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5.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와 발해말갈(渤海靺鞨)

2백년 이상 요동의 중동부를 지배했던 고구려는 맥인(貊人)을 중심으로 예()와 숙신(肅愼), 동호(東胡), () 등 주변의 여러 역사 공동체들을 통합하여 동복 아시아에서 독자적인 국제사회를 형성, 주도했다. (479p)

6세기 말에 이르러 중국이 재통일되자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다시 형성되자,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은 매우 불안정하게 되었다. 수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 강화되자 동아시아에 다른 국제사회가 병존하는 것이 용인되지 않았다.

대업(大業) 7(611) ()가 진()을 평정한 뒤로, 수와 고구려는 곧 전쟁관계로 돌입했다. 수 양제의 세 차례 걸친 고구려 친정(親征)은 곧 국가의 패망으로 이어졌다.(480p)

수를 이어 중국을 다시 통일한 당은 고구려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되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방 유목제국까지 굴복시킨 태종시기 중국인들은 두 국제사회의 통합을 추구했다. 마침 고구려 국내에서 막리지가 그 군주를 죽이는 정변이 일어난 틈을 타서 정관(貞觀)18년에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직접 침공 이후, 지속된 산발적인 공격 중 신라와의 연합공격으로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9개의 도독부와 42개 주와 100개의 현을 만들었으며,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두고 통할케 했다. 고속(古俗)을 인정하는 기미부주 였으나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채, 758년에 요동밖에서 소멸했다.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90여년 간 요동은 중국에 의해 통치되기보다는 발해(渤海)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다.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 요동을 지배한 전형적인 요동 국가의 하나다.(482p) 발해는 숙신계의 말갈인이 건립한 국가로 발해말갈이라 불렀다. 발해의 영역은 전성기의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확보했다.(구당서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중국과 한국 학계의 논쟁의 근거가 된다.) 발해와 당은 기본적으로 당의 황제로부터 발해국왕 홀한주도독으로 책봉받고, 조공을 교환하는 관계였다. 책봉과 조공관계는 불평등하나 독립적인 국가 간의 외교관계였으며, 홀한주는 형식과 실제가 괴리된 전형적인 기미부주의 하나였다.(486p)

발해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국제적 위상을 신라와 다투었다. 두 나라 모두 당나라 인질인 숙위를 보냈고, 숙위학생을 태학에 입학시켰다. 외국인이 보는 빈공과에 응시, 급제 순위를 신라인과 다투었고, 당에 조헌할 때 사신이 신라사신보다 위에 있게 해달라 청하였다. 그러나 당에 대한 자립성은 발해가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컸다.(487p)

후에 한국사학계가 남북국론으로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서술하나(488p), 전통시대 한국인의 역사의식 상에서 발해는 한국의 국가로 인식된 적이 없었다. (490p)

 

6. 거란(契丹)과 요()

발해는 거란에 의해 멸망. 그 국민 대부분이 거란인이 되었다.

거란은 모용선비가 요동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뒤에 동호계의 전통적 공간에서 새로 출현한 새로운 역사공동체였다. 거란(契丹)이란 말은 554년에 만들어진 위서에서 처음 발견되지만, 거란의 기원에 대해서는 신당서219 “거란은 동호종으로, 그 선조는 흉노에 의해 격파되어 선비산에서 살았다. 원위때에 스스로 거란이라 불렀다”, 요사에서는 선비의 무리가 흩어져 우문씨가 되었는데, 혹은 고막해가 되기도 하고 혹은 거란이 되기도 했다”,

거란과 뿌리를 같이하는 역사 공동체로서 해()와 실위(室韋), 지두간(地豆干), 오락후 등이 있다.(494-495p)

거란은 북위에 매년 조공했다. 효문제 태화 3(479)에 유연의 침략을 받아, 수레3천대와 무리 만여 명을 이끌고 내부(來附-와서 복종함)할 것을 요청했다. 553년 북제의 공격을 받아 인민 10만 명과 가축 10만 마리를 겁탈당했다. 수나라 초에, 수나라에 내부하였다. 이후 요서 북쪽 1백리 홀신수에 의지해서 거주했다.

거란국지에 의하면, 처음 거란은 8부가 있었는데, 부족 가운데 강대한 자를 대하씨라 했다. 그 뒤 8부로 나눠졌고, 우두머리를 대인이라 불렀다. 그 중 한명을 왕으로 삼았다. 3년에 한 번씩 차례로 교대했다. 재앙이나 질병이 있거나 목축이 쇠퇴해지면 8부가 모여 의논해서 다른 사람을 세웠다.

대하씨 시기에는 돌궐에 내부했으나, 정관 2(628)에 당조(唐朝)에 귀부했다. 당은 거란 거주지에 송막도독부를 세우고 10개 주를 관할하게 하면서, ()씨성을 하사했다. 측천무후시기에 그 추장 이진충이 이탈, 개원 3(715)에 당조에 다시 귀부, 개원 25(737)에 당을 배반하고 자립했으나 패퇴하여 막북으로 도망, 요련씨를 수령으로 하는 부락연맹을 결성했다. 천보 4(745)에 당조에 의해 송막도독 숭순왕으로 책봉, 회홀이 돌궐을 멸하자, 회홀의 통치하에 놓였다.

당이 쇠퇴하과 회홀이 멸망하자, 거란 질랄부의 아보기가 권력을 장악(916), 칭제하고 국호를 거란으로 정하여, 연맹체제를 종식, 왕조를 건립했다. 황수 연안 거란 고지(故地-전에 살던 곳)에 황도를 건설하고, 920년 문자를 창제하고 법률을 제정했다.

아보기는 916년에 돌궐과 토혼, 당항, 소번, 사타, 제부를 직접 정벌하고 그 추장과 156백호를 포로로 잡았다. 926년 부여부를 함락시키고 발해왕의 항복을 받음으로 5천리의 땅과 수십 만의 병력을 얻었다.

926년 아보기가 병사하고 야율덕광이 제위에 올랐다. 후진의 석경단이 부례로 섬길 것을 약속하여 제위에 올렸으나 그의 아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정벌 멸망시키고, 947년에 국호를 대요로 고치고 중국을 직접 점유했다. 1004년에 송을 압박하여 전연의 맹을 맺어, 거란의 소태후를 숙모로 섬기고 매년 은 10만 량과 비단 20만 필을 보내기로 했다.

거란은 연운 16주를 점령, 모든 관제를 남북 이원체제로 전환했다. 황도를 상경으로 유주를 남경으로 삼고, 남경은 동경이라 했다. 국제(國制)로써 거란을 다스리고, 한제(漢制)로써 한인을 상대했다. 사시날발(四時捺缽) 제도로 지역의 특성에 따라 통치를 실행했다.

1191년에 금나라 장종때에 거란 문자 사용을 폐지했다. 거란은 자기의 원시 종교를 갖고 있어, 하늘과 태양, 산 등에 제사를 올렸는데, 목엽산에 제사드리는 것이 중요했다.

 

7. 여진(女眞)과 금()

숙신계 공동체는 서주(西周)시대부터 문헌에 이름이 올랐다. 상서무왕이 동이를 정벌하니 숙신이 내하했다”, 산해경에서 대황중에 불함이라는 산이 있는데, 숙신지국이 있다”, 좌전에는 무왕이 상나라를 이겼을 대 숙신, , 박은 우리의 북토라’” 하니, 숙신은 선진 시대부터 중국의 동북방에 위치한 공동체의 하나로 인식되어 있었다.

숙신은 한 대(漢代)부터 진대(晉代)까지는 읍루, 북조에서는 물길 혹은 숙신이나 말갈이라 칭했다. 숙신씨전에 숙신씨는 불함산 북쪽에 있고, 부여에서 60여 일 떨어진 곳에 있다. 동으로는 큰 바다와 닿고, 북으로는 약수까지 미친다.”고 했다. 삼국지에 의하면, “산이 많고 험준했다. 읍락마다 대인(大人)이 있었다. 혈거 생활을 영위, 기후는 추워서 혹독했다. 활을 잘 쏘았다. 적옥과 담비 가죽이 생산되었다”, 한대(漢代)에는 부여에 신속(臣屬)하고 조위 시대에 부여의 통제에서 벗어나 조위에 호시(楛矢)를 바쳤다.

숙신과 읍루, 물길, 말갈의 계보를 이은 숙신계 공동체가 곧 여진이었다. 그리고 거란의 요를 이어 요동과 중국의 새로운 통합 국가로 등장한 금()은 여진 중심의 요동인에 의해 건립되었다. 금사1세기에 의하면 금의 선조는 말갈씨에서 나왔다. 말갈은 물길이었고, 물길은 옛 숙신의 땅이았다. 원위(元魏)때에 7부 속말부, 백돌부, 안거골부, 불황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다. 수나라때 말갈이라 칭했고, 당나라 초기에는 흑수말갈과 속말말갈이 있었으나 5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부속했고, 성이 대()씨였다. 뒤에 발해가 되었다. 흑수말갈은 숙신 땅에서 살았는데, 고구려에 부속, 고구려를 도와 당태종에 저항하다 안시에서 패했다. 당은 그곳에 흑수부를 설치, 도독, 자사로 삼았다. 도독에게 이()씨 성과 헌성(獻誠)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그 뒤 발해가 강성하여 흑수가 발해에 역속(役屬)되었고, 오대에는 거란이 발해의 땅을 빼앗으니 거란에 부속했다.”

흑수말갈은 요대에 여진 혹은 여직이라 불렀다. 요는 여진을 책봉-조공 체제를 통해 신속했다. 요 말에 완안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금이라는 요동국가를 세우면서 거란의 기속에서 벗어났다.

아골타가 천경 4(1114)에 병을 일으켜 여진을 통합, 수국 원년에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여진의 고유한 사회조직을 이용해 맹안모극(猛安謀克)이라는 독특한 군사 체제를 갖추었다. 발해군도 맹안으로 만들었는데 여진과 발해가 같은 역사공도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맹안모극 체제를 기반으로 정복 활동을 전개, 요동과 중국을 아우르는 통합국가 건립했다.

 

8. 몽고(蒙古)와 원()

숙신계의 여진이 요동을 통일하고 중국의 일부까지 병합하여 건립한 금은 1234년에 몽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다. 몽고는 통호계였다. 금을 멸망시키고 중구그이 화북을 침탈하고 통합국가 원()1271년에 건립했다. 1279년에 남송을 멸망시켜 강남까지 아우름으로써 요동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전역까지 통합했다.

몽고의 기원에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동호계 몽올실위라는 의견이 보편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초한(楚漢)교체기에 동호왕이 흉노 묵특선우에 의해 격파, 살해되고 나머지 무리가 도주하여 선비가 되고, 오완이 되었으며, 실위, 거란이 되었다. 몽올실위는 북쪽 망건하(흑룡강) 부근에 있었다. 지금은 몽고라 칭한다.

몽고의 고유한 의식주 습속과 혼례. 장례 등 풍속이 중국. 한국뿐 아니라, 요동의 다른 역사공동체 습속과 구별되는 특이한 것이었다. 털로 짠 모직물이나 가죽 등을 의복 재료로 사용했고, 남자는 파초를 깎고, 여자는 고고(固姑)를 얹었다. 육식을 위주로 했고, 주거생활은 장막안에서 이루어졌다. 여름에는 높고 시원한 곳으로, 겨울에는 따뜻하고 땔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다녔다. 친모. 친딸. 친누이가 아니면 그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었다. 고유한 신앙으로 산만교(샤머니즘)를 발전시켰다. 영혼불멸을 믿고, 영혼을 인격화하여 영혼의 우상을 숭배했다. 종교활동은 점복과 도신, 제사 등이었다. 13세기 이후 티베트 불교, 라마교가 몽고로 전입해 들어갔다.

원대의 요동은 몽고 황실의 주요한 봉지로 활용했다. 쿠빌라이가 즉위하여 중통 원년(1260)에 요동을 공제하게 했고, 요동제왕을 통제하려 했다.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요동 전역이 이 전역에 휩쓸려 들었다.

내란을 계기로 행성체제를 요동에 확립했다. 요양행성을 세우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했다. 원대에 요동은 몽고 제왕의 봉지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통적으로 요동을 분점하고 있던 거란이나 여진, 한인 등이 요동을 그대로 분점하고 있었다. 요가 멸망한 뒤에도 거란은 군소 역사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거란 집단 가운데 가장 강력한 야율유가는 몽고에 내부했다. 지원 28(1291)에 거란인 내부자와 개원, 남경, 수달달 등 3만인에게 소와 같은 가축과 농기구를 지급하게 했고, 원대의 요동 거란인이 농경생활로 정착, 이후부터 거란은 역사 문헌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원대의 여진은 금나라 때 중국에 들어가 있던 여진과 요동에 잔류해 있던 여진 두 부류가 있었다. 요동에 잔류한 포선만노 세력은 몽고에 대항, 원 태종 5(1233)에 만노를 사로잡자 요동이 평정되었다. 요동의 여진세력은 몽고에 위협적인 존재로, 여진과 거란뿐 아니라 漢人, 韓人도 상당한 규모로 상존했다.

요동의 여진과 거란, 한인, 고려인 등은 별개의 군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원은 고려인이 통일적 체제하에 놓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고려군민총관부를 이원화하여 의도적으로 분리, 심양왕과 고려왕 권력투쟁이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