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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크로체 : 최초 논문들에서 역사 서술까지
크로체와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제1인자인 베르그송과 문체가 우아하고 간결하다는 것, 직관적 능력에 의거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크로체는 연관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베르그송에게서 ‘어떤 철학적 낭만주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크로체는 박학하고 광범한 독서를 하면서도 그의 시대의 지적 혁신과 걸음을 같이할 필요를 못 느꼈다. 당정의 관심과 관련이 있는 것만 다루었기에, 그에게서 유쾌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을 느끼게 된다. 그의 전집은 60여권이며, 『비평』잡지의 논평이 있고, 그는 이탈리아 문학계. 철학계에서 인자한 독재자로 군림했다. 이탈리아 이외의 세계에서 크로체는 주로 역사가와 비판적 역사철학자로서 영향을 미쳤다. 이 연구에서는 이 부분을 다루고 있다. 크로체를 독일관념론의 장에서 다루려는 이유는, 그가 독일 이론서를 읽고 역사연구의 기준과 비판적 해석의 규범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철학상의 스승은 헤겔과 마르크스였다.
크로체는 어릴 적 아브루치의 아킬라 지방에서 나폴리로 이사, 나폴리 사람으로 지냈다. 그는 대학에서 리브리올라의 도덕철학에 관한 강의와 문학을 주로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폴리에 다시 정착 60년 이상 재야학자로 생활했다. 1886년부터 1892년까지 6년 동안, 나폴리의 고대 문물 연구에 전념, 수많은 역사철학자와는 달리 까다롭고 얼핏 보기에는 사소한 자료를 세밀하게 조사하면서 역사연구를 견실하게 배웠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는 상상력과 영웅적 헌신의 가치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3년에 이르러 크로체는 박학에 실증, 자신의 일을 보다 철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도움을 얻기 위해 비코, 드로이젠‧ 딜타이 등 독일인의 저술을 섭렵하고, 위대한비평가이며 나폴리의 동향인인 상크티스의 기억을 새롭게 하며, “예술의 일반 개념에 포섭되는 역사”라는 제목을 논문을 썼다. “역사에 관한 글은 개념을 가다듬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건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역사에 대해 과학적 성격을 부정해왔다. 그러므로 역사가 과학이 아니라면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짓기는(...)쉽다.” 이러한 공식을 통해 크로체는 문학예술과 역사적 박식은 하나라는 확신을 표현했다. 고향도시의 민요는 예술적 기쁨의 원천인 동시에 역사적 계몽의 원천이었다. 따라서 역사가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둔 윤리적 확신에 이론적‧ 체계적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이후 크로체는 역사가의 과제에 대한 보다 ‘개념적’인 견해로 옮겨가지 시작했다. 1902년 발간한 『표현학과 일반언어학으로서 미학』에서는 아직도 원래의 정의를 고수, 그러나 7년 후에 『개념학으로서 논리학』의 마지막 원고를 완성했을 때는 이론적 입장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원숙기에 들어선 크로체는 자신의 역사이론에서 비코와 마르크스와 헤겔에 대한 종합적 연구결과를 융합,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역사적 사고의 기준속에 받아들이면서 헤겔에 도달, 『헤겔철학에서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발표, 크로체가 마르크스를 매개로 헤겔을 만난 것에는 참된 위험이 있었다. 크로체는 헤겔주의가 매우 계몽적임을 발견, 자신의 개념적 도식을 보다 치밀하고 정연하게 제시하는 데-미학과 논리학을 <정신철학> 앞에 두고, 뒤로 경제학과 윤리학을 덧붙이고, 역사서술에 관한 것을 마지막권으로 결정-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크로체는 헤겔로부터 분별있는 태도를 가졌다고 주장했지만, ‘정신’이라 불리는 신(神)과 같은 존재의 지배적 역할의 강조에 대해서는 위험이 있었다.
그의 최초의 스승인 ‘비코’로부터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부분을 받아들였다. 비코는 한편으로 ‘인간 사회의 전형적 역사를 구성-인간의 철학인 동시에 여러 국민들의 보편사’‘인 새로운 과학’을 만들어냈으며, 역사연구의 중요성을 새로이 자각하도록 이끌었다. 역사와 철학적 방법의 결합은 크로체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두 번째 형식화 단계에서 크로체는 역사란 단지 예술의 한 형태 이상의 개념적인 것일 뿐 아니라 사실상 인간 지식의 총괄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역사에 개념적 요소가 되입되는 것은 철학을 통해서이며, 철학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역사에 대해 내리는 판단의 총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크로체는 헤겔처럼 역사에 철학을 부과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역사 ‘안에’ 역사의 방법론으로서 포함시켰다. 그러므로 철학자의 과제와 역사가의 과제가 동일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정의는 역사적 사고를 자연과학에 대한 실증주의적 예속상태로부터 딜타이 이상으로 철저하게 해방시켰다.
크로체는 자연과학도 사회과학도 외적으로 지각된 자료만을 다룰 뿐이고, 역사학은 내적인 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독일 관념론의 유산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지식의 본질이, 역사적 자료를 역사가 자신의 의식과 통합시켰을 때, 이때에만 자료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다시 살아나거나 경험되는 재창조의 과정이어야 한다는 “참된 역사는 동시대의 역사”라고 주장함으로써 관념론적 사고의 방향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크로체는 역사가가 자료를 종합하면서 하고 있는 일이 정확하게 무엇인가 설명하면서, ‘섬광’이라는 비유 이상의 것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것은 랑케의 관조라는 개념에서 한 걸음도 앞서지 못한, 크로체가 용의주도하게 배제하려고 한 관념론적 전통의 신비적 요소가 수사(修辭)의 형태로 몰래 숨어든 것이다.
4. 크로체:윤리-정치적 역사의 개념
1910년 크로체의 경력에서 공적 단계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상원의원이었고, 결혼을 하고 대가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크로체는 학자라는 국제적 공동체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교전국의 지식인들이 대중의 정열에 휘말려드는 경향과 맞섰다. 그러나 전쟁과 함께 크로체의 창조적 에너지도 쇠퇴가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탈리아 특유의 내전상황에서 크로체는 마지막 내각에 들어갔다. 1921년 6월 졸리티의 내각이 무너지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했다. 크로체는 파시즘의 등장으로, 처음에는 무솔리니의 통치를 조건부로 지지했으나 1925년, 타협의 여지가 없는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 후 20년 동안 파시즘을 반대, 국경을 넘어 외부세계까지 퍼졌다.
크로체가 ‘제2의 청춘’이라 불렀던 지적 변화와 성장의 과정에서, 크로체가 공적 활동 분야 에서 도덕적 결단을 내리게 되면서 그의 정치에 대한 추상적 개념은 더욱 날카롭게 변했고, 역사에 대한 그의 이론적 견해에도 영향을 미쳤다.
크로체의 원래 정치관은 반민주적이었다. 그가 독일의 철학적 전통, 헤겔을 존경한 것은, 그가 정치에서 ‘감상’을 비웃고 힘에 의거한 인간관계의 세계를 승인한 독일 이론가들과 견해가 같았음을 암시한다. 초기에 크로체의 견해는 동포인 모스카와 파레토의 견해와 가까웠다. 그러나 모스카가 자유주의적 제도를 옹호하자 크로체도 그를 따랐다. 그의 실질적인 지적 변모의 최초 조짐이었다.
2년 후, 「반파시스트 지식인 선언」을 통해 자기 나라의 권위주의적 체제와 분명하게 관계를 끊었고, 1925년부터 1929년까지, 거듭해서 독재 강화에 반대하는 발언했고, 1929년 이후로, 무솔리니가 바티칸과 협정을 맺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자, 저술, 칼럼, 반파시스트 지식인을 돕는 허다한 호의적활동으로 국한되었다.
크로체가 4권의 책을 쓴 시기(1925~1932년)에, 파시즘도 역사적 합법성을 가지려고 했고, 그 결과 새로운 강조점을 찾아내 사실을 왜곡하자, 무솔리니가 파괴한 자유사회의 가치들에 확고한 역사적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 성실한 자유주의적 역사가의 의무였다. 철학적 통찰과 초연한 태도로 주요한 역사를 쓰고, 그 과정에서 그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성숙하고 있던 역사적 사고의 쇄신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4권의 책이 계속 간행됨에 따라, 공통된 주제를 가졌다. 그 핵심사상은 인간의 정신은 자기 실현을 향해 진보한다는 것, 자연적‧ 인위적 장애와 끊임없이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역사의 주제에 대한 크로체의 ‘윤리-정치적’인 정의의 ㅡ 마지막 결론이었다.
이러한 말년의 이론적 입장에서 크로체는 보편적이면서 일반사에서 특징이 되는 병행적 계기-정치적. 경제적. 문화작 등의-의 단순한 나열을 피할 수 있는 역사 서술 개념 즉 통일개념을 인류의 ‘도덕적 삶’에 두었다. 인간의 모든 영역-예술. 종교. 윤리. 정치적 원리 등-에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나타내기 위해 ‘도덕적’이라는 말보다 ‘윤리-정치적’이라는 말을 선택했다. 그 결과는 전통적인 정치사에다 문화사로서 알려진 새로운 역사의 유형을 융합했다. 정치는 역사서술의 핵심적 주제를 제공한다고 크로체는 주장했다. 여기에 도덕적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정치적 설명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때, 새로운 종합이 스스로 자유의 관념주위에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인 일-자유가 인간역사의 본질-이었다.
이제 역사가의 과제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역사 서술이 필연적으로 갖는 ‘동시대적’성격이 더욱 분명해졌다. 역사연구는 현재 딜레마의 역사적 근원과 현실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범위를 밝혀줌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보다 합리적인 행동으로 만드는데 이바지할 뿐이다.(238p)
정치적 다파성과 관련된 역사에 이의를 제기, 문제의 핵심에 역사가가 내리는 판단의 유형은 ‘당파적 감정의 적용을 반영한 것인가?’ 또는 ‘보편적인 윤리적 원리의 차원까지 올라와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마지막 입장에 도달했을 때, 크로체는 그의 역사 서술 4부작을 완성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전야에 크로체는 그동안 회피했던 ‘가치’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초기 그는 ‘가치’판단의 기능을 ‘실제적’이라는 낮은 차원으로 추방, 역사적 판단의 기능을 추상의 영역에 한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파시즘의 대두와 자유주의적 의회체제의 붕괴에 직면, 논리적 판단과 실제적 판단의 경계선이 모호하게 되었다. 점진적으로 크로체는 분명한 가치체계의 옹호자로 변해갔다.(240p) 그는 ‘자유주의자’ 또는 ‘휴머니스트’라고 불렀다 ‘민주주의자’라는 말은 목에 걸렸다. 그러나 192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구분은 통용될 수 없었다. 자유주의적 전통과 민주주의적 전통은 완전히 뒤얽혀 하나를 옹호하는 것은 동시에 다른 것도 옹호하는 셈이었다. 그는 마침내 참된 이데올로기적 선구자들, 합리적인 것에 대한 존중과 관용, 인도적 해결의 태도가 추구하는 방향을 알게 되었다.
1943년 파시즘의 붕괴와 함께, 이탈리아 지도적 인물로 등장. 역설적이게도 파시스트 정권이 그 자리에 서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는 괴로움을 격고 있는 동포들에게 특정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도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문필활동만은 1952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했다.
크로체가 파시즘 붕괴 후, 결정적인 수개월 동안 확고한 지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경력과 영향력에서 핵심적인 문제를 보여준다. 그는 표면상의 명석함 배후에, 암초와 소용돌이가 있었기에 그가 하려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역사서술은 그의 역사이론과 일치하지 않으며, 이 이론도 반드시 수미일관하지 않았다. 크로체는 그의 윤리-정치적 개념을 적용하는 경우, 힘과 투쟁의 계기는 간과하고 동의가 이루어지고 지적인 지도가 확립되어 있던 시대에 초점을 두었다. 이처럼 동의의 계기와 자유의 갈망을 특색으로 하는 윤리적 문제에 초점을 국한함으로써, 또한 윤리적 추상 개념에 의해 지나간 시대의 의미를 규정함으로써 관념론적 기준을 어겼다. 과거는 ‘그 자체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중심 원리를 무시, 그 대신 이성과 자유라는 추상개념이 등장했다. 이렇듯 정신의 절대성에 호소함으로써 상대주의 위험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상대주의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직관에 의거한 것은 비합리주의에 이르기 길을 열어놓았다.
5. 트뢸치, 마이네케 및 독일적 가치의 위기
트뢸치는 1896년, 아이제나흐의 신학자대회에서 극적으로 지적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과학적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갖고 있었고, 훗날 마르크스주의적 사고에 대한 이해가 덧붙여졌다. 그는 ‘역사적 세계’에 매력을 느꼈고, 신학에 매력을 느꼈다.
트뢸치는 인간의 역사적 과거의 정신적 측면에 주의를 집중, 딜타이가 씨를 뿌린 곳에서 수확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정신적 의미를 갖는 문제로 되돌아가려는 대학생들의 새로운 갈망을 이용할 수 있는 동시에 역사적 세계가 지금 풍요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회복되어야 한다면 어디서 확고한 발판, 진리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기반을 찾아낼 것인가,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되살아나게 되었다. 트뢸치도 딜타이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세계 이상이 아닌 바로 그 ‘안에서’ 확실성을 발견하려고 했다.
마이네케의 길과 트뢸치의 길이 일치한 것은 반세기의 기간이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부터 같은 길을 따라 딜레마를 추적하고 있었다. 마이네케는 베를린에서 보수적인 프로이센 정통파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는 드로이젠을 통해 근대 독일사에서 프로이센이 섭리적 역할을 한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경이롭게도 그는 지적 독립을 지켰다. 그는 랑케에게 배운적은 없었으나, 독창적인 정신의 강조를 통해, 랑케의 모범을 회복하려 했다.
마이네케와 트뢸치는 딜타이가 말한 현대 세계의 특징인 ‘신념의 아나키’ 때문에 괴로웠다. 마이네케는 국가권력의 윤리라는 문제로서 이 위기에 직면했다. 권력국가를 역사적 과정 자체의 진정한 ‘정신적’창조로서 인정하는 동시에 칸트가 가르친 독일적인 도덕적 지상명령에 충실하려고 했던 랑케와 독일 역사학파의 후계자들을 어떻게 사람들이 따를 수 있을지, 윤리와 권력은 일종의 조화에 도달할 수 있는가? 또는 독일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 양자가 영원히 싸워야만 하는가? 마이네케의 심장은 양쪽을 위해서 뛰었다.
마이네케와 트뢸치는 자유주의적인 바덴 공 막스의 주변에 모인 온건주의자들에 가담했고, 전쟁 말기에는 독일 민주당 창설을 도왔다. 또한 전쟁중에 그들은 독일 특유의 관념론적 전통과 역사에 바탕을 둔 가치의 전통이 국민의 전쟁노력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독일의 지성인이 민족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 독일의 전쟁 목표에 윤리적인 면이 있다고 계속 주장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독일의 역사적 사고의 전통을 재건하려고 한 트뢸치와 마이네케의 노력을 우리는 독일의 패전과 18세기에서 유래한 영국-프랑스적 가치의 분명한 승리라는 문맥에서 보아야 한다.(2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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