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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독트린을 결여한 당, 톡트린을 견지한 당]
Q. 공산당에서 하나의 개념에 대한 포기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알튀세르는 공산당 진영의 과학적 독트린의 근본 개념이 희생된 것으로 인해서 더욱 복잡한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공산당의 독트린은 이론뿐만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다른 조직들과 구분될 수 있었던 과학적 독트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독트린을 기반으로 ‘계급투쟁에 대한 현실적 이해를, 그리고 객관적으로 혁명적인 행동의 관점을 제시’(137)함으로써 공산당을 이끌어 올 수 있었습니다. 이는 독트린이 없는 조직들, 느슨한 조직들, ‘주관적인’ 독트린의 조직과 ‘법칙’ 효과에서 벗어나 공산당만의 차별적인 부분이 두드러짐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부르주아 정당은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권력 내에 자리’(137)하기 때문에 이론을 필요도 하지 않는 ‘지배계급의 대리인’이자 조작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적합니다. 사회민주당이나 프랑스 사회당 등에 대해서도 과학적 이론이 없는 조직들이라 지적하며 이들은 행동에서도 과학적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저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모호한 추상적 관념 아래 집결’(138)한 것에 불과하다 설명합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과 코뮌-인민전선-레지스탕스로 이어져왔던 혁명적이고 인민적인 전통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인민적 감성 속에서만 실제적 메아리를 가지는’(138) 것이라 평가하면서 과학적 이론과 독트린이 부재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저 정치적으로 인민전선을 지도하였을 뿐이며 결과적으로는 정치적인 선택으로 인민전선을 파괴하고 권력에 살아남는 선택을 하였으며,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좌파연합이 논의되는 시기에 사회당에 대한 이러한 평가가 그저 딴죽을 걸기 위함은 아니라고 알튀세르는 말합니다. 그저 사회당에 독트린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과학적 독트린이란 ‘하나의 이론’으로 사실을 해석하고 정치행동을 제약하기도 하는 ‘개념들의 체계적 신체’(139)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독트린이 결여된 조직은 나쁜 의미로 비일관적이며 ‘이론적 방임주의’라는 현상을 유발합니다. 제멋대로인 조직이 되며, 원할 때마다 단어를 바꾸고, ‘가지고 있지도 않은 개념들을 완전히 바꾸거나 포기하겠다고 결정’(139)하면서 모호한 ‘통념’만 가지고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관념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140)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회당의 관념은 계급관계와 사회계층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과정에서 모순적 성격(“부르주아 지배를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그 우유부단한 포로로 남아 있고 싶어 하는 프티부르주아지의 모순”, 140) 속에서 ‘개념의 형태를 취하는 독트린을 이 관념에게 부여할 능력이 없다’(140)고 평가합니다.
“과학을 담지하고 있는 공산당의 경우 독트린을 보존하고 존중하고 발전시킨다는, 하나를 이루는 이 세 가지 요구를 절대적으로 따라야만 하기 때문입니다.”(141)는 강조된 표현을 통해서도 공산당 내에서 독트린이 중요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신학적 독트린과 종교조직을 들어 예를 들고 있는데, 내적으로 독트린의 일부가 문제시되는 상황을 마주하는 경우 독트린의 개념을 포기하거나 바꾸고자하는 과정에서 ‘거친 전투’로서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쟁점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결과가 ‘결정적인 사회 정세에서 조직의 단절이라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141)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를 공산당의 상황에 대입하게 된다면, 독트린의 핵심 개념을 포기하면서 기존 독트린을 ‘완전히 수정하도록 강제되거나, 즉 또 다른 독트린을 생산하도록 강제되거나, 아니면 버려진 개념을 제외하고 이전의 개념들을 단호하게 보존하도록, 다시 말해 버려진 개념을 실제로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사 - 개념으로 대체하도록 강제’(142)하고 있는 상황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연합체의 성격에서 나타나는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의 ‘고유한 성격’(143)을 고려하지 않으면 레닌이 ‘결과라고 불렀던 가차 없는 법칙’(143)의 지배를 받는 ‘이러한 모든 연속적인 결과의 필연성을 이해하지 못할 것’(143)이라며 공산당 독트린의 과학적 이론의 성격과 실천에 대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그러한 차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독트린에 따르는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장을 전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Q. 이론적 개념들에 대한 표현이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중요성이 부여되는 이유
개념이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이유로서 세 가지 예시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1875년 독일사회민주당과 라살당의 합병 승인의 ‘고타 강령’에 맑스의 비판문을 예로 들면서, ‘이론적 양보라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대가를 조직에게 지불케 했다’(143)는 표현을 들어 기존 방식의 도그마를 강제하며 본질적 이론적 개념을 포기했다고 비난했다는 점을 듭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의 개념들은 도그마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개념들은 과학적이며, 그러한 과학적 개념으로서 ‘낡아빠진 것’이 될 수 없으며, 우리에게 주장하듯 ‘시효를 다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144)
두 번째 예는 그람시입니다. 그람시의 저작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표현은 없지만, ‘하나의 개념이 절대적으로 정의된 단어들에 필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145)는 상태에서도 ‘필요에 따라 결합된 다른 단어들을 가지고서(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계급 - 국가, 등등) 하나의 체계로 이 개념을 표현할 수 있다’(145)고 주장합니다. 이 개념은 맑스 이론의 다른 개념들과 관계에서 형성되면서 의미가 현존하는 것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반면 단어를 바꾸고 개념을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들임을 지적합니다.
마지막 예로 포루투갈 공산당 7차 당대회에서 쿤할의 선언을 짚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강령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용어체계 내에서 통용되는 몇몇 표현을 제거하거나 수정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이데돌로기적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수정의 주요 이유는 이 표현 중 몇몇이 우리가 이 표현에 부여하는 의미로는 이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조건 내에서 그 표현의 활용은 우리가 정치를 행하는 데에 불편함과 몰이해를 일으킬 것이며, 민주주의 세력과 대중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 속에서 부정적인 효과들을 생산할 뿐인 사변들을 야기할 것이다. 예를 들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경우가 그렇다. 마르크스주의의 용어체계 내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른 한 계급 또는 다른 계급들에 대한 계급지배의 (또는 계급들의 지배의) 형태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민주주의라 할지라도 이는 부르주아 독재이다. 프롤레타리아와 그 동맹자들이 권력을 잡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수많은 형태를 취할 수 있다.”(145-146)
“그러므로 개념과 그 표현 사이에는 잠재적인 변화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여지에는 정세에, 즉 계급투쟁 내에서의 세력관계에 의존합니다.”(146)
[4장 :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위기]
Q. 엥겔스의 ‘이론에서의 계급투쟁’, 즉 이론적 정세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
알튀세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과학적 개념에 대한 포기 자체가 과학적 개념의 중요성이라는 질문을 제기한다는 이론적 맥락에서 굉장히 역설적인 형태’(147)를 취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점으로서 스탈린주의적인 편향의 문제, 그리고 그 효과가 국제 공산주의운동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면서 사람의 죽음뿐만이 아닌 이념 또한 죽음을 당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이 과학이라는 독트린에 철저하지 못한다면, ‘지배 이데올로기의 단순한 부록,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변종’(149)이 될 뿐이라며 개념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합니다.
역사적으로 또한 이론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장합니다. 과학 이론은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의 현실 세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과학은 생산, 정치, 이데올로기, 철학의 실천들이 인식을 생산하는 특수한 마주침을 통해 결합하는 그러한 세계’(149)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인식을 실천하고 또 다른 인식으로 확장되고 결합하고 연결되면서 또 다른 인식이 나타나는 ‘좋은 또는 나쁜 마주침’(150)의 상황에서 이데올로기가 이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150)이란 모순적이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 관념론적 요소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으며, 과학의 결과물들이 항상 어느 정도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과학이 자신의 실천의 자율성 내에서 그리고 그 자율성에 의해 충분히 보호받지 못한다면’(151) 지배 이데올로기가 과학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과학을 에워싸는 이론적 정세를 논의하는 것이 유의하다 할 수 있으며, 당면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현실적인 위기를 잘 살펴볼 수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마르크스주의 이론 내로의 침투, 즉 이론에 있어 오류 발생의 문제는 마르크스 청년기 저작들뿐만 아니라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등의 저작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일어난 문제들은 당시를 넘어 레닌,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 문학 철학 등의 분야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 마오, 트로츠키 등의 사고들 또한 흥미로운 오류들을 범하면서 이론이 발전해왔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만이 말할 수 있고 말하기를 요구 받지만, 맑스주의 이론도 모든 과학적 이론처럼 한계 지어져 있으며, 발전으로부터 한계 지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의 대상 안에서, 자신의 대상에 의해 한계 지어져 있다’(155)고 표현합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이 아닌 과학이며, ‘한계 지어져 있는 대상에 관한 과학’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해 혁명으로 나아가며 자본주의 생산양식과는 모순되어 있는 경향을 보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사회심리학 등을 창설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분과학문들이 마르크스주의와는 관계없지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본질적인 일부라 설명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제한적 특성에도 불과하고 이데올로기적인 계급투쟁의 효과에 의해서 여러 이론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뒤따르는 학문들이 기만적인 이론에 의해 점령당해 있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아래 형성된 ‘잘못된 범주들’(158) 정당화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159-162의 심리학주의-반심리학주의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긴 설명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반심리학주의의 장막 뒤에서, 다시 말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교란 형태로서 심리학이라는 연막 뒤에서 스스로를 전개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162) 되었다는 표현에서처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한 형성물의 이론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 이데올로기들 각자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형성물일 뿐이라는 점으로 인해, 이러한 거대한 상황 내에서 서로서로 손을 잡기 때문입니다. …… 이러한 실천들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내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들의 물질적 존재에 관해 제가 제시했던 몇몇 언급에 근거 했을 때 그러하기 때문입니다.”(163-164)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에서의 진지한 전투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164)는 표현에서 부르주아지의 지배와 이데올로기적인 힘에 대해서, 그리고 수많은 이론과 학문들의 포장들인 ‘심리학, 도덕, 미학 그리고 종교의 연막’(165) 뒤에서 투쟁의 결과를 이끌어 내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경제적 전선에서는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의 이름을 지닌 형성물을 만들었고, ‘부르주아적인 정치경제학, 부르주아지의 눈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전선 위에서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에 참전한 이론적 형성물로 이해된 의미의 부르주아적인 정치경제학만이 존재한다는 결론’(167)을 도출합니다.
과학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학의 부정과, 부르주아적인 정치경제학만의 존재 설명에 따라 이해하게 된다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 전선이 매우 넓게 확장되어 있으며 여러 개의 전선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인 정치경제학,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형성물로서의 사회학, 심리학이라 불리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형성물에 의해 ‘점거’(168)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마비되었다는 점’(168) 또한 놀랍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론들이라 주장하는 것들 또한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침투당해 있으며, 매우 강력한 적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과 같이 마르크스주의에 본질적인 이론적 개념에 대한 요구가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갈 수 있었는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자신에게 낯선 것이 되어버릴 수 있었는지’(169)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인상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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