간의 젠더 동일시의 경우 이 해결되지 않은 대상관계는 틀림없이 동성애적인 것이다. 엄격한 젠더 경계는 필연적으로 인식되지도 못한 채 해결에도 실패한 기원적인 사랑의 상실을 은폐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분명 모든 젠더 동일시가 다 동성애 금기의 성공적인 수행에 기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적 기질이나 남성적 기질이 그 금기를 효과적으로 내면화한 결과라면, 또 동성 대상을 상실한 것에 대한 우울증적 해답이 합체라면 젠더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입증된 금기를 내면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울증에서 이별, 죽음, 혹은 감정적 유대의 단절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사랑받던 대상이 상실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적 상황에서 이 상실은 일련의 처벌이 따르는 금지의 명령을 받는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적 딜레마에 해답을 주는 젠더 동일시의 우울증은 어떤 도덕적 명령의 내면화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며, 이 명령은 그 구조와 에너지를 외부에서 강제된 금기로부터 얻게 된다. 프로이트가 사실로 가정한 기질은 법의 결과물이다. 분명한 젠더 정체성과 이성애를 생산하고 규정하는 내면화된 법의 결과물인 것이다. 근본주의로 볼 수 없는 이러한 기질은 자신의 계보학을 없는 척 위장하려는 목적을 가전 어떤 과정의 결과물이다. 기질은 강제된 성적 금지의 역사적 흔적이다. 기질에 대한 가정과 더불어 시작되는 젠더 획득에 대한 서사적 설명은 사실상 서서의 출발점을 배제한다. 법은 섹슈얼리티를 기질의 형태로 생산할 뿐 아니라 겉보기에 자연스런 기질을 족외혼이라는 문화적으로 수용 가능한 구조로 변형시킬 때는 부정직해 보인다. 이 법은 자신이야말로 심리적 진실을 출발점으로 삼는 인과관계의 서사 안에 있는 논리적 연속성의 원칙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러한 법의 배치는 섹슈얼리티와 권력관계의 문화적 기원으로 들어가는 더욱 급진적인 계보학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 그리고 은연중 동성애에 대한 금기는 기질이라는 개념에 자리잡고 있는 고유의 욕망을 전제로 하는 하나의 억압적 명령이다.
4. 젠더 복합성과 동일시의 경계
우리는 정체성을 미리 고정시키는 상징계의 법에 반대하면서, 고정되거나 근원적인 법을 전제하지 않는 구성적 동일시의 역사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아버지의 법의 보편성은 인류학의 영역에서는 저항 받을 수 있지만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도 그 법이 주장하는 의미가, 라캉의 설명만큼 그리 일의적이거나 결정적 효과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아버지의 법이 주체에게 첫발을 내딛게 하는 최초의 순간은 하나의 메타역사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체가 탄생하는 순간, 즉 법이 제정되는 순간은 무의식 자체만큼이나, 말하는 주체에 똑같이 앞서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메타역사를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
이성애 욕망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동성애자는 분명 그 이성애를 합체의 우울증적 구조, 즉 인식되지도 애도되지도 않는 사랑의 체현과 동일시를 통해 유지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성애자가 근본적으로 동성애적 애착의 인식을 거부하는 것은 우울증적 동성애의 경우와 달리 동성애 금지에 의해 문화적으로 강제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성애적 우울증은 문화적으로 제도화된 것이고 반대편 욕망과 관계 맺고 있는 안정된 젠더 정체성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만 유지되는 것이다.
어떤 표층과 심층의 언어가 우울증의 이 합체효과를 적절하게 표현할 것인가? 젠더란 내적 고정성의 외양을 수행적으로 구성하는 행위라는 개념으로 연결되어야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페니스에 저장되어서 방해받지 않는 부인을 통해 보호되며, 이제 페니스에 초점을 둔 욕망은 그 지속적인 부인을 자신의 구조이자 사명으로 갖게 된다. 사실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분명히 그 남자가 동성애적 욕망을 느껴본 적이 없으며 욕망의 상실로 인한 슬픔 또한 느껴본 적이 없다는 기호이다. 사실 기호로서의 여성은 이성애를 이음새 없이 매끈한 것으로 신성화하기 위해 이성애 이전의 역사를 사실상 바꾸고 은폐한다.
5. 금기를 권력으로 재공식화하기
근본주의에 대한 푸코의 계보학적 비판은 레비-스트로스, 프로이트 그리고 이성애적 모태를 읽는 방법을 안내해왔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의 사법적 법과 억압이 어떻게 자신이 통제하려는 젠더를 생산하고 증식시키는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정교한 이해가 필요하다.
프로이트와 마르쿠제 모두 문화적 인공물이나 제도란 에로스의 승화된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며, 승화의 생산적 효과를 밝힌다. 그러나 푸코는 이런 승화 이론들과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원형적인 욕망을 가정하지 않는 어떤 생산적인 법을 주장한다. 이 법의 작용은 법 자신이 권력관계에 몸담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은폐하고 자신의 계보학에 대한 서사적 설명을 구성해냄으로써 정당화되고 강화된다. 다음으로 근친상간 금기는 일차적 기질을 억압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일차적 기질과 이차적 기질 간의 구분을 만들어내고 합법적 이성애와 불법적 동성애 간의 구분을 재생산한다. 근친상간 금기야말로 실제로 기원적 생산성을 갖는다고 본다면 주체가 토대가 되는 법, 그 욕망의 법으로 살아남은 금기야 말로 정체성, 특히 젠더 정체성을 구성하는 수단이 된다.
루빈은 라캉의 육화라는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이란 레비-스트로스의 친족관계에 대한 설명을 보완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섹스 젠더 체계, 즉 생물학적 남녀를 분명하고도 위계화된 젠더로 변형시키는 규제된 문화기제야말로 즉각적으로 문화제도의 명령을 받는 것이며, 또한 개개인의 심리 발달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가속화하는 법이 주입된 것으로 생각한다. 루빈은 생물학적 남녀가 젠더로 구성된 남녀로 변형되기 이전에 각 아동은 인간적 표현이 가능한 모든 성적 가능성을 안고 있다. 법 앞에 있는 섹슈얼리티에 최초의 양성성이나 하나의 이상 또 규제되지 않은 다형성의 위치를 매기고 그렇게 기술하려 노력한다는 것은 그 법이 섹슈얼리티에 선행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푸코의 억압가설 비판을 근친상간 금기, 즉 전형적 억압의 법에 적용해보면 법은 허가된 이성애와 위반적 동성애를 둘 다 생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둘 다 결과물이고 시간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나 법 이후에 온 것이다.
루빈의 논문은 섹스와 젠더의 구분에 의지한다. 이 구분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진 결과적으로 젠더로 변해버린 분명하고 선험적인 섹스의 존재론적 실제를 가정한다. 이러한 젠더 획득의 서사는 서술자가 법 이전과 이후가 무엇인지 둘 다 아는 위치에 있다고 가정되는 어떤 시간적 질서를 요구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서술은 법 이후에 오는 언어, 즉 법의 결과물인 언어 안에서 발생하며, 뒤늦은 회고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루빈은 행동이나 정체성에 있어 양성애/동성애의 문화적 발생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젠더 그 자체의 전복을 그리고 있다. 생물학적 다성욕성을 문화의 명령을 받은 이성애로 바꾼 문화적 변형물이 젠더인 만큼, 또한 그런 이성애가 자신의 목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명징하고 위계화된 젠더 정체성을 펼치는 만큼, 루빈에게 이성애의 강제적 성격이 붕괴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서 젠더 자체의 붕괴를 의미한다. 젠더가 완전히 소멸될 수 있는지, 또 어떤 의미에서 젠더의 붕괴가 문화적으로 상상 가능한 것인지가 흥미롭긴 하지만 이는 루빈의 분석에서 불분명한 암시로 남아 있다.
너머에 대한 신성화는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는 상징질서를 소환함으로써 제도화 된다. 사실 상징계, 욕망, 성차의 제도라는 드라마는 스스로를 지탱하는 의미화 경제로 해석해야 한다. 외양의 질서, 그 설명의 토대가 되는 시간성은 주체의 균열과 욕망의 실패를 가져오면서, 서사의 일관성에 저항하는 시간 전개의 층위에서 일관성을 재규정한다. 그 결과 이 서사 전략은 회복할 수 없는 기원과 영속적으로 위치 변경하는 현재를 구분하는 데 집중하면서, 전복의 이름으로 그 기원을 회복해보려는 모든 시도를 때늦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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