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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요동도사(遼東都司)와 여진(女眞)
10세기 이후의 요동사는 일반적으로 요동에서 출현한 세력이 요동 전역을 석권한 뒤에 중국으로 들어가 요동과 중국을 통합, 지배하는 국가를 건립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거란이 요동을 통일한 뒤 요(遼)를 세워 중국의 연운(燕雲) 16주까지 통합지배한 이래로, 여진이 요동을 통일한 뒤에 청(淸)을 세우고 입관하여 중국과 요동을 함께 통합. 지배할 때까지, 무려 1천여년 가깝게 지속된 하나의 큰 역사적 흐름이었다.
그러나 명이 몽고를 중국에서 축출한 뒤 요동 서부까지 진출, 일시적이나마 요동의 일부와 중국을 함께 지배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 시기 거란과 여진은 통일 국가를 건립하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었고 명의 위소(衛所)체계안에 편입되어 간접적, 집단적 방식으로 지배되었다. 명의 요동도사의 관할지역은 요녕성 일대에 국한, 지배력도 매우 제한되어 있었으나 한의 사군과 당의 안동도호부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10세기 이후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요동의 중심부에 요동도사를 설치한 명은 원의 잔여 세력이 있는 요동 서북부를 장악, 삼위지휘사사를 설치하여 항복해온 호인들을 거처케 했다. 태녕, 타안, 복여 삼위는 대녕전저 희봉구부터 선부가까이를 타안이라 하고, 금의부터 관녕을 거쳐 요하에 이르기까지를 태녕, 황니규부터 심양 철령을 넘어 개원에 이르기까지를 복여라 했다. 이는 원의 잔여 세력과 요동 동부의 여진세력의 연결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명이 요동을 지배하는 기본 도사 체제는 형식만 도사일 뿐, 실제로는 그곳 토착 인구의 자치가 이루어진 독립된 형세를 취했다. 이들이 명조에 행하는 ‘조공’은 고통을 수반하는 의무가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동반하는 권리였다.(532p) 『명사』328 타안복여태녕전에 의하면, 이들 삼위는 “영락 12년(1414) 봄에 말 3천 마리를 요동에 공납하여, 황제가 수장 왕진에게 명하여 한 마리 당 포 4필씩을 주게 했다...”
원래 명대의 도사인 도지휘사사란 지방의 각 성의 최고 통치기구인 삼사, 즉 승선포정사사와 제형안찰사사, 도지휘사사 가운데 하나로서, 위소 등 군사조직을 관리하는 최고 기구였다. 그러나 요동도사는 중국 내성(內城)에 설치된 것과는 달리 매우 특수한 성격과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요동에는 독자적인 성이 없어, 산동성의 포정사사에 소속되었으며, 단지 위소만을 세워 군대로써 둔수(屯戌)할 뿐이었다. 이는 요동에 대한 명인의 특수한 인식 때문이었다. 요동은 “경사(京師)의 왼팔이요, 동북의 웅번(雄藩)이자, 국가의 중진(重鎭)이었다. 뿐만 아니라 명은 요동이 ”변방의 중요한 땅이라 하여, 내신(內臣)에 명하여 진수하게 하고, 무관은 총병관으로 충당하고, 반드시 도어사, 순무, 제독에 흠차진수요동지방총병관을 도와 군무를 처리하게 했다. 이들은 요동의 몽고‧ 여진 각부의 책봉과 조공, 교역을 감독하고 도사와 위소의 보고를 정리하여 조정에 보고했다. 여기서 요동이란 대녕도사. 노아간도사 등 전 관동지역을 총괄한다. (534p)
영락 7년 노아간도사가 설치된 이후 여진 제부는 노아간도사 체제 안에 편입되어 있었다. 위소의 여러 관은 여진 추장이나 영도자들이 담임했다. 『명사』90 병지에 의하면, “기미위소는 변외에서 귀부해 온 자의 우두머리에게 관직을 주어 도독, 도지휘, 지휘, 천백호, 진무 등의 관으로 삼고, 칙서‧ 인기(印記)를 주어, 도사와 위소를 설치한 것이다”명조에 규정된 관복의 수여를 통해 여진 추장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명조의 관원이 되었고, 여진 각 부는 명조의 지배 체제 안으로 편입되었다.(535p) 이는 엄밀히 말해 기존의 권력을 승인하는 ‘책봉’이었다.
노아간도사 체제 하의 여진 제부 추장들은 위소 장관으로 ‘책봉’받은 반대굽부로서 정기적으로 명조에 ‘조공’했다.(536p) 조공한 뒤에는 관직 등급과 공품의 수량에 따라 비단 등 상사를 받았는데, 상사를 받은 뒤에는 회동관에서 사흘간 개시(開市)하여, 교역했다.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입공을 서로 다투었고, 명조는 제한하려 애를 썼다. 이러한 조공의 특수한 성격은 명대 요동과 여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명대의 여진은(539p) 기본적으로 명의 도사(都司) 체제에 편입되어 위소의 형식으로 존재했다. 건주위는 앝타리 지역, 해서강 동쪽 화아아강 서쩍에 있었으나 명초에 요동이 혼란해지자 송화강가의 의란 부근으로 남천, 조선과 요동행성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하였다. 처음 노략과 노비 매매를 통해 많은 이익을 획득했으나, 차차 농업을 생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농기구는 모두 조선에서 나간 것으로 조선인들이 담비모피를 사기위해 철과 소, 말까지 호시를 통해 팔았으며, 여진 사회는 신속하고 광범하게 농경 사회로 발전하고 군사력도 강화되었다.(542p) 그리하여 건주여진은 15세기에 이미 “정착과 농경생활을 즐기고 옷감 짜기를 잘하며 음식과 복식이 모두 중국인과 같다”은 수준에 이르렀다.
농경 사회로 발전한 건주여진은 철제 무기로 무장하여 왕성한 약탈 활동을 전개했다. 명말에 이르러 건주여진의 역량은 더 이상 명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소금과 미곡을 공급하여 만족시킴으로써 변경을 침략하지 않도록 요동에 마시를 개설하게 되었다.(543p) 명조는 이후 이들의 압력으로 마시를 계속 증설하게 되었는데, 건주 여진을 위해 무순마시를 기점으로 1관(關) 1시(市)를 열고, 해서여진과 야인 여진 및 복여위 인을 위해 개원에 3관 3시를 여는 등, 모두 5관 5시를 개설했다. 여기에 마시를 관리하는 명조 관리들의 부패는 요동의 마시체제의 붕괴를 촉진했다.
마시체제가 무너지고 올량합 삼위와 여진이 교대로 요동도사 관할을 지역을 침범하여, 이 지역 주민들이 “감히 경작하거나 방목할 수 없어, 밭과 들이 황폐해지고 변방의 창고가 텅텅비게 되어, 중앙 정부에 재정을 의탁하게 도는” 상황에 이르자 명은 요동도사 관할지역에 변장을 수축했다.(545p) 명대 변장은 명과 여진, 거란의 영역을 나누어 표시한 국경선으로 거주 지역을 분계한 청대의 ‘유조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여진과 몽고의 지속적인 침입을 장기간 받음으로써 그 관할 영역이 크게 축소, 명대 후기에는 요동도사의 존재 의미가 거의 소멸되었고,(548p) 몽고, 몽고화한 거란, 여진 등이 서로 교섭하면서 서로 융합하여, 요동의 새로운 주인공, 만주가 역사의 무대로 출현하였다.
명대 요동의 두 세력인 몽고화한 거란과 동부의 여진은 문화뿐 아니라 의식주 생활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서로 용이하게 융합할 수 있는 조건이, ‘만주’라는 단일 개념으로 규정하는 단계에 이르면, 요동을 구성한 다양한 군소 역사 공동체의 문화적. 정치적 융합을 통한 새로운 역사 공동체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10. 만주(滿洲)와 청(淸)
요동도사가 무너지며 요동 전역이 통일되었다. 통일의 주역은 여진이었다. 여진의 여러 부족이 통일되어 대금(후금)이라는 새 국가를 출현시켰고, 이 새로운 상황을 맞아, 요동에 거주했던 예맥계과 동호계, 한(漢)계와 한(韓)계의 인구가 모두 함께 참여하여 이루어낸 새로운 인구 개념인 ‘만주인’이 새로 형성되었다.(552p)
명의 멸망과 만주의 입관으로 요동과 중국은 한 국가 즉 대청에 의해 통합, 지배되었고, 요동의 인적 구조는 크게 바뀌었다. 요동에는 유조변이 설정되어 한인, 만주인, 몽고인의 거주지가 분계되었으나, 요동과 중국의 정치적 통합과 병행하여 인적 통합까지 광범하게 이루어졌다. 청대의 요동은 그 역사 공동체로서 정체성을 현저하게 상실, 독자적 역사 공동체를 유지한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명의 요동도사가 무너지고, 여진 통일의 주역을 맡은 누르하치(1559-1626)는 만력 47년(1619)년에 “동해에서 요변까지, 북으로는 몽고 눈강에서 남으로는 조선 압록강까지, 같은 말을 사용하는 자는 모두 정복하여, 이 해에 제부가 처음으로 합해져서 하나가 되었다”
누르하치는 사회경제적 역량을 증폭시켜 나갔다. 만력 23년(1595) “가는 곳 가운데 경작하지 않은 들판은 보이지 않앗고, 산 위조차도 많이 개간되어 있었으며, 집집마다 모두 닭과 돼지, 거위, 오리, 양 등의 가축을 길렀다.” 이처럼 활발한 무역 활동과 농업, 수공업의 발전은 여진 사회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또한 누르하치는 기간 산업인 수렵 활동 조직과 생산 단위를 군사 조직으로 전환시켜 팔기(八旗)제도를 정립했다. 나가면 병(兵)이 되고 들어가면 민(民)이 되는 ‘병민일체’의 조직, 즉 사회조직과 군사조직이 합일되고 농과 병이 일치된 여진 고유의 팔기 제도이었다. 이러한 팔기병을 이끌고 누르하지는 만력 44년 스스로 한(汗)이라 칭하고 국가 이름을 대금(大金)이라 하면서 명에 선전포고를 했고, 살이호에서 대패시키고, 심양과 요양 등 요동의 핵심부를 획득했다. 천명 6년(1621)에 요하(遼河)건너 영원성에서 원숭환이 지휘하는 명군의 반격을 받아 패퇴하고, 누르하지는 1627년에 병사하였다.(556p)
여진이 요동의 중심부를 장악하게 됨에 요동의 인구와 산업이 재편성되었다.(557p) 다수의 여진인이 요동의 주인 없는 농지를 점거했고, 대금 정부는 ‘계정수전령’을 반포하여, 제도적으로 인정했다. 또한 한인을 노예로 삼거나 팔기로 편입했으며, 몽고 인을 팔기로 뽑아 누르하치 시대에 비해 팔기의 병사가 배가되었다. 요양에서 심양으로 도읍을 옮겨 성곽과 궁전을 수축했다.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이라 바꾸고 연호도 숭덕으로 고쳤고, 모든 사람은 ‘만주’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청의 건국 당시 그 국가를 구성하게 된 요동인들에 대한 새로운 범칭으로, 요동에서 만주라는 새로운 역사 공동체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자적인 만주문자(만주어) 생활을 영위했다.(559p) 국가적 정비를 완료한 후금은 조선을 제압하여 ‘강도화약’을 맺어 형제의 나라임을 약속하고, 요동에 잔재한 명의 세력을 제거했고, 막남 몽고를 공격하여 멸망시켜 몽고 16개 부 49인 추장들이 몽고 가한의 칭호와 박극달철진한의 존호를 올렸다. 이에 청 숭덕 원년(1636)에 황태극은 칭제하고 대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조선을 재침하여 군신관계로 전환시켰고, 피도의 명군 잔여 세력을 완전히 소멸, 반간계로 명에 의해 원숭환을 제거시킴으로써, 만주인은 중국 입관의 걱정거리를 말끔히 제거했다. 그러나 황태극은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황태극의 유자 복림이 즉위,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이 북경성을 함락하자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결하였고,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관문을 열어 청군을 맞아 들였다. 순치 원년(1644)에 청은 성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요동과 중국을 함께 통하는 통합 국가로서 새로 출발했다.
만주의 입관으로 요동은 전역이 거의 황폐화되었다. 이리하여 순치제는 ‘요동초민개간령’을 반포하였다. 순치(1644-1661)말년에서 강희(1662-1722)중엽까지 20여년 간에 인구가 5배 증가하자 강희 7년에 ‘봉금’정책으로 선회, ‘유조변’을 축조했다. 이것은 역사 공동체의 범주를 나누어 표시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즉 만주의 풍속과 여진인 고유의 산업체제를 보호하고 그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려는 것이며, 만주 팔기의 경제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기지 설정이었다. 만주인은 만주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요동을 이원적인 기민 지배체제로 운영했다. 성경에 호부, 예부, 형부, 공부, 병부, 호부는 모두 만주인 기인을 관리하기 위해 존재, 성경을 배도로 정하고 팔기 주방병을 주둔시키고 기내대신을 성경총관으로 삼아 요동의 기병과 기민을 관리하였고 일반 민, 한인은 따로 부주현이 설치되어 별도로 관리하였다. 그러나 청조의 노력에도 인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근본적으로 막지는 못했다. 청대 중기 이후부터 요동의 인구는 급속하고 광범하게 혼합되어 인구비례가 역전되었고, 서로 섞여 잡거함으로써 혈통적 혼합이 폭넓게 이뤄졌을 뿐 아니라 문화적 융합까지 동반, 전통적인 접속혼제까지 폐지되었다. 순장, 인사법도 폐지하였고, 생활 양식에 변화가 일어나자 본속을 잊지않도록 말타고 활쏘기에 힘쓰도록 명령하였다. 만청시대 요동의 종교 문화적 융합은 숙신계와 중국계, 동호계, 티베트 문화와의 융합까지 폭넓게 이뤄졌다. 제천에 대한 신앙을 불교가 대신하게 되었다.
후금 혹은 만청이 황교 승려를 총행한 것은 복과 길함을 기원할 뿐 아니라 몽고 제부가 황교를 믿기에 지배하는 도구로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571p) 몽고도 후금과 연맹하여 신복했고, 결혼동맹했다(1635). 속민들은 귀순하여 금국에 정착하여 만주 팔기로 편입했다. 청조 강희 27년(1688)에 몽고 갈단의 힘이 강하고 뜻이 커지자 친정하였고, 몽고 제부의 칸, 왕, 태길 등이 내귀하면 부락의 대소와 인구의 다소, 세력의 강약에 따라, 팔기의 작직을 모방하여 책봉했고, 맹기를 세워 통할했다. 맹기제도는 힘을 분산시키는 ‘분(分)이치지’의 정책이다.
티베트 불교를 독신하는 만청이 요동과 중국, 몽고와 티베트까지 지배하게 됨으로써 티베트 불교는 동아시아를 구성한 주요한 역사 공동체들을 문화적으로 묶어주는 거대한 문화벨트로 기능하게 되었다. 혈통과 문화. 정치까지 통합된 청대의 장기 지속적 국가 통합은 요동이라는 역사 공동체가 그 주체성을 상실, 요동 역사가 종결된 시기이기도 하다.
11. 동북인과 동북삼성
만주가 요동과 중국의 통합 국가인 청을 건립한 뒤에도 요동의 역사 공동체적 정체성은 산해관과 유조변이라는 이중벽과 봉금 정책, 요동의 관리 체제를 통해 유지되었다. 또한 총관 혹은 장군이 설치되어 막부에 의한 군정이 이루어졌다. 이는 만청이 요동을 중국과는 다른 권역으로 간주하고 중국과는 다른 제도적 지위를 요동에 부여했음을 의미한다.
9세기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만청은 요동에 설치된 세 장군을 철폐하고 행성을 세워 산무와 총독을 파견, 20세기 초에 이르러 비로소 행정체제를 중국과 동일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5년도 지속되지 못하고 청조의 멸망과 동시에 봉계군벌이 이 지역을 장악하여 독립적인 형세를 갖추었다. 봉계군벌 장작림은 원세개의 칭제에 협조, 요동을 정치적으로 통일했다. 배후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있었으며, 일본은 장작림을 제거하고 황제 부의를 내세워 만주국을 세우고 1945년까지 통치했다. 공산당과 국민당이 내전을 전개한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장악되지 못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에야 중국의 국가에 의해 통일되었다. 요동이라는 문헌이 등장한 이래 중국과 다름없이 통치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국과는 분리된 역사공동체로 존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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