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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월 6일 강의. 전반부
발제 화니짱.
전반적 문제 틀의 환기: 주체성과 진실
지난해 나는 주제성과 역사 간의 관계를 주제로 역사적 성찰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주체성과 진실> - 프랑스어 판으로도 미출간) 그리고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특정한 예와 굴절 표면으로서 고대의 성적 행동과 쾌락의 체제의 문제, 즉 기원후 1,2세기에 규정된 아프로디지아(aphrodisia)의 체제를 선택했었습니다. 올해는 이 구체적 예인 아프로디지아, 성적 행동들의 체제와 관련된 특수한 기제로부터 벗어나 거기로부터 ‘주체와 진실’이라는 문제의 보다 일반적인 용어들을 추출해 보고자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주체성/진실 관계들에 관련된 문제를 설정하려고 시도한 역사적 차원을 소거하거나 취소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지만 이 문제를 훨씬 더 일반적인 형식 하에서 제기해 보고자 합니다. 서양에서 실천의 소관도 아니고 익숙한 역사 분석의 소관도 아닌 ‘주체’와 ‘진실’의 관계들이 어떤 형태의 역사 내에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가 올해 강의에서 내가 접근하려 문제입니다. (40)
새로운 이론적 출발점: 자기 배려(le souci de soi)
서양 철학사 내에서 모두가 gnothi seauton(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이 주체와 진실의 관계 문제를 기초하는 표현이 확실하다고 지적하는 마당에 고대 그리스 사유에 확산되어 있다 할지라도 어떤 특정한 위상을 부여받지 못한 epimeleia heautou(에피메레이아 헤아우토우, 너의 영혼을 돌보라), 다시 말해 자기 배려 개념을 왜 내가 선택했을까요? 오늘 강의의 전반부에서는 epimeleia heautou(자기배려)와 gnothi seauton(자기인식)의 관계 문제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41)
델포이 신전의 격언 ‘너 자신을 알라(connais-toi toi-meme)’에 대한 해석들
Gnothi seauton(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은 신탁에 의뢰할 때 제기해야 할 질문들을 스스로 검토하고 최대 한도로 수를 줄여야 하며, 과다하게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싶은 바에 대해 스스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해석도 있지만 이것 역시 자기 인식의 원리가 결코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3) gnothi seauton(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은 중요한 여러 텍스트에서 epimeleia heautou(에피메레이아 헤아우토우, 너의 영혼을 돌보라)보다 일반적인 범주의 한 형식, 한 결과 또는 구체적으로 한정된 보편적 규칙의 특수한 적용으로 등장합니다. 요컨대 그것은 자신을 망각하지 말고 돌보며 배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배려와 배려의 정점에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규칙이 등장해 표현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플라톤의 텍스트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가 본질적이고 근본적으로 또 시원적으로 타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 배려하며 등한시하지 말라고 선동한 최초의 인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에는 사실상 세 개의 텍스트가 있고 위의 사실을 명시하는 세 구절이 있습니다.
배려의 인간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세 발췌문 분석
첫 번째 구절은 <소트라테스의 변명> 29 d에 있습니다. (44)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사람들은 재산, 명성 등 많은 것들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배려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45) 소크라테스는 신으로부터 아테네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 “여러분 자신을 돌보십시오”라고 임무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두 번째 구절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사형에 처하면, 아테네인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덕에 마음을 쓰도록 권고하는 최후의 사람을 잃게 된다고 말합니다. (46)
마지막으로 세 번째 구절 36b-c는 소크라테스가 받는 형벌과 관련됩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사적인 이득이 아닌 공적인 이익을 추구했으므로, 처벌이 아닌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47)
소크라테스는 타인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재산과 상당수의 시민적 특권들을 무시했으며, 모든 정치적 경력을 포기했고 공직이나 법관직을 탐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선동하는 ‘자기 자신을 돌보기(s’occuper de soi-meme)와 자기를 돌본다는 사실 혹은 경우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는 사실이 소크라테스의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는 바간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즉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보기’의 문제에 있어서 스승의 위상입니다. 즉 타자로 하여금 자신을 돌보도록 선동하는 행위 내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동료 시민들을 각성시키는 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기 배려는 최초의 각성 순간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겁니다. (48) (등에의 역할을 자처했던 소크라테스처럼,) 자기 배려는 인간의 신체 내에 이식되어야 하고 인간의 실존 내에 박혀야 하는 침이고 또한 동요, 운동의 원리이고 생애 내내 항구적으로 있어야 하는 배려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내 생각에 이 epimeleia heautou(에피메레이아 헤아우토우, 너의 영혼을 돌보라)의 문제는 문제의 중요성을 다소 약화시킨 Gnothi seauton(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의 명성으로부터 좀 탈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에게 epimeleia heautou(자기배려)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절대적이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특권적으로 소크라테스와 Gnothi seauton(자기인식)을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고대의 철학적-도덕적 삶의 계율로서의 자기 배려
단지 사유와 실존 상에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출현하는 오직 그 순간에만 이 epimeleia heautou(자기배려)라는 관념이 자기 인식의 필요성을 수반하고 지탱하며 기초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 생각에 epimeleia heautou(자기배려와 거기에 연관된 규율)는 그리스-헬레니즘-로마 문화의 전반에 걸쳐서 철학적 태도를 특징짓는 항구적 원리였습니다. (49) 자기배려에 대한 선동은 헬레니즘-로마의 긴 여름을 거치면서 아주 폭넓게 확신되어 총체적 문화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같은 총체적 문화 현상(자기 배려의 선동과 그 일반 원리의 수용)이 헬레니즘-로마 사회에 고유한 총체적 문화 현상이 되게 하고(어쨌든 엘리트 계층에게), 또 그와 동시에 그것이 사유에 있어서 하나의 사건이 되게 한 결과를 초래한 역사를 올해 강의에서 설명하고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한정된 폭을 갖는 한 문화 현상이 실제적으로 근대적 주체의 존재 양식에까지 관여하는 결정적 계기를 이루는 순간을 사유의 역사 내에서 포착하는 바로 이 일이 모든 사유의 역사가 도전해야 할 핵심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51)
초기 기독교 텍스트에서의 자기 배려
그레고리우스에게는 결혼의 초극(독신)이 금욕 생활의 최초 형식이자 최초의 활동임을 감안할 때 자기 배려의 최초 형식과 결혼 초극의 동일시는 어떻게 자기 배려가 기독교 금욕주의의 모태가 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일반적 태도로서의 자기 배려, 자기와의 관계, 실천들의 총체
젊은이들을 붙잡아 세우고 자기 자신을 돌보라고 설교하는 소크라테스 이래로 자기 배려와 더불어 금욕 생활을 시작하게 한 기독교 금욕주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epimeleia heautou(자기 배려)의 긴 역사와 만나게 됩니다. (51)
- 첫째로 epimeleia heautou는 자기 사진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태도입니다.
- 둘째로 epimeleia heautou는 주의 시선의 일정한 형식입니다. 자기 자신을 배려한다는 것은 자신의 시선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고, 말하자면 시선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이동시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훈련과 명상을 동시에 의미하는 melete와 epimeleia(배려)의 유연 관계가 있습니다. (53)
- 셋째로 epimeleia는 항시 자신에게 가하는 다수의 행위를 지칭합니다. 이 행동들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변형하고 정화하며 변형하고 변모시킵니다. 바로 여기로부터 일련의 실천들이 기인합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명상의 테크닉, 과거에 대한 기억술, 의식 점검의 테크닉입니다. 또 이러한 테크닉이 정신에 제기될 경우 그것은 심상의 점검 기술이기도 합니다. (54)
자기 인식을 위해 자기 배려가 근대에 실추된 이유들: 근대의 도덕, 데카르트의 순간
서구 사상과 철학이 자신의 철학사를 수정하는 방식상에서 무엇 때문에 epimeleia heautou(자기 배려)를 무시한 것일까요? ‘너 자신을 알라’에 그렇게 많은 특권과 가치와 강도를 부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왜 자기 배려를 희생시켜 gnothi seauton(자기 인식)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일까요? 자기 배려가 우리를 동요시키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보기, 자기 자신과 더불어 지내기,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기, 자기 자신을 존중하기 등 자기 자신을 고무하고 경배하며,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고 자기 자신에 봉사하라는 이 모든 권고들은 우리 귀에는 어떻게 들리는 것일까요? (55) 그것은 윤리적 단절의 의지, 허세, 위협, 일종의 도덕적 댄디즘, 초극 불가능한 미학적·개인적인 단계의 단언-도발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집단적 모럴의 붕괴에 직면해 이제 자기 자신만을 돌볼 수밖에 없는 개인의 퇴행에 대한 다소 우울하고 슬픈 표현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표현들이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함의들과 일차적인 효과들은 이 같은 격언들이 긍정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되었건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되었던 간에 내가 논의하는 모든 고대의 사유에서 ‘자기 자신을 돌보기’는 항시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56) ‘자기 자신을 돌보기’라는 정언적 명령에 입각해 서구가 가져왔던 가장 엄격하고 혹독하며 엄정한 도덕들이 구축되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과 관련해 이 같은 도덕의 책임을 기독교에 넘기기보다는 기원 직전의 시기와 기원후 초기의 모럴(스토주의 모럴, 견유주의 모럴, 일정 정도까지는 에피쿠로스주의의 모럴)에 훨씬 더 책임을 돌려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자기 포기의 의무라는 기독교 형식하에서건 타자에 대한 근대적인 의무의 형식하에서건 - 그것이 타자이건, 공동체이건, 계급이건, 조국 등에선간에 - 우리는 계율의 구조상에서 동일한 것으로 재발견되는 이 엄격한 규칙들을 보편적인 비이기주의 윤리의 맥락 내에 재적응시켰고 순서를 바꾸어 전이시켜 놓았습니다.(57) 내가 보기에 ‘데카르트의 순간’은 철학적으로 gnothi seauton(너 자신을 알라)을 복권시키고, 반면에 epimeleia heautou(자기 배려)를 실격시키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첫째로 데카르트의 이 순간은 철학적으로 gnothi seauton(너 자신을 알라)을 복권시켰습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절차는 철학적 절차의 기원과 출발점에서 나타나는 바 그 자체인 의식, 다시 말해서 제로 의식에 어떤 의심 없이 주어지는 자명성을 구축합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절차가 주거하는 곳은 적어도 의식의 형식으로서의 자기 인식입니다. 게다가 주체의 실존의 자명성을 존재에 접근하기 위한 원칙으로(자명성을 체험하는 형식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내 실존을 의심할 수 없는 형식으로) 설정하면서 자기 인식은 ‘너 자신을 알라’를 진실에의 근본적인 접근 통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gnothi seauton과 데카르트의 절차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데카르트의 절차가 상당히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이유로 gnothi seauton을 복권시켰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 배려 원칙을 실격시키고 근대철학의 사유의 장으로부터 배제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습니다.
영지주의의 예외
이것과 다소 거리를 두도록 합시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에 대해 질의하는 게 아니라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존재하게 마드는 바에 대해 질의하고, 또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판단할 수 있다거나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사유의 형식을 ‘철학'이라 명명하도록 합시다. 이것을 철학이라 명명한다면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실천·경험 전반을 영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인식이 아니라 주체, 심지어는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치러야 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 부르도록 합시다. (58) 적어도 서구에 등장하는 바 그대로의 영성의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영성은 진실이 충만한 권리로 주체에게 결코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정합니다. 주체는 그 자체로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영성은 전제합니다. 즉 진실에 도달할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주체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변형하며 이동하고 어느 정도와 한도까지는 현재의 자기 자신과는 다르게 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진실은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거는 대가로만 주체에게 부여됩니다.
영서의 두 번째 중요한 양상으로, 이러한 주체의 개심과 변형은 상이한 형태 하에서 행해질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개심은 주체를 현재의 신분이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활동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극히 관행적으로 이 운동을 그 진행 방향에 입각해 eros(사랑)활동이라 부르도록 합시다. 그리고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고 변형해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형식은 작업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작업, 자기 수련(askesis)이라는 장기간의 노력 속에서 자신이 그 책임을 지는 자기에 의한 자기 자신의 점진적 변환입니다. Eros와 askesis는 서구의 영성에서 결국 진실이 가능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변형시키는 방식을 만들어내는 두 주요한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59)
영성은 진실에의 접근이 시작되었을 때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행해진 영적인 절차들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다른 것에 상당하는 효과, 즉 주체로의 진실의 ‘귀환’이라 부를 수 있는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영성에 있어서 진실은 주체의 인식 행위에 보상을 하고 또 이 인식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은 주체를 개명시켜 주는 것입니다. 진실은 주체에게 지고의 복락을 부여합니다. 진실은 주체에게 영혼의 평정을 가져다줍니다. 요컨대 진실과 진실에의 접근에는 주체 자체, 즉 주체의 존재를 완결시키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간략히 말해 영성에 있어서 인식 행위는 개인이 아니라 주체 존재 내에서 주체 자신에 의해 준비되고 함께하며 이중화되고 완수되지 않는다면 그 주체만으로 결코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영적 인식(gnose)과 모든 영지주의 운동은 인식행위에 지나친 부담을 지우고 또 실질적으로 진실에의 접근에서 인식 행위에 지상권을 부여 합니다. (60)
철학과 영성
도식적으로 말해서 고대라 칭할 수 있는 전시대에 걸쳐, 또 아주 상이했던 방식들에 입각해 ‘진실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문제와 영성의 실천(진실에의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주체의 존재에 필요한 변형)같은 두 문제와 테마는 결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컨대 epimeleia heautou(자기배려)는 정확히 영성의 조건 전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기 변형의 총체를 지시합니다.
몇 세기를 건너뛰어 말하자면, 이제 진실의 역사가 근대로 접어드는데, 이때 진실에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 주체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이 오직 인식이 되어버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실의 역사에서 근대 시기는 오로지 인식만이 진실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이 되는 순간에 시작됩니다. 달리 말해서 철학자에게 어떤 다른 것도 요청되지 않고 자신의 주체 존재를 변형시키라는 요청을 전혀 받지 않고 철학자는 자기 자신 안에서, 또 오로지 인식 행위만을 통해서 진실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61)
요컨대 이 조건들은 구체적인 실존 속이 있는 개인과 관련되지, 있는 그대로의 주체의 구조와는 연관이 없습니다. (62) 주체는 그 자체로서 진실의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주체성과 진실이 맺는 관계의 역사는 다른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생각됩니다. 주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고 또 자신의 존재를 경유해 가로지르고 변형시키는 진실의 ‘회귀 효과’를 통한 주체의 계명 지점, 완결 지점, 변형의 순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인식은 끝을 알 수 없고 진보의 무한한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진실은 그 자체로서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주체는 그 자체로서 진실의 능력이 없으나 진실은 그 자체로서 주체를 변형시키고 구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실천의 형식을 영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의 근대는 주체는 그 자체로 진실의 능력이 있지만 진실은 그 자체로 주체를 구원할 수 없다고 우리가 가정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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