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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_역자 서문 발제_윤명_샘.hwp


1.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는 성의 주제에 전혀 골몰하지 않았고, ‘주체의 문제에 지속적 관심을 보인다. 이는 1980년대 푸코가 서구의 성의 역사를 쓰는 데 전념한 것으로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 강의가 있기 전인 <주체성과 진실>에서 그가 시작한 고대 그리스로마의 쾌락의 주체에 대한 분석의 이론적 틀을 명백히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왜냐하면 주체가 자기 자신의 쾌락과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보다 넓은 차원에서 자기와 자기의 관계를 전제해야 하며, 성은 이 자기 관계의 여러 표현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부터 부단히 제기한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 입각해 이해해 보려고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푸코는 자신의 철학적 계획에 대해 나는 우리 문화 내에서 주체화의 상이한 방식들에 대한 역사를 쓰려 했다. 이러한 시각에 입각해 나는 인간의 존재를 주체로 변형시키는 세 유형의 대상화를 다루었다.”고 말했다. 그 첫 번째 방식은 어떤 조건하에서 주체는 진실된 바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고, 두 번째 방식은 어떤 조건하에서 주체에 대한 참된 인식이 가능한지를 파악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주체성과 진실에 관한 이 두 문제에 입각해 또 이 문제에 반하여 푸코는 세 번째 질문을 던진다.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진실 생산은 어떤 한도 내에서 주체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느 경험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고 또 변형시키는 것일까? 이같은 푸코의 물음은 전자처럼 비판의 문제도 아니고, 후자처럼 실증주의적인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 서두에서 명시하듯이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문제이다.

이처럼 <주체의 해석학>은 주체의 대상화 가운데 하나이고, 푸코는 거기서 고대의 고행을 이용한 주체화 방식을 탐색하며, 이같은 계보학적 목표를 가지고서 자기 배려에 접근한다. 푸코가 고대 그리스로마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근대적인 진실 이해 방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체와 진실과의 관계와는 완전히 이질적이고, 다른 유형의 주체-진실 관계의 가능성을 해명하여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는 한 주체가 자기를 스스로 구축하고, 설립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방식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는 지극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이를 통해 연구하는 것은 경청, 독서, 글쓰기, 자기 통제, 의식 점검 등과 같이 실존의 테크닉에 해당되는 테크닉과 그것을 습득하기 위한 도식들이다. 이러한 수련을 통해 자기 자신을 구축하고, 타자, 재화, 자신의 신체와 관계를 구축하는 주체를 우리는 윤리적 주체라 명명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주체화를 논의하며 푸코는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존의 기술들에 의해 고안되고 구축된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기술들을 통해서 자기와의 한정된 관계가 설정된다. 따라서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의 연구 대상은 역사적으로 한정 가능하고 포착 가능한 자기관계의 방식들이다. 그리고 윤리의 장은 한정되고 규칙적인 관계를 자기와 자기 간에 설정하기 위한 실천적 절차들의 총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대체적으로 진실에 대한 인식론적인 개념에 입각해 사람들은 자기 배려가 아니라 자기 인식이 고대철학을 지배했고, 또 그 이후에도 철학을 계속 지배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주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장차 정신과학’, ‘심리학’, ‘의식의 분석’, ‘psykhe’ 등으로 명명될 학문의 초벌 형식에 해당하는 자기 인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철학의 탄생 시기부터 기독교 금욕주의에 이르는 시기에 있어서 자기 인식은 자기 배려라는 일차적 정언에 부응하는 한 방식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려고 한다.

푸코는 이 자기 배려가 억압된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먼저 자기 배려의 정언은 오늘날 일종의 도덕적 댄디즘, 극복 불가능한 미학적·개인적 단계의 단언과 위협이나 집단적 도덕을 지탱할 수 없는 개인의 자폐 상태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푸코가 누차 강조하였듯이 그리스로마의 윤리는 도덕률이나 신의 명령에 의해 지배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은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주체의 객관화문제를 인식의 영역에서 보는 반면, 그리스 시대·헬레니즘 시대·로마 시대의 고대인들은 주체의 영적인 경험인 세계에 대한 지식의 구축문제를 본다. 그리고 또 다른 근대인인 우리가 법질서에 예쏙된 주체를 보는 반면,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진실의 실천을 통한 최종적 목적인 주체의 구축을 본다. 바로 이점이 푸코가 고대의 자기 배려에서 특별히 주목하는 부분이다. 자기 배려는 만인에게 부과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보편적 원칙이나 정언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 삶의 선택 대상으로 주어진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의 연장선상에 있다. 서구의 문화는 자기 배려라는 애초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자기 포기 쪽으로 고대의 윤리를 끌고 가는 기독교의 금욕주의적인 규칙들을 자기화했다. 결국 기독교가 재해석한 자기 배려의 전통에서 결과되는 비이기주의 윤리의 전승이 역설적으로 서구인으로 하여금 자기 배려를 불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진실과 진실의 역사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푸코에 의하면 자기 배려의 정언은 데카르트의 순간에 의해 결정적으로 소거되었다. 고대그리스의 자기 배려의 구도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정한다. “진실은 주체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갖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변형시키고, 개선해 어느 정도는 현재의 자신과 다르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진실은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거는 대가로서만 주체에게 주어진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서는 주체는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주체는 연애술이나 자기 수련을 통해 자기를 변형시키지 않고서는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러한 영성과 구도의 조건들은 소거한다.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주체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오랜 자기 변형 훈련을 따라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진실에 접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오직 인식이라는 것을 용인하는 순간 우리는 근대로 접어든다.”고 푸코는 강조한다. 근대 이후 철학은 진실과 오류를 존재하게 하는 바에 대해 순수한 성찰을 하고, 주체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바에 대해 자문하며, 그 한계를 설정하려 하는 사유의 형식이 된다. 따라서 이제 지식은 더 이상 현자가 도달해야 할 완결 지점이 아니라, 인식의 막연한 여정이 된다. 그리고 이 지식은 그 생산자와는 독립적으로 축적되는 대상이 된다. 이 같은 근대적 지식의 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지식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고대의 주체화 방식은 행위의 완벽성이 불가능함을 잘 알지만, 자신이 잘 행우하고 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 주체의 구출을 목표로 하는 방식인 반면에, 기독교와 근대의 주체화 방식은 자신의 환원 불가능한 한 부분이 인식을 항시 벗어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 자문하는 방식이다.

자기 배려아 자기 인식의 대립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종속 관계와 우열의 구조를 설정하는 것이다. 고대의 주체화 방식과 관련해 푸코는 고대에도 분명히 자기 인식의 규율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내적 정당성을 가질 수 없었고, 또 자족적 임무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반대로 고대의 자기 인식은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자기 배려의 범주 내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내가 내 자신의 감성과 사유를 독서함으로써 내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바는 내가 보다 곧게 행동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와 근대의 주체화 방식에서 자기 배려는 자기 인식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단지 보다 잘 행위하기 위해서 자기 인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잘 알게 해주는 한에서만 내 행위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진술하기 위해서 자기 인식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서구에 있어서 참된 담론의 대상으로서의 주체의 구축은 곧은 행동의 윤리적 주체를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이 푸코 논지의 핵심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실된 주체이기 위해서 우리가 행하는 바에 대해 말하고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지, 우리가 사유하거나 말하는 바를 행하는 것에 많은 중요성과 무게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3. 자기 인식은 자기 실천의 범주에서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고대의 사유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응시해야 한다라는 관념과 자기 자신을 목전에 놓아야 한다는 관념을 아주 빈번히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으로의 시선의 전환은 인식, 해독, 해석의 장인 내면성을 여는 행위가 아니라고 푸코는 강조한다. 자기에로의 시선의 전향은 세계의 사물과 타자로부터 시선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고, 세계의 동요와 건강하지 못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선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악덕을 알려고 노력하는 건 우리의 악덕을 알아 제거하기 위함이고,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적인 예를 찾기 위함이어야 한다. 자기 배려 내에 인식이 개입하지만 그것은 인식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식의 내용들이 인식 주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조건하에서 인식이 개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응시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분석·해독·성찰의 대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유를 수행해야 할 행동에 고정시켜 사유가 내면의 안내자를 따르게 하기 위함이고, 생의 소용돌이에 자신이 휩쓸려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고대 그리스의 경험에서 주체는 가능한 인식으로 열린 존재가 아니라, 그가 인식하는 진실에 입각해 구축되고 고안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자기 배려, 자기 실천은 인식의 형식과 관련될 때에도 자기와 인식의 다른 대상들을 분리하지 않는다. 동일한 대상을 아는 것이 문제이지만 이 대상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주체의 존재 방식, 즉 주체의 ethos(성격 습성 등 개인적인 특질)에 이 사물의 인식이 발행시키는 효과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진실된 담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타자·사물·세계에 대한 진실의 생산은 인식 주체의 존재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배려는 우리로 하여금 사건들에 대면할 수 있는 정언적 명력(칸트 철학에서 행위의 결과에 구애됨이 없이 행위 그것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이라는 장비를 갖출 수 있게 해준다. Logoi(언어를 매체로 하여 표현되는 이성)는 실제로 발화되고 경청되며, 반복되는 문장이고, 주체가 반복하여 정신에 각인하여 항구적으로 현실의 시련에 놓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한 명령적 정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확신을 줄 뿐만 아니라 행동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설득적이다. 그래서 logoi 자체가 차츰차츰 주체의 이성과 일체가 되어 주체의 자유와 의지가 자기 자신을 위해 말하는 듯한 효과를 발생시킨다. 고대인들은 진실을 기억하는 훈련을 통해 의미로서의 진실을 관념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고대인들은 진실을 기억하는 수련을 통해 진실이 자기 자신의 신체가 되기를 갈망했다. 진실을 아는 주체는 이 진실의 윤리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푸코가 말하는 철학적 자기 수련은 참된 담론의 주체화를 목표로 삼는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진실은 우선적으로 스승의 말과 글로부터 온다. 스승의 참된 말의 경청은 aletheia(truth or disclosure)ethos로 구축하는 데 불가피한 매개자 역할을 한다. 청각은 독자적으로 자신에게 들리는 바를 선별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들을 뿐이며, 들은 바만을 영혼에 전달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스승의 말은 적나라한 단순한 진실이 아니라 말을 통해 표현되고 로고스를 표현하는 일정한 양식을 갖고 복잡하고 난해한 고유의 운동을 수반할 수 있다. 이러한 진실의 물질성이 제자에게 본질적인 모호함을 줄 수 있다. 의미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주체가 진실을 체현화할 수 있는 능력이 관건이기 때문에 결국 로고스의 물질성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결국 청자가 나쁜 물질이 아니라 좋은 물질을 체현화할 수 있게 만드는 교육이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제자의 신체가 스승의 말을 따라가는 운동과 연관된 경청의 테크닉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푸코는 말의 용례에 있어서도 진실된 바를 주체화할 수 있게 해주는 방식으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테크닉의 고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테크닉이 바로 parrhesia(솔직히 말하기)이다. 푸코에 따르면 말하는 자가 자신이 하는 말에 연루되는 것이 parrhesia의 기준이 된다. 진실을 말하는 주체가 자신이 말한 바를 동시에 체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말의 진정한 보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승의 입장에서 행동의 주체와 발화 주체 간의 정합성은 참된 말이 그것을 들은 제자의 행동과 존재 방식으로 변화되기 위한 조건이다. 말하자면 진실의 순환 절차가 존재한다. 이것은 분명 주체성의 순환, 다시 말해서 진실을 매개로 한 ethosethos의 순환이다.

푸코가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진실의 실천에서 이같은 자기 경험이 근대와 현대의 우리가 하는 자기 경험에 의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서구 역사에서 자기 수련과 자기 실천은 완전히 다른 목적하게 재구성되었다. 푸코에 따르면 카시아누스가 동방의 수도원 제도를 서양에서 제도화한 시기를 언급하는데, 카시아누스의 목적은 수도사의 존재 방식을 변형시키는 것이었지만 고대와는 목적이 다르다. 수사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었다. 수도사는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욕망을 극복하는 자이다. 그는 복종을 에토스로 구축해야 하고 복종을 자신의 항구적인 존재 방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복종은 지도자의 능력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그가 부여한 명령의 내적인 정합성에 기초하고 있지도 않다. 이와는 정반대로 부조리한 명령처럼 유익한 것은 없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자기 실천의 장에서 자기는 특수한 진실 생산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과 행동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형성하고 변형시키려 하는 자기 실천의 대상이었다. 진실을 주체화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수도원 모델과 더불어 서구는 진실의 주체화를 거치지 않는 자기 실천으로 넘어간다. 이순간부터 오늘날 근대 주체의 존재 방식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고백의 실천, 자기에 대한 해석학적 언표는 현대인의 복종의 근본적인 형식이 되어 존속하고 있다.

 

4.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해방될 여지가 아직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포로라는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 구축 방식의 포로임을 의미한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푸코가 자기 기술이라 부르는 다수의 기술에 호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고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고대의 자기 기술들을 연구하면서 고대인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해 낸다. 고대의 윤리적 주체가 제기하는 문제는 오히려 나는 나를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가?‘였다. 그것은 발견해야 할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해야 할 행동의 문제였다. 고대에 자기와 자기를 분리시키는 것은 인식의 거리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와 생이라는 작품의 거리였다는 점을 푸코는 강조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해석을 통해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위 자신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는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에서만 권력에 대한 궁극적인 저항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푸코가 제안하는 자기 배려는 행복의 기술이 아니다. <주체의 해석학>에서는 내적 만족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체성에 대한 역사적 탐구가 주요 관건이다. 푸코는 이러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 차이와 거리를 도입함으로써, 사람들이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주체의 정체성을 해체하여 재창조하려 시도한다. 그래서 푸코는 우리가 주체로서 우리 자신과 맺는 가장 비역사적으로 보여지는 관계방식의 역사성을 증명함으로써 우리를 우리 자신의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투쟁이 정치적 지배에 대한 저항이나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정체성의 예쏙에 항거하는 투쟁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오늘날 혁명을 말하는 것이 아직도 시의적절하다면, 그것은 윤리적 혁명이 가장 장래성이 있다는 한에서일 것이다.

푸코는 철학을 실천하는 독특한 양식을 창조해 냈다. 그의 철학적 실천의 특수성은 철학적 실천이 담론의 가치나 인식의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 현실태를 파악하고, 현실태의 수동적 반복을 중단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창조하며, 그것을 사는 것이 관건이라는 말이다. 푸코는 우리의 현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두 도구를 제시한다. 하나는 우리가 지극히 자연스럽고 자명하게 생각하는 장소인 사유 체계의 현실태를 달리 파악할 수 있는 고고학이라는 도구가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 체계의 현실태를 파악할 수 있께 해주는 계보학이라는 도구가 있다. 이 수치스러운 현실태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푸코는 윤리의 문제에 접근한다. 윤리가 필요한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의 무엇인가를 해방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생산해 내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 생산이라는 점과 관련해 푸코는 배려 개념을 도입한다. , 푸코는 담론과 권력 행사, 자기와 자기, 자기와 타인싕 관계 속에 배려 개념을 도입한다. 그리고 이 배려의 조절이 자기 생산을 윤리적 생산으로 만든다. 이것은 윤리시학적인 실천이며 동시에 탁월하게 정치적인 실천이다. 푸코는 주체는 해석해야 될 비밀의 베일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라, 부단히 창조·변형해야 할 작품이라고 우리에게 외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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