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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1982.1.13. 강의 전반부 / 푸코 / 2016.05.08.(일) /닥홍
160508 19820113 주체의해석학 푸코 닥홍.hwp
소크라테스의 자기 배려 정언 명령의 탄생 맥락 : 훌륭한 가문 젊은이들의 정치적 능력; 아테네 학교 교육 및 성교육의 한계; 무지한 사실에 대한 무지
자기배려라는 표현이 나타난 것은 소위 소크라테스의 대화라고 불리는 대화편에서 지극히 일상적 정치 사회적 맥락입니다. 알키비아데스의 경우 그들의 태생적 신분, 귀족 사회에의 소속, 부 그리고 그들에게 애초부터 부여된 권위가 그들로 하여금 적절하게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부여하는지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타인을 통치해야 함에 따라 자기 배려가 문제시 된다. 이것이 이 맥락의 첫 번째 요소입니다. 두 번째는 교육의 문제입니다. 집단적 규율에 근거한 연속적인 엄격성을 갖는 스파르타 교육과 비교하여 가장 큰 결점을 갖는 아테네 교육의 실제에 대한 비판 압니다. 또 한 측면은 성인 남성과 소년들 간에 일어나고 전개되는 사랑 방식에 대한 비판입니다. 교육과 사랑의 측면에서 이중적 결핍 때문에 자기배려가 필요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보기(epimeleia heautou)의 문제는 다스림을 받기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타자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보아야 하고, 또 젊은이들은 충분하고 적절하게 다스림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합니다. 다스리기, 다스림을 받기 자기 자신을 돌보기는 3,4세기 기독교 교회 사제 권력 구축에 이르기 까지 복잡한 역사의 계열을 형성합니다.
너 자신을 돌보아라라는 명령적 정언이 출현한 세 번째 맥락적 요소는 무지입니다. 무지는 알아야 할 사물들에 대한 무지와 이 사물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기의 무지를 포괄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훌륭한 통치가 무엇인지를 쉽게 정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모르고 또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며 화합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합니다. “너는 무지하다. 하지만 너는 젊기 때문에 시간이 있다. 그러나 배울 시간이 아니라 너 자심을 돌볼 시간이 있다.” 이같은 추론의 예상 가능하고 일상적인 결과인 배움과 자기배려 정언 간의 격차, 상호작용, 근접성 내에서 고대 세계의 철학과 영성 간의 작용과 관련된 다수의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헬레니즘 시대 철학에서 자기 테크닉의 중요성
자기 배려가 무엇일까요? 주체의 방식을 변형 변모시키면서 주체에 자격을 부여하는 실천들 없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다소 예식화된 무수한 절차들을 발생시킨 철학적 테마입니다. 신과의 접촉뿐만 아니라 신이 말하는 진실된 바와의 접촉에 필요하며 선행되어야 하는 정화는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에 이르는 유구한 시간 속에서 일상적으로 잘 알려지고 입증된 테마입니다. 정화 없이 신이 소유한 진리와 관계 맺을 수 없습니다. 정화는 피타고라스의 중요한 실천이고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보급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자기 기술의 다른 한 예은 단련 테크닉은 자기 주변에 유혹적 가치를 갖는 상황을 조성하고 저항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자기를 영혼으로 설정하기
신발을 배려하는 테크닉이 있고, 그것은 구두장이의 테크닉이고 발을 배려하는 것은 의사가 조언할 수 있습니다. 자기 배려에 대해서는 누가 정확히 알고 있을까요?
배려해야 할 자기는 누구일까요? 파이돈에서 만약 영혼이 불멸한다면 영혼은 돌볼 필요가 있고 헌신과 배려를 필요로 한다라는 구절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배려해야 할 자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혼이다.
영혼을 행위 주체로 설정하기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가 토론을 통해 어떻게 자기를 영혼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의미심장하게도 내 자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나는 내 영혼이다라는 대답으로 귀결되는 이 분석과 운동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는 일련의 질문들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말한다”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소크라테스가 말합니다. 달리 말해서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은 언어 행위를 환기시킬 때 우리가 가정하는 주체는 무엇이냐고 소크라테스가 되묻습니다. 결과적으로 언어 행위에서 행위의 주체와 그 행위 자체를 구축하고 그것을 실행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의 종체를 구분하는 선을 긋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컨대 환원 불가능성 속에서 주체를 출현시키는 것이 문제시됩니다. 실제적으로 신체, 신체의 부분들, 신체의 기관들, 결론적으로 도구들을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요체는 무엇이며,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요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혼이며 영혼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배려는 우리가 다수의 무엇인가의 주체인 한에서 자기 배려입니다. 우리가 기계적 행위의 주체, 타자와의 관계의 주체, 일반적 행동과 태도의 주체, 자기와의 관계에서의 주체인 한에서 자기 배려 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과 연관 속에서 본 자기 배려
의사는 자신의 신체, 자신이 사용하는 바를 돌봅니다. 그가 배려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이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의사의 기술과 주체인 자신의 영혼을 돌보게 해주는 기술간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구분입니다. 두 번째 구분은 가정관리술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버지, 가정은 무엇을 관리할까요. 그는 자신이 수요할 바를 돌볼 뿐입니다. 자기자신을 돌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알키비아데스를 추종하는 자들이 알키비아데스 자신을 돌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단지 알키비아데스의 육체와 육체의 아름다움만을 배려할 뿐입니다. 알키비아데스를 배려하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행위의 주체, 자신의 육체와 적성, 능력을 사용하는 주체로서 그의 영혼을 배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배려는 스승이라는 타인과의 관계를 거쳐야 합니다. 스승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배려 대상이 그가 인도하는 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배려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의사나 가장과는 달리 스승은 육체나 재산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교수와 달리 그는 자신이 인도하는 자에게 적성과 능력, 화술, 타자들을 제압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고심하지 않습니다. 스승은 주체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배려를 배려하는 자이고, 제자를 사랑하는 가운데 제자가 자기 자신을 배려할 수 있게 만드는 자입니다.
내가 의학, 가장, 연인과 관련해 세 종류의 작은 성찰을 주장한 이유는 이들이 자기 배려와 그 테크닉의 역사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문제들을 환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자기 배려와 의학, 자기 배려와 신체의 배려, 자기 배려와 양생술의 관계의 문제가 규칙적으로 제기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관리술이라는 의무가 바기배려가 양립 가능할까가 두번쨰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애정 관계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주체의 해석학/ 1982.1.13. 강의 후반부 / 푸코
두 번째 문제는 배려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입니다. 자기 배려는 무엇을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를 인식하는데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우리를 기만하는 감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모든 외부 사건들에 포획되도록 방치하지 않는 부동의 견고성 내에 영혼을 설정해야 합니다. 근대철학은 데카르트의 순간에서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 문제를 망각하고 어둠에 방치하며 소외시켜 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강의를 통해 나는 오랫동안 자기인식에 부여된 특권과 관련하여 자기 배려를 재출현 시키려고 합니다. 자기인식과 자기배려의 상호 호출, 역동적 착종이 플라톤의 특징입니다.
눈의 은유 : 시각의 원리와 신성의 요소
자기를 어떻게 인식할까요? 인식은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눈이 거울을 통해 자기에게 보내진 이미지를 지각하는 경우에서 거울은 자신을 보려는 눈을 위한 유일한 반영의 포면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사람의 눈이 타인의 눈에서 자기 자신을 보려고 할 경우 하나의 눈이 자기와 절대적으로 유사한 다른 눈에서 자기 자신을 보려고 할 경우 그가 타자의 눈에서 보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눈에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시각 행위는 또 다른 시각 행위 즉 타자의 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시각 행위 내에서만 수행 될 수 있습니다. 이 비유가 영혼에 적용되면 어떻게 될까요? 영혼은 자신의 시선을 자신과 동일한 속성을 갖는 한 요소로 향하는 한에서만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신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영혼이 신성이라는 사유와 인식의 원리를 사유하고 인식할 줄 알게 될 때 영혼은 지혜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신성의 인식이고 지혜의 인식이며 적절한 처신의 규칙인 자기 인식에 근거해 사람들이 통치할 수 있다는 것과 또 이같은 상승과 하강 운동을 하는 자가 도시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통치자임을 압니다.
대화의 결론 : 정의의 배려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이나 정의를 배려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고 대화 활동 전체는 “나는 어떻게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알키비아데스를 너 자신을 돌보아라라는 명령적 정언으로 유도하는 데 있다. 그리고 너 자신을 돌보아라라는 명령적 정언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즉 이 정언에 부여해야 할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며 알키비아데스는 자기 배려가 정의의 배려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 사람의 가설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플라톤의 노년의 어떤 시기에, 아마도 그의 사후에 다시 씌어진 텍스트라는 것입니다. 즉 알키비아데스 내에는 두 요소가 합쳐져 있는 것 같고, 두 층의 텍스트가 합쳐져 있는 듯하며 두 층이 서로 경합하다 통합된 듯 하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플라톤주의의 역설
자기 인식, 신성의 인식, 자기 안에서의 신성의 재확인 이것이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형식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신피타고라스주의와 뒤에 오는 신플라톤주의 운동 간에 있을 수 있었던 상호 간섭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주의, 스토아주의, 피타고라스주의의 형식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점에 입각해 17세기까지 유럽 사상사에서 중대한 플라톤주의의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플라톤주의는 신성을 자기 자신 안에서 확인하는 행위인 자기 인식에 의해서만 인식과 진실 접근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양한 영성 운동의 주요 근원이 되었습니다. 신성인 자기와의 관계와 자기인 신성과의 관계라는 이 자기와 신성에 대한 이같은 조건이 진실 접근의 플라톤주의적 조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플라톤주의가 일련의 영성 운동의 요인, 토대, 분위기, 전경이 돼버렸는지와 또 왜 이 운동의 한복판과 정점에 그노시스 운동이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왜 플라톤주의가 소위 합리성 발달의 지속적인 환경일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동일한 수준에 있는 두 사물처럼 영성과 합리성 간에 대립되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플라톤주의는 영성을 요구하지 않는 순수 인식을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주의의 핵심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자기가 자기에게 가하는 모든 작업, 모든 배려가 자기 인식, 즉 진실의 인식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기 인식과 진실의 인식은 영성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자기 안에 흡수하여 제거해 버립니다. 그 결과 플라톤 주의는 고대 문화와 유럽 문화 전번에 걸쳐 이중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즉 플라톤주의는 진실 접근을 위해 필요한 영성 조건들을 부단히 다시 제기함과 동시에 인식, 자기 인식, 신성 인식, 본질 인식 속에서 영성이 요청하는 제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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