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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개요.

 

올해 강의는 자기 해석학 테마의 형성에 할애되었다. 이 실천들은 그리스어로는 epimeleia heautiym 라틴어로는 cura sui라 불리는 바의 영역에 속한다. ‘자기 자신을 돌보기’, ‘자신을 배려하기’의 원칙은 자기 인식의 빛에 가려진 것처럼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 같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인식해야 하는 규칙은 자기 배려의 테마에 일정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대 문화 전반에 걸쳐 ‘자기 배려’에 부여된 중요성과, 또 자기 배려가 자기 인식과 연결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다. 첫째로 소크라테스에게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재판관들에게 자기 배려의 스승으로 소개한다. 소크라테스는 동료 시민들이 ‘자기 자신들을 돌보도록’ 애쓰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좀 뒷부분에서 이 역할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한다. (519)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도록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물질적 사업이 아니라 도시국가를 돌보는 법도 가르치기 때문에 그 일이 도시국가를 위해 유익하고 올림피아 제전에서 승리한 운동선수보다도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재판관들은 타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도록 가르친 소크라테스를 징벌할 것이 아니라 포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후로 8세기가 지나서 epimeleia heautou 개념은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갖고 출현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각인하고 육신이 더러움으로 뒤덮은 초상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을 돌볼 필요가 있고’ 이성의 빛을 밝혀 영혼의 모든 구석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고대철학과 마찬가지로 자기 배려의 영향하에 놓이고, 또 자기인식의 의무를 이 같은 본질적인 배려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 우리는 이 양 극단의 지표 사이-소크라테스와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에서 자기 배려가 단지 원리만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항구적인 실천을 구축했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리스에서 고도의 가치를 인정받은 생활의 정언이었다. (520) 스파르타인들에게 여가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 보내는 시간이다. 크세노폰은 농업경작을 지휘하는 집 주인의 일을 지시하기 위해 epimeleia를 사용한다. 그것은 신들과 죽은 자들에게 하는 예식적 의무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백성을 돌보고 도시국가를 통치하는 군주의 활동을 푸루사의 디온은 epimeleia라고 명명했다. 따라서 철학자들과 도덕주의자들이 자기 자신을 배려할 것(epimeleisthai heauto)을 권고할 때 단순히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오류와 위험을 피하거나 피난하라고 충고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복잡하고 규칙화된 활동의 영역을 참조한다. 고대철학 전반에 걸쳐 자기 배려는 의무이자 기술, 근본적인 의무이자 심사숙고 하여 고안된 절차들의 총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 배려에 할애된 연구의 출발점은 자연히 ‘알키비아데스’이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와 1,2 세기 텍스트들과의 대조는 몇 가지 중요한 변형을 보여준다. (521)

1)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인생의 일시적인 단순한 준비가 아니라 생의 형식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이후에 타자 돌보기를 자신이 원했으므로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를 돌보아야 한다. 인간은 평생 동안 자기 자신의 대상인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여기로부터 자기로의 회귀 관념, 자기 자신으로 귀환하는(eis heasuton epistrephein) 실존의 운동 관념이 결과된다. Epistrophe 테마는 전형적으로 플라톤주의 테마이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에서 이미 볼 수 있었듯이 영혼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이 시선이 ‘위쪽으로 -신성한 요소 쪽으로, 본질들 쪽으로, 이것들이 보이는 천상계 쪽으로 끌려올라가는 운동이다. 세네카, 플루타르코스, 에픽테토스가 권유하는 회귀는 말하자면 제자리에서 하는 회귀이다. 이 회귀는 자기 가까이에 자리잡는 것, 자기 자신안에 거주하는 것, 거기에 머무는 것 말고는 다른 목적이나 사항이 없다. (522) 자기로의 회귀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와 상당수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 있다. 이 같은 관계들은 자기 자신의 지배자가 되기, 자신에게 완벽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완전하게 독립적이기, 완벽하게 ’자기에게‘ 속하기와 같은 법률-정치적 모델 위에 구상된다. 또한 이 관계들은 자신을 향유하기, 자기 자신과 더불어 즐거움을 취한다, 자신 안에서 모든 관능을 발견하기와 같은 소유적인 향유의 모델 위에서 표상된다. (523)

2) 두 번째 큰 차이는 교육과 관계가 있다. ‘알키비아데스’에서 자기 배려는 교육의 결함 때문에 부과되었다. 교육을 보충하거나 교육을 대체하는 것이 문제시되었는데 아무튼 ‘교육’을 시키는 것이 문제시되었다.

자기에의 전념이 평생동안 수행해야 할 성인의 실천이 되어 버린 순간부터 그 교육적 역할은 사라지고 다른 역할들이 단언되는 경향이 있다.

a) 우선 비판적 역할이 있다. 자기 실천은 대중이나 나쁜 스승, 또 부모나 측근들로부터 습득할 수 있는 모든 악습과 그릇된 의견을 버리게 해주어야 한다.

b) 하지만 자기 실천은 투쟁의 역할도 하고 있다. 자기 실천은 계속되는 싸움으로 이해된다. 미래를 위해 가치 있는 인간을 양성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개인에게 평생동안 싸울 수 있는 무기와 용기를 줄 필요가 있다.

c) 하지만 특히 이 자기 수양은 치료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자기 수양은 교육적인 모델보다는 의료적인 모델에 훨씬 더 가깝다. 철학의 역할이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것이라는 에피쿠로스 주의자, 견유주의자, 스토아주의자에게 친숙한 원칙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523)

3) 1,2세기에 자기와의 관계는 항시 스승이나 지도자 혹은 아무튼 타자와의 관계에 근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애정관계로부터 더욱더 현저하게 독립되는 상태에서이다. 타자의 도움없이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으로 용인되는 원칙이다. 갈레노스는 인간이 홀로 자기 자신의 정념을 치료할 수 있기에는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영혼의 수련에서 주목할 만한 바는 그 실천의 근간이 되는 사회적 관계가 다수적이라는 점이다.

- 엄격한 교육 채제가 존재한다.

- 또 특히 로마에는 사적인 고문들이 있다. (524)

- 하지만 영혼 지도는 다른 형태로도 수행된다. 영혼 지도는 가족관계, 보호관계, 연령-교양-상황을 통해 볼 때 가까운 두 사람 사이의 우정 등과 같은 일련의 다른 관계들과 중첩하게 되고, 또 이 관계들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혼의 서비스’라 부를 수 있는 바는 이렇게 구축된다. 전통적인 eros는 고작해야 임시방편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확실히 오늘날 현대의 사랑과 우정의 범주들은 고대의 애정관계를 해석하는 데 부적합하다.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와 그의 스승 프론토와의 서신 교환은 애정관계의 강도와 복잡성의 예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기 수양은 askesis라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지시되는 일군의 실천들을 포함한다.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에 대해 경솔한 짓들을 할 피룡가 없다. 훌륭한 격투사처럼 우리는 발생 가능한 사건들에 대항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사건들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 법과 사건들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에 사로잡히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525)

그런데 발생 가능한 사건들 앞에서 자기 제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이 필요한가? 참되고 합리적인 담론을 의미하는 logoi가 필요하다.

참된 담론과 관련해 세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1) 그 속성의 문제이다. 세계, 자연, 신, 기적의 원인, 생사의 법칙을 지배하는 원리들을 인식하는 것은 에피쿠로스 주의자들에게 실존의 사건들에 대비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스토아주의자들은 견유주의의 독트린과 근접성의 여부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즉 어떤 사람들은 실천적 규정들을 보충하는 이론적 원리인 dogmata에 최대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반대로 행동의 구체적인 규칙들에 우선권을 부여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바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참된 담론들이 세계와 우리와의 관계, 자연의 질서상에서 우리의 위치, 일어나는 사건들과 관련한 우리의 의존성이나 독립성 내에서만 우리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참된 담론들은 우리의 사유, 표상, 욕망의 해석이 결코 아니다.

2) 제기되는 두 번째 문제는 이 참된 담론들이 우리 자신 내에서 존재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참된 담론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필요가 느껴질 경우 그것들에 호소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이나 불행이 닥칠 경우 우리 자신을 그것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것들과 관련된 참된 담론들에 호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526) 플루타르코스는 정념이 동요하기 시작할 때 저절로 들리는 내면의 목소리로 참된 담론을 환기한다. 참된 담론은 마치 “목소리만으로 개들의 으르렁거림을 잠재울 수 있는 스승”과 같을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자신의 본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영혼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플라톤이 추천하는 활동과는 아주 다른 활동이 발견된다. 반대로 플루타르코스나 세네카가 제안하는 것은 교육, 독서, 권고를 통해 주어진 진실의 흡수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자기의 일부분으로 만들고 행동의 항구적이고 늘 능동적인 내적 원리로 만들 때까지 자기화한다. 이와 같은 실천에서 상기 운동을 통해 자기 자신 깊은 곳에 숨겨진 진실을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추진된 자기화를 통해 획든된 진실들을 내면화한다.

3) 그래서 이 자기화의 방법에 관련된 일련의 기술적인 문제들이 제기된다.

- 경청의 중요성이 있다. (527)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바에 물음을 던지고, 또 그것을 말하게 하려고 했던 반면에 스토아주의자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제자는 우선 정숙하고 경청해야 한다.

- 글쓰기의 중요성이 있다. 일지들은 수련이었다.

- 배운바를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자기로의 회귀가 또한 중요하다. eis heasuton epistrephein 이 갖는 정확하고 기술적인 의미, 요컨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거기에 놓아둔 ‘부’를 점검하기 이다. 인간은 이따금씩 다시 읽는 일종의 책을 자기 자신 안에 갖추어야 한다. 이는 예이츠가 연구한 기억 기술의 실천에 해당된다. 주체가 모르고 있었고 또 주체 내에 거주하지도 않던 진실로 무장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학습되고 기억되며 점진적으로 적용된 진실을 우리 자신 내에서 지고하게 군림하고 있는 유사-주체로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528)

 

 주체의 해석학 강의개요 16.05.0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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