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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베버의 사회학 - 실증주의 및 관념론의 극복
서론: 뒤르켐과 실증주의의 잔재
뒤르켐은 실증주의 경향이 가장 강했으며 차츰 관념론적 관점으로 발달해 나갔다. 궁극적인 함축은 ‘정신적’임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은 실증주의적이고 기계론적이기도 했다(298). 그가 사회학자가 된 이유는 보다 구체적이며 직접적으로 사회적 현실과 관계되는 학문을 수립하고 싶었고 제3공화(299)국의 도덕적 강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욕망에 있었다. 민주주의적·인도주의자였는데 그는 참된 계몽주의자였다(300). 평생 프랑스 정부의 충실한 공무원으로(299) 프랑스 사회과학 연구 전체를 그의 사회학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독일-이탈리아의 지적 세계에서는 격리되어 있었다. 현재 뒤르켐은 주변적 인물에 지나지(300) 않는다.
뒤르켐의 사회연구의 접근법 첫째는 형이상학적 논의의 거부였다. 온건하고 세련된 실증주의 였다. 둘째, 사회학과 인류학을 결합시켰다. 그의 연구의 경험적 성격 때문이었다(301). 처리 가능한 부분의 개별적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했다. 셋째, 경험적 연구이다. 넷째, 사회의 ‘도덕적’ 요소에 대한 관심이다. 이점에서 계몽주의의 후계자로 꼽는다. 초기의 저술에서 ‘아노미’-가치의 모든 위계조직이 해체된 ‘모든 규제가 없는’ 상태-의 개념을 처음으로 정의했다. 현대 사회적 논의에서 표준 용어가 되었다. 사회의 무형의, 정신적인 측면을 기술하는 용어로서 단순히 기계론적 사회관은 아님을 보여준다. 문제는 처음부터 사회의 주관적 성질을 알고 있었다. ‘감각’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알았으나 단지 초기 저술에서 사회적 요소들을 ‘사물’이라고 불렀다(302).
종교적 현상과의 대결은 20세기 사회사상 전개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뒤르켐은 말년에 『종교생활의 기본 형태』를 발간했으나 너무 늦게 완결되었고 1차 대전으로 죽었다(302). 어떤 교리가 ‘참’인가 ‘거짓’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종교는 어떤 깊은 ‘사회적 요구’와 일치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참된 이유는 종교의 교리가 아닌 종교적 실천, 즉 의식에 있다고 보았다. 종교적 경험의 과학적 현실성은 종교의 ‘실천’에 있었다. 이 현실성은 ‘사회적’ 현실성이었다. 종교적 실천은 연대감, 개인이 집단에 의해 보강된다는 감정을 발생시켰다. 따라서 그는 사회란 그 기원에서는 종교적이라고 정의했다. 종교가 사회를 ‘창조했다.’ 이것이(304) 종교의 참된 기능이었다. 더 나아가 사회는 ‘오직 개인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현대 사회과학의 발전에 기본적인 개인적 모범과 방법론상의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철학적으로는 명확한 지침이 되지 못했다. 핵심적인 모순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편 ‘지상명령적 규칙’의 체계를 세우려는 노력은 있었다. 단순하고 일방적인 설명을 열망했던 것(305)이다. 동시에 사회 현실에 대한 매우 정신적인 정의-관념론적이고 다원론적인 정의가 있었다. 거는 두 측면을 결코 종합하지 못했다.
그의 공식은 정적이었다. 과정보다 구조를 나타냈다. 준실증주의적 입장에서 사회학과 인류학을 결합했다. 독일의 신관념론자들은 사회과학의 세계와 역사적 경험으 세계를 융합시키고 있었다. 이 두 결합의 체계를 합류시킨 것이 베버의 업적이었다(306).
1. 지적기원과 초기의 업적
뒤르켐 | 베버 |
▸프랑스인-유대인 | ▸독일인-프로에센의 상위 중산계급 |
▸실증주의자 | ▸독일 관념론자 |
▸합리주의적·과학적·반교권적-근대사회와 인간의 업적 신뢰 | ▸비독단적인 종교성, 정신 존중과 물실세계 불신-이성에 반감, 기술적 변화에 공동체 감정 대립, 자본주의와 합리화된 사회에 항의 |
▸독단론적 경향 | ▸주저하고 자기 분열적, 고뇌한 사람 |
▸관념론과 과학적 방법, 경제학과 종교,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 정치적 관여와 사회과학의 ‘객관성’ 합류시킴 | |
▸민주주의자이면서 비판자(307) | |
▸아노미 개념 | ▸관료제도와 ‘카리스마’ 개념 |
베버는 현대 서구사회의 근본 경향은 관료화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스로 합리주의자로서 ‘프로테스탄스 윤리’의 계승자로서 이러한 경향을 찬양했으나 관료제도가 개인의 지적 자유를 위험하게 함도 알고 있었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탈출구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여기에도 자유에 대한 위협은 뚜렷했다(308). 베버는 카리스마를 불신하고 거리를 두었다. 따라서 지적 지도자의 역할을 거부했다(309).
베버는 법학 → 경제사회사 → 사회과학의 일반적인 방법론 → 종교사회학 → 사회학의 지적 전개의 변천을 거쳤다. 변천 과정에서 그의 모든 관심은(311) 서양사회에서의 합리성의 문제가 지배하고 있었다.
독일 사회과학적 전통의 약점은 형이상학적 사변에 기울어지는 경향과 ‘정신’에 탐닉하는 것이었다. 장점은 ‘역사적 세계 안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베버가 사회과학의 방법론에서 가치 판단의 문제를 배운 것은 철학자 리케르트였다. 베를린 대학의 로셔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크니스에게(312) 경제학이라는 개념을 배웠다. 당시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산업화된 조국에서의 자본과 노동 문제들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고 1873년 ‘사회정책학회’를 조직했다. 베버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회원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목표로 하는 사회정의를 보다 보수적인 방법에 의해 달성하는 것이 이 학회의 주요 목표였기 때문에 베버는 마르크스와 대결하게 되었다. 경제제도를 지배하는 ‘정신’을 형식화하려고 했는데 개념적 엄격성을 보다 신중하게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 만이 고전경제학의 이론적 도식에 한정된 타당성을 부여하려고 했다(313).
초기 엘베 강 동쪽의 독일 노동자들을 연구하면서 국가의 이익과 권력, 그 정치적 명령의 엄격성과 권위에 대한 논의 자체를 공격했다. 이 점에 베버의 독창성이 있었다. 베버에게는 ‘국가형태’의 논의는 단지 ‘기술’과 ‘메커니즘’에 대한 문제로서 2차적이었으며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의 힘뿐이었다(314).
2. 방법론적 단계
1898년부터 1902년까지의 발병은 법률로부터 경제학으로의 변경, 대학 업무과 반공적인 활동의 부담때문이었다(315). 프로이트적 ‘미해결의’ 신경증으로부터 생긴 간접적인 결과로 추측할 뿐이다. 그는 스스로 자기 병을 고쳤다. 미술사를 통해 지적인 회복을 했다(317). 그는 신경증 자체에서 창조성에 대한 자극을 발견했다. 지적 마비는 표면적이었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진지한 사고에 할애했다. 과거와 깨끗이 결별하는 지적 이점을 제공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중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는데 베버는 이를 놓쳤으나 그 후 보다 엄격한 형태로 여기에 동참했고 관심은 더욱 광범위해졌다. 그 후부터 사회과학 자체의 철학과 방법론만을 다루게 되었고 이 문제와 체계적 방식으로 대결했다(319).
1904년 미국여행과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학보』의 공동 편집으로 연구 시작에 자극을 받았다. 학보는 그에게 발표의 수단이 되었다(320).
베버는 실증주의 또는 ‘자연주의’의 피상성과 인간 문화의 영역에서 과학적 연구에 대한 관념론의 부정에 대항하여 논쟁했다. 이것은 자신의 지적 과거로부터 해방을 의미했다. 역사적 박식과 형이상학자들의 사변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경험적으로 이끌어낸 개념화라는 ‘중간’ 차원을 확립하려했다. 또한 역사적 지향을 가진 경제학자들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다(321). 지적 마비 기간에 지적 선구자들의 핵심에 놓여 있는 일종의 신비적 혼란을 발견했다. 실증주의자들과 관념론자들은 어느 쪽도 사회적 또는 문화적 연구에서의 ‘법칙’과 ‘원인’, ‘객관성’과 ‘가치’의 성질에 대해 만족스런 관념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용어들을 정의하지 못했고 적용 범위를 한정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베버의 방법론 연구의 근본 목적이었다(322).
인간 행동은 법칙적이며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법칙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법칙적인 측면은 예언 가능성에 있다. 이는 관념론자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이다. 인간의 자유의 영역은 비합리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행동할 때만큼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은 ‘원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베버는 인과적 설명에 관한 논의에서 관념론적 전통과 충돌했다. 크로체의 ‘원인’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론적 입장에서 반대하지 않았지만(323) 역사적 설명의 기준에 있어서 크로체의 심미적이고 논리적인 범주를 매우 불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관’, ‘재경험’을 배척했다. 인과적 설명을 전적으로 제거하지 않았으나 인과적 성격의 ‘부분적’ 설명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가설적 분석’이라는 가장 정교한 도식을 만들어냈다(324).
인과적 설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주어진 사건의 계기에 결정적인 차이를 일으킬 요인을 찾아내는 것뿐이라는 것이며 ‘객관성’과 ‘가치’에 대한 유익한 반성의 길을 열었다. 가설적인 인과적 설명의 방법을 제기하면서 ‘개별적인 연구자의 관점으로부터’만 결정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밝혔다. 요인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가치체계에 기초를 둔다는 의미였다. 역사가나 사회과학자가 자료를 가려 뽑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고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가치를 충실히 반영한다는 것이다(325).
베버에 의해 과학적 객관성과 가치판단의 관계는 미묘한 상호작용의 관계로 발전했다. 가치 선택의 범위를 조명하기 시작했고(326) 사회에서의 인간의 생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가치관뿐인데 문화라는 것에 의해 확립된다. ‘문화’는 ‘무의미하고 무한한 세계의 과정 중 하나의 유한한 부분이며 ’인간‘이 거기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는 부분’으로 볼 수 있다 했다. 사회과학 또는 정신과학에서 방법과 대상, 연구를 위한 규칙과 인식론은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이며(327). 연구의 대상 또는 분야나 연구의 방법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실용적’에 근거하며. 어떻게 문제를 파고드는가가 해답이다. 이로써 지식의 타당성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은 발판을 잃었다.
가치판단에 대해 절대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베버는 상대주의의 세계로 다가갔다. 상호 제약의 세계-단일한 접근법의 지속이 필요한 동시에 다원론도 철학적으로 불가피한, 무한히 복잡한 인간사에 대한 견해-에 도달했다. ‘허구적’ 관점에 도달한 것이다. 사회적·문화적 세계에서는 고정된 현실이 발견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기껏해야 윤리적·문화적 가치를 고수하며 가치의 근원과 의미는 신비에 싸여 있고 가치의 연구는 이해 가능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전적으로 임의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철학적 다원론과 허구적 접근법은 ‘이해’로 불리는 절차와 ‘이념형’의 정교화였다. ‘이해’는 베버의 관념론적 과거의 잔재였는데 ‘이해’는(328) 지식의 원천에 철학적 지위와 권위를 부여한 독일적 형식이다. 근원은 딜타이의 ‘재경험’과 크로체의 ‘재사고’에 있다. 행위자 입장에 자기 자신을 서게 함으로써 ‘감정이입’을 하려는 노력이었고 심리적 공감의 방법이었다. 인간의 행동에 관한 연구는 직관적 방법은 불가피하다고 보았으며 이해의 범위를 한정하고 준실증주의적인 인과적 설명과 결합시키려고 했다. ‘이해‘는 인과적 귀속의 방법에 의해 가능한 한 통제되어야 하며 과학적 타당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해‘로부터 끌어낸 지식이 경험적 테스트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329). 그는 직관주의적 입장을 “가설의 공식화에 도움이 되는 ’예감‘의 원천”으로 격하시켰다. 그러면 ’이해‘의 절차는 역사 서술을 넘어 사회과학적 방법의 공인된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이해‘를 점검하는 인과적 유형의 설명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했다. 그것은 인과적 유형의 선택적인 계기로 이루어졌으며 설명 가능성을 모두 드러내지 못한다. 필연적으로 인간 정신의 구성물이 수반되었다.
인과의 개념과 관련된 것은 베버의 ’이념형‘이다. 인과적 설명의 단일한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330). 이념형은 모든 차원의 추상물이다. 인간 내면의 사고유형이라는 유개념이며 인간 존재를 지배하는 이상이자 경험적 자료를 이용하는 ’이론적‘ 구성물이고 ’여러 가지 가능한 결합‘의 연속체 전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 예로서 유개념은 정부나 교회 등 사회현상의 계급, ’이상화된‘ 개별적인 현상복합체는 ’자본주의‘라는 두 가지로 제시했다. 또한 자신의 구성물은 인공적인 도구로서 새로운 개념에 의해 대체될 운명(331)을 가졌다고 했다. 베버의 이념형에 대한 정의는 사회사상 방법론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공헌의 하나이다. 베버는 후계자인 슘페터의 ’모델‘ 용어 개념의 최초 구성자로서의 명예를 갖고 있다(332).
3. 종교연구
종교연구는 이념형의 절차를 ’의식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첫째, 비논리적 세계와 대결에서 결정적인 테스트 케이스였다. 둘째, 마르크스와 충돌이다. 종교 연구는 그의 사상이 더욱 성숙한 결과로서 두 측면은 동시적으로 진행되었고 영향은 상호적이었다. 베버는 특정한 교리를 수용하지 않았지만 종교가 주는 감명은 받아들인 사상가였다(333).
베버에 따르면 모든 사회이론인 이데올로기는 이념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유물사관의 상대적 타당성‘을 인정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력을 날카롭게 만든 것은 그 편파성이라고 보았다(334). 사적 유물론의 특징을 모든 사회이론이 지닌 편향적 성격과 관련시켰고 다른 일련의 편향적 이론을 실행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에 새로운 국면을 부여했다. 베버는 마르크스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분석의 ’래디컬‘한 성격인데 사회적 난문제의 근본에 관심을 갖는다는 언어학적 의미에서 래디컬했던 것이다. 또 현대인에 대한 철학적 사회학을 시도했다.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노동자의 ’소외‘라고 부른 것을 베버는 현대생활의 합리화라는 광범위한 범주로 확대해 마르크스 이론을 ’특수한 경우‘로서 보다 광범한 가설에 편입시킴으로써 마르크스 이론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마르크스 이론을 따르면서(335) 강조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에 의해서 ’자본주의‘는 다양한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둘의 연속성을 강조한 것이다. 집단적 관계의 가치적 측면이 날카롭게 드러나는 새로운 범주를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에 첨가함으로써 이를 더욱 세련되게 했다. 곧 계급이란 물질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속된 사람들의 경제적 범주이며, 신분집단은 특권과 명예에 대한 배려가 두드러진 집단으로 정의했다. 초기의 농업연구도 과거의 사회적 변혁에서 경제적 요인과 정신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했음을 체계적이고 경험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프로테스탄스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336) 현대 사회사상의 명저이며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정교한 논의를 진행시킨다.(309). 첫째,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관념‘에 의해 창조된 ’세계상‘은 이해관계의 움직임에 따라 궤도를 결정하고 역사상의 결정적인 점에서(337) 정신적 프로그램과 물질적 이익집단의 압력이 합치된다고 했다. 단순히 인과적 계기의 도표를 그리지 않았다.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의 ’선택적 친화력‘-엄격하고 자기 부정적이며 금욕적인 능력을 기울이게 하고 자본주의 기술에 새로운 합리성과 역동성을 부여하게 한, 주로 무의식적인 견해의 유사성-의 윤곽의 제시를 시도했다. 둘째, 유물론적 해석을 ’논박‘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요인으로부터 정신적 요인으로 인과적 계기를 흐르게 했는데 베버는 마르크스의 흐름을 역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어느 방법이나 완전하지 않았고 보았다. 많은 ’선택적인 인과적 계기‘를 결합함으로써 각 방법은 연구의 준비로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338).
베버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강조한 마르크스와는 전혀 달랐다. 자본주의는 관료제도와 마찬가지로 서양세계의 역사 중 포괄적인 합리화 과정의 주요한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왜 이 과정이 서양에서만 충분한 형태를 갖고 전개되었는가(339)라는 수수께끼 때문에 종교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그 자신이 속해 있는 문명이 역사적 독자성을 갖게 된 이유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최초의 해결에 도달했다. 결정적인 차이는 칼뱅주의의 역동적인 힘이었다. 불교 또는 힌두교에는 합리적인 지향을 가진 비즈니스 활동의 생활을 보증하고 격려하는 윤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종교사상에 도움이 되는 지리적·물질적 조건을 밝히려고 했다. 이것은 베버 자신이 서양사회의 합리적 가치에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성에 대한 깊은 관심-이성을 서양의 최고의 성취로 만드는 동시에 현대 생활의 ’영혼 상실‘의 원천으로 만들기도 한 역설- 때문에 그는 합리성의 문화 자체를 탐구하고 검토하려고 했다(340).
4. 사회학과 역사
『경제와 사회』는 경제사회학 개론의 총괄적인 책으로 사후에 발간되었다. 짧은 서술문, 깨끗한 문장이 빠른 리듬으로 연결되었으며 수식어나 한정사는 없었다.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썼고, 각주나 학자적 수식이 없었다(341). 그러나 ’구체적 사회에 대해 모자이크적 이론‘을 제시했다. 단편적인 것들을 모았으나 상호 관련이나 시험적이고 ’허구적인‘ 성격은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역사는 ’단위로서의‘ 이념형의 변화 과정이 된다. 역사는 더욱 고정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구성은 일반적인 사회학적 ’법칙‘을 추구하는 실증주의적 방식과는 완전하고 영원히 갈라선 것이다. 난점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사회적 존재의 자주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제도의 ’정신‘이라는 관념론적 개념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을 보였다. 관념론적 잔재는 오히려 강점이기도 했다. 베버의 사회학은 역사의 틀 속에 확고하게 머물러 있었다. ’사회학의 체계적 완성‘은 “역사적 지식의 과정에 종속”되어 있었고, 역사세계의 “개별적(342) 사건의 구체적인 ’생성‘ 과정에서의 인간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적 장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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