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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줄리아 크리스테바 / 개벽크 / 23. 05. 25./

 

 

 

1.삶은 하나의 이야기다

 

한나 아렌트는 신학자가 되려는 생각으로 공부에 전념하며 형이상학을 해체하는일에 몰두하는 가운데 그보다는 삶이 젊은 철학자의 사유 속에 본질적인 주제로 자리 잡았다.(10)

 

처음부터 삶과 사유는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는 열정에 사로잡힌 그녀의 다양하지만 서로 깊게 연결된 지적 오디세이는 삶을 그 중심에 두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11)

 

그녀는 전문적인 사유가라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게 자신의 삶에서 생각을 행동으로 밀어붙였다. 이와 같은 특유의 아렌트적인 특질에서 우리는 어쩌면 여성들에게 고유한 어떤 것을 보고자 하는지도 모른다.(12)

 

그녀의 전 작품에 걸쳐 삶이라는 주제는 그녀가 정치사와 형이상학을 논할 때도 그녀의 사유를 인도하여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면서 이 주제가 점점 더 정제되고 첨예화된다. 이러한 것은 엄청난 지적 용기를 가지고 나치즘과 스탈린 주의가 인간 삶을 똑같이 부정하는 매한가지 전체주의이며, 공포와 전율의 또 다른 두 얼굴이라는 것을 밝힐 때 그녀의 사고와 일치한다.(13)

 

과거에서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도 전체주의적 인간이란 그 자신의 것을 포함해서 모든 삶의 의미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림으로써 인간 삶을 파괴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 부정적인 사실은 아렌트가 특히 제국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강조한 인간 삶의 잉여성이 자동화가 판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도리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14)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삶에 대한 맹렬한 방어를 구축한다. 소비주의의 생기론적 결정론과 생명 활동에 대한 현대 과학기술의 헌신 속에서 단지 틀에 박힌 듯이 재생산되는 삶에 대한 정반대 극단에서 아렌트는 그녀가 기꺼이 삶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각각의, 그리고 모든 탄생의 고유함에 대해 찬양을 올린다.(15)

 

오늘날 우리는 이 삶, 곧 기독교와 기독교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성스러운 가치였던 삶이 한 역사적 진화의 최근 산물임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직면하기 어려워한다. 엄밀히 말해 이는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탐색인바, 성 어거스틴에 대한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부터 판단 능력에 대한 미완성 원고에 이르기까지 일곤되게 추적될 수 있는데, 그것()이 기독교 종말론 안에서 어떻게 구축되었고, 또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위험에 처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17)

 

기술이나 과학에 근거해 장시간에 걸쳐 관점이 변화하는 가운데 아렌트는 특별히 마르크스를 공격한다. 마르크스가 사유 과정은 그 자체로 자연적 과정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인간을 자연화시켰다는 것이다. 이엇은 어떤 신성화하는 가면 뒤에서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를 보장하는 과학자들의 결정론이 여지없이 이루어진 것이다.(19)

 

그의 나타남과 사라짐이 이 세상적 사건이 되는 이러한 특별히 인간적인 삶의 핵심 특성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서술될 수 있고,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는 사건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삶에 대한 것이고, 단순한 생명으로부터 구별되는 정치적 생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하나의 행위라고 일컬었다.

 

그러므로 탄생과 죽음을 재현하는 가능성, 즉 그것을 시간 속에서 파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가능성이 바로 이야기하기의 가능성이고, 그것은 인간 삶을 그에게 특별한 것, 그에게서 비동물적인 것, 비생리적인 것 안에 근거 지운다.(20)

 

아렌트는 권력의지를 삶에서의 정상적인 욕구로 보는 니체를 암암리에 환기시키는 한편, 그리고 또한 니체의 생기론을 시적 표현의 평온함에로 돌리는 하이데거에 암묵적으로 호소하면서 아렌트는 이야기의 행위성을 복권시킨다.(21)

 

그녀는 활동적 삶에 대한 성찰을 단념하지 않고 정신의 삶에 대한 사고의 핵심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사고, 의지, 그리고 판단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밝히는 일이다.

 

기독교 종말론과 또한 철학의 일부이기도한, 삶과 사유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수용하면서 아렌트는 역사를 정신의 해체와 공명키는데, 그것은 인본주의적 관념론자들이 그렇게 믿어 왔듯이 삶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23)

 

 

 

2.아렌트와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하기를 위한 변명

 

아렌트의 젊은 시절 텍스트(성 어거스틴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과 라헬 파른하겐)와 전체주의에 관한 유명한 작업들 사이의 실종된 고리가 그녀의 이야기하기 언어(이야기와 역사)속에 드러나는 정치적 행위로서의 인간 삶에 대한 개념이다.

 

오늘날 아렌트식 비평은 아렌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칸트주의를 하이데거의 플라톤주의에 대치시키는데, 아렌트의 근거 없이 주장되는 정치적 불합리가 하이데거의 정치적 사유 때문이 아니라고 할 때도 그렇게 한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지만 똑같이 도식적인 독법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한다.(26)

 

아렌트는 하이데거식의 형이상학 해체의 기법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스탐바우흐의 번역에 따르면 그의 폭로, 드러남, 그리고 개방성과 그의 유한성에 대한 강조, 우연성, 그리고 인간 자유의 내적 구조들로서의 무세계성 등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을 그 실존적 맥락으로부터 분리시켜서 정치적 배경으로 이식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히 그녀가 니체와 하이데거를 깊이 이해한 이후에 이룬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재독해로써 아렌트를 이러한 전유와 변경에로 이끈 관점이다.(27)

 

하이데거의 가르침에 충실한 아렌트는 그 실체가 언어인시야말로 바로 그 사실로 인해서 가장 인간적인 예술이고, 그것을 촉발하는 사고에 가깝다고 강조한다. 시는 그러므로 물화되지 않으며, 실용주의적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주 농축되어 있고’, ‘기억들을 향하면서 시는 언어의 본질을 실현한다.(29)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아렌트는 이 두 가지 서사를 특화하는 방식을 제안하는데, 이것은 곧 그 태생에서부터 서사성에 관한 형식주의적 이론들이나 폴 리쾨르의 이론들과는 다른 방식이다.(30)

 

이론가 아렌트는 그녀 도시의 그리스적 모델들 속에서 그들 영웅적 업적의 유일성에 우선적으로 특별한 가치를 둔다. ‘반신일 필요 없이 호머적 영웅은 그의 고유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차이는 결코 배타적이지 않은데, ‘모든 자유인은 그것이 가능하기때문이다.(31)

 

아렌트 사유의 핵심으로 참역사가 서술된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나눌 수 없는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는 두 번째 조건이 그 사이 안에서 그리고 사이를 통해서 실현되는 사이에 있음의 존재이다. 이야기의 운명은 우리가 때때로 기억의 해결 논리를거기서 살아진 과거의 사실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보는 사이에 달려 있다. 오직 이 조건들에서만 사실주제를 언어화하는 일을 통해서 공유할 수 있는 사유로 드러날 수 있다.

 

아렌트는 현대 문화의 위기를 망각의 위험으로 낙인찍으면서 이야기의 근저를 이루는 기억으로 대변되는 인간 실존의 깊이 차원에로 되돌아온다.(33)

 

그녀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이론의 형식적이거나 형식주의적인 측면을 충분히 인식하는데, 그것은 미가 위대함을 요청하는 만큼 그렇게 여러 다양한 부분들의 통합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구술의 기술적인 측면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더 가까이 집중한다. 이 텍스트에 따르면 목격자 이야기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가장 먼저 마침 또는 종결의 순간을 인식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을 식별하는일이다.(35)

 

아렌트는 정태적 모사에 반대하면서 최상적 구술의 활동 방식으로서의 연극적 몸짓 행위에 호소한다. 우리는 그녀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오늘 시대 문화적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그 아이디어를 되찾은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36)

 

행위하고, 보고, 회상하고, 이야기를 통한 기억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아렌트에게서 진정한 정치적 구술을 구성하는 주인공의 현현을 위해서 고귀한 길인 것 같다. 그것은 순수 사유의 이론적 삶도 아니고, 순수 시의 고독한 계시도 아닌, 오히려 도시(국가)의 구술된 행위들에 대한 성찰이다.(38)

 

한 사람은 정치적 영역 안에서 행동하는 누군가가 됨으로써 기억에 남을 이야기가 되어서 스스로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다. 왜 행위를 상세히 언술하는 말하기가 이러한 특권적 위치를 점하는가? 그것은 먼저 시작을 촉발하는 능력으로서 개인의 인간 조건이 현실화되는 것은 행위 안에서 있기 때문이다.

 

행위와 말의 생생한 흐름이 모사 속에서 주제를 통해서 드러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 모사는 한 동떨어진 인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의 모방이라고 아렌트는 강조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모사는 겉모습에 노예처럼 사로잡히게 하고, 소피스트들은 주제나 신화는 유치하다고 거부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탐구하면서 주제 안에서 또 다른 것인 행위의 모사를 발견한다.(40)

 

아렌트는 자신의 모든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작업에서 일관되게 한편으로 플라톤적 이념들과 그것들을 사유가가 정치적 행위에 적용했을 때 확실하게 나타나는 폭군적 잠재성의 힘과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의 개시 사이의 상반됨을 강조해 왔는데, 권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생각한 것인바 지배 개념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차이들로 인한 본성에 근거한 것을 말한다.

 

우리는 아란테그 현대 세속주의를 넘어서 다시 세우려고 하는 이 다른 권위에 합당한 담론은 참으로 단순하게 이야기라는 것을 잊을 수 없다.(48)

 

이제 우리는 왜 행위와 말을 연결하는 두 가지 특성(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에서는 인간 다원성에 대한 기억으로, 그리고 성 어거스틴에서는 개인적 고백으로 파악)의 역사적 설명이 아렌트에 의해 그렇게 고결한 개념으로 여겨졌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이야기가 행위의 기억이기 때문인데, 여기서 행위는 그 자체가 하나의 탄생이고, 또한 공적 영역에서 끊임없이 새로 시작되는 이질성이며, 그의 존재론적 가능성들이 우리 탄생의 처음 사실에 근거 된 것이다.(52)

 

우리는 아렌트가 사고와 행위 그리고 시적 언어를 동질화시킨 하이데거의 전향에서의 구절을 통해 이어나가는 암묵적 대화를 거의 들을 수 있다. 만약 사유가 소피아라면, 정치적 행위가 그것을 동반한다. 아렌트는 본질적으로 그렇게 말하는데, 그러나 특히 그것을 살아 있는 자들의 다원성 속에서 서로 나눌 수 있는 분별력으로 변형시킨다.(54)

 

결론적으로 아렌트의 이야기 개념은 하이데거 존재와 그의 시적 언어의 면밀한 해체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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