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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레스토랑
간주곡2 광기의 역사속의 코기토 발제 바다사자
코기토, 광기, 종교는 칸트, 데카르트에게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코기토는 광기와의 차별화를 통해 출현하며 코기토 자체는 상식에 의해 철학의 광기의, 철학의 광적인 편집증적 체계 형성욕의 전형 자체로 간주되고 있다. 동시에 종교는 광기의 한 현태로 환기되며 종교는 광기의 해결책으로 들어온다. 셋의 삼각형이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의 초점인데, 핵심적인 기본 전제는 공유되고 있다.(589) 코기토는 내속적으로 광기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차이는 푸코의 코기토는 광기의 배제에 근거하고 있으나 데리다의 코기토는 자체가 오직 ‘미친’ 과정을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으며 이 초과에 의해 표시된 채로 잇을 수밖에 없는데 있다. 코기토는 사유하는 것, 자기투명적인 사유하는 실체로 자신을 안정화시키기 전에 미친 듯한, 한 점에 집중되는 초과로 폭발한다는 것이다.
푸코의 출발점은 광기의 지위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인간 정신의 특수한 현상, 고유한 진리를 가진 의미심장한 현상이었으나 데카르트와 함께 광기가 배제되면서 치료되어야 할 단순한 질병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590)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내가 보는 모든 것이 환각일 수 있지만 내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으며 철학의 절대적 확실한 출발점이다. 푸코는 광기를 이성의 영역에서 배제한다고 반박한다. 고전주의 시대 이성은 광기의 배제에 기반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광기는 이성과 함께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출현한 담론적 구성물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데카르트는 광기를 배제하기는커녕 그것을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갔음을 입증하려한다. 세계 전체가 환각일지도 모른다는 보편적 의심이야말로 상상 가능한 초대의 광기라는 것이다.(591) 데카르트의 보편적 광기는 모든 역사적 형태의 철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초과적 계기이다. 그것은 철학에 내적이다. 이에 푸코는 광기란 환각, 꿈이 아니다. 오직 내가 보는 것과 관련해서만 자신을 기만할 뿐이며 광기 속에서는 나 자신이 더 이상 정상적이지 않으며 이성을 잃으므로 합리적 주체가 되려면 광기를 배제해야 한다고 한다.(592) 푸코는 텍스트를 분석하기보다 텍스트 외적인 권력 및 통제 메커니즘과의 상호 연관되는 담론적 실천들이 권력과 지배의 실천들과 결합되는 방식을 분석한다. 데리다의 광기는 먼저 주체성의 철학 전체를 통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파르마콘이며 두 번째로 코기토 전사 자체 속에 초월론적인 생성의 일부이다.(593)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모체는 두 극단 사이의, 철저한 소모와 과장, 초과, 그 이후의 순치 사이의 영원한 동요이며 양극단 모두 환각적인 것이다. ‘세계의 밤’의 순수한 초과가 아니라 상징적인 것 자체로의 이행의 광기, 실재의 카오스에 상징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의 광기이기 때문이다.(595)
철학 자체의 역사에는 과장이, 특 철학의 외밀한 핵심이 직접적으로 자신을 철학 속으로 기입하는 특권적 지점이 존재하며 그것이 코기토의 초월론적 철학이라는 계기이다. 여기서 ‘광기’는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세계관 속에서 그것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는 ‘초월론적 ’지평을 통해 ‘길들여진다.’(596) 푸코는 자신의 언표의 위치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주의의 덫에 빠지고 만다. 푸코의 전략적 목표는 광기 자체가 말하도록 하는 것인데 그것은 자신에 대한 담론 밖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기 또한 그것을 배제하고 대상화하고 연구하려는 담론 자체에 의해 생성된다.(597) 그것 바깥의 ‘순수한’ 광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텍스트 밖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푸코는 ‘위반은 우리 문화에 결정적이고, 우리 문화적 토양에 뿌리박은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고 했지만 그러한 날은 이미 도래했으며 영구적인 위반은 이미 후기자본주의의 핵심적 특징이다.(598)
데리다가 푸코보다 외부성을 사유하는데 훨씬 더 가깝다. 푸코의 외부성은 단순한 역사주의적 환원과 관련된다. 반면 그것의 내속적 초과, 외밀한 핵심을 사유하기는 그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이것이 둘 사이의 논쟁의 진짜 쟁점이다. 외밀성인가? 직접적 외부성인가? 코기토 한가운데 있는 광기의 어두운 핵심은 보다 발생적인 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인공적 환경, 언어와 도구 없는 인간은 불구이다. 상징적 제도들과 도구에 의해 보충되는 것이 그러한 결여로 대중 문화적 형상들 속에서 분명해지고 있는 사실은 처음부터 그러했다.
어떻게 ‘자연적’환경으로부터 ‘상징적’ 환경으로 이행할까? 양자 사이에 자연도 또 문화도 아닌 ‘사라지는 매개자’가 개입해야 한다. 중간자를 가리키는 프로이트적 이름이 죽음충동이다.(600) 광기의 한 극단을 대변하는 것은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이다. 진정한 실체(신)가 지속적으로 이 양자 사이를 조정하고 매개하는 것, 연속성이라는 가상을 유지한다는 것뿐이다. ‘신’을 큰 타자로, 상징적 질서로 대체한다면 이는 라캉의 입장에 가깝다. 영혼과 육체 사이의 관계는 결코 직접적이지 않다. 큰 타자는 항상 자신을 이 둘 사이에 두기 때문이다. 기회원인론은 ‘시니피앙의 자의성’을, 생각들의 네트워크를 신체적 인과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극을 이 두 네트워크 간의 조정을 설명해주는 것은 큰 타자이다.(601) 사이버 공간은 분열증적 판타지를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컴퓨터로 연결된 우주’는 신이 인간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신병적이다. 즉 컴퓨터 속에서의 큰 타자의 외재화는 컴퓨터로 연결된 우주에 내속적인 분열증적 차원을 설명해준다.(604) 워쇼스키의 매트릭스는 라캉적‘큰 타자’, 가상의 상징적 질서, 우리를 위해 현실을 구조화하는 네트워크다. ‘큰 타자’의 이러한 차원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의 주체의 구성적 소외의 차원이다. ‘큰 타자’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으며 주체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구조에 의해 ‘말해진다.’
‘큰 타자’속에서의 소외 다음에는 큰 타자로부터의 분리가 이어진다. 주체가 큰 타자는 정합적이지 않고, 잠재적인 것이며 물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자마자 분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판타지는 큰 타자의 정합성을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이다.(605) 따라서 코기토의 한가운데서의 광기의 초과는 자유라는 주제와 밀접하다. 루소나 칸트에게 최대의 도덕적 선은 완전히 자율적인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며, 최고의 악은 타자의 의지에 종속되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은 주체에 의해서 오직 외적 강제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가혹한 훈육과 교육에 의해 몹시 힘든 성숙 과정을 통해서만 자유롭고 성숙한 합리적 행위자로 출현한다고 보았다.(606) 칸트의 진정한 목표는 외적인 주인에 대한 필요 자체가 왜 기만적인 미끼인가를 지적하는 데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어려운 자유와 자기책임이라는 교착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감추기 위해 주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진정 계몽된 ‘성숙한’ 인간 존재는 기꺼이 자기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는 무거운 짐을 전적으로 떠안는 주체이다.(611) 자유(도덕적 자율성, 자기책임)와 예속(병리적 본능들, 외적 권력에의 복종) 사이의 외적 대립은 무시무시한 자유와 진정한 도덕적 자유 사이의 ‘최고의’ 적대성으로서 자유 자체 속으로 옮겨져야 한다.
순수한 자율성으로서의 주체를 강조하는 근대로 전환되면서 습관의 지위는 유기적인 내적 규칙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의 대립물로 바뀐다. 자유는 결코 습관이 될 수 없다.(612) 헤겔은 정신으로부터 자연으로의 이행을 ‘지양이 아니라 중복으로서, 정신이 자신을 제2의 자연 속에서, 제2의 자연으로 구성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제2의 자연을 습관이라 한다. ‘제2의 자연’ 속에서의 자연의 중복은 원초적인 것이며, 정신적 창조성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는 것은 오직 이 중복뿐이다.(613)
헤겔의 습관 개념은 데리다가 파르마콘 –죽음의 힘인 동시에 삶의 힘인 모호한 보충물과 가깝다. 습관은 생명력이 없고 기계화된 반복이며, 창조적 선택을 하고 새로운 것을 고안해내는 자유와는 정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614) 헤겔은 습관 없이는 자유도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습관은 자유의 모든 행사에 배경과 토대를 마련해준다. 습관들은 통해 주체는 몸을 전유한다.(615) 습관 속에서 현존과 부재, 전유와 철회, 관여와 거리두기, 의식과 무의식은 상호 연결된다. 습관은 의식이 기능하는 것 자체에 필수적인 무의식이다.(617) 습관의 초기ㅗ 수준은 사유의 매체로서의 언어이다. 습관의 ‘무반성적 자발성’은 주체적으로 객관적 필연성을 선택한다는,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을 의지한다는 역설을 설명해준다.(618) 습관은 핵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시간성이다. 주체성은 습관 속에서 ‘자체 내에 미래의 존재 방식들, 미래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될 방식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습관이 가능성의 현실성을 의미한다. 지금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인 동시에 미래에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가능성이기도 하다.(619) 우연적인 것의 본질적인 것 되기이다. 즉 인간은 영원한 실체 또는 보편적 본질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핵심 자체에서 습관의 창조물이며, 우연적인 외적 사건들 또는 만남들이 내적인 보편적 관습으로 격상되는 것을 통해 정체성이 형성되는 존재이다.(사르트르)(620)
동물적 습관과 인간적 습관 사이의 차이에 대해 헤겔은 ‘정신철학’ 서두에 밝히고 있다. 자연으로부터 정신으로의 이행이 정신의 직접적인 외적 개입, 자연적 긴장과 적대성으로부터 지성이 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오랫동안의 고된 ‘돌파하기’로 전개되고 있다. 이행은 직접적이지 않은데, 언표에 의해 매개된 인간의 지성(621)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정신은 직접적으로 생물학적 과정에 직면하고 그것을 지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의 ‘물질적 토대’는 영원히 상징 이전의 습관으로 머물러 있다. 헤겔은 습관을 영혼의 변증법적 과정-개념-판단-삼단논법-의 세 번째, 결론을 내리는 계기로 간주하고 있다. 처음에는 ‘느끼는 영혼’이라는 단순한 개념 속에 있는 영혼이 있다. 영혼은 감각들 속에서 자신을 깨우기 시작한다. 자아는 단순한 ‘감각이 있는 자아’이다. 주체와 대상이 직접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감각을 느낄 뿐이다. 감각은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 감각 있는 자아는 직접적으로 외적 과정들에 연결되고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영혼이 분명하게 자신을 외적 현실과 구별되는 것으로 느끼는 순간은 ‘판단’의 순간에 일어난다.(623) 주체는 자신의 세계의 틀 안에 담겨진 내용의 일부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미 틀 내부에 있으며, 틀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현실 내부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가능성 자체는 가능성으로서 자신을 현실화해야 하며 가능성으로서 적극적이고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624) 효과적인 권위로 기능하려면 그것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채로, 영원한 위협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자아의 지위이다. 자아의 자기인식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의 현행성이다. 그 결과 주체에게 출현하는 것은 주체가 완전히 자신을 ‘마주치게 되는 ’대상이게 된다. 주체는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625) 주체는 단수형이며 ‘그의 세계’의 보편적 틀이다. 주체에게 출몰하는 물은 대상적 맞짝 속에서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이다.
광기는 그 자체로서는 유동적이지 않으며, 그에 고유한 자리와 서열로 환원되는 것에 저항하는 특수한 규정은 주체 본인, 또는 구조화된 총체성 내에서 주체를 대표하는 특징(시니피앙)이다. 주체는 자신을 객관화할 수 없으므로 ‘모순’은 절대적이다. 이러한 간극과 함께 광기의 가능성이 출현한다.(626) 광기는 우발적 착란이 아니라 개별적 정신의 기본적인 존재론적 구성 속에 기입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잠재적으로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광기는 비록 사실적 필연성은 아니지만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형식적 가능성이다. ‘정상성’은 오직 위협의 극복으로서만 등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습관 속에서 주체는 ‘자신을 소유할 수 있는’, 습관을 하나의 속성으로, 즉 긍정적인 현실적 특징이 아니라 잠재적인 어떤 것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는 보편적 성향으로 ‘소유하는 것’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적 내용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628) 따라서 습관은 광기의 불균형을 안정화시키는 방법이다.
‘판단’의 순간에 폐쇄된 원환의 고리가 깨진다.(629) 이 원환을 자신 안으로 비틀어 넣는 자기참조성에 의해서 그렇다. 동시에 개인은 오직 자기가 행위한 것이 겹겹이 쌓여가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개인의 육체는 개인이 일구어낸 자기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신체적인 자기표현 과정은 어떠한 선재 하는 지시 대상도 정박점으로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 운동 전체는 철저하게 자기 참조적이며 표현된 내적 자아가 소급적으로 창조되는 것은 오직 표현 과정을 통해서 뿐이다.(630) 개인이 신체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아무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 헤겔의 급진적 결론이다. 이처럼 습관은 ‘아무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이상한 기호이다. 이 기호는 라캉이 ‘시니피앙’이라고 부른 것으로 다른 시니피앙을 위해 주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주체 자체의 공백으로 따라서 궁극적 참조항의 부재는 이 부재 자체가 궁극적 참조항아며, 이 부재가 주체 자체임을 의미한다.(634) 정신들(유령들) 없이는 정신(이성)도 없으며, 정신이 영원히 유령들에 시달리는 것은 정신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며, 정신정신은 자연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자연은 이미 다른 어디에서인가 구성되어 있으며, 기성품으로 존재한다.-정신착란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636) 우리는 자신의 역할과 ‘과잉-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연기를 완수할 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한다.(638)
정신적 존재들인 인간들만이 유령들에 시달린다. 보편성이 인간들에게는 필요한 동시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 주체들에게는 보편성의 자리가 사전에 규정되는 반면 그것은 텅 빈 채로 남아 있어야 하며, 결코 ‘본래의 ’내용으로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특수성은 보편적 본질과 그것의 우연성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639) 오직 인간 존재만이 보편성을 보편성 그 자체로서 정립하며 그것과 관계를 맺으며 재귀적으로 우연성들을 보편적 본질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속이 그 자체로서 문제인 존재이다. 이런 또는 저런 습관의 우세는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이다. 인간 주체는 현실을 단독적인 주체적 관점에서 지각하며 동시에 자신을 그와 동일한 현실 속에 그것의 일부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대상으로 포함된 것으로 지각한다. 보편성은 항상 필요한 동시에 불가능하다(640) 헤게모니 개념의 핵심적 특징은 사회 내부적 차이들과 사회 자체를 비사회로부터 분리시키는 한계가 우연적으로 연결되는데 있다. 외적 차이들은 항상 이미 또한 내적이며, 더 나아가 내적 차이와 외적 차이가 어떻게 연결되느냐는 궁극적으로 우연적이며 정치적인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이다.(641) ‘자기-대상화‘의 불가능한 지점은 정확히 보편성과 그것의 특수한 내용이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지점일 것이다.(642) 더 이상 헤게모니 투쟁이 없게 될 지점이 다시 우리를 광기로 데려간다.
광기에 대한 가장 간결한 규정은 보편성과 그것의 우연성들 사이의 직접적 조화, 이 양자를 분리시키는 간극의 철회가 될 것이다. 주체가 어떤 습관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은 어떤 긍정적 특징들과의 직접적 동일시가 아니라 성향, 가상성과의 동일시이다. 습관은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이다. 그것은 ’본질‘로 보편적 특수성이 격상된 우연성으로 보편성의 텅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다.(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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