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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과 『로마사 논고』
강정인 서강대 교수·정치학
마키아벨리와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가 근대 유럽 정치사상사에 남긴 탁월한 공적은 정치영역이 윤리나 종교 등 다른 영역과 구분된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히고 정치행위가 종교적 규율이나 전통적인 윤리적 가치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사상적으로는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대변하고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화된 근대 국가의 정당성을 옹호한데 있다. 중세 유럽의 세속화 경향을 정치영역에서 철저히 추구하고 관철시키고자 함으로써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근대의 기원을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27).
<마키아벨리즘>(곽차섭)
첫번째 | 공익, 특히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수단의 도덕적 선악에 관계없이 다만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고려하는 자신의 정치사상, 마키아벨리의 본래 정치사상에 가장 충실한 것 |
두번째 | -공익을 도외시하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인이나 파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관행을 지칭, 정치적 ‘부패’의 일환, 마키아벨리가 가장 비난했던 정치 현상 -정치 부패의 주된 특징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무너지고 양자 사이에 혼동이 초래되는 상황, 이것이 그 경계를 넘어 사적 영역에 침투하여 일반화될 때 세 번째 의미의 마키아벨리즘이 사적 영역에 만연하게 되며 정치는 물론 사회 전체가 총체적 부패에 시달리게 됨(29). |
세번째 | 사회의 삶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리낌없이 남을 희생시키는 처세방식(28) |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저술(30~35)
1498 | 29세,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 주로 외교업무 담당 |
1500 | 외교사절 임무로 프랑스 루이 12세 궁정에 파견, 피사의 피렌체 공격에 대한 프랑스 군사적 협력이 주된 임무 |
1501 | 마리에타 코르시니와 결혼, 6명의 자녀, 마키아벨리보다 25년 더 장수(30) |
1502 | 체사레 보르자 의중 파악하기 위해 파견 |
1503 | 로마에 파견, 보르자의 도움으로 교황이 된 율리우스2세가 보르자를 간계로 파멸시키는 과정 목격, 율리우스2세의 세력 확대 과정 지켜봄 |
로마파견 중 | 신성로마제국 막시밀리안 황제 궁전에 파견, 우유부단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효율적인 정부 운영 자질이 결여되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보고서 보냄. 『군주론』은 피렌체공화정의 외교사절로서 당대에 겪은 체험과 관찰에 근거한 것. |
1512 | 에스퍄냐 군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 몰아낸 후 피렌체 공격, 항복 결과 메디치가문의 왕정 복원, 마키아벨리 추방, 메디치 정부 추출 음모 연루되어 투옥, 메디치가의 레오10세의 즉위 특사로 석방, 메디치 정부 공직에 참여하려 『군주론』을 집필했으나 실패함. 『군주론』을(31) 로렌초 데 메디치에 헌정했는데 읽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았음. |
이후 | 피렌체 교외 칩거, 코시모 루첼라이 정원 인문학 모임에 열성적 참여 |
1518 | 오르티 오리첼라리 모임 - 희곡 『만드라골라』 집필, 무자비한 희극, 피렌체와 로마에서 공연되기도 함. - 공화정체 운명 주제로 논쟁, 메디치가의 ‘전제정’ 격렬히 반대, 대주교 줄리오 메디치 살해 음모(32) 쿠데타 실패 후 중단 - 토론 영향 결과 『전술론』 출간,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의 처음 10권에 대한 논평서인 『로마사 논고』를 쓰기로 결심. 정치철학에 관한 가장 독창적인 저술로 평가받음. |
1513 여름 이후 | 고대 역사의 연구에 몰두, 『논고』의 「헌정사」에서 고전 독서 자랑(33). |
< 저서 >
군주론 | -1513년 집필, 메디치가의 군주의 정치권력에 대한 조언 목적으로 구상, 목적 달성을 위해 신생 군주가 따라야 할 지침 상세히 논함. 마지막 장은 1인의 영명한 군주가 출현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함으로써 질서와 평화를 확보해줄 것을 바라는 민족주의적 열망을 담음. |
로마사 논고 | -1513~19에 집필,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논평에 근거하여 로마의 정치적·군사적 제도와 대외정책을 상세히 분석함. 공화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의 신념이 명백히 표현됨(34). |
전술론 | -1519~20에 저술, 군사적 전략과 전술 서술 |
피렌체사 | -1520~27년 완성, 1492년 로렌초 대군이 죽을 때까지의 피렌체 역사를 전체 이탈리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핌. 유일하게 생전에 출간. |
사후 | -1532년 『군주론』 출간 후 도덕주의자들의 비난이 본격적으로 제기됨, 1559년 교황 파울루스 4세에 의해 그의 전 저작이 금서목록에 등재됨. |
마키아벨리 당시의 정치적 상황
15세기 후반 유럽은 로마 교황, 신성로마 황제 지도 하의 보편적 공동체의 관념이 와해되어가는 시기였다. 군주의 권력은 귀족과 사제계급, 의회, 자치시 등 경쟁적 권력과 제도를 희생시키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중세의 분산된 정치권력은 왕에게로 집중되었다. 신이 왕과 교황에게 부여한 권위가 권력은 군주의 몫으로 주장되었고 이는 왕권신수설로 발전하게 된다(35).
신대륙의 발견 및 생산력 발전, 무역과 상품유통의 국제적 활성화에 따라 이를 규제하고 장려하는 역할이 필요해졌다. 큰 규모의 정부가 요구됐고, 군주가 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16세기에 모든 왕의 정부는 이러한 정책을 의식적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신흥 부르주아계급은 군주 권력의 강화를 적극 지지했다. 그 결과 유럽 각국에 절대군주정이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소국들 간의 정치적 분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당시 이탈리아는 도시국가 즉 교회,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가 오랜 균형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이들이 세력 강화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임에 따라 에스파냐군, 프랑스군, 스위스와 독일 등의 끔찍한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36).
결정적 원인으로 ‘교회’가 지목되었는데, 교회는 이탈리아 내에 강력한 세력이 부상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빈번히 외세를 끌어들였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용병제도, 교회의 내분 조장 및 외세 개입 유발을 개탄한다. 마키아벨리 『군주론』에 제시된 정치사상은 절대군주정의 입장을 대변하여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한편 당대의 정치적 상황, 정치가와 사상가 자신의 신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어왔다(37).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정의 지지자였으며 『로마사 논고』는 인민의 자유와 정치참여를 존중하는 공화정이 위대한 국가에 이를 수 있는 정치체제라며 공화정에 대한 선호를 명백히 밝혔기 때문에 대표적인 공화주의 사상가로 기억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에게 주목받았고 독일, 이탈리아 등 후진 지역에서 민족주의 사상의 선구로서 각광을 받았다. 헤겔 등 국가주의 사상가들에게 찬양받았으며 근대 나치즘 등 전체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람시는 『현대의 군주』에서 『군주론』을 압박받는 인민들의 집단의지를 분기시키기 위한 정치선언서로 이해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조직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이탈리아 공산당과 동일시하였다(38).
마키아벨리 사상에서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군주론』보다는 『로마사 논고』가 마키아벨리 본래의 사상을 대변하고 공화주의자로 본다.
< 『군주론』에 대한 네 가지 해석 >
일종의 ‘일탈’로 보는 관점 | - 피렌체 공화정의 미래에 절망하여 메디치가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환심을 사기 위해서 집필했으나, 환멸을 느껴 다시 공화주의자로 복귀하는 『논고』를 썼다는 것 |
공화주의자 관점 | -메디치 가문의 지배를 반대했고 공화주의적 자유의 관념을 옹호 -루소는 메디치가를 위해 쓴 것이 아니라 군주의 무자비한 행태와 위선 및 기만의 술책을 폭로함으로써 공화주의자와 인민이 속지 않도록 필요한 지식 제공한 것이라 함. |
군주정은 공화정 이행 준비단계 | -월린: 총체적인 부패상황 개혁 위해 군주정이 필요불가결함 역설, 『논고』에서 정치공동체가 건강하게 회복되면 인민 지배가 자유를 신장시키고 군주정이 공화정으로 대체되는 게 바람직하다 주장 -『군주론』에서는 영명한 군주를 통해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열망을, 『논고』에서는 공화정을 통해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비전 제시하고자 함(40). |
의도 자체가 공화주의적 | -디어츠: 로렌초의 몰락을 위해 ‘기만적’인 조언을 한 술책이었음. 내용 중 모순점을 찾아내어 로렌초에게 올가미를 씌울려고 했다는 해석(41). |
『로마사 논고』에 나타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
『논고』에는 공화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의 신념이 다른 어느 저술보다 명백히 표현되어 있다. 자율 또는 자유는 세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개인적 행위의 관점에서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주변상황에 대한 인간 행위자의 ‘주체성’을, 대내적 정치의 차원에서는 ‘자유로운 정부’-공화(42)정부-를. 대외적 정치의 차원에서는 ‘독립성’을 지칭한다. 따라서 자유 또는 자율의 개념을 중심으로 『논고』에 나타난 정치사상을 분석하겠다.
마키아벨리의 정치 형이상학
마키아벨리는 서구정치사상가 중 ‘정치적’인 면에 가장 치중한 인물이다. 어떤 체계적인 철학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라는 영구불변의 철학적 진리에 따라 정치체를 구성함으로써 영구적으로 안정된 정치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43). 아퀴나스 등 중세 사상가들은 종교적 신앙이나 진리의 구현 차원에서 정치체를 조망하고 이론화했다. 근대 사상가들은 자연법과 이성, 기하학적인 진리, 절대 이성과 같은 고정된 이론적인 틀을 고안하여 정치체를 조망하고 이론화하고자 했다. 자신들이 구상한 정치질서가 항구적이고 불변적인 원리에 기반할 수 있다면 정치질서도 그 원리에 따라 항구성과 불변성을 공유할 수 있고, 또 정치적 변화의 내용을 예견할 수 있다면 쉽게 적응하고 역사의 미래를 선점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가 사상가들의 정치 형이상학에 해당한다. 형이상학적이고 과학적인 원리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세계 자체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간과하는 정치사상을 산출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세계의 다양성과 역동성의 문제를 통제하기 위해 지배력을 획득하는 “권력의 문제”로 관심을 전환했다. 정치세계의 역동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안정된 이론틀을 제시하는 정치 형이상학으로 ‘역사’를 선택하였다(44).
마키아벨리는 ‘역사 속에 보존된 위대함의 영원한 모델’에서 확실성을 발견했다. 로마 공화정이 바람직한 정치제도와 정치행위의 기본이 되는 영구적이 모델을 제시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순환론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고대 로마의 위대함을 재현하기를 희망했다(45).
자율/자유
자율과 자유는 마키아벨리의 모든 저작에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주제다. 자율을 국가의 목표로 본다(45). 현명한 군주는 타인의 세력 아래 놓이는 것을 가급적 피한다. 군주는 자신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인민의 지지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이것이 군주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조언자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 자체를 더 경계한다. 『논고』에서 제시된 건국자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군주론』에서 제시된 군주는 스스로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46).
공화국과 대중의 비르투
1) 정치지도자의 비르투와 대중의 비르투
마키아벨리는 로마인이 운명의 여신에게 축복과 혜택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행운과 결합해 로마가 매우 많은 비르투를 소유했고 오랜 세기 동안 유지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유지했고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비르투라는 자질을 『군주론』에서는 정치지도자와 군대 장군들에게만 결부시켰는데 『논고』에서는 공화국의 시민 전체에게 필수적으로 요구했다. 개인적인 이익이나 도덕성(47)을 고려하기보다 자신들이 태어난 도시국가의 영광과 공동선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비르투의 표지다. 건국하거나 개혁하는 데는 뛰어난 정치지도자 1인의 비르투가 필수적이다. 대중의 다양한 의견은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에 통일된 정부를 적절하게 조직하는 데 방해가 되고 부패한 대중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번영은 현명한 지도자가 대중의 비르투를 분발시키고 유지하기 위해 창설한 훌륭한 제도에 의존해야 한다. 정치지도자의 비르투와 평상시의 법/제도가 고취시키는 비르투는 상호 의존적이다(48).
2) 대중의 비르투를 지속적으로 분발시키고 유지하는 방법
① 정치지도자의 비르투를 통한 감화와 위협
뛰어난 지도자는 감화력을 통해 대중의 비르투를 자발적으로 고취시키기도 하지만 인민들이 두려워 달리 행동하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방법을 통해서도 동일한 효과를 거둔다(50).
② 좋은 법률과 제도 그리고 혼합정체(공화정)
처음부터 시민들이 비르투를 획득하고 자신들의 자유를 유지할 수밖에 없도록 국가를 조직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50) 법률의 강제력을 제시한다. 법률의 비르투는 건국 초에 건국자들이 훌륭한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비로소 구체화되기 때문에 건국자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대의 입법가들은 모두 세 가지 유형의 ‘순수한’ 헌정 형태-군주제, 귀족제, 민주제-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며, 부패와 타락의 순환을 발생시키기 쉽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법률의 강제로 비르투를 부과할 열쇠는 혼합정체의 수립이며 이를 통해 순수한 헌정 형태들의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단점인 불안정을 상쇄할 수 있다고 보았다(51).
마키아벨리는 혼합정체의 정적인 안정과 균형 보다 긴장과 갈등이 넘치는 역동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다. 혼합정체가 평민과 귀족이라는 대립하는 두 사회세력 사이에 팽팽한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고 실례를 호민관 제도에서 발견했다. 호민관의 설립은 통치에 평민의 몫을 부여한 것 외에도 로마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에 최대한 찬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52).
3) 종교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로마인들은 일반평민들에게 다른 선보다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선을 더 선호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의 교화적·위협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신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기는 것보다 신에 대한 맹세를 어기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53). 종교는 좋은 법률을 가져오고, 좋은 법률은 행운을 가져오고, 그 행운에서 도시가 노력한 모든 사업들이 행복한 결실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제국과 자유
자유와 비르투는 대외적인 제국주의적 팽창을 통해서도 유지되었다. 국제적인 갈등과 침략은 국내정치를 괴롭히는 격렬한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그리고 시민의 시민적 비르투를 유지하기 위해 요청되었다. 마키아벨리는 파벌 간의 갈등은 로마의 대내적 자유의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팽창의 원인이라고까지 주장한다(54). 국가 간의 갈등과 침략 역시 국내적인 파벌 간의 갈등처럼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 로마 공화국의 시민적 비르투 역시 제국주의로 뒷받침되었고, 또 제국주의를 필요로 하였다. 대외적 팽창은 정치체의 자유에 필수적이었던 것이다(55).
정치적 부패
마키아벨리에게 부패는 ‘정치체 전반’의 부패를 의미한다. 부패는 『논고』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개념이다. 지나치게 강한 세력을 형성한 시민들이나 강력한 이익집단들이 자신들의 이기적·당파적 목표에 유리하게 정치질서의 균형을 파괴하려는 항구적 경향이 발생하고 이 때문에 정치체에는 부패의 맹아가 싹트며 자유가 위태롭게 된다(55).
부패의 가장 심각한 예는 사사로운 충성에 기초한 당파를 조직하는 일이다. 또 막대한 개인적 부를 소유한 자들이 행사하는 사악한 영향력이다. 시민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이득을 제공하는 후원은 지극히 해롭다. 공공이익을 저버리고 시혜자의 당파로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부패와 자유로운 생활에 대한 부적합성은 국가 내에 존재하는 불평등에서 연유한다고(56) 주장한다. 부패 정치의 큰 해악은 좋은 제도가 해로운 제도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부패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별도의 헌정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의 대가는 항구적 불침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당파가 안전 수위를 넘는 권력 장악 수단을 경계하는 것이 긴요하다. 대처할 수 있는 특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57).
운명과 비르투
운명은 그의 사상에서 인간의 자율성 추구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운명에 대한 관념은 자율성의 추구와 동전의 앞뒷면을 구성하며, 인간의 조건, 인간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에 관한 가르침의 핵심이다. 운명의 여신은 비르투와 짝지어 나타났다. 그러나 운명에 대한 비르투의 역할은 여신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보다는 인간의 자기통제-용기, 지혜의 함양, 열정의 통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58). 기독교화되면서 운명의 여신은 오직 기독교적 영혼의 덕에 바쳐진 삶만이 고귀하다는 교훈을 가르치는 신으로 전환되었다. 무자비한 필연성을 강조하는 신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운명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곧 운명은 인간의 권능과 개입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점차 운명에 대한 인간 행위의 가능성, 역사에서 인간의 자율성 등이 핵심적 문제로 부상했다. 마키아벨리는 이를 발전시켰다. 운명을 비르투와 대치시켰는데 인간의 적극적인 대응을 통해 일격에 통제해야 한다고 강조하기 위해서였다(59).
마키아벨리가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특정한 사건들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관련된 행위자들이 예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종종 예견할 수 있었던 인간의 선택이거나 자연적인 사건임이 판명된다. 일정한 사건을 운명이라 지칭하는 것의 논지는 인간의 선택과 행위라는 정치적 맥락에서 항상 인간이 예상치 못한,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행위로서 인간이 처하는 인간적 조건이자 정치적 상황이다. 따라서 인간사에서 비르투와 운명의 상호작용은 불가피하다. 마키아벨리에게 운명의 힘은 특히 그것이 자연(본성)의 힘과 결합되었을 때 총체적이다. 궁극적으로 운명은 그의 사상 전반을 꿰뚫고 있는 인간 현실에 대한 비전, 정치행위자의 남성성 및 자율성, 문명의 성과를 보존하고자 투쟁하는 인간들에 대한 비전이다(63).
맺는말
마키아벨리가 『논고』에서 주로 논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태어난 조국 피렌체의 통치자들이 저지른 과오와 실책, 부패한 피렌체의 쇄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정치사상은 자전적이다. 자율성을 대외적으로 자주성, 대내적으로 자유로운 정부, 개인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주체성으로 파악했지만 피렌체에서 이 세 요소는 실패작이었다. 피렌체는 끊임없이 강대국의 침략과 개입에 시달리고 있었고(64) 메디치 왕정은 1527년 프랑스군의 로마약탈, 교황의 도주, 메디치가문에 대한 인민의 봉기 등으로 붕괴되고 1527년 공화정이 복원되었다. 새로운 공화주의자들에게 마키아벨리는 늙고 하찮은 메디치가의(65) 가신에 불과한 인물로 비쳤기 때문에 그의 공직 복귀는 불가능했다. 충격을 받은 마키아벨리는 병을 얻어 1527년 6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사상은 프로메테우스적 자유를 실천하고자 하는 인간은 항상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며 이를 꿈꾸는 인간은 비애의 사상가로 남는다는 점을 보여준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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