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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 <아미엥에서의 주장>, 두 번째 시간, pp 156~178
지난 시간은 맑스주의적 변증법을 토대로 한 관계의 해석을 바탕으로 경제적 최종심급의 이론적인 중요성을 강조한 알튀세르의 사유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단순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 정치적 역사적 의미에서의 계급투쟁의 의미성도 밝히는 과정이었습니다. 남은 챕터에서의 알튀세르의 사유는 이론적 실천으로 자신의 철학에 대해 전개합니다.
지식과정에 관하여
맑스주의의 지식이론적 기반으로서 스피노자의 이론의 중요성은 ‘사실상’(157)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157) 여기서 올바른 생각이란 것이 어디서 왔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고, 하나의 ‘사실’에서 파생되는 관계와 그로 인해 규정되며 ‘권리’로 납득하게 되고 이것이 하나의 지식 체계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을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반면 ‘기원’, ‘주체’, ‘권리’의 문제는 지식과정의 문제와는 별개인 것을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맑스주의가 ‘지식의 이론’이라 표현한 레닌의 표현을 빌려서도 지식이 사실화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지식이 선험적 체계로서 말해지는 것이라는 설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맑스에게서는 ‘생산’의 과정과 관계에서 ‘선험적인 생산 일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158)로 구체적 사회에서는 그것에 맞는 특정한 생산양식과 체계가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것에서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동일한 생산양식이란 존재하지 않음에도 생산관계와 체계가 있음을 설명하는, 한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최소한의 일반성’(158)을 통해 이를 알리고 있다 설명합니다. 그리고 지식과정 또한 생산에 대한 최소한의 일반성처럼 설명되어야 한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생산으로서의 지식’(159)이라는 테제에서 생산에 이중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하나는 ‘노동과 실천’으로서, 하나는 ‘진리의 표명’으로서입니다.(159) 특히 이는 ‘생산’을 중심으로 맑스주의적 본질에서 지식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의 개념이 지식이론의 ‘실천’(159)이라는 개념으로 재현되면서 원료-도구-구체의 관계(저는 이를 토대-기구-이데올로기화로 이해했는데 적합한 해석인지 모르겠습니다.)의 작업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맑스주의에 대해서 경험주의와 헤겔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는 것은, 경험주의적 사유가 추상에서 구체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험주의를 물질 경험에서 이론화한다 이해하지만, 이미 ‘사유 속에서’의 추상을 바탕으로 경험을 이해하며 오히려 실재 대상을 ‘바깥에 존재’시키는 것이라 집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봐야하는 것은 이 바깥에 존재하게 놓여진 현실 대상이어야 합니다. 맑스에 따르면 경험주의적 체계는 현실적 생산이 아닌, 지식적 생산일 뿐입니다.(160)
“지식은 ‘사유와 구상의 산물이고 그것은 직관과 표상을 개념으로 바꾸는 가공의 산물”(160)이며, “좋은 방식은 현실과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160)이라는 표현으로 맑스주의적 지식의 이해에 대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맑스주의 앞서서의 지식화의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효과로 작동해왔던 지식의 과정에 대해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맑스주의에서의 지식은 철저히 실재 대상을 바탕으로 한 ’현실-구체, 실재 대상‘(161)에서 구체화된 지식임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재는 바깥으로 둔채, 지식으로 존재하게 되는 그 과정 자체에 대한 질문이, 지식의 이전과 이후로 이어지는 사이의 그 ’간격에 대해 자문‘(161)하고 규정된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니며, 이를 통해서 ’지식‘이라고 불러온 것들이 사유를 구체화 하는 방식으로 실재적 구체를 바라볼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함을 파악하고, 관념론적 경향을 벗어나게 됩니다.
맑스의 ‘지식 대상에 대한 실재 대상의 우위’(162), 그리고 ‘실재 대상과 지식 대상의 구별에 대한 첫번째 테제의 우위’(162), 즉 실재 대상을 바탕으로 유물론적인 사유와 변증법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때 관념론적 테제를 벗어난 실재 구체 대상과 과정을 더욱 명료하게 분석, 파악하고 실천을 제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맑스에게서 단절적인 혁명의 필요성,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 지배를 자명한 것으로 설명해왔던 지식 체계에 대한 단절이자, 여타 ‘자명성’(164)의 흔적과는 단절하고, 우리의 ‘생생하고 현재적이게 만드는 것’(164)으로서의 분석과 구체에 몰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새로운 지식의 생산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자, 레닌의 표현처럼 “과학이 말의 나쁜 의미에서 도그마, 즉 경직되고 도식적인 죽은 이론이 되는 것을 막는다.”(165)는 표현에서 앞서 ‘진리’라 말해져 왔던 것들의 반복을 경계하고, 구체적 현상의 마주침의 상황에서 새로운 지식의 필요성을 ‘상기’(165)해야 함을 주장합니다.
맑스주의와 이론적 인간주의
먼저 ‘맑스주의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라는 테제’(165)에 대조점으로 포이에르바하의 이론적 인간주의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인간 - 주체 - 욕망의 실현 - 세계의 의미에서 포이어바흐의 이론적 인간주의는 고전주의적 주체 관점의 철학이면서, 봉건적인 교회 이데올로기에 대해 투쟁하고 인간적 존엄을 부여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이러한 인간주의적 이데올로기화 과정에서 보여지는 경제적 도덕적 정치적 주체의 재생산과, 자유로운 인간 주체로서의 부르주아적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을 ‘청산’(170)하는 과정으로 맑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170)에 대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서 현존했던 철학들, 고전철학적 전통, 그것들을 통해 이어져 왔던 ‘모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문제삼는 것(170)으로서 ‘철학적 반인간주의’라고 알튀세르는 설명합니다.
인간 주체 중심의 인간주의적 해석이나 인간주의적 관념론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여야 하며, 역사유물론의 과정에서 인간론적 개념의 관념론을 제거해야함을 역설합니다.
하지만 이것에서 ‘맑스주의는 인간들을 무시하기에 이르며 그들의 혁명적 투쟁을 마비시키기에 이른다’(171)는 것, 그리고 ‘욕구와 노동과 욕망의 주체, 도적적 정치적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유로운 인간주체와 인간 본질에 대해 말함으로써 사회와 역사를 설명하려는 인간주의적 견해의 이론적 의도’(172)라는 두 가지의 이의제기를 제거하고,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과 철저한 유물론적 인식과 설명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하나의 관계, 토대, 즉 하부구조와 분리될 수 없는 생산관계임’(172)을 밝혀서 인간을 중심으로 그룹과 관계로 제한하려 하는 ‘신비화’(172)의 작업을 지양하려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적 자연과 생산수단의 관계, 그 생산에 따른 분배의 관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계급성과 대립의 구도들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그들을 하부구조 속에서, 생산 속에서, 따라서 착취 속에서의 이러한 단순한 기능으로 환원’(173)시키는 것을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에 따라 나타나는 특징들을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생산관계에서 계급투쟁의 의미성이 강조되고 있는 구조임을 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감수하게 되는 끔직한 노동규칙과 일상 생활을 그들에게 부과함으로써, 강제로 노동계급에게 계급투쟁을 가르치는 것은 생산, 즉 착취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이다.”(174)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은 살아 있는 인간을 추상화하여 그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복종하거나 반항하는 단순한 주체로 취급한다.’(175)는 상태의 역설적인 부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실제로 부르주아적 관계들 속에서,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투쟁 자체를 통해서 정치적으로 교육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투쟁에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구체제, 그 생산관계와 국가를 전복시킬 수 없었다.’(175) 이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지배 관계에서의 이해를 바탕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을 배워왔던 자세를 비판합니다.
이미 상정된 적으로서의 위치로 이해관계 안에 포섭된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이렇게 강제되는 투쟁의 모순적 위치에 있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맑스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인간적 개념에서의 위치 지어짐과 ‘역관계’(176)로 신비화되어온 것에 대한 단절이 필요합니다. 이는 ‘구체적인 인간들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며, 구체적인 삶과 투쟁을 규정하는 법칙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함‘(177)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론적 인간주의에 대한 우회로서 맑스주의의 본질은 ‘최종심에서 결정적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부터 법적 이데올로기적 관계에 이르는 각각의 관계가 어떻게 인간을, 계급투쟁의 형태들과 효과들에 의해 규정되는 그들의 삶 속에서 특징짓는가를 보여주고’(177) 이러한 ‘추상’의 과정에 ‘조응’해왔던 ‘사유-구체’의 양식이었음을 밝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관점이 맑스주의와 ‘소외’를 연결해 왔음을 지적합니다. 현실에 대한 불충분한 사유와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사유되어 왔던 개념들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맑스주의 이론의 작업과 실천들에 영향을 미쳐왔던 부분들을 언급하면서, 실제 ‘꼬뮌’ 이후 맑스에게서 소외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맑스주의에서 생산되고 있는 이론에 대한 검토가 필요함을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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