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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국가(天下國家)22(1-4) 김한규 2022.2.27. 바다사자

 

22장 요동 역사 공동체

 

요동은 요하 유역의 일정 지역(만주, 동북이라 칭하는 지역과 대체로 일치), 중국과 한국 사이의 광역의 공간적 범주나 그곳에서 형성된 역사 공동체를 총칭(428).

역사공동체 종류 지리적 위치
동호계 오환, 선비, 거란, , , 실위, 몽고 요동 서부, 대흥안령 기슭
예맥계 , 요동 중부, 요하 중하류 유역의 대평원
숙신계 읍루, 물길, 말갈, 여진, 만주 요동 동부, 장백산맥과 연해주 일대

요동의 역사 공동체
요동역사공동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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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동체 통합된 역사공동체(430~431)
조선 맥인의 고대 국가 건립, 예인 공동체까지 통합
고구려 맥인의 고구려, 부여, 동예, 옥저 등 예인 국가 통합, 숙신계의 말갈, 동호계 거란 흡수, 지배. 나아가 백제, 신라의 한국계 인구까지 흡수, 지배
공동의 정치공동체 안에서 역사 경험 장기간 공유, 서로 융합되어 새로운 역사 공동체 형성
발해 숙신계 속말말갈 중심, 요동 재통일, 예맥계와 숙신계 융합 철저 진행, 예맥계 역사 공동체 자립성 상실, 세 계열이 하나의 국가 안에서 융합, 새로운 역사공동체
거란 요 건국, ‘발해인’, 동호계 습, , 실위, 숙신계 흑수말갈 병합하여 융합 촉진
여진 흑수말갈 성장, 금 건국, 거란, 발해, 여진 재 융합
몽고 금 멸망 후 새 주인공 됨, 거란, 여진, 몽고 등이 원 지배 체제 안에서 재융합
몽고화한 거란, 여진 외 요동의 중국인까지 융합의 요소로 포함
새 역사 공동체 만주 출현, 여진 중심 여러 군소 역사 공동체 융합
요동 단위의 새로운 역사 공동체 지속적 재생산 됨

 

1. 朝鮮

고고학적 시기의 요동사는 동호계에서 시작(431)

신석기 부하문화, 홍산 문화(채도, 대형 제단, 여신묘, 적석총군 등 고도의 문화), 소하연 문화 동호계 遠古 문화
청동기 하가점 상층문화, 하가점 하층 문화 분포와 대체로 일치, 하가점 하층문화하가점 상층문화燕國 문화 분포, 연대는 서주 시대부터 춘추 시대까지

문헌 상엔 예맥계가 먼저 확인, 맥은 주대 이래 독립된 역사 공동체로 중국이 인식(431). 진의 북방에 위치해 있다 요동 방면으로 이동. 춥고 건조한 자연환경으로 수렵과 목축으로 생활, 중국의 禮儀와는 다른 貊道가 존재, 다수의 국가와 종족적 갈래를 내포한 역사 공동체였고 대표적인 것이 조선(433)

위치 -연의 동쪽, 발해 북쪽 요동지역
- 전기 조선 중심부는 요동 중심부인 요하 유역, 후기는 대동강 유역, 연의 장군 진개에 의한 조선 영토의 침탈이 계기
-진의 통일 후 조선의 영역은 요동의 동남변, 압록강 이남으로 위축(435)
발전 -전국 중기, bc4~3에 영토 국가로 발전, 연과 경쟁(343)
-진의 동진을 두려워 한 조선이 자진하여 진에 복속
-진과 조선의 관계는 조회의 의무를 동반한 책봉-조공 관계 가능성
-진 멸망 후 연, , 조 등 지방의 중국인 피난, 요동과(435) 한국 방면으로 대규모 유망 조선의 정권 교체, 위만 조선 출현(‘사기 조선열전’, ‘위략’)
-중국인 유망민 집단과 조선의 맥계 원주민이 타협적으로 결합하여 형성된 국가였지만, 그 지배체제 안에는 진번과 임둔, 옥저 등 에계 국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만 조선은 한 국가가 복수의 역사 공동체를 아울러 지배하는 전형적 통합국가의 하나로 발전함.
-한과 외신의 약을 맺은 조선은 관시의 개통을 통해 중국의 철제 병기와 농기구를 수입하여 광역의 정복 국가, 농경 사회로 급속히 성장(437).
-한 무제의 침공으로 멸망, 4개의 군 설치요동의 중국 지배

요동은 비파형 청동단검을 표지 문물로 하는 청동문화를 이룸. 칼몬과 칼자루, 칼자루머리장식 등 세 부분이 따로 주조되어 조립되는 독특한 제조방식으로 중국 도씨검과 명확하게 구별, 북방식 고인돌의 분포지역과 대체로 중복(438).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세형동검이 고인돌과 함께 발견, 세형동검은 비파형 동검의 퇴화 양식, 요동은 하나의 독특한 언어권역 구성,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군현 설치 이후 중국 문화에 전염되어 고유 문화와 사회질서가 변질됨(’한서 지리지에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의와 전잠, 직작을 가르쳤다. 낙랑 범금에는 8조가 있었는데 중국 상인의 도둑질로 풍속이 각박해져 60여조에 이르렀다). 조선에 의해 지배되던 시기의 요동은(439) 이미 독특한 한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으며, 중국 등 주변 역사 공동체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역사공동체를 형성함.

 

2. 郡縣

한사군은 요동의 동부에 설치됨,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 진번, 임둔, 현도군은 조선에 예속된 진번, 임둔, 옥저 등 예인 사회에 설치, 요동 중서부의 요동군과 요서군을 합쳐 요동 전역이 한의 군현적 지배를 받게 됨. 군현적 지배란 군주에 의한 인민의 직접적·개별적 지배를 의미. 인두세, 요역, 병역의 개별적 착취를 통해 실현됨. 한의 변군은 직접적·개별적 지배체제가 실현되지 못하고 현지의 고유한 습속과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한의 법률도 일률적으로 관철되지도 못함. 또한 자립성도 극히 약했음.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구조적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임둔, 진번 2군의 철폐와 현도군의 이동은 원주민의 저항에 대한 소극적 대응이었음. 철폐지역엔 낙랑군 동부도위 설치(441). 그러나 후한 초에 철폐되고 소속된 영동 7현 예인 사회는 독립하여 독자적 정치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지배는 종식되었음. 낙랑군(442)과 현도군 등 군현적 기능 사실상 와해됨.

와해의 요인은 고구려, 부여, 옥저, 동예 등 예맥계 국가들이 성장하여 자립했기 때문. 부여는 예계 국가로서 현도군내에서 성장하여 이탈함(443). 한과 부여의 실질적 관계는 책봉-조공 관계. 고구려도 현도군에서 출현, 발전(444). 한과 책봉-조공 관계, 즉 한의 변군 체제 하에 있었음. 전한 말에 왕국 단계. 초기 고구려는 왕국으로 인정받았으나 여전히 내속관계였음(445). 실질적으로 책봉과 조공을 서로 교환하는 독립적 관계가 지속되었음에도 형식적으로는 군현적 지배 체제의 틀을 유지하는 것을 변군 체제라 함. 변군 체제는 제국 즉 황제가 통치하는 국가를 지향함에도 실현할 정치, 군사, 경제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을 때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호도할 목적으로 중국인이 고안해 낸 독특한 외교 체제였는데 고구려나 부여 등 비중국계 국가들은 변군 체제에 스스로 편입됨으로써 안정된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고 중국과의 문화적 교류와 경제적 교역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음.

한과 고구려의 내속 관계는 요동 중서부의 제3세력이 출현하여 양국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사실상 소멸(446).

첫번째 공손씨 정권, 450여년간, 요동의 중서부 장악, 위에 의해 멸망 창려, 요동, 현도, 낙랑, 대방 등 5개 군으로 쪼개 평주에 예속 시킴. 위 멸망 후 진에 계승
두번째 동호계 선비 모용씨 남하 후 중서부 점령(447)

 

3. 慕容 鮮卑諸燕

동호(대흥안령 기슭에서 목축과 수렵하는 공동체)의 거주지는 호(흉노 등 북방 초원 유목민 사회 총칭)의 동부, 연의 북쪽에 위치하여 춘추시대 산융(노합하, 대릉하, 난하 유역과 그 동북 지구에 분포, 하가점 상층문화)의 땅과 대체로 일치(447).

노합하,난하,대릉하 위치

전국 시기 흉노 묵특이 동호를 멸망시킨 후 동호의 후예는 장기간 흉노의 지배를 받았는데 전한 후기부터 위진남북조 시기의 오환(동호 멸망 뒤 오환산에서 살아 오환)과 선비(선비산에서 살아 선비)는 동호의 후예였음(448). 한 무제 시기 흉노의 지배를 벗어나 중국 변방으로 이동하고 한에 내속하여 변군 체제에 참여함(449). 오환은 후한 중기 변군 체제에서 이탈하여 왕을 칭함. 선비는 한 말에 강력해져서(450) 한의 동북 군현을 점유하게 됨. 원래 대흥안령의 중부, 북부에서 유목, 수렵생활을 하여 오환보다 늦은 후한 초부터 등장함. 오환의 남천을 따라 남천, 서진하면서 흉노, 정령, 오환, 안인 등과 혼혈되어 많은 새 부를 만듬(451).

남하한 오환은 한 말 조조 등에 의해 격파·흡수되어 점차 쇠락해짐. 서진 초 유주 북변 새 안팎에서 거주하던 오환은 선비 모용씨, 우문씨, 단씨 등으로 통합되어 점차 선비와 융합함. 모용수는 오환의 도움을 받아 휴연을 건립함. 위진 이후 오환은 기타 제족과 잡거하면서 잡호를 형성함. 오환은 雜夷의 범칭으로 사용됨. , 당 시대에 변군 안에서 활약하지 못하고 유민만 있었고(452) 요 태조가 토벌한 뒤 역사에서 사라짐.

산업 목축과 수렵 중심, 농경은 보조적이었으나 남천 후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도 함.
수공업 구리 주조, 야철, 도자기, 방직 등의 수공업은 대부분 읍수나 부락 대인이 장악했음. 일찍부터 호시를 통해 중국, 흉노와 상품을 교환함(453). 오환의 대인은 호시 통제권을 통해 중국 물자 유통과 분배를 장악했고 이로 인해 빈부 분화와 계급 분화가 더욱 심화되었음.
신분 대인은 선거되었고 계승하지 않았음. 후한 말에 선거제가 세습제로 대체됨(454). 상층은 대인과 소수, 하층은 부락 구성원, 노예이며 노예는 전쟁 포로로 충당됨. 전쟁의 목적 중 하나가 노예의 확보였음.
사회 조직 -, , 낙 등으로 구성, 1부는 수백, 수천의 낙(호의 의미)으로 구성, 매 장호 혹은 장락은 7~8구에서 10여 명, 약간의 낙이 모여 읍을 이룸.
-복수의 관행 지속.
-읍 두목은 소수라 하였고 선거함. 전쟁과 조공, 호시 등으로 권력 강화. 중국 국가들로부터 솔중군등의 작호 받음.
-읍락 이상에 부 혹은 부락. 부락 수령인 대인은 대권 가짐(455). 무기 제조, 수공품 제조, 무역, 진공, 전쟁 및 약탈품의 재분배 권한 장악. 왕이나 선우 자칭
풍습 -모계 사회 유풍, 결혼 시 남자가 여자 집에 머물고 부녀 존중. 약탈혼과 군혼 풍속 잔존. 전방제(형사취수)(456).

 

선비

산업 목축과 수렵 중심, 황하 유역 진입 후 농경 시작
수공업 한 말 선비 부족으로 도망간 한인들이 병기 제조를 가르침. 선비의 대인도 약탈과 호시 등을 통해 재부를 축적하고 노예를 목축과 수공업에 종사시킴.
신분 부락의 군장들은 선우를 자칭했고 가한이라 부름.
사회 조직 -, 읍락, 부 등으로 구성. 읍에는 소수, 부에는 대인이 통솔.
-대인의 선거제, 세습제로 대체되어 계급 분화와 사유제 강화
-후한 말까지 선비 고유의 사회 유풍 잔존
풍습 -여자 약취, 소나 양에 의한 빙례, 처가 복역, 전방제(형사취수), 결혼 전 여자 성생활 자유 등. 결혼 때 곤두(주위 머리 깎고 정상부의 머리만 남겨서 뒤로 땋아 내리는 모양, 탁발 선비의 색두도 변발이었음). 무술 숭상, 시신 염해서 관에 넣고 개, , 의복 등 순장, 일반적으로 토장함.
-언어와 습속이 오환과 동일. 문자 없고(458) 중원에 들어간 뒤에도 선비어 통용. 효문제에 의해 선비어 사용 금지, 북제 북주 시기에 선비어 다시 성행.

한대 요동과 한반도

단석괴(선비족 대추장) 죽은 뒤 선비 연맹 와해(459). 선비 제부는 한 말 위 시기 조공, 책봉, 호시 등을 통해 중국의 국가와 평화 관계 혹은 약탈과 전쟁으로 충돌하기도.

모용부는 선비의 한 가지(460). 단석괴 시기에 모용은 중부 대인의 하나. 처음에는 부락 대인의 이름이었으나 뒤에 이것이 씨가 됨. 위 초에 모용외의 증조부인 막호발이 부락을 이끌고 요서 바닷가에 옴. 사마의를 따라 요동의 공손연을 정벌한 공이 인정되어 솔의왕으로 책봉, 손자 섭귀 때 요동 땅으로 옮김. 모용외가 계승하여 부여를 멸망시켰고 남하하여 도하의 청산으로 옮김. 초기 유목이었으나 294년에 대극성으로 옮긴 뒤 농업 정착 생활 시작함(461).

대극성 위치

전진의 부견에게 항복, 전진 멸망 후 선비 모용씨가 후연, 서연, 남연 등을 건립했고 선비화한 한인 풍발이 북연을 건립함(462).

단씨는 동부 선비의 한 가지, 위진 시기 번성함.

우문씨는 흉노에서 나옴(464). 후에 북주를 건립함.

탁발씨는 선비의 가장 동북에 있는 선비의 별부. 세차례 근거지를 남쪽으로 옮김(465). 398년 도무제가 국호를 위로 정하고 평성에 도읍을 정하면서 황제를 자칭, 북위를 건립함. 북방 일대를 통일하여 오호십육국 시대를 종결 짓고, 유송과 더불어 남북조 시대를 염(466). 효문제 때 균전령 반포, 租調力役제 개혁, 三長(5-25-1/인장, 이장, 당장) 설립, 백관봉급제(467) 등을 통해 탁발 부락 조직 타파,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 낙양 천도로 북방 회귀 끊고 한인과의 통혼 적극 장려(468). 전통 제사 체제를 모두 중국식화함. 말년부터 계급 모순과 종족 모순 극심해짐. 평성 일대의 육진에 남아있던 선비 탁발부인은 지위가 현저히 격하되어 효문제 사후 523년 육진의 난이 일어남. 이 반란에 편승하여 산서 북수용천의 계호 추장 이주영이 남하하여 북위 근간 무너뜨림. 53412148년만에 멸망하고 업의 동위와 장안의 서위로 분열, 다시 북제와 북주로 이어짐.

수 당 시대에 탁발 선비도 완전(469)히 한화함. , 당 이래 선비는 정치 및 종족의 실체로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후예들은 양조에서 중요한 지위를 점했음. , 당의 건국자인 양씨와 이씨가 선비화한 한인, 모계 처계는 한화한 선비인, 문무 대신들 106,7이 대북의 자손이었음.

선비 일부는 서쪽으로 가 별부 이룸. 하서 선비, 농서 선비, 토욕혼 등이 있었음. 서부 선비가 세운 국가들은 대부분 강인과 저인으로 구성되어 있음(470).

하서 선비 하서주랑과 황수 유역의 독발 선비
농서 선비 감숙 농산 이서와 황하 이동에서 활동한 걸복 선비
토욕혼 , 강 집단 거주지역에서 활동한 모용 선비의 일파

 

4. 濊貊高句麗

선비 활동 시기 요동의 동부에서는 고구려, 부여, 옥저, 동계 등 예맥계 국가들이 발전(471).

고구려 -도읍지: 흘승골성(오녀산성) 국내성 환도성(209)
-큰 산과 깊은 계곡, 음식을 아껴 먹는 습관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사자,조의,선인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하호들은 양식, 물고기 소금 공급
-감옥이 없어 번죄자가 있으면 제가가 모여 평의하여 사형, 처자는 노비로 삼음
-노래와 춤을 좋아함. 부경이라는 창고가 집집마다 존재. 10월 제천행사(동맹)
-비단 의복, 금 은 장식,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씀(471). 서옥제.
-초기 한의 변군 체제에 있다 강성해진 뒤 독립된 형세 취함. 후한과 고구려는 책봉과 조공 또는 침공과 반격을 교환. 위 관구검의 공격으로 환도성 함락(472).
-선비 모용씨와는 요동의 중부를 치열하게 다툼. 모용황이 대거 침공한 위 전연과 책봉-조공 관계 수용했지만 서진 멈추지 않음. 최종 고구려의 승리
-광개토왕 대 요동 중심부 차지한 후 멸망 때 까지 점거함. 중국 국가 정식 승인(473).
부여 -북위 효문제 493년에 물길에 멸망되었으나 실질적으로 훨씬 전에 고구려에게 병합되었음(474).
-예인에 의해 건립. 군왕이 있었으나 왕권이 미약하고 불안정. 관직은 마가,우가,저가,구가, 대사,대사자,사자 등. 도가 있고 도의 읍락은 호민이 관리, 하호가 노복이 되어 호민에 예속됨. 형법은 엄격. 계급이 엄격하고 순장 풍습(475).
-농업 위주, 목축과 수렵으로 보완. 어업에도 종사. 의복은 백포, 음식 먹을 때 조두(위가 편편한 나무 그릇) 사용, 문자는 없었음. 영고(은력 정월) 제천행사. 일부일처제, 형사취수 풍습. 곽은 있으나 관은 사용 안함. 부여왕의 장례에는 한으로부터 받은 옥갑을 사용함.
-현도군에 속했으나 한 말에 요동군에 속함. 서진 시기 선비와 고구려 사이에 끼어 점차 쇠약해짐(476). 전연 모용황의 공격으로 왕 등이 포로가 되어 곤욕을 치뤘고 전연 멸망 후 전진과 후연의 세력권에 놓임. 광개토왕의 공격의 받은 후 고구려의 통제 안으로 들어감. 물길에 의해 멸망되고 유민들은 고구려에 투항함. 일부는 속말말갈의 일부가 되어 발해국 부여부의 거주민이 되었고 일부는 북으로 나하 유역으로 가 두막루라 칭함.

고구려 수도

고구려의 통합 대상에는 예맥계 외 숙신계, 동호계도 포함됨. 동호계의 거란도 고구려에 기탁하기도 했지만 주로 중국과 돌궐에 예속됨. 숙신계의 경우 고구려에 예속된 경우가 더 많았음(477).

고구려는 남방 한국의 일부를 병합하여 韓系 인구를 대거 수용함. 요동 중심부를 장악한 뒤 평양 천도하여 잦은 전쟁을 통해 한국의 일부를 국가 성분의 하나로 수용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맥인에 의해 건립되었지만 발전과정에서 예인, 숙신인, 한인 들의 인구와 주거지를 포섭하여 거대한 통(478)합국가로 발전함. 통합 지역은 요동의 서부 일부를 제외한 요동의 전 지역을 포괄했기 때문에 스스로 요동인임을 자처했고 주변국도 요동국으로 인식하게 됨. 고구려는 요동에서 출현하여 요동의 대부분을 지배한 대표적인 요동국가였음(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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