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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마키아벨리의 후계자들(파레토, 모스카, 미헬스)
이 마키아벨리 학파의 이탈리아 및 이탈리아계의 대표적 인문들-파레토, 모스카, 미헬스는 20세기 초의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꼽히지 않는다. 폭넓은 상상력과 사회사상의 범주에 대한 세련된 이해라는 면에서 그들은 프로이트나 베버나 그들의 동포인 크로체와 같은 자리에 설수 없다.(268)
파레토와 모스카는 반형이상학적이고 매우 실제적인 경향을 가졌다는 점으로 이탈리아 전통의 참된 계승자들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문필상의 교우관계를 지속했다. 파레토는 『일반사회학』 - 오직 경험으로부터만 이끌어낼 수 있는 일반 이론을 가지고 소렐이 다른 분야에서 하고 있던 일을 성취하려고 노력 했다고 말했다. 미헬스는 파리에서 『폭력론』 발간 직전에 소렐과 알게 되었고 생디칼리슴 지도자의 힘에 대한 견해와는 달랐지만 이데올로기적 수세에 대한 소렐의 무자비한 비판에는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269)
메헬스는 20세기 처음 10년 동안 프랑스와 독일의 사회사상을 접촉시키는 희귀한 인물이다. 미헬스는 그의 직전 세대의 거의 모든 사상가들로부터 중요한 여러 가지 요소를 끌어내서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정연한 이론을 정리했다. 그렇기에 미헬스는 20세기 초의 지도적 지식인들 중에서 가장 코즈모폴리턴적인 인물이었다.(270)
미헬스- 이탈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교직
모스카- 교수-> 하원의원-> 상원의원-> 장관
파레토와 미헬스는 사회주의를 통해서 사회학에 도달했다. 모스카는 신마키아벨리주의 트리오 중에서 유일하게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초연했고 이 이론에 대해서 끊임없는 적의를 보였다.(270)
파레토와 미헬스는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를 스승으로 인정하게 된 것은 프랑스 계몽주의의 희망적인 이론에 실망한 다음이었다. 파레토와 미헬스는 대의제도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후에 보다 비판적이고 준파시즘적인 견해를 착실하게 전개시키고 있었다.(271)
파레토와 모스카 그리고 미헬스는 사변적 사회학자로서, 치자와 피치자의 엄격한 구별, 통치에서의 힘과 간계의 필연적 역할 및 모든 정치집단과 정치제도의 필연적 타락을 주장한 점에서 마키아벨리주의자였다.(272)
파레토는 현대의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는 정치운동이란 능동적 소수자가 하는 일에 지나지 않고 인류의 대부분은 그들을 통치하고 있는 정부의 형태가 아무리 ‘민중적’ 이더라도 권력투쟁의 수동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중심 원리로 거듭해서 되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지배적 소수자의 개념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밝힌 사람은 모스카이다. 모스카는 『통치이론』에서 파레토가 동일한 사상에 도달하기 거의 20년 전에 ‘정치계급’의 이론을 공식화했다.(273)
이 세사람은 통치적 소수자의 이론에는 모두 동의하면서도 강조점은 각기 달랐다. 모스카의 공식화는 최초이고 일반적이었고 『통치이론』, 『정치학 원리』에서는 ‘민중’의 대표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사실은 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자신의 입후보 자격을 강요하여 ‘스스로 자신을 선출’ 하는 상황 이라고 보는 견해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274)
미헬스는 『정당사회학: 근대 민주주의 과두적 경향에 관한 연구』에서는 엘리트라는 개념을, 그동안 성장해왔고 그가 잘 알고 있는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에 적용했다. (275)
파레토는의 경우는 미헬스에 의해서 엘리트 이론은 결국 더욱 일반적인 가설의 종속적이고 보조적인 요소로 낮추어졌다. 세 사람 중에서 파레토만이 그들 모두가 동의하고 있던 정치적 조작이라는 사실을 넘어서서 대중 지도의 요소를 제공하는 인간의 기본적 충동들을 밝히려고 했다.(275)
파레토, 모스카, 미헬스 중에서 자료를 가장 조심스럽게 정리하고 그의 저술이 과학연구의 현대적 기준에 가장 접근했던 사람은 미헬스였다. 미헬스의 『정치원리』 최종판은 지금도 광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치이론을 명석하고 우아하고 고전적인 형태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 진영에서도 지지자를 획득해왔다.(276)
파레토의 지적 기원을 돌이켜보면 초기 교육에서는 자연과학과 고전연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역사와 신화로부터 그의 『일반사회학』에 생기를 준 기묘한 예들을 끌어낸 다음에 고전연구로 되돌아갔다. 그는 자연과학과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받은 훈련과 기술자라는 원래의 직업 때문에 그는 수리경제학, 사회주의 비판, 마지막으로 체계적 사회학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통해 기술자적 기질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277)
파레토는 경험적 연구자로서 일할 만한 재주가 없었다. 그는 책에 매달리는 하자로 책을 고루 갖추어 놓은 서재에 갇혀서 이 안전한 피난처로부터 마치 올림포스 산에서 내려다보듯이 세계를 보았다. 그는 과학적인 연구나 현장을 조사할 생각이 없었으며 이론 형성은 광범한 독서에 두는 것으로 충분했다. 파레토의 생애를 통해 본다면 경제학에서는 파레토는 자유주의자였고, 언론과 교육의 자유를 주장한 점에서도 자유주의자였다.(278)
파레토는 인도주의자에 대해서는 가장 날카로운 비웃음을 퍼부었다. 그는 인도주의자들을 절멸해버리는 것이 마땅한 ‘유독한 동물’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그가 특히 증오하는 자들의 명단에는 곧 ‘금권주의적’ 민주주의의 선동정치가들과 수혜자들이 포함되었다. 여기서 파레토의 심리적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파레토는 공적 도덕관에는 매우 엄격했으나, 개인적 도덕관에는 경솔할 만큼 관대했다.(279)
파레토는 논리적 편견을 갖고 있지 않다고 공언했으며 『일반사회학』의 첫 머리에서 그는 ‘파생물’의 ‘실험적 진리’ 라는 문제는 제쳐놓고 그 사회적 유용성을 기초로 이를 판단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가장 불합리한 실천이나 신념도 유용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파레토는와 비논리적인 것의 만남에서 지배적인 것은 그의 비웃는 태도였다. 그는 역설적인 입장으로 정치와 종교 문제에 대해 완전한 불가지론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가장 강력한 편견을 주장했다.(284)
파레토는 시대에 뒤진 철학적 입장을 완고하게 고집함으로써 과학자로서도, 사변적 사상가로서도 위대해질 수 있었던 자질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러한 불행한 상황은 자신도 어느 정도 느꼈으며 『일반사회학』에는 한 줄기의 방법론적 패배주의가 줄곧 나타난다.(285)
그는 『일반사회학』의 마지막 부분에서 파생물은 그늘진 존재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원래 여섯 개였던 잔여는 실제로는 두 개로 줄어들었다. 파레토는 정치생활의 보다 광범한 측면에 대한 대조적이면서도 상보적인 두 태도가 역사를 통해 교체된다는 이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의 인정 역시 마키아벨리의 유신이다. ‘사자’ 와 ‘여우’- 이 고전적인 대조는 파레토의 원래의 발상이 매우 단순한 ‘직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286)
잔여 1 - ‘결합의 본능’-은 여우의 비유이다.
잔여 2 - ‘집합체의 지속’-도 사자의 상징을 설명한다.
*파레토는 잔여 1과 2중 어느 것이 우세하냐에 따라 두가지 유형의 사람들로 분류된다고 보았다. 잔여 1이 우세한 사람은 여우형으로 선전과 경제적 조작을 통해 우회적이고 교활한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한다. 잔여 2가 우세한 사람은 사자형으로 충성심 ∙ 전통주의 ∙ 직접적인 행위로 공개적인 힘을 행사하여 권력을 유지한다.
파레토가 말하는 ‘집합체의 지속’은 보다 미묘한 복합체로, 보수적 이상, 혁명적 열정, 종교적 열광 등 다양한 현상을 한 제목 밑에 묶어 놓은 것이다. 이것을 인간사회의 영속적 요소라고 규정한 것은 아마도 현대의 정치적 사색에 대한 파레토의 유일하고 가장 위대한 기여일 것이다.(287)
2천여 년의 서양사를 통해 이러한 두 가지 태도의 변천을 규명한 것이 파레토의 마지막 업적이었다. 각 잔여가 어느 정도로 역사상의 성공적인 엘리트들의 특성을 이루고 있는가, 그리고 낡은 지배계급에 새로운 요소를 점진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가 어느 정도로 나타났는가 하는 데 대한 평가, ‘사회적 균형’에 대한 이러한 평가로부터 파레토의 신랄하고 눈부신 논평이 나왔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시대에 대해 반동의 차례가 왔다고 굳게 믿었다. 서구세계는 ‘선동적 금권정치’ 주기의 마지막에 이르렀고 여우들은 거의 무절제하게 날뛰고, 지배계급이 균현을 회복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사자를 키워내지 못한다면 하층계급 사이에 이미 나타난 사자들이 현재의 엘리트들을 역사의 쓰레기더미 속으로 쓸어버릴 것이라고 주장했다.(288)
신마키아벨리주의자들은 어떤 입증할 수 있는 의미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이탈리아에서의 파시즘 대두에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신마키아벨리주의적 사조는 결국 무솔리니가 이익을 얻게 되는 반의회주의적 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는 견해를 되풀이할 수 있다. 파레토는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이 새로운 통치를 그의 예언의 실현이라고 인정했다. 또한 무솔리니가 제공한 상원의원직을 실제로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10개월 동안 파시스트 체제에 대해 적어도 조건부 지지자로 꼽혔다.(289)
신마키아밸리주의자 트리오 중에서 가장 독창성이 없었던 미헬스는 스스로 아주 쉽게 파시즘 체제에 적응했고, 본인의 저서에 존경의 어조로 무솔리니의 통치를 언급했다. 그러나 모스카의 경우에는 무솔리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끝에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모스카는 무솔리니가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는 상원의 동료인 크로체와 함께 더욱더 난폭해지는 지도자의 권위에 의연하게 맞섰지만 반파시스트 투쟁에 눈에 띄는 활약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1920년대 말에 이탈리아에서는 거의 홀로 무솔리니 통치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소수의 상원의원들 중 한 사람이었다.(290)
파레토와 모스카는 회의주의자였다. 그러나 파레토의 경우 회의주의는 정치적패배의 쓰라린 환멸을 반영한 것이었고, 모스카의 경우에는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이 타고난 인간성에 대한 세련된 이해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계몽주의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파레토의 지배적인 의식은 18세기적 유산의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측면이라면 모스카의 경우에는 인간의 모든 제도를 냉정히 검토하고 인류의 실패로부터 어떻게 하면 미래의 세대들이 그들에 앞선 세대들보다 약간이라도 덜 불행하게 살도록 할 수 있는가를 배우려는 용의였다.(292)
보론 : 알랭과 급진주의의 재선언
알랭은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자유사상가이자 확고한 반교권주의자임을 공언한 진정한 종교인이다. 이 사람은 세상에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괴물이다.(292)
알랭은 프랑스 급진당의 양심의 수호자로 자처하던 그는 불가피하게도 이론적인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선거민의 권리를 옹호했고 관료의 권력과 맞서 싸웠으며 파리의 부패를 불신했다. 요컨대 소박한 ‘청렴파’로서 파레토가 비웃고 모스카가 미소를 지은 모든 일을 대표하고 있었다.(293)
알랭은 시민- 또는 하원의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항구적인 관료의 행동을 ‘통제’ g는 것이다. 불의와 억압에 대한 확고하고 끊임없고 지치지 않는 저항, 이것이 알랭의 정치적 신조의 핵심이었다.(294)
알랭은 소렐과 마찬가지로 파레토나 모스카가 고찰한 여러 가지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렐이나 파레토의 냉소적 태도와 모스카의 어리석음을 점잖게 관용하는 태도에는 진심으로 반대했다. 대단한 낙천적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회의주의로 흐르지도 않았고 파멸적인 사회적 항의에 뛰어들지도 않았다.
신마키아벨리주의자들은-마키아벨리처럼-정치생활을 통치자의 관점으로 보았고 알랭은 피치자의 입장에 섰던 부분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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