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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 랍비 몹식
인간의 행동, 특히 구술적 의례와 하느님의 영광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관한 랍비문헌 연구 수행
‘신을 만드는 의례들’(1993년)
카발라의 절대적으로 중심적인 모티브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주제들이 이미 초기 랍비 문헌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p. 467).
카발라(히브리어: קַבָּלָה 캅발라, Kabbalah[1])는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을 말한다. 히브리어 '키벨'에서 온 말로, '전래된 지혜와 믿음[≒전통]'을 가리킨다.[2] 세계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 전통과 일맥상통한다. 카발라는 신비주의의 양식을 그대로 쫓고 여타 신비주의처럼 특정한 카발라 교의(敎義)의 독선주의도 배제된다. <위키피디아>
“그들을 박해하는 자 앞에 힘없이 걸어간다”(몹식, p. 53)
“종들로부터 어쩔 수 없이 관을 받았다.”
몹식은 여호와의 왕권 자체가 어떤 식이든 의인들의 기도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쉽게 입증할 수 있었다(앞의 책, p. 58).
“만약 사람이 하느님에 대한 예배를 소홀히 하고, 예배에 절망하고 불순한 것에 집착하고 불순한 짓을 하려 하면 지상의 존재들 위에 빛나던 하느님의 빛이 다시 흡수되어버리고 마는 원인이 될 것이다”(몹식, p. 260에서 인용).
중세 카발라의 위대한 문헌들에서는 예비의 주술적 성격에 대한 진술이 「시편」의 119장 126절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나서실 때가 되었사옵니다’ - “신을 만들어야 할 때”라는 의미처럼 해석됨(p. 469).
하느님은 인간의 경건함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회복되고, 수선될 필요가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경건함을 잃어버리면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p. 469-470).
8.18. 영광의 고고학의 의미: 통치 기계의 기능 방식에 대한 이해 시도
영광의 신학에 대한 분석은 단지 권력의 구조에 대한 우리의 탐구가 과거에 던진 그림자에 불과하다(p. 471).
(p. 471)
내재적 삼위일체(신학) | → | 양극을 가진 기계 구성 | → | 신에 의한 세계 통치 발생 |
오이코노미아적 삼위일체 (오이코노미아) |
왕국과 통치는 동일한 권력 기계의 두 요소, 두 측면 구성 |
의식은 어떤 식으로 권력을 ‘만들까?’
통치 기계가 이중적인 것(왕국과 통치)이라면 영광은 이 기계 내에서 어떤 기능을 할까(p. 472)?
영광이 신학에서 이토록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영광이 통치 기계 내에 내재적 삼위일체와 오이코노미아적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실천, 왕국과 통치를 하나로 묶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재적 삼위일체 | 영광으로 연결‧통합 가능 | 오이코노미아적 삼위일체 |
하느님의 존재 | 하느님의 실천 | |
왕국 | 통치 |
영광은 오이코노미아와 통치의 의미 규정
영광은 삼위일체라는 독트린은 결코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던 신학과 오이코노미아 사이의 균열을 메우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p. 472).
8.19. ‘아멘’
그르스도교 의식에서 특히 환호송이라는 이름에 잘 어울리는 것은 ‘아멘’이다(p. 472).
‘아멘(p. 473)’
- 안정성과 충실성이라는 의미론의 영역에 속함.
- 동의의 환송송 또는 영광송(‘축복’)에 대한 응답으로 사용됨.
후일 시나고그에서 축복에 대한 응답으로 사용됨.
앞서 나온 어구에 조응.
시나고그(히브리어: בית כנסת 베트 크네세트, 이디시어: שול 슐, 라디노어: אסנוגה 에스노가, 영어: synagogue) 또는 유대교 회당( - 會堂)은 유대교의 사원이다. 모임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시나고게(συναγωγή, synagogē)'에서 유래한다. 히브리어로 '베트 크네세트'라고 불리며 시나고그 대신 예배의 집을 뜻하는 '베트 테필라(히브리어: בית תפילה)'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위키피디아>
‘아멘’의 번역
- ‘그러하리라’, ‘진실로’
- 70인역: 그대로 사용
아우구스티누스: ‘아멘’/‘호산나’ ‘할렐루야’/‘라카’라는 감탄사로 가능하지만,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것에 부여되어 있는 “보다 성스러운 권위” 때문이라고 지적(p. 475).
세르비아의 이시도르스: “‘아멘’과 ‘할렐루야’라는 이 두용어는 그리스인이든 라틴인이든 또는 야만인이든 자기 언어로 완전히 옮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4세기에 ‘아멘’을 영광송에 응답하는 환호송이 아니라 단순히 기도의 끝을 ㅍ시하는 단순한 정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P. 475).
‘아멘’의 효과와 기능
콘서트홀에서의 ‘브라보’라는 환호송: 배우나 명연주자에게 보답하는 동시에 무대로 돌아올 것을 강제함.
언어활동이 가진 의미론적 측면은 무위상태로 돌아가 한순간 공전하는 것처럼 보임.
그러한 공전으로 인해 특유한, 거의 주술적 효력을 지니게 됨(p. 476).
8.20. 모스 『브라마나』 ‘영양’이라는 개념에 관한 연구
‘영양’은 “영양 일반, 영양 자체로, 이는 안나디아, 먹을 수 있는 것, 먹을 수 있는 것의 소유를 말한다”. 그리하여 안나디아는 “왕권”을 규정하는 성질 중의 하나가 된다.
물질적 성질이 제거되면 ‘영양’은 생명의 원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증대시키는 힘이 된다(p. 478).
영양인 이 신(프라자파티)는 “나 외의 영양은 없다”고 말하며 피조물들의 삶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모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신의 본질은 먹을 거리, 먹을 것 자체이다. 신은 음식이었다”.
성체의 희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에게 자신을 영양으로 제공하는 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영광송이라는 규범적 맥락 속에서 뿐이다. 마찬가지로 『브라마나』에서 찬가의 운율적 형식은 신의 영양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의례적으로 고정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8.21. 찬가
“신을 찬양하며 노래될 경우 그때에야 비로소 찬가이다(세르비아의 이시도르스, 『어원』, 6, 9, 17).”
『두이노의 비가』는 찬가적인 의드롤 비가와 애가 형식 아래 숨김(p. 482).
『두이노의 비가』는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시, “말은 중핵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순수한 “단언”이라는 예지의 규정은 실제로 찬가 일반에 대해 타당하다(p. 484).
영광과 완전히 일치하는 점에서 칭찬에는 내용이 없다. 칭찬은 ‘아멘’에서 정점에 달한다. ‘아멘’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단지 이미 말한 것에 동의하고 결론지을 뿐이다.
『두이노의 비가』가 찬미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찬가의 내용이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재한다는 것, 찬양의 최고 형식으로서의 언어는 공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찬가란 의미를 가진 언어활동을 철저하게 무위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완전히 무위적인 것으로 만들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는 의식의 형식 속에 간직되는 말이 그것이다.
8.22. 바울, 아우구스티누스에게의 무위
영광은 하느님의 오이코노미아 기계가 완성되고 하느님을 시중드는 천사들의 위계가 완전히 무위적인 것이 되었을 때 남는 것이다. 지옥에서는 형정(刑政)과 같은 것이 여전히 가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천국에는 통치가 없어진다.(p. 488-489).
영광은 최후의 심판 후의 무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영광은 영원한 ‘아멘’으로, 거기서 모든 일 그리고 신과 인간의 모든 말은 해소된다.
무위는 하느님께 가장 고유한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또한 세상의 종말에서 기다려지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이 『성경』과 랍비 문헌의 주제인 안식일이라는 모티브를 전개하면서 종말 때의 조건인 안식과 무위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연관성은 그리스도교적 왕국관을 심오하게 표시한다(p. 491).
“안식일을 상 또는 형상으로 하는 무위란 천상의 왕국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식은 본질적으로 무위인 종말론적 영광의 이름이다. … 하느님은 본인이 모든 것의 무위이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클레멘스 1세의 주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신국론) ‘행동’에 대해서도 또 ‘휴식’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말할 수 없음을, 피조물들의 궁극적 무위 문제는 인간과 천사 모두의 지성을 넘어섬을 깨닫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도가 말한 것처럼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평화이다(p. 492).’”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처럼 최종적인 모습을 더할 수 없이 철저한 안식일-지키기로 규정한다. 안식일에는 안식일로 휴식하도록 하는 것, 무위가 무위 속에서 해소되도록 하는 것이 이 그것이다.
“이 세대가 지난 다음에는 일곱째 날처럼 하느님이 쉴 것이다. 하느님은 이 일곱째 날을 당신 안에서 쉬게 만들 것이다.”
8.23.
그리스도교 신학에 따르면 최고 권력의 최초와 최후에 있는 것은 행위나 통치라는 형상이 아니라 무위라는 형상이다(p. 495).
우리가 생각할 수도 또 볼 수도 없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영광’이 구름과 휘장의 빛으로 덮어 가리고 있는 무위의 위엄이다. 신학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이 영광은 권력의 무위라고 할 수 있는 이 생각할 수 없는 텅빈 것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말할 수 없는 텅 빈 것이야말로 권력에 영양을 마련해주고 부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통치 장치의 중심, 즉 왕국과 통치가 끊임없이 서로 왕래하고 부단히 서로 구별하는 경계선은 실제로는 공허함을 의미한다.
무위는 통치 기계에서는 너무나 본질적인 것이어서 무위는 영광이라는 형태로 이 기계의 중심에 어떻게든 받아들여지고 유지되어야만 한다(p. 496).
‘텅 빈 왕좌’의 숭배: 크노소스의 ‘왕좌의 방’, 알렉산드로스의 텅 빈 왕좌, 로마의 ‘행정관의 의자’, 비잔틴 바실리카 개선문과 성당의 후진을 장식하는 ‘왕좌의 준비’
역사가들은 통상 이 텅 빈 왕좌라는 도상을 신적이든 세속적이든 왕권의 상징으로 해석해왔다(p. 498).
이 왕좌가 왕권의 다른 휘장과 마찬가지로 주권자의 인격보다는 오히려 주권자의 기능과 ‘존엄’을 가리킴(p. 499).
왕좌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항상 준비되어 있으며 오래 전부터 항상 하느님의 영광을 기다리고 있었다(p. 500).
8.24.
영광의 장치는 텅 빈 왕좌의 위엄에서 완전한 암호를 발견한다. 신성의 궁극적 신비를 구성하는 생각할 수 없는 무위를 통치 기계 내부로 포획하는 것 – 그리고 그것을 이 기계의 비밀스런 동력원으로 만드는 것이 – 이 장치의 목표이다(p. 501).
본 연구를 이끌어온 의도에 따라 이 장치를 권력의 중심을 이루는 비밀을 꿰뚫어볼 수 있도록 해주는 인식론적 패러다임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영광송이나 식전이 권력에 왜 그토록 본질적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의 오이코노미아는 자신의 한가운데 축제나 영광의 형태로 인간과 하느님의 무위처럼 보이는 것을 확고하게 마련해둔다. 인간의 삶은 무위적이며, 목적이 없지만 다름 아니라 바로 이 ‘파공(罷功)’, 이처럼 목표가 없는 것이 인류의 비할 데 없는 근면을 가능하게 해준다. 인간은 생산과 노동에 몸을 바치는데, 이는 인간이 본질에서 일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으며 인간이 안식적 동물 중 최고이기 때문이다.
이 무위가 서양의 정치적 실체로, 영광을 통해 모든 권력에게 영양을 공급해주고 있다. 축제와 게으름이 서양의 꿈이나 정치적 유토피아에서 부단히 되돌아오고, 마찬가지로 부단히 좌초하고 마는 것은 이 때문이다(p. 502).
8.25.
왜 권력은 무위와 영광을 필요로 하는가?
무위와 영광은 무엇이 그토록 본질적이어서 권력으로 하여금 통치 장치의 텅 빈 중심에 어떻게 해서든 이 두 가지를 기입하도록 만들까?
무엇이 권력에 영양을 제공할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광의 장치 밖에서 무위를 생각하는 것은 가능할까(p. 504)?
우리가 사는 삶: 우리의 자서전을 규정하는 사실이나 사건의 총체
우리가 그것을 위해 사는 삶: 삶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고 삶에 이미와 형식을 부여하는 것
메시아 속에 산다는 것은 정확히 전자의 삶의 모든 측면을 매순간 철회하고 무이적으로 만들며, ‘우리가 그것을 위해 살고 있는 삶’이 삶 속에 나타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p. 507).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해졌을 장치에 따라 영생 그리고 이 삶의 무위성을 별개의 영역에 고립시키는 영광스런 삶에 대한 독트린이 메시아적 삶에 대한 독트린을 대체해나간다. 모든 형식을 무위인 것으로 만드는 삶 자체가 이제 영광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형식이 된다. 이와 같이 신학자들에 따르면 움직이지 않는 것, 재바름, 절묘함, 명료함이 영광을 입은 몸의 삶을 규정하는 성격이 된다.
8.26. 스피노자 『에티카』
스피노자: 무위 = 평온함 = 영광
“평온함은 그 자체로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 더불어 행동할 수 있는 자신의 잠재력을 관조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기쁨이다” 여기서 “인간이 자기 자신과 더불어 행동할 수 있는 자신의 잠재력을 관조하는” 데 있는 무위란 무엇일까? 그리고 이 관점으로부터 “영광과 다르지 않은” 무위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하느님의 무위는 무기력이나 무활동이 아니라 괴로움도 또 애씀도 모르는 행동 형식”(p. 510)
스피노자의 무위
행동하거나 무엇을 하는 모든 특수한 잠재력을 무위적인 것으로 만드는 독특한 ‘실천’(p. 511)
‘자아’라고 하는 것, 주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삶의 살아갈-수-있는 가능성처럼 모든 행함(유위)에서 중심적인 무위성에 자신을 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무위성에서 우리가 사는 삶이란 단지 우리가 그로 인해 살아가는 삶일 뿐이다.
우리는 서양 철학의 전통이 관조적 삶과 무위에 배당해온 본질적 기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에 고유한 실천이란 안식으로, 그것은 생명체에 특수한 기능을 무위적으로 만들어줌으로써 그러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관조와 무위는 인류 발생의 형이상학적 조작자로, 이 조작자는 살아 있는 인간을 생물학적 또는 사회적 운명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온 규정하기 어려운 차원에 인간을 배당한다(p. 512).
우리가 여기서 그것의 게보를 추적해온 신학적 오이코노미아의 관점으로부터 보자면 무위성을 신학적 오이코노미아 자체의 장치 속에 포함시키는 것만큼 긴급한 일도 없다. ‘영원한 삶’은 인간적인 것이 가진 이러한 무위적 중심을 기리키는 이름이다. 즉 오이코노미아라는 기계와 영광이라는 기계가 부단히 내부에 포획하려고 하는 서양의 이러한 정치적 ‘실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 하느님이 하는 모든 일을 무위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있는 이러한 조작의 모델은 시이다(p. 513).
시적 주체는 시를 쓴 개인이 아니라 언어가 무위인 것이 되며, 따라서 그러한 주체에서 그러한 주체를 위해 순전히 말할 수 있는 것이 되는 지점에서 스스로 태어나는 주체이다.
시가 말할 수 있는 잠재력과 관련해 완수한 것을 정치와 철학은 행동할 수 있는 잠재력과 관련해 완수해야만 한다.
오직 통치와 영광의 이러한 계보학에 의해 열린 관점에서 바라볼 때만 비로소 기술에 관한 물음이 형이상학의 궁극적 질문으로 제기하려는 하이데거의 결단이 본래적 의미를 획득하고 또한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하이데거는 ‘모으기’를 기술의 본질로 규정한다(p. 513-514).
‘모으기’는 절대적이고 전면적인 세계 통치 장치이다.
존재의 오이코노미아가, 존재가 은폐되어 있는 것 속에서 존재를 획기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오이코노미아적 신학과 마찬가지로 권력이 통치라는 형상 속에 들어가는 것에 대응하는 정치의 비밀이다. 이 비밀을 해결하는 조작은 정치적인 것이다. 이것은 존재나 신적인 것을 보호하는 일이 아니라 존재와 신적인 것 내부에서 그것의 오이코노미아의 작동을 멈추고 그것을 완료하는 조작이다(p. 515).
경계영역
본 연구로 우리는 영광이 광희와 노래들로 감싸고 있는 기계의 중심 근처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p. 516).
영광, 환호송이나 영광송이 하는 본질적인 정치적 기능은 오늘날 종말을 맞이한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말해 의식이나 전례는 오늘날 단순화되는 경향이다(p. 517).
“‘인민’이란 공적 영역에서만 존재하게 되는 개념이다. 인민은 공공송 속에서만 출현한다. … 인민은 환호송을 보낼 수 있다.”
환호송과 공공성뿐만 아니라 환호송과 민주주의가 풀기 힘들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 것뿐만 아니라 환호송이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존속하면서 취하는 형식을 특징한 것은 슈미트의 기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p. 519).
인민-환호송-여론이라는 구성적 연결을 출발점으로 할 때만 공공성 개념을 권리들로 재통합하는 것이 가능하다. 공공성 개념은 오늘날에는 “상당히 모호해져버렸지만 모든 정치 생활에서, 특히 현대 민주주의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여론은 근대적 유형의 환호송이다.”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오히려 권위주의 전통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환호송이라는 요소를 진정한 민주주의 전통과 독특한 방식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보다는 영광의 영역이 근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영역으로, 즉 여론이라는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하는 부분이다(p. 520).
드보르는 자본주의 정치와 경제의 전 지구적 변형을 ‘스펙터클들의 광대한 축척’으로 진단했는데, 그러한 축척에서는 상품과 자본 자체가 이미지라는 미디어적 형태를 띤다.
현대 민주주주의는 전적으로 미디어에 기반한 민주주의이다.
세속적 의식에 대해서도 교회 의식에 대해서도 항상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원초적인 민주주의적 현상’으로 간주되는 이것은 스펙터클한 권력이라는 형태로 그리고 스펙터클한 권력의 전략에 따라 다시 한 번 포착되고 방향이 정해지고 조작된다(p. 521).
본 연구를 통해 우리는 환호송을 보내는 인민의 직접적 현전에 기초한 전체론적 국가와 주체 없는 커뮤니케이션 형식으로 해소되는 중립화된 국가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직 외견에서뿐임을 보여줄 수 있었다. 양자는 단지 하나의 도일한 영광의 장치가 두 가지 형식을 취한 것에 불과하다(p. 524).
‘동의에 의한 통치’와 결국 동의의 기초가 되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은 실제로는 환호송으로 향하게 된다(p. 525).
드보르가 ‘스펙터클 사회’라고 불렀으며 커뮤니케이션 행위 이론가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동의 민주주의는 영광의 민주주의로, 여기서 오이코노미아는 영광과 영광송적 기능 속으로 전면적으로 해소되어 의식이나 식전으로부터 해방되어 전대미문의 규모로 절대화되어 사회생활의 전 영역으로 샅샅이 파고들어간다(p. 526).
우리 문화는 정치성이라는 기준을 어디서 끌어내야 할까?
어떤 것에 고유하게 정치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실체는 무엇인가?
본 연구가 시사하는 답변은 영광이다.
‘동의에 의한 통치’나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오이코노미아가 어떤 식으로든 들먹여야 하는 인민은 본질에서는 환호송이고 ‘영광’이다(p.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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