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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과 유물론–R.오스본, E.프롬 / 2부 2-5장 / 개벽크 / 21. 10. 20.
166~209
[제2부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제2장 인간의 개념과 본질
인간성의 개념이나 휴머니즘의 개념은 모든 사람들이 인간적 본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 위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교나 기독교 사상의 대전제일 뿐 아니라, 불교의 대전제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각 개인의 자아가 서로 다르며 불멸성을 지니고 있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나’라고 하는 독특한 존재를 포함한 여러 가지 사물에 집착하는 탐욕스런 욕구에 의해서 존재에 대한 모든 문제들의 답을 찾고자 애쓰고 있다. (167)
*인간성에 대한 정의
1.스피노자- 인간 본성의 모습을 ‘인간 본성의 모형’이란 말로 설명했다. 어떤 특정한 문화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하나이기 때문에 자연에 존재하는 다른 존재와 같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168)
2.괴테와 헤르더- 인간이 타고나는 본성은 인간을 더 높은 발전 단계로 이끌어주는 것으로 믿었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개성뿐 아니라 잠재력을 지닌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삶이라는 과제를 개성을 통해서 전체를 행해 발전해 나가는 것으로 여겼다. (168)
3.현대 심리학자나 사회주의자들- 인간을 한 장의 백지로 보고, 그 백지 위에 각각의 문화가 그 자체의 과제를 써내려가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인류가 하나임을 부인하지 않는 반면에 인간성의 개념에 대한 내용이나 본체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168)
4.마르크스- ‘일반적인 인간의 본성’과 ‘각각 역사적 시기에 형성된 인간의 본성’은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본성이란 하나의 주어진 잠재력인 동시에 일련의 상황이고 인간적인 원료로 보았다. (169)
오늘날에는 인간 본성 및 인간 본질에 대한 개념이 나쁜 평판으로 나오게 된 이유는 인간 본질이라는 형이상학적이고도 추상정인 개념에 사람들이 갖고 있는 회의적인 생각 때문이고, 오늘 날에는 인간이 불교 신자, 유대교 및 기독교 신자, 스프노자 추종자, 그리고 계몽주의 개념 등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체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168)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동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행동이라는 심리적, 정신적 성격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될 수 있는 한 종족의 행동이기 때문이다.(169)
마르크스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이 역사의 시작 이래 존재하는 실체라는 비역사적인 면과, 인간의 본성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사회적 상황의 반영에 불과하다는 상대론적인 면이 또 다른 하나의 비판의 대상이다. (170)
마르크스는 인간의 병증세와 건강에 대한 개념으로 신경증적 증세의 표현을 ‘불구의’ 인간과 ‘소외된’ 인간에 대해 말하고, 정신적 건강에 대한 표현으로 능동적이고 생산적이며 자립적인 인간을 얘기하고 있다. (171)
프로이트의 인간 본성의 개념을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인간 본성의 모형’을 형성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모형은 19세기 물질주의적 사상에서 비롯됐고 인간은 성적 충동(리비도)의 성적 에너지에 의하여 움직여 나가는 기계와 같은 것으로 본다. (171)
제3장 인간의 진화
프로이트는 마르크스처럼 인간의 발달을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보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주된 추진력, 성적 에너지가 태어나면서부터 사춘기까지 각 개인의 생애에 있어 진화를 겪게 되는 것으로 본다. *어린아이- 빨거나 물어뜯는 행위 -> 항문과 요도를 통한 배설 작용 -> 궁극적으로 생식기 주변으로 집중 (173)
인간은 프로이트가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몇 가지 이유로 인해서 문명을 창조하기 시작하게 된다. 창조하는 힘으로 본능에 대한 만족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이 좌절된 본능은 비성적인 정신적, 심리적 에너지로 변화하였으며, 이 사실이 문명의 초석이 된 것으로 본다. 문명이 발전 할수록 인간은 승화 작용을 하게 마련이지만 성적 충동에 대해 더욱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174)
*승화- 성적 에너지 -> 비성적 에너지
프로이트가 역사를 보는 이론의 또 다른 면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련이 있다. <자연 숭배와 금기>를 토대로 경쟁자들 사이에 더 이상의 살인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동시에 도덕성의 확립을 이룩할 수 있었다. (175)
인간의 정신적 진화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마르크스의 진화론의 중심 개념은 인간의 자연과의 관계에서, 또 이러한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에게는 사회주의란 완전히 성숙한 어른이 자기의 모든 힘을 펼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하고 있다.(176)
한 종족으로서의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어머니와 같은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서서히 해방시키게 되는 것이며 인간이 자연을 인간의 완전하고도 이성적인 지배하에 두려고 노력할 때, 또는 사회가 적대 계급의 성격을 상실할 때에 ‘역사 이전의 시대’는 끝나게 될 것이며 진정한 인간의 역사가 시작 될 것이다. 모든 사회생활의 목표나 목적은 노동이나 생산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하나의 목적으로 꽃피게 하는 것으로 이런 상태를 인간이 자기의 동료들이나 자연과 완전히 연합하게 되는 ‘자유의 왕국’이 되는 것이다. (178)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대조적인 개념은 너무도 확연히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완전성이나 진보에 대해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는 특히 1차 대전 후 회의주의적 입장에 있었다. 그는 인간 진화의 문제를 근본적인 입장에서 하나의 비극으로 보았고 진화란 애매모호한 축복이며 사회는 이익을 주는 것만큼 유해하기도 한 것으로 보았다. (178)
제 4장 인간적인 동기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는 힘이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추진하는 충동은 무엇인가? 답에 대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마르크스- 유물론적인 역사는, 인간의 주요 동기란 마치 물질적 만족을 소원하는 것이고 더 많은 것을 사용하고 싶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다.
프로이트- 인간의 필수적인 동기로서의 물질에 대한 탐욕은 인간 행동의 가장 강한 동기를 형성하는 것이 성욕이라고 한다. (179) 인간은 성적 충동에 의한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힘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는 것이다. (180)
프로이트는 인간을 모순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되는 존재로 보고 있다. 성적 쾌락을 위한 노력과 생존 및 자기의 환경을 지배하고자 하는 노력 사이의 모순을 뜻한다. 인간은 성적 충동에 의한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힘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는 것이다. (181)
유물론이라는 용어와 이 말의 상대어인 ‘관념론’은 그것들이 적용되는 문맥에 따라 물질적 만족에 관심을 갖는 유물론자를 뜻하며, 관념론자라는 것은 관념, 즉 정신적, 윤리적인 동기에 의해서 동기가 유발되는 사람을 가르킨다. 유물론이란 말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유물사관)을 가리킬 경우에만 해당되는 뜻으로 사용되어야 한다.(역사적 유물론이란 말을 마르크스 자신은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다.) (180)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인간 자신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는 세계에 대한 견해로부터 우리의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 인간으로부터 우리의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다. 역사적 유물론은 심리학적 이론이 아니고 주요 선결 조건은 인간이 생산해 내는 수단이 생활 습관과 생활 수단을 결정하는 것이고, 이러한 인간의 사고 및 인간사의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181)
경제란 심리적인 충동이 아니라 생산 양식이다. 주관적인 심리학적 요인이 아니고 객관적인 사회 경제적 요인인 것이다. (182)
마르크스는 소유하고자 하고 사용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을 ‘절름발이 인간’이라고 믿었다. 마르크스의 목표는 이익이나 사유 재산이 아니라, 인간적인 힘을 자유로이 펼쳐 나가는 것이 인간의 주된 목표가 되는 그런 사회주의적 사회이다. 재산을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인품이 훌륭한 자를 완전히 성숙되고 진정 인간적인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183)
소련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과, 소련의 경영주, 노동자, 농부들의 이윤 추가가 소련 경제의 최대의 중요한 자극이 된다. 소련의 체제나 자본주의 체제는 서로 일치되고 있으며 마르크스의 이론이나 목표에는 모순되고 있다. (184)
제5장 병적인 개인과 병적인 사회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정신병 증상의 개념은 무엇인가?
프로이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지 못한다든가, 인간이 유아적 충동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숙한 생식 단계에 고착된다면, 인간은 그 내부에 있는 어린 아이의 욕구와 성인으로서의 욕구 사이에서 분열되게 마련이다.
마르크스- 체계적인 정신병리학을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인 절름발이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절름발이 상태는 그에게 정신병리의 가장 근본적인 표현이고, 또 정신병리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인 소외를 말한다. (185)
이 소외라는 개념은 헤겔에 의해서 온 세계(자연, 사물, 다른 사람들, 인간 자신)가 인간에게 제일 낯선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엘바하의 사상에 의해 깊은 감동과 영향을 받았다. 헤겔의 <법철학 비판> 서론에서 소외 문제를 분석하면서 포이엘바하의 이론을 추종하고 있다. <경제적․ 철학적 소고 1844년>라는 논문에서 마르크스는 종교적 소외 현상으로부터 노동 소외 현상으로 관심이 쏠리고 있다. (186)
“노동자는 많은 부를 생산할수록, 또 그의 생산의 힘과 범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만큼 더 가난해진다.” “모든 이러한 결과는 노동자가 생산한 노동의 생산물이 소외된 사물이 되어 버리는 사실에 따른다.”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그가 만들어내는 사물의 세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의 내적인 삶은 더욱 빈곤해지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점점 적어지게 마련이라는 전제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187)
마르크스는 독창적이며 소외되지 않은 형태의 노동을 ‘삶의 활동, 생산적 생활’이라고 정의하고, 인간에 대한 인종적 특징을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은 소외된 노동에 있어서 소외된 활동으로 왜곡되고, 따라서 생활 그 자체가 단지 생산 수단처럼 된다. (188)
소외된 인간은 인간의 개인적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생활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한 가지 뚜렷한 결과는 인간이 다른 인간들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저서에서 “특정한 이해 관계와 공통적인 이해 관계 사이에 분열이 존재하는 한 인간 자신의 행위는 자기 자신과 대결하는 소외된 힘이 되고, 이런 힘은 인간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 자신을 노예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189)
<자본론> 속에서 소외의 문제에 대해 말한 몇 가지 구절 “현대 산업은 진정 사회에 대한 생산의 문제로서 대수롭지 않은 한 가지 일을 한평생 동안 반복함으로써 절름발이가 되고, 이것 때문에 단편적인 인간이 되어 버린 오늘날의 세공 노동자들을 완전하게 발전된 인간으로 대치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런 개인에 대하여 인간이 행하는 서로 다른 사회적 기능은 인간 자신의 선천적․ 후천적 힘을 자유롭게 제공하는 다양한 양식이기도 하다.” (190)
소외는 인간만이 가진 질병이다. 소외는 노동자 계급에서 발전했으나, 이 소외는 모든 사람들이 겪는 병인 것이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만 치료될 수 있다. 완전히 소외된 인간만이 소외를 극복할 수가 있다. 사회주의가 그 문제의 해답이 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이 역사의 의식적 주체가 되고, 자기 힘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경험하며, 사물과 환경의 속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191)
마르크스에 있어서 소외는 모든 인간의 가치를 부여하게 만들고 나쁜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득, 노동, 절약, 절제와 같은 타고난 가치를 인새의 최고 가치로 여김으로써 인간은 그의 진실 된 도덕적 가치, 즉 훌륭한 양심과 덕과 같은 부를 개발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192)
마르크스는 소외된 사회에서 인간의 욕구가 어떻게 타락하여 진정한 약점이 되는가를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새로운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로 하여금 새로운 희생물이 될 것을 강요하며, 새로운 종속 자가 되게 하고서 새로운 쾌락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마침내는 경제적 파멸로 유도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에 대한 만족을 찾기 위해 소외의 힘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도록 시도하게 된다. (193)
돈에 대한 욕구는 현대 경제에 의해서 창조된 진정한 욕구이며, 현대 경제가 만들어 내는 유일한 욕구이기도 하다. 화폐의 양도 점차적으로 그 유일한 중요 특성이 된다. 사유 재산은 본래의 욕구를 인간적인 욕구로 변화시킬 줄 모른다. 사유 재산의 이상주의는 환상이요, 변덕스러움이요, 공상에 불과하다. (194)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욕구에 지배를 받는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몰인간적인 존재로서 자의식을 지니고 스스로 행동하는 상품으로 전략해 버리고 만다.’ 이렇게 상품화된 인간이 자기 자신과 일부 세계를 연결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한 가지밖에 모른다. 물건을 소유하고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다. 인간이 소외되면 소외될수록 외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소유와 소비의 의미가 그만큼 더 커지게 된다. (195)
신경증적 성인 환자는 소외된 인간 존재이고,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동과 경험에 있어서 주체로서 또는 창조자로서의 체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건강하지 못하다고 느끼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내적 공허감이나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랑․ 지식․ 용기 같은 자신의 인간적 특성을 모두 투사할 수 있는 대상을 나름대로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대상에 대해 복종함으로 해서 그는 자기 자신의 특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196)
전이는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형태의 권위적 인물을 우상화하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이는 소외의 표현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정신병의 유일한 현상은 아니다. 자의의 질병으로서 소외는 현대인의 정신병리의 핵심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런 경우 정신병보다는 덜 극단적이라 하겠다. (197)
소외에 대한 또 다른 예는 희망의 소외인데, 이 희망의 소외 속에서는 미래가 우상으로 변형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우상화하는 것은 로베스피에르의 견해 속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199)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외된 역사와는 정반대 역사관을 <성스런 가족>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역사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거대한 부를 지닌 것도 아니고, 어떤 투쟁도 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오히려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인간인 것이다. 역사는 동떨어진 사람처럼 인간을 역사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역사란 그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 황동에 불과한 것이다.” (201)
정신병리학적 현상의 근본으로서 중심적 현상인 자기의 주체 의식을 체험하지 못하는 현상도 또한 소외의 결과다. 소외된 사람은 자기의 감정 및 사고 기능을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의 어떤 대상으로 변형시켜 놓기 때문에 그는 나라는 감각을 잃어버리고 주체 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201)
이러한 주체 의식의 결핍은 여러 가지 결과를 야기시킨다. 전체적 인격을 통합시키지 못하는 것이어서, 이런 상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부에 분열된 상태가 되게 하며, ‘어떤 일을 행할 의욕’의 결핍 또는 어떤 일을 하려는 의지가 있다 해도 진실성이 부족하게 된다. (202)
소외를 병리적 현상으로 보더라도 헤겔이나 마르크스가 필요한 현상이라고 여겼던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성의 소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내가 외부 세계와 나 자신을 구별할 수 있을 때에만, 외부 세계가 하나의 객체가 될 때에만 비로소 나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고, 그것을 나의 세계로 만들어 그것과 함께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02)
인간은 자기의 이성적 활동에 있어서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외되어야만 한다. 이 원리는 사랑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린아이가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되지 못하는 한, 그는 그 세계의 일부일 뿐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은 낯선 이방인이 되어야 하며,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는 그 이방인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소외를 전제로 하며, 그와 동시에 소외를 초월하는 것이다. (203)
마르크스는 현대인의 질병이라는 중심적 쟁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과, 포이엘바하나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도 이 ‘질병’을 이해한 것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상 숭배는 현대적 생산 양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인간의 정신적 해방과 함께 경제․ 사회 구조를 완전히 변화시킬 때에만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205)
정신질환에 대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각각의 견해로 프로이트는 원래 개인적인 병리 증세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마르크스는 사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병리 상태와 그 사회의 특수한 체제에서 비롯되는 병리 상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정신병리 상태의 내용이 매우 다르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이 병리 상태는 본질적으로 이드와 자아 사이에 알맞은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본능적인 욕구와 현실적인 욕구 사이의 불균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소위 19세기에 ‘세기의 병’이라고 불리어졌던 인간의 본질적인 질병이 자신의 인간성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또 동료로부터 소외당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206)
마르크스는 사회에서의 인간의 진화에 대한 견해를 헤겔과 똑같은 방법을 취하고 있다. 원시인이나 중세인이나 산업 사회의 소외된 인간들은 정신적으로 병든 상태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 하면 이러한 발전 단계는 필수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생리적으로 성숙할 필요가 있듯이, 인류도 완전한 인간이기 위해서는 자연과 사회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성숙해야만 하는 것이다. (208)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병리 상태의 개념은 둘 다 개인과 인류 역사의 진화 개념의 측면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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